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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과 일본

후쿠오카(福岡): 중일교류의 살아있는 유적지

by 중은우시 2018. 11. 21.

글: 우운국(虞雲國)


구정이 지나자마자 일본의 큐슈(九州)로 갔다. 마지막 이틀은 반드시 해야할 업무가 없어서, 대학의 옛친구들과 몇 곳을 방문했다. 후쿠오카는 중국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중 하나이고, 중일관계의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그래서 유적지를 방문하기로 했다.


듣기에 시카노시마(志賀島)은 중일교류가 시작된 발원지라고 하여 먼저 가보기로 했다. 섬은 원래 바다 가운데 있는데, 지금은 육지와 제방으로 연결되어 있다. 배를 타고 하카다만(博多灣)을 지나 사이토자키(西戶崎)로 가서, 택시를 탔다. 순식간에 금인공원(金印公園)에 도착한다. 높이 솟아있는 석비(石碑)에는 한예(漢隸)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한위노국왕금인발광지처(漢委奴國王金印發光之處)." <사기>에 비록 서복이 수천명의 동남동녀를 이끌고 바다로 나갔다고 되어 있지만, 일본으로 갔다고 분명히 써놓지는 않았고, 그저 전설일 뿐이다. 중국의 정사에 양국의 교류가 처음 등장하느 것은 동한 건무 중원2년(57년), 왜노국이 "봉공조하(奉貢朝賀)"하고, 광무제가 "사이인수(賜以印綬)"했다고 기록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1784년 이곳의 농민이 도랑을 파다가 이 금인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하여 <후한서>의 기록이 입증된다. 금인은 길이가 2.3센티미터의 정사각형이고, 높이는 2.2센티미터, 무게는 108.7그램이다. 거의 순금으로 만들었다. 위에는 "한위노국왕(漢委奴國王)"이라는 다섯 글자(委와 倭는 서로 통한다)가 새겨져 있다. 이 중일교류의 최초 증거물은 일본의 중요문화재이고, 후쿠오카박물관에서 상시전시하고 있다.


1975년, 양국이 수교의 밀월기일 때 현지에 금인공원을 만든다. 여기에는 두 개의 석비도 있다. 하나는 1980년 양상곤(楊尙昆)이 쓴 글이다: "대수횡진(帶水橫陳), 양시상망(兩市相望), 우의영항(友誼永恒)" 이 해에 후쿠오카과 광저우(廣州)가 자매결연도시가 되었고, 당시에 그는 광주의 최고책임자였다. 또 다른 하나는 곽말약(郭沫若)의 시비(詩碑)이다. 시는 1955년 일본에 있을 때 썼고, 글씨는 1974년 비석을 세우기 위하여 특별히 휘호로 남긴 것이다. 마지막 연은 이러하다: "차래수획장하유(此來收獲將何有), 영굴원조동실과(永不願操同室戈)". 후쿠오카는 그가 유학할 때 머물던 곳이고, 하카다만에는 그의 족적과 시가가 많이 남아 있다. 시비를 세운 것도 적절한 일이다.


공원의 평대에는 양국이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그림이 새겨져 있다. 후쿠오카에서 중국주요도시까지의 킬로미터수를 표시해 놓았다. 안내판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다: "이곳에서 아름답고 조용한 경치를 바라보면, 대륙과 진행된 바다를 건넌 문화교류를 느끼게 한다. 지금, 멀리 하카다만 건너편의 해변과 후쿠오카시가 보이고, 후쿠오카TV탑과 금인을 수장하고 있는 후쿠오카박물관이 서 있다. 저녁에는 더욱 운치가 있다." 그러나 그곳을 방문한 날에는 차가운 비가 내려서 건너편 해변이 잘 보이지 않아서, 안개 속으로 무슨 운치같은 것은 없었다.


역사의 풍운은 정말 날씨가 개었다 흐렸다 하는 것과 같다. 공원에서 북쪽으로 천미터가량을 걸어가면, 바로 "몽고내습고전장(蒙古來襲古戰場)"이다. 첫눈에 "원구사적몽고총(元寇史迹蒙古塚)"이라는 석비가 보인다. 일본사에서는 "몽고내습"을 "원구내습"이라고 부른다. 천황의 연호를 따서 두 번의 공방전을 각각 "문영지역(文永之役, 1274년)"과 "홍안지역(弘安之役, 1281년)"이라고 부른다. 간지로 부르자면 "갑술지역(甲戌之役)"과 "신사지역(辛巳之役)"이라고 불러도 무방하겠다. 두번의 전투는 모두 원나라가 일으킨다. 마지막에는 태풍을 만나 실패로 끝난다. 일본인들은 이것을 "카미카제(神風)"가 보우해준 것이라고 말한다(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은 마지막 몸부림으로, '카미카제특공대'를 조직하였는데,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몽고총'은 바로 하카다만에서 익사하거나 전사한 원군의 시신을 거두어 매장한 곳이다. 현지에서는 옛날에 "참수총(斬首塚)"이라고 불렀다. 20세기 들어, 이들 유총(遺塚)은 대부분 사라졌다. 1927년, 후쿠오카 일련종(日蓮宗) 승려인 고과일통(高鍋日統)이 "몽고군공양탑(蒙古軍供養塔)"을 세우고, 탑의 비석에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이라는 글자를 새긴다. 탑을 세울 때 <묘법연화경>을 읽어 망령을 제도한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다.


공양탑을 건립한 후, 1938년, 몽고덕왕(德王)이 참배하러 온 적이 있다; 1941년, 몽강정권 흥안남성 공과후기이 기장(旗長)인 빠오니야바사르(包尼雅巴斯爾) 일행도 온 적이 있다. 참배했던 돌기둥은 지금도 남아 있다.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동비(銅碑)에 <대일본지하도몽고군공양탑찬(大日本志賀島蒙古軍供養塔贊)>이 새겨져 있는데, 낙관은 놀랍게도, "중화민국동삼성보안총사령 장작림(張作霖)"이다. 공양탑은 1927년 9월에 낙성되고, 다음 해 6월, 장직립은 황고둔(皇姑屯)에서 운명한다. 이 <탑찬>은 이 몇 달안에 세워진 것일 것이다. 황고둔사건의 전야의 중일관계에 대하여 이 오언찬문은 아마도 특수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찬문은 역사를 회고한다: "하의홀필렬(何意忽必烈), 루해흥웅사(淚海興雄師), 피괵제건아(被馘諸健兒), 황원혈장벽(荒原血長碧), 박다대해만(博多大海灣), 왕왕고루곡(往往骷髏哭), 흘금육백재(迄今六百載), 유총다인몰(遺塚多湮沒)" 이것은 이치에 맞는 이야기이다. 비록 가마쿠라막부(鎌倉幕府)가 통교를 거절하고 사신을 먼저 죽이기는 했지만, 원나라가 몽고, 고려, 강남의 여루 군사를 보내고, 중화의 건아들이 이국에서 목숨을 잃게만든 것은 어쨌든 비극이다. 그러나, 이어서, 찬문은 소위 '대동아공영론'을 찬영한다. "중일동종족(中日同種族), 문교통항해(文敎通沆瀣)" "비아세아주(俾亞細亞州), 증위대화우(蒸爲大和宇)" 아마도 장작림은 일본군국주의세력이 "추차비민심(推此悲愍心), 보급어동아(普及於東亞)"하여 자신의 동북에서의 이익을 돌봐줄 것이라는 환상을 가졌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아마도 몰랐을 것이다. 일본관공군은 일찌감치 그를 동북을 독점하려면 반드시 제거해야할 적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하여 장작림이 "고자역허공(枯骴亦虛空)"에서 출발하여, "적아하휴진(敵我何畦畛)", "무아무적인(無我無敵人)"의 전쟁 무시비론을 전개했는데, 이는 객관적으로 일분군측의 야심을 조장한 것이다


"원구내습"은 일본사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그래서 다음 날도, 계속하여 관련 사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갑술지역후, 원군이 다시 공격해 오는 것을 방어하기 위하여, 카마쿠라막부는 하타다만연안에 축대를 쌓도록 명한다. 1276년 3월부터 반년동안 서로는 이마즈(今津)에서 동으로는 카시이(香椎)에 이르는 해안선에 일본인들이 "원구방루(元寇防壘)"라고 부르는 석축공사를 하게 된다. 이는 높이가 2.5미터 내지 3미터이고, 총연장 20킬로미터의 방어선이다. 신사지역때 효과적으로 원군의 상륙을 저지한다. 어렵게 필자는 후쿠오카 서남학원대학 부근에서 방루유적지를 찾았다. 일찌기 1931년 10월, 일본 문부성은 이를 "사적명승천연보호물"로 지정해서 국가사적으로 정하고, "원구신사(元寇神社)"를 짓는다. 그때는 '9.18사변"이 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일본은 원나라의 침략을 받는 입장에서, 일약 중국을 침략하는 입장으로 변신한 것이다. 원구내습시의 민족감정은 완전히 망각한 듯하다.


방루유적지를 보면서 몽고총을 연상하고,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어제 택시를 타고 시카노시마로 갈 때, 일본택시기사가 "거기에 뭘 보러 가느냐?"고 물었다. 나의 동창은 일본어로 "몽고총을 보러 간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택시기사는 바로 말한다: "몽고내습은 아주 대단했었죠." 동창도 바로 대답했다: "그렇죠. 만일 태풍이 없었더라면, 일본은 일찌감치 몽골의 지배를 받았을 것이고, 우리는 지금 몽고말로 얘기했을 겁니다." 그 일본노인은 다른 말없이 "그렇죠!"라고 대답했다. 나는 전후의 어느 일본영화에서 나왔던 비슷한 대화를 기억해 냈다. 유명감독인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는 주인공으로 하여금 이렇게 말하게 한다: "전쟁에 이겼더라면, 현재 너와 나는 모두 뉴욕에 있겠지." 이런 논조가 떠받드는 것은 "역사는 승리자를 질책하지 않는다"는 가치관이다. 이런 관념으로 전쟁을 논의하면, 실제로 구체적인 전쟁의 시비나 잘못, 정의와 비정의가 말살되는 것이다. 중일양국에 있어서, 고대이건, 근현대이건, 서로 무기를 들고 싸운 적이 있다. 우리는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추구한다. 영원히 전쟁으로 인한 원한을 지고 살아야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미래의 평화진전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된다. 다만 그렇다고 하여, 이런 전쟁의 무시비론이나 승자무죄론에는 동의할 수 없다. 역사적 사실을 견지하고, 구체적인 전쟁의 정의와 비정의가 어느 쪽인지를 명확히 해야만 이성적으로 전쟁을 반성할 수 있고, 미래를 직면할 수 있고, 평화를 맞이할 수 있다.


신사지역과 같은 경우, 원나라는 새로 정복한 강남지역에서 근 10만명의 사병을 모은다. 유민시인(遺民詩人) 정사초(鄭思肖)는 이렇게 적었다: "차번거자개함원(此番去者皆銜怨)"(이번에 가는 자들은 모두 원한을 품었다). 패전소식이 들려오자 그는 "박수를 치며 웃는다." 그리고 <원달공일본패배가(元韃攻日本敗北歌)>를 써서 환영한다. 정사초는 시에서 동정으로 인민들에게 고난을 가져온 것을 읊었을 뿐아니라: "이고강남민수건(已刳江南民髓乾), 우행병호추정어(又行幷戶抽丁語), 흉염소안구경아(凶焰燒眼口竟啞), 지사민민병여고(志士悶悶病如蠱)"; 그리고 서문에서는 원나라를 이렇게 공격한다: "이 땅의 백성들이 힘을 다 빼내서 배를 만들어 공격하러 갔다. 그 땅의 모든 것을 빼앗아 돌아오려고 했다." 원나라가 일으킨 것은 불의의 전쟁이라는 것을 공격한 것이다. 유민으로서 그는 패전을 반겼다. 아마도 원나라가 자신의 고국을 멸망시킨 원한을 품고 있었던 것일 것이다. 그러나 불의전쟁에 대한 비판정신은 평가할 만하다. 송원교체기에, 유사한 반전시인은 그 혼자만이 아니다. 왕원량(汪元量)은 <연가행(燕歌行)>에서 일본정벌전쟁을 비판한 바 있다: "기지사장우습비풍급(豈知沙場雨濕悲風急), 원혼전귀성행읍(寃魂戰鬼成行泣)" 만일 7백여년전의 몽골-일본전쟁에 대하여 비록 카마쿠라막부의 무례함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일본민중은 어쨌든 원군동정의 피해자들이다. 두번의 전투에서 몽골, 고려와 강남의 참전병사들도 멸정지재(滅頂之灾)를 당했다. 그렇다면 칠십년전의 그 전쟁은 일본이 침략자이고, 비정의측이다. 중국은 피해자이고 정의측이다. 이것은 일찌감치 결론이 나 있는 역사의 공론이다. 그때, 정사초, 왕원량등이 전쟁의 정의여부를 구분했는데, 이런 이성적인 인식과 비련의 정회는 현재 쌍방에게도 각성제가 아닐 수 없다. 오늘 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치관이 고대인들의 것보다 후퇴한 것같다.


"원구방루'를 떠나, 후쿠오카성 유적지를 방문했다. 그리고 다시 지하철을 타고, 기온(祗園)역에 도착했다. 역을 나서서 멀지 않은 곳에 유명한 사찰 도초지(東長寺)가 있다. 산문의 앞에는 석비가 하나 서 있었다. 위에는 "홍법대사개기(弘法大師開基)"라고 쓰여 있고, 정중앙에는 큰 글씨로, "밀교동점일본최초영장(密敎東漸日本最初靈場)"이라고 쓰여 있고, 낙관은 "서안청룡사주지관욱(西安靑龍寺住持寬旭)"으로 되어 있다. 비액(碑額)에는 "남악산동장밀사개창천이백년기념(南嶽山東長密寺開創千二百年紀念)"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 홍법대사는 그 이름도 유명한 일본승려 공해(空海)이다. 804년, 그는 견당사를 따라 장안으로 온다. 그리고 청룡사 승려 혜과(惠果)에게 밀교의 적전을 배운다. 다음 해 혜과가 원적하고, 그는 천여명 제자의 추대를 받아 선사의 비문을 쓴다. 일중문화교류역사상, 공해의 이야기는 아마도 감진(鑒眞)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라 할 것이다. 문장가로서 그의 <문경비부론>은 지금까지도 중일문학사상의 존경을 ㅂ다는다. 서예가로서 그는 한자의 초서에 근거하여 지금까지도 일본에서 쓰이는 히라카나를 만든다. 806년 그는 절강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귀국한다. 하카다만에 상륙해서 이 사원을 지었다. 밀교를 홍양하는 최초의 도량이었다. 지금 산문과 오륜탑의 장식은 새롭게 일신하였는데, 이것은 아마도 산문앞의 그 공해를 기념하는 비석과 같이 2006년에 1200주년을 기념한 흔적일 것이다.


도초지를 나오니 아직은 날이 밝았다. 그래서 수백미터 거리에 있는 조텐지(承天寺)로 갔다. 이 칙사선사(勅賜禪寺)는 1242년 다자이후(太宰府) 귀족이 땅을 기부하여 지은 것이다. 막 남송에서 귀국한 성일국사(聖一國師) 원이변원(圓爾辨圓)을 개산조사로 한다. 사원은 당시에 수만평을 차지했는데, 현재도 점유면적이 여전히 적지 않다. 일본식 정원으로 백쇄석(白碎石)이 파도모양으로 바닥에 깔려 있다. 담장구석에는 구불구불한 백매(白梅)가 한 그루 서 있어서 문인들의 선취를 자아낸다. 이곳에는 3개의 석비가 서 있다. 두 개는 개산조사 원이와 관련이 있고, 중앙에 있는 비석에는 "어만두소(御饅頭所)"라고 쓰여 있고, 왼쪽에는 "온둔교맥발상지지(饂飩蕎麥發祥之地)"라고 쓰여 있다. 원이는 1235년 남송으로 가서 6년간 머무르면서 천동(天童), 정자(淨慈), 영은(靈隱)등 명찰을 방문하고 나중에 경산사(徑山寺)에서 무준(無準)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의 심전을 얻고, 법통을 잇는다. 하카다만을 통해 귀국할 때, 그는 선학으로 이름을 날렸을 뿐아니라, 면식(麵食) 제조방법까지 가져왔다. 전해재는 바에 따르면, 일본식 만두(만쥬)는 바로 그가 처음 이곳으로 가져온 것이다. 비석상의 '어(御)'는 경의를 표하는 전철사이고, '소'는 모시는 처소를 의미한다. 그리고 교맥(소바)와 온둔(우동)과 같은 일본에서 유행하는 면식도 그가 송나라에서 처음 이곳으로 가져온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 '발상지지'라는 비석을 세운다. 일본학자 키토 야스히코(木宮泰彦)에 따르면, 일본 카마쿠라시대에 "음식물의 조리방면에서 송나라의 방식이 유행했다. 이것은 원각사 개당재에 만두가 사용된 것에서 엿볼 수가 있다."(<일중문화교류사>). 두 개의 비석을 보면, 후쿠오카는 바로 송나라 면음식 요리방법이 들어온 창구이다.


곁에 있는 정원에는 "다선공양탑(茶筅供養塔)"비가 있다. 성일국사와 관련이 있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가 없다. 다만 일본의 다선(가루차를 잘 섞이도록 젓는 도구)도 송나라에서 들어왔고, 후쿠오카는 가장 먼저 전해진 곳이다. 여기에는 거의 의문이 없다. 다선은 말차를 마실 때 젓는 다구이다. 주희의 <가례>에서 여러번 언급되고, <대관차론>에서도 구체적인 묘사가 있다: "다선은 근죽(觔竹) 나이든 것으로 만든다. 몸이 두꺼우면 다선으로 저을 때 힘있게 저어지지가 않는다. 그래서 검신과 같은 모양이어야 한다. 몸의 두께가 적절해야 힘있고 쉽게 저을 수 있다. 다선의 모양이 검신과 같으면 저을 때 거품이 생기지 않는다." 이것은 "송나라때 차병(茶餠)을 쓰고 이것으로 저었다." 일본의 다도는 송나라때의 음차법(飮茶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그래서 다구에 반드시 다선이 있어야 한다. 명나라에 들어선 후, 중국의 차마시는 법은 편차충포법(片茶沖泡法)으로 바뀐다. 그래서 청나라때 가례연구자들은 다선에 대하여 그다지 잘 알지 못했다. 이를 보면 "예실구제야(禮失求諸野)"라는 감탄이 든다.


조텐지의 산문을 나서니 이미 황혼녘이다. 이틀 동안 후쿠오카에서 유적지를 방문했다. 왜노국금인, 몽고총, 원구방루, 밀교동점제일사, 송나라면식수입지, 다선공양탑.... 여러 장면이 스쳐 지나가며 서로 겹친다. 이것은 아마도 중일관계사의 축소판일 것이다. 두 나라 사이에, 씻어도 사라지지 않은 깊은 원한도 있고, 일의대수(一衣帶水)의 문화왕래도 있다. 이 축소판에 기하여 제2차세계대전승리 70주년을 기념하는 오늘 자연히 이성적으로 깊이 사고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 세계의 정치판도이건 아니면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정치판도이건, 중일양국은 모두 중요한 대국이다. 양국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는 이웃나라이면서, 근대이래로 너무나 많은 원한이 쌓여있다. 더더구나 골치아픈 현상은 침략자이며 가해자인 일본의 우익은 독일처럼 반성하지 않고 패전을 옹호하고 있다. 중국은 피침략자이며 피해자인데, 어떤 사람은 극단적이고 편협한 민족주의정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시시때때로 "일본과는 반드시 전쟁을 한번 벌여야 한다"는 논조를 내놓는다. 확실히, 두 이웃이 이익이 부딛치면 분쟁이 발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국과 일본은 이웃나라로서, 도서주권문제이건, 해양권익문제이건 반드시 마찰과 분쟁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당연히 원칙문제에서 역사적 사실을 ㄱㄴ지하고, 시비과 잘잘못을 명확히 해야하는 것은 완전히 필요하다. 다만 이것은 분쟁해결때 이치에 맞는 측이라고 하여 경솔하게 소위 '반드시 한번 전쟁을 벌여야한다'고 호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2015년 5얼 23일 시진핑은 중일우호대회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이웃집은 선택할 수 있지만, 이웃나라는 선택할 수 없다" 이 말은 의미심장하다. 이웃간에 분쟁이 있어서 심하게 싸우고, 심지어 살인사건까지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마지막에는 이사를 가는 방법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웃나라는 그저 대대로 같이 사는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양국정치가와 백성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을 인정하고자 하느냐이다: "쌍방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양국인민의 근본이익에 부합할 뿐아니라,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안정에도 도움이 된다. 이렇게 되면 양국 모두 윈인이다. 만일 눈앞의 이익으로 전쟁에 호소하면, 양국민중에게 재난이 될 것이고, 양국의 미래에도 액운이 닥칠 것이다. 이 전제에 컨센서스를 이룬다면, 남은 임무는 아주 명확하다: 쌍방정치가들이 정치적 지혜를 운용하고, 양국 백성들은 이성적으로 인식하여, 진정으로 함께 갈 수 있어야 하고, 최대한 평화곤존을 쟁취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