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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과 일본

현양사(玄洋社): 일본의 간첩조직

by 중은우시 2018. 12. 4.

글: 융성전우(戎星戰友)


열본역사를 잘 아는 사람은 알고 있을 것이다. 1860년대이래 일본은 외국 각 분야의 정보수집을 계속 중시해왔다. 이런 정보의식으로 일본인은 시시때때로 어디에서든지 정보를 포착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에는 '전민정보국가(全民情報國家)'라는 칭호가 있었다. 일찌기 15세기 일본의 전국시대에, '간첩대가'라고 불리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는 정보활동을 아주 중시하였으므로 최소의 유혈댓가로 일본통일의 대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한다. 메이지시대(明治, 1868-1925)는 일본정보간첩활동이 비교적 활발한 시기이다. 군대, 민간등 각종 정보기구가 속속 설립된다. 일본의 각종 비밀조직도 이 시기에 연이어 설립된다.


메이지14년(1881년) 2월, 큐슈(九州) 지역의 후쿠오카(福岡)에는 히로오카 고타로(平岡浩太郞)를 사장으로 하는 한 무리의 무사들이 '광요황실(光耀皇室)', '존숭제국(尊崇帝國)' '한위인민권리(捍衛人民權利)'를 기치로 내걸고, 현양사(겐요샤, 玄洋社)를 설립한다. 이는 일본 최초의 대외비밀정보조직이다.


메이지유신후, 특히 1880,1890년대에 일본에서는 '탈아입구(脫亞入歐)'의 사조가 일어난다. 이와 동시에 '아주주의론(亞洲主義論)이 대륙에 대해 야심을 가진 일부분 일본인들 사이에 일어난다. 그들은 정부의 주류가 서양문명이 시정강령에 심취해 있는 것에 강한 불만을 품는다. 그리고 아시아부흥을 통해서 구미에 대항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일본이 맹주가 된다는 전제하에, 중국등 아시아국가와 연합하여 일본방위선을 확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아주주의론'을 내세우는 일부 사람들 중에는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를 따르며 반메이지정부쿠데타에 실패한 재야세력도 포함된다. 그들은 일본 큐슈의 남부를 중심으로 향당을 모으고, 학교와 신문을 만들어 동아진흥, 서방침입방어를 주장한다. 당시 자칭 '천하낭인(天下浪人)'이라고 하며 명리를 뜬구름처럼 여기는 도야마 미쓰루(頭山滿)가 그중 전형적인 대표인물이다.


도야마 미쓰루는 1855년 일본 큐슈의 후쿠오카성 아래의 한 파락한 무사가정에서 태어난다. 어려서부터 무사정신의 훈도를 받은 그는 정치적으로 대외침략을 확장하자는 경향이 있다. 1875년, 도야마 미쓰루는 히로오카 고타로, 하코다 로쿠스케(箱田六輔)등과 함께 후쿠오카에서 교지사(矯志社)를 조직하여, 대외참략을 주장하는 정한파(征韓派)인 사이고 다카모리를 옹호한다. 1877년, 사이고 다카모리가 '서남전쟁(西南戰爭)에서 실패한 후,  도야마 미쓰루는 비통한 심정으로 저명한 정치가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가 창건한 애국사(愛國社)에 가입한다. 나중에 애국사에서는 많은 사단이 파생하는데, 이타가키는 이들 사단을 연합하여 의회촉진사(議會促進社)를 조직한다. 1879년, 도야마 미쓰루와 히로오카 고타로, 하코다 로쿠스케는 치쿠젠공애공중회(筑前共愛公衆會)를 조직한다. 2년후, 이 두개의 정치결사의 기초 위에 일본근대 최초의 우익정치단체인 현양사가 역사무대에 등장하게 된다.


'현해노도(玄海怒濤), 세가도천(勢可搗天)"이라 자부하는 현양사는, 그 이름을 큐슈와 조선의 사이에 있는 현해탄의 좁고 긴 수역에서 따왔다. 이 수역은 비록 면적이 크지는 않지만, 일본에서 한반도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이다. 현해탄만 건너면, 바로 한반도에 도착한다. 즉 이미 아시아대륙에 발을 디딘 것이다. 현양사는 '현양'이라는 이름을 비러, 일본이 현해탄을 건너 아시아대륙을 점거하려는 광망한 야심을 드러낸 것이다.


<현양사사(玄洋社史)>에 따르면, 현양사가 성립된 후, 도야마 미쓰루등 지도자들은 3조의 기본원칙을 제정한다: 제1조 반드시 황실을 존경하고 받든다. 제2조 반드시 본국을 사랑한다. 제3조 반드시 인민의 권리를 고수한다. 현양사의 활동은 최초에 단지 큐슈 주변이었다. 그래서 건립초기의 현양사는 그저 민족주의정서와 지역색채가 강렬한 조직이었다. 그리고 '황실을 빛낸다'와 '존황위민(尊皇爲民)'을 표방하여 일본민중의 존경을 받는다. 다만, 현양사의 주요 구성원(전 무사와 무사의 후예)의 고유한 보수적 사상에 막후의 신흥자산계급의 지지로 현양사는 성립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신속히 우경화한다. 그리하여 "파지나(破支那), 승아국(勝俄國), 병조선(倂朝鮮)"을 분투목표로 삼는다. 대외확장의 야심은 이때 이미 확연하게 드러났다. 일본민족주의조직을 연구한 바 있는 G R 스토리 교수는 일지기 <이중애국자>에서 이렇게 썼다: "현양사는 테러리즘와 간첩학교이다."


1882년에만 당시 중국청정부의 전체적인 상황을 알아내기 위하여 현양사의 두목중 하나인  일호산광(一戶山光)은 일거에 100명을 중국으로 보내어 정보를 수집한다. 이번 활동은 큰 성과를 거둔다. 그리고 일본 군대에서도 아주 중시하게 된다. 그후 현양사는 표면적으로 민간정보조직이지만, 뱋에는 군대의 음성적인 지지를 받는다. 나중에 현양사는 조직을 상해로 발전시키고, 사람들의 이목을 가리기 위해 동문서원(同文書院)을 만들어 300여명의 간첩을 배양한다. 이들 간첩은 나중에 일본의 대중국정보활동에서 중국의 동북 백산흑수에서부터, 대강남북까지 무인지경으로 다니며 정보를 수집한다. 그리하여 그물망처럼 중국의 각 지역에 배치된다.


군측의 지지를 받는 현양서는 나중에 신속히 테러조직으로 전환된다. 그들은 일찌기 아시아각국에서 여러 건의 테러활동을 저지른다. 1894년, 조선에서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청군과 일군이 개입한다. 그후 중일간의 청일전쟁으로 발전한다. 전쟁이후, 승리자인 일본이 지지하는 대원군파가 득세한다. 당시 정권을 휘두르던 명성황후는 세력을 잃은 후 신속히 친러노선으로 전환한다. 제정러시아의 힘을 빌어 세력을 재건하려 한 것이다. 현양사는 만일 조선에서 친일세력을 확대하려면 반드시 명성황후를 제거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도야마 미쓰루는 적극적으로 일본의 주한성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와 함께 암살계획을 세운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낭인은 '민비를 죽여라'라고 소리치며 명성황후 민비의 침궁인 경복궁으로 난입하여 극히 잔인한 방식으로 황후를 살해하고, 시신을 모욕한 후 불태워버린다. 이 사건은 당시 궁안에 있던 미국군사교관이 목격했고, 그가 대외에 이 사건을 통보한 후, 각국공사는 일본의 행위를 강력히 규탄한다. 다만 일본정부는 이들 흉수를 불러들인 후, 형식적으로 판결을 선고했을 뿐, 흉수는 무죄를 선고받는다. 일본의 국민들은 오히려 그들을 개선장군으로 맞이한다.


현양사는 국외에서 여러가지 죄행을 저질렀을 뿐아니라, 일본국내에서도 여러가지 일들을 저지른다. 1866년, 나가사키사건이 발발하면서 당시 일본인들은 국가의 치욕이라고 여겼다. <현양사사>에서는 나가사키사건을 현양사가 민권에서 국권으로 번환시킨 이정표같은 사건이라고 말한다. 1889년, 도야아 미쓰루는 낭인을 선동하여 정부에 강경한 외교를 취하고 군비를 확대하여 시기가 성숙하면 '중국을 징벌하자'고 요구한다. 다만 수상인 이토 히로부키(伊藤博文)는 타협적인 외교정책을 실행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야마 키쓰루는 이토 히로부키 수상에게 항의한다. 그후 현양사 사원인 구루시마 쓰네키(來島垣喜)에게 지시하여 오쿠마(大隈) 외상을 암살하게 한다. 오쿠마는 폭약으로 인하여 한쪽 다리를 잃고 사작하게 된다. 구루시마 쓰네키는 오히려 대중의 마음 속에 영웅이 된다.


현양사의 정보활동은 특히 중국에서 창궐했다. 당시 중국에 아주 깊이 삼투해 들어간다. 1882년, 현양사는 100여명을 중국에 보내어 정보를 수집하게 하고, 다시 1884년 동양학관(東洋學館)을 설립하고, 1886년에는 중국최초의 간첩기관인 낙선당(樂善堂)을 설립한다. 이들 조직은 현양사라는 모체의 아래에서 배양되어 중국전역을 석권한다.


대련의 금주성(金州城)에서 멀지 않은 최가둔(崔家屯)에 백미터도 되지 않는 산이 있는데 일찌기 일본점령기간중에 '삼기산(三崎山)'으로 명명된 바 있다. 일본인들은 산 위에 삼기묘(三崎묘), 삼기처사지기념비(三崎處死地紀念碑)가 세워져 있었다. 이를 통해 청일전쟁때 이 곳에서 사망한 3명의 이름에 모두 '기(崎)'자가 들어있는 일본간첩 야마자키 고자부로(山崎羔三郞), 종기삼랑(鍾崎三郞), 등기수(藤崎秀)을 기린다.


1881년, 야마자키 고자부로는 현양사에 가입한다. 나중에 한구(漢口)로 가서 또 다른 간첩조직인 낙선당의 두목 아라오 세이(荒尾精)에 의탁한다. 그는 여러번 귀주, 운남, 광동, 광서등지에 잠입하여 정보를 모은다. 나중에 간첩훈련기관인 일청무역소의 중요두목이 된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촉즉발일 때 그는 화교약재상으로 변장하고, 청군의 아산에 있는 방어진지에 들어가 정찰한다. 며칠이 되지 않아 아산의 지형과 청군의 병력배치, 방어계획을 알아낸다. 나중에 정보를 얻은 야먀자키 고자부로는 부주의하여 체포된다. 요행히 도망친 후에 그가 얻은 정보를 사실대로 보고하여, 아산에 주둔하는 2800명의 청군이 모조리 전멸하게 만든다.


1894년 8월 중순, 그는 다시 명을 받아 평양지역의 청군동향을 정탐한다. 금방 정확한 청군정보를 얻어내어 일본군은 9일만에 평양을 점령한다. 그리고 조선에 주둔하던 청군을 모조리 궤멸한다. 큰 공을 세운 야마자키 코자부로는 귀국후 천황이 직접 접견하고 그 자리에서 제2군의 계급을 준다. 현양사 두목은 그를 '천양사를 위해 큰 공을 세운' 수퍼영웅이라고 칭찬한다. 


무나카타 고타로(宗方小太郞)는 1884년 현양사에서 파견하여 중국으로 들어간다. 전후로 북경, 한구등지에서 낙선당 약포를 경영하며 변발을 하고, 치파오를 입으며, 만주족의 신분으로 대거 군사, 정제정보를 수집했다. 나중에 아라오 세이를 도와 상해에 일청무역소를 열어 간첩을 배양한다. 배운 학생들이 130여명에 달한다. 청일전쟁과 그 후 일본에 중요한 역할들을 하다.


1894년 6월, 무나카타는 명을 받아 한구에서 연태로 간다. 거기서 북양함대의 기지에 잠입하여 대량의 1차정보를 취득한다. 그는 위해위에서 북양함대의 출발시간을 알아냈고, 일본연합함대는 9월 15일 황해도 대동구 부근에 전함을 배치하여 기다릴 수 있었다. 그후 발발한 세계 최초의 철갑선함대대전을 위한 준비를 마친다. 일본육군대장 혼죠오 시게루(本莊繁)는 무나카타를 이렇게 평가했다: "국가에 극대한 공헌을 했다." 무나카타는 1923년 상해에서 병사한다. 중국에서 수집한 정보와 조사등 자료는 나중에 <무나카타 고타로문서>로 편집되어 일본에서 출판된다.


현양사에서 부화된 간첩들을 얘기하자면, 부득이 근대중국에서 악명높은 "대륙아국(大陸阿菊)"을 얘기해야 한다. 대륙아국은 통칭이고, 일본이 국내에서 훈련을 시켜 중국대륙으로 보내 첩보업무를 수행하도록 한 기녀(妓女)를 가리킨다. 1896년, 현양사는 홋카이도 삿포로에 언어학교를 하나 만든다. 명목은 '러시아어를 배운다'는 것인데, 나중에 한어(漢語)과정도 증설한다. 학교이름은 "러시아중국어학교(俄華語學校)"였다. 중점적으로 여간첩을 훈련시킨다. 그녀들에게 미색으로 정보를 얻게 하는 능력을 가르친다. 이들 여간첩들은 많은 경우 모두 기녀의 신분으로 위장하여, 이 학교는 그로 인하여 '기녀간첩학교'라는 명칭을 얻게 된다.


"대륙아국"은 여기에서 한동안 훈련받은 후, 한구로 보내어진다. 현양사는 중국의 본부가 이곳에 있었다. 현양사는 한구, 상해, 천진에 모두 고급기원을 개설하였다. 이들 '대륙아국'은 젊고 아름다워 많은 중국의 고관대작, 고관자제, 고위군관과 비밀결사두목등이 찾았고, 일본정보기구의 '사냥감'이 된다. 대륙아국은 충분히 기녀간첩학교에서 배운 재주를 시전하여, '사냥감'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만들고 그들로부터 대량의 중요정보를 획득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세계각국의 간첩직업은 모두 자랑스럽지 못한 일로 여긴다. 그러나 일본에서, 현양사에 투신하여 간첩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금전을 위한 것도 아니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것이었다. 설사 명문귀족과 고관대작출신이더라도 기꺼이 어부, 농민, 쿠리, 기녀등으로 위장하여 나타났다. 현양사는 정보공작을 이처럼 '숭고'한 위치로 글어올린 것은 간첩들이 하는 일이 애국주의에 의존하고 다른 요소에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나라의 정보기구에서 보기 어려운 일이다.


10여년의 발전을 거쳐, 현양사는 일본에서 독보적인 조직으로 성장한다. 다른 민간단체들이 모두 현양사의 뒤를 따랐다. 다만 동시에 현양사내의 구성원은 각양각색이었고, 혼잡한 추세였다. 현양사는 심지어 위협, 협박의 방법으로 일본의 대외정책에 영향을 미치고자 했다. 그리하여 당국을 분노하게 했다. 특히 조선의 민비살해사건은 일본의 국제적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일시에 국제여론이 들고 일어났고, 일본을 야만민족으로 취급했다. 중국과 러시아 양국정부는 현양사의 국외활동에 대하여 일본에 항의를 제기했고, 현양사구성원들은 'persona non grata(환영받지 못하는 사람)'가 되었다. 


현양사가 활동할 때 하류의 수법을 썼기 때문에, 국내외정치에 나쁜 영향을 끼쳤고, 금방 명성이 악화된다. 이때 현양사의 두목 도야마 미쓰루의 지지하에 흑룡회(黑龍會)가 분리되어 나간다. 그리고 흑룡회는 점점 현양사를 대체하여 일본정부의 '어용첩보사단'이 된다.


흑룡회의 이름은 중국의 흑룡강에서 따왔다. 중국을 노리는 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흑룡회는 낭만적인 애국주의로 자신을 포장해서 국내에서 선동성이 컸다. 몇년이 지나지 않아 일본의 수십개 민간사단중 가장 기율이 있고, 가장 책략이 많은 정보조직으로 성장한다. 현양사의 날개 밑에서 튀어나온 한 마리의 거대한 독수리와 같았다. 흑룡회의 구성원은 처음에 100-200명에서 1944년에는 10,000명에 가까운 규모로 성장한다. 처음에 흑룡회는 정보수집이 소련과 동북삼성에 국한되었지만, 나중에는 한반도, 중국내륙, 필리핀, 말레이시아등 전체 아시아지역으로 확대된다.


근대 이래, 일본의 대중국정보수집은 사쿠라꽃 아래에서 찾아내기 어려운 '독즙'과도 같이 규모도 크고 인원도 많았으며, 시간도 길었다. 정보수집의 상세함은 촉목경심(觸目驚心)이라는 말로 형용할 수 있을 정도이다. 현양사와 흑룡회는 비록 2차대전후 미군에 의해 해산되었지만, 일본국민의 혈액속에 남아 있는 정보의식은 이로 인하여 사라지지 않았다. 장개석이 한 말은 깊이 새겨볼 만하다: "중국에 온 일본인 한명 한명을 절대로 경시해서는 안된다. 남자건 여자건, 그들은 모두 정보수집의 임무를 띄고 있다. 웃는 얼굴로 맞이한다고 안심하지 말라. 아마도 그는 정보를 이용하여 거꾸로 너의 살을 먹고, 너의 피를 빨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