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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과 일본

일본의 제왕지도는 중국의 제왕지도와 어떻게 다른가?

by 중은우시 2015. 6. 30.

글: 정만군(程萬軍)

 

허리에 전도를 차고, 완전무장을 하며, 눈빛은 강인하고, 냉혹교만하다. 이는 메이지시기 일본의 각 학교에 보내어진 젊은 일본 메이지천황의 사진모습이다. 이는 일본역대천황의 표준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이미지는 사람들에게 냉혹과 폭력이라는 이미지를 준다. 그러나 그들의 잔혹은 기본적으로 '외향형(外向型)'이다. 일본천황은 만대일계라고 말하는데 한번도 '내향형폭군'이 나타난 적이 없다. 어느 천황도 대규모 도살과 숙청을 진행하지 않았다.

 

이는 당연히 일본천황이 대부분역사시간동안 '허군(虛君)'이었던 것과도 관련된다. 그러나, 설사 일부 권력을 장악했던 천황, 황자, 황형들이라고 하더라도, 거의 '내도(內屠)'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중국역사에서 상상할 수도 없다. 중국의 첫번째 봉건왕조로부터 최후의 왕조까지, 모두 폭군이 빈번히 나타난다. 그리고 대부분은 본국인에게 손을 썼다. 진나라는 겨우 2세를 거치는데, 진시황에서 진2세까지 대내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데 있어서 갈수록 심해졌다.

 

청나라 12명의 황제중 거의 혼군은 없었다. 그리고 '초원랑(草原狼)'의 혈맥이 흘렀다. 그러나 중원에 들어온 후, 그들은 금방 '초원랑'에서 '권중랑(圈中狼, 우리속의 이리)로 퇴화한다. 대외적으로는 상권욕국(喪權辱國)을 참고 대내적으로는 잔인하고 피비린내나게 진입하는데 있어서, 한족황제들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청나라 말기의 실제통치자, '준여황' 예허나라 자희(서태후)는 내외술을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모두 잘 아는 명언 "양중화지물력(量中華之物力), 결여국지환심(結與國之歡心)". 역사를 해독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 문구를 서태후가 매국하였다는 확실한 증거로 얘기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서태후가 이 말을 한 진실한 마음상태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뼛속부터 피정복당한 화하인을 노비로 생각했다. 차라리 노비라는 물건을 남에게 줘버릴 지언정,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려 하지는 않았다. 비록 그들은 한족황족이 아니지만, 한족황제보다 더욱 뿌리깊은 "목양(牧羊)"심리가 깔려 있다. 혈연적으로, 그들은 스스로를 고귀하게 여기고, 한족혈통은 비천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만한통혼을 허용하지 않는다. 노예주는 절대로 노예와 구분되어야 한다. '목양'의 수단에서 조야이건 민간이건, 황가에 반항하는 태평군이건 황가에 빌붙으려는 의화단군이건, 무정하게 배반하며 마음대로 살육했다. 극한을 가지 않은 경우가 없다.

 

같은 황제이지만, 왜 두 가지 방식이 나타날까? 동해에서 대면하는 일본천황은 왜 중국황제처럼 '내잔외인(內戰外忍)'의 전통이 없을까?

 

이는 역시 '동류부동도(同類不同道)'의 문제이다.

 

중국의 군주는 대부분 중원낭도(中原狼道)를 숭상하고, '내잔외인'의 4자요결을 지킨다. 고대 일본은 비록 중국을 스승으로 삼았지만, '제도(帝道)'에서는 중국과 크게 달랐다. 비록 군사기술상, 일본천황은 중세기의 여진, 몽골처럼 철기로 쳐들어가지 않았지만, '도'를 관찰하면, 예로부터 지금까지 일본은 확실히 고대유목민족과 대동소이하다. 철혈입세(鐵血立世)를 숭상하고, 대외적으로 낭성(狼性)을 드러내며 정복한다. 이런 '해랑(海狼)'이 기질은 초원낭과 비교하여도 막상막하이다. 그러나 "권중랑(圈中狼)'과는 반대였다. 심지어 '내잔외인'의 권중랑에게는 극성인 성격이었다.

 

일본의 낭도(狼道)는 중심이 바깥에 있고 안에 있지 않다. 여기의 문화적 원인은 아주 많지만, 가장 주요한 한 가지는 그들이 생존환경의 위기의식으로 인하여 나타난 '단결본능'이라는 것이다. 만일 불패지지에 서려면, 혹은 강국의 숲에 들어가려면, 본민족 내부의 정신적 지도자는 자상잔살(自相殘殺)해서 안된다. 반드시 전민족의 동구적개(同仇敵愾), 포단취난(抱團取暖)의 호소력을 유보해야 했다. 이런 의식은 영원히 정확한 천황의 머리에 뿌리깊이 박혀 있어서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예로부터 지금까지, 설사 '문명세계'에 진입하기 전이라도, 천황이 허군이건 실군이건, 일본에는 '내향폭군'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의 잔혹은 대외전쟁에서 대부분 나타난다.

 

중국과 일본 양국의 군주가 실천한 낭도는 내외의 구분이 있다. 최종적으로 두 가지 서로 완전히 다른 물종이 된다. 나중에 갑오전쟁의 결과가 이를 증명한다. 중일 갑오전쟁때, 광서제와 서태후는 기실 한편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말한다. '제당'이건 '후당'이건 설사 둘을 합치더라도 '자잘한 소국'의 메이지천황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는 두 물종의 대결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퇴화한 초원랑, 권중랑이고, 다른 하나는 서양화된 해랑이었기 때문이다. 누가 강하고 누가 약한지는 일목요연하게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