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서달(徐達): 대명왕조 최대의 개국공신

중은우시 2018. 11. 21. 12:07

글: 정만군(程萬軍)


서달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인물이다. 1332년에 태어났고, 안휘 봉양 사람이다.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주원장과 같은 고향사람이며 어릴 때부터의 친구이다. 주원장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서달은 그를 처음부터 따랐고, 회서이십사장의 으뜸이며, 명나라군대 최초의 대원수이다.


서달은 개국전에 정로대장군(征虜大將軍)으로 원나라를 멸망시키는 마지막 전투를 그가 승리로 이끌었다. 그가 이끄는 북벌군이 원나라의 대도를 점령했다. 건국후에는 주원장에 의해 우승상(右丞相)에 임명된다.그러나 2년도 되지 않아 내려온다. 이유는 직무조정이다. 서달이 승상의 자리에서 내려온 것과 호유용(胡惟庸)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그러나 호유용은 확실히 서달을 끌어내리려고 계획한 바 있다.


이건 어찌된 일인가?


이것은 주원장의 서달에 대한 태도변화에서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천하를 얻는 단계때, 주원장은 서달을 포함한 형제들에게 큰형으로서의 뛰어난 자질을 보여준다: 의리를 중시했다.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주원장은 빈한한 출신이다. 농민중에서도 하층농민이다. 그는 지식이 없었고, 돈도 없었다. 그래서 난세에 두각을 나타내기 위하여는 IQ와 EQ를 사용해야 했다. 이 두가지 점에서 그는 발군이었다. 주원장의 뛰어난 IQ는 그의 오성(悟性)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슬쩍 찔러주면 바로 알아차린다. 그의 뛰어난 EQ는 그의 인간적 매력으로 나타난다.


여러해가 지난 후, 황제가 된 주원장은 강호에서의 옛 일을 회고한다. 그리고 자신은 인의(仁義)에서 이겼다고 생각한다. 당시는 군웅이 할거하던 시기인데, 주원장은 거사가 비교적 늦은 편이었다. 그가 어느 정도 세력을 형성했을 때 원군은 이미 선배들에 의하여 거의 소멸된 상태였다. 그리고 그의 적수는 대부분 같은 류였다. 반란군의 우두머리. 그중 두 명의 적수가 가장 강했다. 하나는 장사성(張士誠)이고, 다른 하나는 진우량(陳友諒)이다. 장사성은 돈이 많고, 진우량은 병사가 많았다. 주원장은 아무 것도 업삳. 다만 '가진 것은 신의'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형제들과 '동심공제(同心共濟)'했다.


역사기록을 뒤져 보더라도 이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주원장은 가난뱅이로 처음에는 그도 큰형을 모셨다. 천하가 난세에 빠지자, 그는 홍건군(紅巾軍)의 우두머리인 곽자흥(郭子興)에게 의탁한다. 처음에는 친병이었다가 용맹하게 싸우면서 재능을 드러내자 큰형 곽자흥은 그에게 양녀를 주어 사위로 삼는다. 형제에서 장인사위로 관계가 바뀐 것이다.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비록 중용받았지만, 주원장은 곽자흥의 생각이 편협하고, 안목이 좁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혼자서 사업을 일으킬 것을 생각한다. 1353년, 25살의 주원장은 장인을 벗어나 독자적으로 창업한다. 24명의 형제들을 이끌고 별도 부대를 만들었고, 결국은 자신의 천하를 얻어낸다.


이 24명의 형제는 당초 주원장이 천하를 얻기 위하여 가진 모든 밑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 으뜸은 바로 서달이다. 나머지 인물로는 탕화(湯和), 비취(費聚), 육중형(陸仲亨)등이 있다. 주원장은 먼저 이들 형제들과 동감공고(同甘共苦)하며, 좋은 큰형으로서의 자질을 보인다. 그는 통이 크고, 형제들에게 부족한 게 있으면 바로 주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과 쉽게 어울린다. 형제들과 하나가 되어 피차를 구분하지 않았다. 이들 형제들은 그와 무슨 명분을 따지지도 않았고, 그저 그를 우두머리로 여겼을 뿐이다. 의견이 서로 다를 때는 이치를 따지며 다투기도 했다.


예를 들어, 형제들 중 으뜸이자,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고, 그보다 4살이 어린 서달에 대하여, 주원장은 공경했고, 형제로 대한다. 시미정 그의 생활이나 감정문제까지도 관심을 쓴다. 서달은 자신에 엄격하여, 여색을 탐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혼이 비교적 늦었다. 주원장은 친히 나서서 미녀 사취아(謝翠娥)를 골라 그와 결혼하게 해준다. 이뿐 아니다. 나중에 서달의 장녀를 자신의 4남 주체(朱棣)와 결혼시켜서, 형제에서 사돈으로까지 발전한다. 이처럼 서로를 아끼는데 어찌 간담상조(肝膽相照), 출생입사(出生入死)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형제들 앞에서, 주원장은 은의를 베푸는 외에 수시로 앞장서서 모범을 보였다. 형제들에게 어떻게 큰형을 대해야 하는지 보여준다. 주원장의 '원래 큰형'이자 '나중에 장인'이 된 곽자흥이 호주에 갇혀 있을 때, 여러 장수들과의 불화로 부장이 곽자흥을 납치하고, 많은 사람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주원장은 앞장서서 구해주러 나선다. 형제들은 그에게 위험한 일에 손대면 괜히 죽을 수도 있으니 가지 말라고 말렸지만, 주원장은 이렇게 말한다: "곽공은 나에게 큰 은혜를 베풀었다. 그가 지금 어려운데, 내가 만일 가서 구해주지 않는다면, 내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는 파벌다툼을 무마시키고 곽자흥을 구해낸다. 형제들 앞에서 주군을 구해냈다는 좋은 명성을 쌓는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천하를 차지하는 단계에서 서달은 대우를 받았다. 주원장의 여러 형제들 중에서 가장 좋은 대우를 받았다. 대명왕조가 건립된 후에는 24명의 형제들 중에서 3명의 공(公)에 봉해지고, 21명이 후(侯)에 봉해지는데, 그중 서달의 지위가 가장 높았다. 위국공(魏國公), 우중서우승상(中書右丞相), 참군국사(參軍國事), 태자소부(太子少傅)가 된다.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서달은 원래 큰형 주원장과 함께 복을 누려야 했다. 누가 알았으랴. 좋은 시절이 오래가지는 않았고, 액운이 금방 닥친다.


홍무제가 된 후의 주원장은 얼마 후 개국황제의 안면바꾸기 철칙을 따르게 된다. 토사구팽(兎死狗烹). 계획적이고 대규모로 개국공신들을 도살하기 시작한다. 예전에 이들 24명의 형제들은 그를 황제의 보좌로 올려놓았다. 그를 하늘의 성인으로 받들고, 신단으로 올려놓은 것이다. 그러나 이 성인은 올라가자 내려오지 않는다. 그는 이미 신이 되었다. 그럼 형제들은 무엇인가. 이런 말이 있다. 한 사람이 득도하면 닭과 개들까지도 하늘에 오른다(一人得到鷄犬昇天). 이때 득도한 큰형은 정말 형제들을 개나 닭으로 본다. 이들 형제들도 확실히 하늘로 올라가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큰형의 가장 간단하고 거친 방법으로 하늘에 올라간다: 도살당한다.


사료를 보면, 황위에 오른 주원장은 전우들에게 사나운 면목을 드러낸다. 핑계거리를 찾아서, 이들 생사를 같이 넘나들던 전우들을 친다. 그는 더 이상 정이 있고 의리가 있던 좋은 큰 형이 아니다. 옛정을 전혀 생각지 않는 백안랑(白眼狼)이었다.


주원장의 첫번째 전우인 서달도 큰형이 변화와 무서움을 확실히 깨닫는다. 그리하여 행동에 극히 조심했다.


사료 기재에 따르면, 칭제후의 주원장은 자주 서달을 불렀다. 연회를 베풀어 먹고 마셨다. 겉으로는 매번 '포의형제'로 칭했지만, 실제로는 천자의 티를 드러낸다.


서달은 어떠했는가? 그는 항상 겸허하고 조심했다. 군신의 존비질서를 넘지 않으려 애썼다.


조정의 예의제도에 따르면, 개국공신 서달은 관직이 승상에 이르므로, 외출시 상당한 규모의 호위대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보통의 가마와 말을 타고 드나들었다. 집으로 돌아가서도 검소한 생활을 한다. 전혀 사치, 낭비하지 않았다. 가무를 즐기거나 연회를 베풀어 자신의 고귀함을 자랑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주원장은 서달을 시험해본 적도 있다. 자신이 살았던 집을 서달에게 넘겨준다. 서달은 극구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서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원장이 말한 집은 주원장이 오왕을 칭할 때의 오왕부(吳王府)였기 때문이다. 그 집에 들어가서 산다면, 칭황불신(稱王不臣)의 생각을 품었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그래서 극구 받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시험은 계속되었다. 명사 기록에 따르면, 한번은 주원장이 서달과 술을 마시는데, 주량이 센 서달을 일부러 취하게 만든다. 그리고 황상의 이불을 덮어준다. 서달은 깨어나서 대경실색한다. "놀라서 계단 아래로 내려가서 바닥에 엎드려 죽을 죄를 졌다고 소리친다" 확실히 주원장은 고의로 서달의 충성을 시험해 본 것이다. 서달의 행동을 보고 주원장은 당연히 기뻐했다. 처벌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상을 내린다. 서달은 대장군이다. 위풍당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원장의 앞에서 그는 이미 '조심해서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를 보면 그는 주원장의 곁에서는 아주 조심해야한다는 것을 잘 알았던 것이다.


야사를 보면, 심지어 "승기루(勝棋樓)"의 고사까지 전해진다. 서달은 두 마음을 품지 않았다는 것을 표명했다는 것이다. 서달은 바둑의 고수인데, 한번은 주원장이 서달을 불러 바둑을 둔다. 그리고 서달에게 절대로 양보하지 말고 제대로 두라고 명한다. 그리하여 두 사람이 바둑을 두기 시작했는데, 이번 판은 아침부터 정오까지 계속되었다. 그래도 승부가 나지 않았다. 끝내기를 할 때 돌연 서달은 돌을 놓지 못한다. 주원장이 놀라서 묻는다: "장군은 왜 더 놓지 않는가?" 서달이 바닥에 닾드려 말한다: "황상께서는 판을 상세히 봐주십시오." 주원장은 그제서야 발견한다. 바둑판의 검은 돌이 이미 '만세(萬歲)'라는 두 글자를 새기고 있었다. 주원장은 크게 기뻐하며 이 누각과 막수호 화원을 서달에게 하사한다. 이것이 바로 '승기루'의 내력이다.


모두 알고 있다시피, 대명은 개국한 후 주원장이 여러 공신들을 강력하게 경게한다. 당연히 여기에는 공신들 자신의 원인도 있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대신들은 훈구대신이 된 후에도 공을 내세워 오만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원인은 주원장의 변태적인 권력욕이다. 권력을 손에 쥐자, 남이 빼앗아갈 것을 겁낸다. 주원장의 후계자인 태자 주표는 성격이 나약하여, '당우지풍(唐虞之風)", "불기살륙(不嗜殺戮)"했다. 이는 더더욱 주원장의 우려를 강화시킨다. 주표가 장래 이들 숙부, 백부들을 억누르지 못한다면, 대명강산은 주인이 바뀔 수도 있다. 그리하여, 주원장은 황위에 앉은 후 암중으로 살심을 품어 문호를 정리하기로 한다. 그렇게 하여 주씨의 명왕조정권을 반석처럼 굳게 하려 한 것이다.


나중에, 많은 형제들이 주원장에게 제거당한다. 그러나 오직 서달만은 주원장이 손을 쓰지 않는다. 그것은 옛정을 생각해서라기보다는 서달의 잘못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서달은 너무나 잘 행동했고, 그에게서는 거의 핑계거리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주원장의 서달에 대한 평가는 이렇다: "명을 받아서 나가면 성공하여 개선했다. 그리고도 자랑하지 않고 겸손했다. 여색도 좋아하지 않고, 재물도 취하지 않았다. 가운데 바르게 하여 하자가 없다. 해와 달처럼 밝다. 이런 사람은 대장군 한 사람 뿐이다." 이 말은 서달에 대한 총체적 평가라 할 수 있고, 아주 높은 평가이다. 서달은 백전백승이며 자만하지 않고, 호색하지 않고 재물을 탐하지 않으며 광명정대하고 정천입지의 사내대장부라는 것이다. 이런 완벽한 사람은 다시 찾기 어려울 것이다.


당연히 이런 장점들 외에, 홍무제 주원장에 있어서, 그가 서달에게서 시험하고 싶었던 것은 단 한가지이다: 당파를 만들어 사욕을 도모하지않는지. 이것은 황권에 대한 최대위협이다.


서달이 주원장의 앞에서 공손했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한 사람에게 찍히게 된다.


그는 바로 황제의 총애를 받는 인물인 호유용이다.


호유용과 서달의 투쟁이 시작된 연유는 다음과 같다:


서달은 조정에서 지위가 높았고, 호유용은 그의 명망을 이용하여 이익을 도모하려 한다. 그래서 서달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 하는데, 서달은 다른 사람들과 지나치게 가까이 하지 않았다. 게다가 호유용의 품행을 그다지 좋게 보지 않아, 무시한다.


당당한 황제의 총신인데, 서달과 가까워지려 했으나 거절당한다. 그래서 호유용은 분노하게 된다. 오히려 살의를 품는다. 서달의 가족 복수(福壽)를 매수하여 서달의 집안생활을 알아내고, 독을 넣어 죽이려고 한다.


다행히 이 복수는 양심이 남아 있어서, 이리저리 생각해본 다음에 주인에게 차마 손을 쓰지 못하고, 서달에게 솔직히 자백한다. 서달은 매우 화가나서 주원장에게 호유용의 행위를 알린다. 이 자는 입과 속이 다르다. 겉으로는 좋은 말을 하는데, 뒤에서는 독수를 쓰고 있다. 조심하시는 것이 좋겠다. 주원장은 그의 말을 듣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호유용은 처벌받지 않고 지나간다. 이것은 무엇을 설명하는가. 서달과 같은 초중량급의 개국공신을 주원장의 묵인이 없었다면 터럭하나 건드리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나중에 이 개국공신은 비록 호유용에게 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주원장의 암산(暗算)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바로 민간의 "사증아(賜蒸鵝)" 이야기이다. 서달에게 독창이 생겨서 음식을 가려야 하는데, 주원장은 굳이 삶은 거위고기를 서달에게 내린다. 서달은 눈물을 흘리면서 씹어먹었고, 결과적으로 독창이 발작하여 죽고 만다. 이 민간전설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다만 믿지 않을 수도 없다. 결국 호유용이 서달에게 감히 도전했다는 것은 누가 그에게 그런 담량을 주었겠는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서달은홍무18년 즉 1385년에 죽었다. 이때 주원장은 이미 호유용을 포함한 승상을 모조리 제거했을 때이다. 마지막으로 이 공적이 탁월한 서우상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주원장은 아주 비통해 했다. 명사에 따르면, "황제는 조정을 철(輟)하고, 장례때 비통해 마지 않았다. 중산왕(中山王)에 추봉하고, 시호를 무녕(武寧)이라 한다. 삼세의 왕작을 내리고, 중산의 북쪽에 매장하게 하며 신도비문을 황상이 짓는다. 태묘에 배향하고, 공신묘에 초상을 두는데 위치는 첫째로 하였다."


사후에 서달은 최고의 영예를 얻는다. 왕에 봉해진다. 당연히 이때는 어떻게 상을 내려도  주원장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주원장의 아픈 마음과 비교하면 공신 서달의 죽음이 황제에게 가져다준 가장 큰 수확은 철저히 안심해도 되겠다는 것이다. 민간에서 서달의 죽음을 주원장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한편으로 서달이 민간에서 높은 명망을 얻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중국의 백성들이 숭상하는 대표인물인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폭군의 마음을 추측한 것이다. 주원장의 이런 마음을: "야심이 없다고? 명망이 너무 높으니, 나는 안심이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