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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영락제의 차남 주고후(朱高煦)의 죽음 (1)

by 중은우시 2018. 11. 19.

글: 사우춘(史遇春)


명태조 주원장이 대명왕조를 건립한 후, 송, 원의 '주약신강(主弱臣强)'의 폐단을 없애고자, 홍무3년(1370년)부터 여러 황자를 분봉하여 왕으로 삼아 번병조정(藩屛朝廷)하게 한다.


홍무9년(1376년)에 이르러, 조정은 직언을 구하는 조서를 내리고, 당시 평요유학훈도(平遙儒學訓導)를 맡고 있더 섭백거(葉伯巨)는 이에 응하여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린다:


"번국이 강성하여 병마도 충분하고 양식도 많이 쌓아두었으니 앞으로 꼬리가 머리를 흔드는 국면이 벌어질 수 있다. 일단 번국이 이런 형세를 형성하게 되면, 조정이 다시 그 영지를 줄이고 권리를 박탈하고자 하더라도, 번국의 불만과 원성을 사게 될 것이다.(숨은 뜻은 불만을 가지면 땅도 있고 병사도 있고 권력도 있으므로 반드시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것이다). 더욱 심한 경우에는 이들 번국에 아무런 압력을 가하지 않는 상황하에서도 기회를 틈타 움직여 대권을 노릴 수 있다. 이 점은 방비하지 않으면 안된다."


주원장은 이 상소를 읽은 후, 섭백거가 주씨일가의 골육혈친을 이간질한다고 여겨 화가 나서 친히 섭백거를 화살로 쏘아서 죽여버리겠다는 말까지 한다. 나중에 주원장이 친히 손을 쓴 것은 아니지만, 섭백거는 형부대옥에 갇히고, 옥중에서 결국 병사하고 만다.


홍무31년(1398년), 주원장이 병사하고, 손자 주윤문이 즉위한다.


주원장은 아마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손자인 건문제 주윤문이 번국을 없애려 시도하고, 그의 아들인 연왕 주체가 건문원년(1399년) 거병하여 조정에 항거하게 될 줄은.


누군가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만일 주윤문이 삭번을 하지 않았더라면 연왕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그것은 잘못된 말이다.


섭백거가 말한 바와 같이 번국은 설사 아무런 압력을 받지 않더라도, 기회를 틈타 움직이고, 대권을 노릴 것이다. 이 점을 방비하지 않으면 안된다.


주윤문의 삭번에 관해서 보자:


첫째, 주윤문의 각도에서 보자면, 그는 이 방안을 집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위 내 침대 옆에서 다른 사람이 편하게 자는 꼴은 용납할 수는 없는 일이다. 주체의 실력과 인맥이 존재하는 한, 주윤문은 한시도 안심하고 살 수가 없다. 이는 역사의 현실이다. 더더구나 권력의 현실이다.


둘째, 주윤문이 삭번하지 않으면 주체 개인은 아마도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을 수 있다. 다만 주체의 신변에 있는 사람들은 어떨까? 그건 뭐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들이 주체에게 암시, 명시, 건의, 기획을 내놓지 않았을까? 주체가 이때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더라도, 다음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한단 말인가? 다시 생각해보자. 주체는 자신이 당시에 가진 실력을 스스로 나서서 삭감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는 기회를 잡아서 계속 늘여가려 할 것인가?


셋째, 주윤문이 삭번하지 않으면 역사의 경험법칙에 따라 그는 아마도 죽기를 기다리는 꼴일 것이다. 주윤문이 적극적으로 삭번하면 결과를 보면 죽으러 가는 길이다. 다만, 누가 알 수 있으랴. 주윤문은 정통의 지위를 가지고 있고, 정규군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조정신하들도 있고, 지방관리도 있다. 그외에 이 신임황제는 업적을 남기고 싶었다. 그가 어떻게 해야한단 말인가? 주윤문이 즉위한 후, 자신의 의지를 실행하려면, 그는 분명히 어느 세력도 자신을 견제하도록 놔두지 않으려 할 것이다. 신변의 우환을 제거하는 것은 대다수의 신임자가 권력을 강화하고 지위를 안정시키는데 반드시 필요한 조치이다. 주윤문이라고 하여 예외가 될 수 있겠는가?


이런 상황을 보면, 삭번은 반드시 해야하는 상황이다. 비록 결과는 주윤문의 패배로 나왔지만, 과정을 보자면 주윤문에게 성공의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번 권력투쟁에서 주윤문과 주체의 숙질 두 사람은 4년에 걸친 전투를 벌인다. 최종결과는 이러하다:


대명조의 두번째 황제는 무너지고, 숙부가 조카를 대신하여 새 황제에 오른다.


이것은 섭백거가 말한 대로이다.


일단 세력이 형성되면, 영지와 권력을 삭감하려면 반드시 번국의 불만과 원성을 사게 된다.


주체는 불만과 원성을 가졌을 뿐아니라, 그의 행동은 즉시 거병하여 항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번국이 강대해져서 조정을 무너뜨릴 수 있을 때, 조정은 상대적으로 약세가 되어버린다.


이번 권력투쟁을 보면 다음과 같다:


주원장은 '주약신강'의 역사현상을 피하기 위하여 자신의 집안인물의 '꼬리가 너무 커져서 자를 수 없게 되는 상황'을 만들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주원장이 즉위후에 한 이런 조치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의 조치는 헛점이 있었다. 주원장은 아마도 아들이 손자의 권력을 빼앗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숙질간의 권력투쟁이끝나고, 주체가 등극한다.


대권을 잡은 후, 주체는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후계자를 세우는 문제에서, 주체는 심지어 그의 부친처럼 과감하고 확실하지도 못했다.


후계자문제에 있어서, 주원장은 시원스러웠다. 홍무원년(1368년) 정월, 주원장은 장남 주표를 황태자에 앉힌다. 아쉽게도 주표는 즉위하도 전인 홍무22년(1392년) 병사한다. 같은 해 주원장은 즉시 주표이 장남인 주윤문을 황태손에 앉힌다.


주원장과 대비해보면, 후계자선정문제에서, 주쳬는 망설이고 흔들렸다.


주체의 후계자문제에 관하여 사료를 분석해보면 주체는 기실 장남 주고치(朱高熾)를 좋아하지 않았다.


정난지역때, 주체는 차남 주고후를 데리고 같이 전투에 나선다. 그 동안 주고후는 적지 않은 공을 세운다. 주원장을 여러번 위기에서 구해준다. 주체 자신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주고후는 나를 닮았다고. 이것은 당연히 주고후를 인정하는 말이다.


주고후를 인정한다는 것은 당연히 그에게 황위를 넘겨주려는 생각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의사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정난지역때 주체는 주고후의 등을 쓰다듬으면서 이렇게 암시했다고 한다: 


"열심히 해라(勉之). 세자는 병이 많다(世子多疾)!" 


비록 주고후를 인정하고 허락에 유사한 격려를 했지만, 실제로 후계자를 정하는 사직대사를 처리함에 있어서는 주체가 과감하고 확실한 면을 보여주지 못한다


개략, 주체의 내심 깊은 곳에는 황위를 주고후에게 물려주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고이래로 제도와 관례로 볼 때 그는 자신의 생각을 밀어붙일 유력한 이론적 근거나 실무사례를 찾아내지 못한다.


주체는 자신이 권력을 탈취했고, 이것만해도 제도를 파괴한 것이다; 그런데 다시 주고후를 태자로 앉힌다면, 그것은 다시 한번 제도를 파괴하는 것이 된다.


주체는 아마도 주고후를 태자로 삼고 싶었겠지만, 전체 대신의 지지와 옹호를 바랐을 것이다. 주체의 마음 속에서 그는 이렇게 바랐을지도 모른다. 주고후를 태자로 삼는데 관하여, 모든 신변의 유력한 신하들이 그의 마음을 잘 읽어서, 집단적으로 상소를 올리면, 그에 따라서 이 일을 확정하겠다고. 그러나, 이런 생각은 그저 주체의 희망일 뿐이다. 당시 주체의 신하들 중에서 주고후에 대한 인상이 아주 좋았고, 주고후와 교분이 두터웠던 일부 사람들이 사적으로 암암리에 주체에게 주고후를 후계자로 삼으라고 말하는 외에, 조정신하중 대다수는 확실하게 입적이장(立嫡以長)을 요구한다. 하물며, 당시의 분위기를 보면, 장남 주고치에게는 큰 하자나 과실이 없었다.


결국, 주체는 어쩔 도리가 없어 장남 주고치를 황태자에 앉힌다.


다만, 이미 주고치를 황태자로 세웠지만, 주체의 내심에는 태자에 대한 불만이 사라지지 않았다.


후계자를 세우는 문제에서, 대신들은 주체의 뜻을 헤아려 상소해주지 않았고, 오히려 주체의 뜻을 거역한다. 그래서, 주체는 이들 대신들을 미워하게 된다. 그후 그는 자신이 아주 아꼈던 해진(解縉)을 처형한다(해진의 죽음에 대하여는 여러 방면의 원인이 있지만, 후계자문제에서 해진이 주체이 뜻에 따라 말하거나 처리핮지 않았던 것도 아마 죽음에 이르게된 주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태자에 대한 불만으로, 나중에 동궁의 속관(屬官)은 거의 모두 주체에게 처벌받는다. 그중 개별적으로 용서받은 경우를 제외하면, 이들 태자의 신하들중 어떤 사람은 옥중에서 죽고, 어떤 사람은 감옥에 십년씩이나 갇혀 있는다.


주체는 황태자를 세웠지만, 황태자에 불만을 갖고 있고, 마음은 주고후에게 향해 있었다. 주고후는 부친의 마음을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교만하고 방자했다. 그 결과 여러가지 사단을 일으키고, 큰 변란을 만들게 된다.


이렇게 보면 주체는 후계자선정문제에서 실제로 지혜롭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주고후는 황위를 노렸다. 그는 전투경험도 있고, 인맥도 있다. 병마도 있고, 양초도 있다. 주체와 비슷한 성격까지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주체와 같은 일을 벌일 수 있었다.


이것은 바로 앞에서 섭백거가 말한 대로이다. "더욱 심한 경우 이들 번국은 아무런 압력이 없는 상황하에서도 기회를 봐서 움직여, 황위를 노릴 것이니. 방비하지 않으면 안된다."


결과는 이렇다. 주체가 죽은 후 2년만인 즉 선덕원년(1426년), 차남 주고후는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그 결과 주고후는 조카인 명선종(明宣宗) 주첨기(朱瞻基)에게 처형당한다.


이상은 관련배경이다.


아래에서는 명나라때 사람인 초굉(焦竤)이 <국조헌정록>권지이 <한서인전(漢庶人傳)>이 기술한 내용을 가지고 영락제의 차남 주고후의 죽음을 설명하고자 한다.


주고후는 주체의 둘째 아들이다.


주고후의 모친은 바로 명성조의 서황후(徐皇后)이다.


서황후는 명나라 개국공신 서달(徐達)의 적장녀(嫡長女)이고, 시호는 인효자의성명장헌배천제성문황후이다.


주고후는 명태조 홍무13년(음력 경신년 1380년)에 태어난다.


당초 주원장은 일찌기 진왕(秦王, 주상, 주원장의 차남, 서안에 위치함), 진왕(晋王, 주강, 주원장의 삼남, 태원에 위치함), 연왕(燕王, 주체, 주원장의 사남 북평에 위치함), 주왕(周王, 주숙, 주원장의 오남, 먼저 오왕에 봉해졌다가 나중에 주왕ㅇ로 고쳐 봉해지다. 개봉에 위치함)의 세자와 주고후등을 경사(남경)으로 불러서 공부하게 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때 주고후는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매일 놀기를 즐겼고, 경박했으며, 품행이 단정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주원장은 이 손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건문제가 즉위(1398년)한 초기에 즉 주원장이 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주고후는 부친을 따라 경사로 와서 장례식에 참석한다.


경사에 머무는 동안, 주고후의 외삼촌인 위국공(魏國公) 서휘조(徐輝祖, 서달의 장남)는 일찌기 몰래 주고후에게 훈계한 바 있다. 법도를 준수하라고. 그러나 주고후는 그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생각해보라. 서휘조가 몰래 주고후에게 그런 훈계를 했다는 것은 한편으로 외삼촌으로서 그는 자신의 조카가 제대로 크기를 바랐을 것이고, 더욱깊게 생각해보면 서휘조는 이미 정치분위기의 변화를 알아차렸던 것이다. 서휘조는 마음 속으로 알고 있었다. 신황제 주윤문은 숙부인 연왕에 대하여 마음을 놓지 못했다. 결국 서휘조가 주고후에게 훈계한 목적은 주로 외조카가 사단을 벌여서 신황제가 그들 부자를 처결할 이유나 핑계를 주지 않도록 하라는 뜻일 것이다.


주고후는 원래 말을 잘 듣는 청년이 아니었다.


주고후는 자신의 집안, 부친의 권세를 믿고 남의 말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결과는 서휘조의 말은 말이고, 주고후는 계속 놀기만 했다.


주고후는 외삼촌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을 뿐아니라, 더욱 심하게도 서휘조의 말까지 훔쳐간다. 그리고 신황제에게 물러간다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로 남경에서 장강을 건너 북평으로 돌아간다.


돌아가는 건 돌아가는 것인데 이 돌아가는 길에도 주고후는 그냥 있지 않았다.


귀로에 주고후는 걸핏하면 백성과 관리를 죽인다.


탁주(명나라때는 북평부에 속함. 지금의 하북성 보정)에 도착했을 때, 무슨 일 때문인지, 주고후는 역승(명,청의 제도에 땨르면 각 주, 현에는 역참이 있고, 역승을 둔다. 역승은 역참의 의장, 차마, 영송의 일을 담당하며 관직은 없다.)을 죽인다.


그때 주고후의 흉포함과 잔인함 음란함과 교활함, 음험함과 발호함음 더 이상 통제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의 여러가지 악행은 이번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의 여러가지 악행은 이미 오랫동안 계속되어 왔다.


위에서 이미 분명히 말한 바와 같이, 주윤문이 번국을 없애는 것은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린다.


즉위후에 주윤문의 삭번계획은 시작된다.


주윤문이 먼저 없애고자 한 것은 자신의 권위에 가장 위협적인 연왕이었다.


누가 알았으랴. 주윤문이 동작을 취하자  마자, 주체는 즉시 거병하여 항거한다.


당일 주체가 거병할 때, 세자 주고치(나중의 명인종)를 북평에 남겨서 수비하게 하고, 그는 친히 주고후를 데리고 나서서 사방에서 전투를 벌인다.


주고후는 팔힘이 셌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다.


주체와 주윤문의 숙질간 싸움에서, 주고후는 자로 주체의 선봉으로 전쟁터에 나선다. 그리고 부친이 강산을 차지하는데 도와주고, 큰 공을 세운다.


건문2년(1400년) 사월, 백구하(白溝河, 지금의 하북성 웅현, 용셩, 정흥 일대)전투에서 주체가 패퇴하고, 거의 구능(瞿能, 정난지역때 조정측 중요장수중 하나. 그는 여러번 사기가 떨어졌을 때 병사들이 앞에 서서 사기를 북돋우고, 연군을 대파했다. 마지막에는 용맹하게 전사한다)에게 따라잡힐 뻔했다. 이때, 주고후가 수천의 정예기병을 이끌고 와서 앞에 나서서 싸워주는 바람에 구능 부자를 베고, 주체가 곤경을 벗어나게 해준다.


건문2년(1400년) 십이월, 주체는 동창(東昌, 지금의 산동성 요성)에서 패배하고, 부하장수 장옥(張玉)이 전사한다. 당일 주체는 몸을 겨우 빼서 도망치는데, 주고후가 군대를 이끌고 적시에 달려와서, 조정군대를 격퇴한다. 그리하여 주체는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건문4년(1402년) 오월, 서휘조는 포자구(浦子口)에서 연군을 격파한다. 주고후는 병력을 이끌고 달려온다. 주체는 그 모습을 보고 기뻐하며 말한다: "나는 이미 지쳤다. 아들이 왔으니 용맹하게 싸워라." 주고후가 기병을 이끌고 분전하여 조정군대는 결국 물러난다.


주체는 여러번 위기를 만날 때마다 이를 뒤집고 승리를 거두곤 했는데, 아들 주고후가 많은 역할을 했다.


주체는 주고후가 자신을 많이 닮았다고 여기고, 주고후도 이를 자랑으로 여겼다. 그리고 공로를 내세워 교만했고, 불법적인 일도 많이 저지른다. 


건문4년(1402년) 육월, 연군이 장강을 건너, 남경성이 함락된다. 궁안에 불이 붙고, 주윤문은 행방이 묘연했다.


건문4년 음력 육월십칠일(기사), 즉 1402년 7월 17일, 주체가 황제위에 등극한다.


주체가 등극한 후 직면한 주요한 문제는 바로 황태자를 세우는 일이었다.


후계자문제에 있어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주체는 주고후를 세우고 싶어했다. 그러나 주고후는 전통, 예제, 관례로 볼 때 모두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


황태자문제를 논의하는 날, 이전에 연왕부에서 일하던 신하들중 기국공(淇國公) 구복(丘福), 부마 왕녕(王寧, 주원장의 여섯째딸인 회경공주의 남편)등은 주고후와 관계가 좋아서, 극력 '이전하(二殿下)'를 추천한다. 이들은 모두 '이전하'의 공이 크니, 마땅히 황태자로 세워야한다는 것이었다.


해진등은 극력 입적이장을 주장한다. 주원장은 마음 속으로 불쾌했지만, 그는 대다수 대신들을 설득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는 입적이장을 주장하는 대신들의 말을 가지고 구복, 왕녕등에게 대답한다:


1. 본거지를 수비한 공로는 호종한 공로보다 크다. 즉 주고치의 공이 주고후의 공보다 크다는 것이다.

2. 황태자의 명분은 예로부터 적자, 장자를 세우는 것이다.

3. 하물며 장남 주고치는 인효하고 현량하여 사직을 지키는 군주가 될 만하다.

4. 그러니 너희는 더 이상 말하지 말고, 함부로 떠들지 말라.


주체는 비록 전혀 원치는 않지만, 이런 이유들 앞에서 주고후를 태자로 세울 방법이 없었다. 왜냐하면, 일단 제도를 파괴하면, 역사상 일어났던 무수한 탈위지쟁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자신의 후세자손들은 계속하여 황위싸움을 벌이게 될 것이다.


후계자를 세울 때, 적자, 장자로 세우는 것은 관례이다. 이 제도가 존재하는 한 따라야 한다. 그것을 어겼을 때의 댓가가 얼마인지는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주체는 조카의 손에서 강산을 빼앗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 마음대로 좋아하는 아들을 후계자로 세울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주체는 자신이 강산을 빼앗았다. 비록 제도를 파괴한 것이지만 이것은 부득이한 일이었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다만 후계자를 세우는 일에서 그가 계속 제도를 파괴할 수는 없었다. 그도 제도를 파괴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렇게 파괴하게 되면, 자신이 얻어낸 강산은 아마도 금방 자손들간의 혼란과 투쟁속에 무너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사회의 역사에서 사람을 기용할 때는 현명함을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후계자를 세우는데서는 모두 적장자를 기준으로 했다. 적장자가 유고일 때는 순서대로 내려갔다.


왜 현명함을 기준으로 후계자를 세우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현명한 사람을 후계자로 세우게 되면, "현(賢)"이 기준이 되어야 하는데, 너무나 신축성이 크고, 확정하기 어렵다. 후계자가 되는 사람이 얼마나 '현명'한지에 대하여 반대자와 경쟁자들은 계속하여 그의 '현명하지 않은 점'을 소재로 삼아 공격할 것이고, 먹칠할 것이다. 그리고 항상 이유는 찾아낼 수 있으므로 권력투쟁은 끊이질 않게 된다.


왜 반드시 후계자를 세울 때, 적자, 장자를 기준으로 하는가?


왜냐하면 적장자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간단하기 때문이다. 신분이 적자이고, 나이가 가장 많다는 것은 공격하기 어렵다. 뒤집기가 어렵다. 그래서 집행하기 아주 편리한 것이다.


여러가지 이유로, 주체는 후계자를 세우면서, '입적이장'의 원칙을 따랐다. 이것은 주원장이 만든 제도이기도 하다. 소위 조종의 법도이다.


그리하여, 영락2년(1404년) 주고치는 황태자에 오른다.


같은 해, 주고후는 한왕(漢王)에 봉해지고 번국은 운남(雲南)이 된다.


이에 대하여 주고후는 앙앙불락이었다.


명나라 종실제도에 따르면, 봉왕된 후, 이들 번왕은 반드시 번국으로 가서 거주해야 했다.


주고후는 번국으로 가려 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반발한다:


"나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나를 만리 먼 곳으로 유배보내야할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보라. 주체는 주고후를 황태자로 세우지 않았다. 마음 속으로 자신을 도와서 강산을 차지하게 해준 이 아들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었을 것이다.


주고후의 이런 불만을 들은 후, 주체는 그의 번국을 청주(靑州, 지금의 산동성 유방)로 고쳐준다.


주고후는 그래도 불만이었다. 그는 여전히 청주로 가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


"내가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나를 그 척박한 땅으로 보내려 한단 말인가?"


그 결과 주고후는 계속하여 경사에 머무르게 된다.


경사에 남아 있으면서도 주고후는 조용히 지내지 않았다. 그는 주체에게 요청해서 주체의 동의를 받아낸다. 천책위(天策衛)를 자신의 호위로 삼게 된 것이다.


소위 천책위(1위는 5천명의 병사로 구성되어 있음)는 황제의 친위군이다. 호위와 궁궐수비를 담당하는 황실의 호위대이다.


천책위를 호위로 얻은 후, 주고후는 이렇게 말한다.


"당태종이 일찌기 천책상장에 봉해졌었다. 내가 천책위 호위를 얻었는데, 이게 우연한 일이겠는가?"


주고후는 스스로를 이세민에 비유한다.


여기에서 천책장군에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천책상장(天策上將)은 천책부관제(天策府官制)의 일종이다. 직위는 친왕(親王), 삼공(三公)보다 높다. 명목상 문관의 우두머리인 삼사(三師, 태사, 태부, 태보)에 바로 다음이다. 천책부는 무관 관부의 우두머리이다. 십사위부(十四衛府)의 위에 있다.


천책상장은 스스로 인재를 모아서 천책부의 관리로 삼을 수 있다. 소위 "허자치관속(許自置官屬)"이다.


<구당서>본기제일 <고조>에 따르면, "당고조(이연) 무덕4년(612년) 겨울 십월 기축, 진왕을 천책상장에 삼고 지위는 왕공보다 높다. 영사도섬동도대행대상서령(領司徒,섬東道大行臺尙書令)을 삼다."


당나라때, 천책상장은 오직 이세민 1명뿐이다.


후세에도 송나라와 오대십국때 모두 6명만이 이 직위를 얻었을 뿐이다.


천책위호위를 얻은 후, 주고후는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다시 주체에게 요청한다. 자신에게 양호위(兩護衛)를 추가해 달라고.


주고후는 이렇게도 말한다:


"나의 영무(英武)함이 진왕(秦王)만 못하단 말인가?" 여기서 진왕은 위의 글과 연계시켜 보면 진왕 이세민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그 외에 주원장의 차남인 진왕 주상(朱樉)도 '엄의영무(嚴毅英武)'하다고 불리웠다.


주체는 북평을 순수하는데, 그 동안 주고후는 경사에 있었다. 황제가 멀리 떠났으므로 주고후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더욱 기고만장했다. 그는 몰래 병사를 기르고, 마음대로 외출하며, 병마를 빼앗았다. 범행과정에서 병마지휘 서야려(徐野驢)에게 붙잡힌다. 주고후는 대노하여, 친히 철조(鐵爪)로 서야려를 때려죽인다. 모두가 그는 황제의 아들인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이런 악행에 대하여 아무도 감히 말을 하지 못한다.


그 후, 주고후는 더욱 대담해져서 참월(僭越)한다. 그는 천자의 차마관복(車馬冠服)을 쓰기 시작한다.


영락14년(1416년), 주체는 북경을 순수한다. 이 기간동안 주체는 북경에서 병이 든다. 주고후의 역모활동은 더욱 두드러지게 된다.


주체는 주고후가 도모불궤(圖謀不軌)한 상황을 들은 후, 화를 낸다. 그리하여 그는 어가를 돌여 급히 남경으로 돌아간다.


경사로 돌아온 후, 주체는 주고후를 부른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그의 의관을 벗기게 한 다음 서금문(西禁門)에 가둔다. 그리고 그가 범한 죄 수십건을 열거하고 그를 주살하려 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황태자 주고치는 인효하고 우애가 깊어,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눈울을 흘리며 극력 구해준다. 이렇게 하여 겨우 주체의 주고후를 주살하라는 명을 거두게 만든다.


마지막 처리결과는 주고후의 양호위를 거두고, 그의 곁에 있는 압닐지도(狎昵之徒)를 주살한다.


역사와 현실은 자주 이렇다:


재난을 당하는 것은 왕왕 곁에 있는 사람이다. 주범은 대부분 자신의 목을 유지한다.


이어서, 주고후는 낙안주(樂安州, 지금의 산동성 혜민)으로 쫓겨간다. 조정은 명을 내려, 즉시 봉지로 떠나도록 재촉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때 주체는 황태자 주고치와 황태손 주첨기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낙안주는 북경에서 아주 가깝다. 만일 주고후가 변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말을 들으면, 병력을 보내라. 아침에 출발하면 저녁이면 그를 붙잡아 올 수 있을 것이다."


주고후는 낙안주에 도착한 후, 마음 속으로 불만을 품고 원한이 더욱 깊어진다. 이때 그의 반역모의활동은 더욱 가속화된다.


주고후가 낙안주에 도착한 후, 태자 주고치는 여러번 그에게 서신을 보내어 회개할 것을 훈계한다. 그러나 그는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조금도 회개할 생각이 없었고, 회개하는 행동도 없었다.


영락22년(1424년), 음력칠월, 주체는 북정에서 회군하는 도중에 유목천(지금의 내몽고 우주무친)에서 사망한다.


당시, 주고후의 아들 주첨기(朱瞻圻)는 북경에 있었다(이때는 이미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한 후이다). 조정의 동향을 주첨기는 모두 몰래 사람을 보내어 주고후에게 알린다. 당일 주첨기는 하룻밤낮에 모두 6,7번이나 인마를 보내어 부친에게 경성의 상황을 알렸다고 한다. 동시에, 주고후측에서는 매일 전후로 수십차례의 인마를 몰래 경사로 들여보내어 조정의 일을 탐문한다. 주고후는 경성에 변고가 일어나기를 바랐다. 이렇게 하여, 그는 기회를 잡아 반란을 일으킬 생각이었던 것이다.


황태자 주고치는 비록 인효하고 우애롭지만, 그는 바보가 아니다. 그런 가정환경에서 자랐으니 세상 일을 많이 겪었다. 그렇게 많은 일을 보면서 그도 마음 속으로 생각한 바가 있을 것이다. 아무리 양보해서 말하더라도 그는 최소한 자신을 보호할 생각은 했을 것이다.


주체가 북정을 떠나면서 경사지역은 황태자의 손에 완전히 장악되어 있었다.


주원장으로부터 주체에 이르기까지 명나라의 특무기구는 활약이 대단했다.


그래서 주고후의 생위는 개략 주고치가 모조리 알고 있었을 것이다. 비록 마음 속으로 주고후의 여러가지 행위들을 잘 알고 있지만, 주고치는 주고후를 더욱 우대해준다.


주고치는 조서를 내려, 주고후를 곁으로 부른다. 그리고 그의 봉록을 배로 늘여주고, 하사품도 수만에 이른다.


그렇다면 주고후의 봉록은 얼마였을까?


<명사>권83. 지제58 <식화6>의 기록에 따르면, "홍무9년(1376년) 제왕 공주의 세공의 수를 정하다; 친왕은 쌀오만석, 초이만오천관, ㅡㅁ사십필, 저사삼백필, 사,라 각 백필, 동하포 각천필, 면2천냥, 염2백인, 화천근, 모두 매년 지급한다; 말의 사료는 월 오십필을 지급한다. 비단은 장인과 재료를 보내어 왕부에서 스스로 만든다."


이전에 주고후가 주첨기의 모친을 죽였으므로, 주첨기는 부친에게 원망이 컸다. 원한때문에 주첨기는 여러번 조정에 부친 주고후의 잘못과 악행을 고발했다.


그리하여 주체는 여러번 아들 주고후, 손자 주첨기 두 사람을 훈계한다.


"너희 부자 둘은 어찌 이럴 수 있느냐?"


주고치가 하사품을 늘이고 봉록을 늘여준 후, 주고후는 아들 주첨기가 주고치의 등극을 전후하여 경사에서 탐문한 정보 및 조정사무를 알아낸 행위를 모조리 조정에 일러바쳤다고 한다.


(이들 부자는 정말 대단하다)


주고후는 또한 이런 말도 한다.


"주첨기가 올린 정보에 따르면 모두 조정에서 의논하여 말하기를 하룻만에 조정은 병력을 보내어 낙안주를 취할 수 있다고 했다."


주고치는 주첨기(圻)를 불러서 훈계하여 말한다:


"너는 너희 부자와 우리 형제의 사이에 끼어 있다. 그런데 서로 모함하고 훼방하는게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느냐. 나는 네가 아직 무지한 어린아이라는 것을 생각해서 죽이지는 않겠다."


그리하여 주고치는 명을 내려 주첨기를 봉양(안휘성 저주(滁州))로 보내어 능을 지키며 속죄하도록 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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