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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명왕조 4대총비 (4): 전귀비(田貴妃)

by 중은우시 2018. 10. 1.

글: 접련화(蝶戀花)


명나라는 아주 엄격하게 적서(嫡庶)의 구분과 처첩(妻妾)의 구분을 한 왕조이다. 그러므로 후비의 지위차이는 아주 컸다. 그래서, 황제의 총비가 된다는 것은 기실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아마도 모두 의문을 가질 것이다. 명선종의 손귀비, 명헌종의 만귀비와 명신종의 정귀비, 이들 총비는 모두 아주 잘 살지 않았는가? 호선상은 황후의 자리까지 손귀비에게 넘겨주어야 했고, 만귀비는 평생 황후를 억눌렀고, 정귀비도 잔인하고 포악한 황후 왕희저마저도 어쩌지 못하지 않았는가. 이렇게 보면 총비가 되는 것은 이익이 아주 큰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손귀비, 만귀비와 정귀비가 선시선종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황제가 살아서 그들의 뒤를 받쳐주었기 때문이다. 만일 손귀비가 황후에 오르지 못하고, 만일 명헌종이 만귀비보다 먼저 죽었더라면, 만일 명신종이 왕희저보다 먼저 죽었더라면, 아마 손귀비, 만귀비와 정귀비를 기다리는 최후는 어떠했을까?


두 명의 명왕조 총비의 불행한 처지는 그녀들에게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 명은 명인종의 총비 곽귀비(郭貴妃)이고, 다른 하나는 명세종의 총비 조단비(曹端妃)이다.


명인종의 장황후는 소문이 날 정도로 현혜대도(賢惠大度)한 여인이다. 그리하여 시아버지인 주체(영락제)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이 현혜대도한 장황후도 명인종이 죽은 후 명인종이 총애하던 아들 셋을 낳고 집안에 작위봉호가 있는 훈구대신의 딸이자 법도대로라면 순장하지 말아야할 곽귀비를 순장해버린다. 명나라에는 귀비등 고급명분이 있거나, 아들을 낳았거나, 혹은 친정이 공훈이 있는 경우에는 모두 순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귀비라는 고급명호도 있고, 아들도 셋이나 낳고, 친정이 조정에 공훈을 세운 곽귀비는 바로 현혜대도한 장황후에 의하여 강제로 순장된다. 그리고 곽귀비의 장남이자 이미 봉번받은 17살의 등회왕 주첨개도 1달후에 원인불명으로 급사하고 철번된다.


다시 명세종 가정제의 세번째 황후 방황후를 보자. 가정 13년, 가정제의 두번째 황후인 계후 장황후는 명효종의 장황후의 동생을 구해주려고 말을 꺼냈다가 가정제에게 폐위당한다. 가정제는 수보에게 후궁중 어느 비빈을 새로운 황후로 앉힐 것인지를 물어본다. 일찌기 마음 속으로 생각해두었던 수도 하언(夏言)은 "신은 폐하를 위하여 경하드립니다. 무릇 하늘은 둥글도 땅은 둥글다고 했습니다(天圓地方)". 미신을 믿던 가정제는 그의 말을 듣자 크게 기뻐한다. 그리하여 비빈 중에서 '방(方)'씨성을 가진 덕빈을 황후로 책봉한다. 총애를 받지 못하던 덕빈은 이렇게 하여 하언에 의해 황후의 보좌에 오르게 된다. 가정제는 미모가 뛰어난 조단비를 총애했다. 조단비를 질투했던 방황후는 꾹 참고 있다가, 가정21년 십월, 양금영(楊金英)등 십수명이 궁녀가 가정제가 깊은 잠에 빠진 틈을 타서, 가정제를 목졸라 죽이려 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궁녀들이 급한 나머지 밧줄을 잘못 묶어서 졸리지 않는 바람에 실패한다. 참여자중 하나인 궁녀 장금련(張金蓮)은 거사에 실패한 것을 보고 곤녕궁으로 달려가서 방황후에게 자수한다. 이것이 '임인궁면'이다. 가정제는 비록 목졸려 죽지는 않았지만, 놀라고 혼미하여 조정을 돌볼 수 없었다. 방황후는 이 혼란한 형세를 틈타 성지를 내려 조단비를 능저처참에 처하고, 그녀의 족속 십수명도 주살한다. 악독함이 치를 떨 정도이다. 나중에 정신을 차린 가정제는 비록 조단비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방황후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것을 고려하여 조단비의 명예를 회복시켜주지 못한다. 그리고 방황후의 부친 방태는 후작의 작위를 내린다. 황경방의 <국사유의>에 따르면 궁안에 자주 조단비의 귀신이 출현했다고 한다. 가정제는 각신 서개에게 묻는다. "임인궁변때 억울하게 죽은 자가 있어서 심하다." 그러자 서개가 이렇게 대답한다. "그녀는 살아서 귀했는데 억울하게 죽었으니 어찌 심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가정제는 먼저 도사 소원절(邵元節)의 도움으로 아들을 얻었고, 게다가 밧줄이 매듭이 있어 졸리지 않아 죽지 않을 수 있었으며 조단비의 귀신이 계속 나타나자 가정제는 더욱 도교에 빠ㅣ진다. 이때부터 서원에 홀로 거주하면서 수도한다. 이때부터 가정제는 정무를 게을리하기 시작한다. 5년후, 방황후의 궁전에 돌연 불이 붙는다. 가정제는 이것은 하늘이 죄많은 방황후를 벌주는 것이라고 여기고, 감히 나서서 구해주려고 하지 못한다. 방황후는 그리하여 큰 불 속에서 타죽어버린다. 가정37년에 출생한 하교원의 <심삽조유사>에는 방황후가 서궁의 큰 불로 죽었다고 적었다. 모기령의 <승조동사습유기>에서도 이런 내용을 적어두었다. 가정제는 비록 성격이 잔인했고, 각박했지만, 방황후에 대하여는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다. 이것은 가정제가 극히 미신적이어서 그렇다. 하언의 '천원지방'설과 '임인궁변'때 운좋게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으로 인하여 가정제는 방황후가 그에게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여겼다. 그래서 방황후를 구해줄 수 없었던 만력제는 아주 내심이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가정제는 계후인 그녀를 원배(元配) 황후의 예의로 후장해주고 종묘에 배향하며, 원배황후의 예로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방황후의 신위와 자신의 신위를 나란히 놓을 것을 당부한다. 방빈은 가정제의 미신으로 황후에까지 오르고, 가정제의 미신으로 불에 타 죽는다. 더더구나 가정제의 미신으로 죽은 후에도 영예를 누린다. 방빈의 일생 흥쇠는 완전히 가정제의 미신과 관련이 있다.


명인종의 현덕대도한 장황후가 총비 곽귀비 모자를 잔혹하게 박해하는 것이나, 명세종의 현덕대도한 방황후가 총비 조단비를 잔혹하게 능지처참하고 가족 십여명을 다 죽여버린 것을 보면 명왕조의 총비와 그 아들과 가족들은 황후가 권력을 장악한 후에 어떤 비참한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황후의 자리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하는 총비들의 최후도 모두 이렇게 비참했다. 그렇다면 황후의 지위에 위협을 가했던 명선종의 손귀비와 명헌종의 만귀비는 만일 황제가 살아서 그들의 뒤를 받쳐주지 않았더라면, 결말은 분명히 비극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이많은 만귀비가 명헌종의 총애를 믿고 황후에게 함부로 대한 것을 제외하면, 총애를 받았던 손귀비, 정귀비와 전수영은 모두 자신의 윗사람인 황후에게 공손하게 대했다. 다만 손귀비나 정귀비와 달랐던 점이라면, 전수영은 재능과 용모가 뛰어났을 뿐아니라, 원래 진정한 황후의 자리를 차지해야 했었으므로, 부정한 수단으로 황후의 자리를 차지한 주황후는 좌불안석이었다. 그래서 전수영이 아무리 공경하고 조심하더라도 주황후로서는 그녀를 없애야만 된다고 여겼던 것이다.


장황후는 명인종의 사후에 비로소 곽귀비 모자를 해친다. 방황후는 가정제가 혼미할 때 조단비를 박해했다. 그러나 마음이 급해서 도저히 기다릴 수 없었던 주황후는 숭정제가 멀쩡한 상황하에서 전수영 모자에게 독수를 뻗친다. 숭정제의 멍청함이 주황후의 담량을 키워주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만일 명왕조가 일찌감치 망하지 않았더라면, 주자소(朱慈炤)도 언젠가 주황후에게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가정제와 숭정제는 명나라역사상 가장 미신적인 두 황제이다. 자신의 총비가 자신이 살아있을 때 황후에게 죽임을 당핟게 만든다. 그리고 억울함을 풀어주지도 못한다. 이것은 명왕조의 유이한 특이한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