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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영락제의 차남 주고후(朱高煦)의 죽음 (2)

by 중은우시 2018. 11. 19.

영락22년(1424년) 음력팔월, 주고치가 즉위한다.

그해 십월, 조정은 주고후의 적자인 주첨탄(朱瞻坦)을 한왕세자로 봉한다.

동시에 주고후의 다른 아들들도 왕(王)에 봉한다:

주첨자(朱瞻垐)를 제양왕(濟陽王)에

주첨역(朱瞻域)을 임치왕(臨淄王)에

주첨성(朱瞻垶)을 창락왕(昌樂王)에

주첨역(朱瞻墿)을 치천왕(淄川王)에

주첨평(朱瞻坪)을 제동왕(齊東王)에

주첨도(朱瞻壔)를 임성왕(任城王)에

주첨0(朱瞻0)를 해풍왕(海豊王)에

주첨방(朱瞻垹)을 신태왕(新泰王)에 봉한다.


등극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주고치는 병이 위급해지고, 홍희원년(1425년) 오월, 겨우 10개월간 황제로 있던 주고치는 병사한다.


영락9년(1411년) 조부에 의해 황태손에 세워진 주첨기(朱瞻基), 즉 이때의 황태자는 남경에서 북경으로 장례를 치르기 위해 간다.


홍희원년 음력육월십이일(경술), 즉 1425년 6월 27일, 주첨기가 즉위하니 그가 명선종이다.


주첨기가 등극한 후, 둘째숙부 주고후에 대한 하사품은 다른 왕부들보다 항상 많았다.


주고후가 주첨기에게 낙타를 달라고 하자, 주첨기는 그에게 낙타를 준다. 그것도 40마리를.


주고후가 주첨기에게 말을 달라고 하자, 주첨기는 그에게 말을 준다. 그것도 120필을


주고후가 주첨기에게 포복(袍服)을 달라고 하자, 주첨기는 그에게 포복을 내린다...


주고후가 달라는 것은 주첨기가 모두 다 주었다.


이런 거동은 주고후를 기쁘게 해주지 못했을 뿐아니라, 오히려 그의 의심을 가중시킨다.


선덕원년 음력 팔월 초하루(임술삭), 즉 1426년 9월 2일, 주고후는 반란을 일으킨다.


주고후는 심복 매청(枚靑)을  경사로 보내어, 영국공(英國公) 장보(張輔)를 만나 내응(內應)을 받아내고자 한다.


장보(1375-1449), 자는 문필(文弼), 하남 상부(지금의 하남성 개봉시) 사람. 명나라 중신, 명장. 하간왕 장옥의 장남. 홍희원년(1425년), 장보는 장중군도독부사무로 직위를 바꾸고, 태사의 직위를 받는다.


주고후가 장보에게 내응을 약속한 일에 대하여, 주고후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계획을 했는지, 주고후와 장보가 어떤 교분을 가지고 있고, 장보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 주고후의 거사시에 장보와 밀약이 있었는지 아닌지, 장보에게 미리 알려주었는지 아닌지는 모두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이렇게 내응을 약속받으러 간 결과는 바로 이렇다: 주고후가 보낸 심복 매청은 밤에 장보에게 붙잡히고, 장보는 주고후가 반란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즉시 조정에 보고한다.


주고후도 바보는 아니다. 그는 분명히 혼자서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심복 매청을 경사로 잠입시켜 장보의 내응을 받아내려 한 이외에, 주고후는 산동도지휘 근영(靳榮)등과도 약속한다. 그들도 제남에서 반란을 일으켜 호응하기로.


그외에 주고후는 사람을 보내어 궁전, 창도, 군기등 물자를 나눠주고, 그가 장악할 수 있는 위소(衛所)는 모두 장악하도록 하고, 위소는 ㅓㄴ력을 다하여 주변 군현의 말을 탈취하도록 명한다.


동시에 주고후는 기구를 설립하고 인사를 배치하고, 직능을 나누고, 관직을 내린다.


1. 오군도독부를 설치한다

2. 인사안배와 직능분업은 아래와 같다:

    지휘 왕빈(王斌)이 전군(前軍)을 이끈다.

    위달(韋達)이 좌군(左軍)을 이끈다.

    천호 성견(盛堅)이 우군(右軍)을 이끈다

    지주 주항(朱恒, <명사기사본말>에서는 朱煊이라고 하였다)은 후군(後軍)을 이끈다

    주고후의 여러 아들(주고후는 모두 11명이 아들이 있었고, 장남은 요절했다)은 각자 일군을 감독한다.

    주고후 자신은 중군(中軍)을 지휘한다.

    한왕세자 주첨탄은 남아서 본거지를 지킨다.

3. 배치완료후, 관직을 수여한다:

    왕빈, 주항등을 태사, 도독, 상서등의 관직에 봉한다.

    어사 이준(李浚)은 낙안사람이다. 부친상으로 이때 집안에서 상을 치르고 있었다. 주고후가 거사한 후, 이준을 부른다. 이준은 이미 소식을 들어서 부름에 응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준은 집을 버리고 도망쳐서 이름을 바꾼다. 그리고 지름길로 경사로 달려가 조정에 주고후가 반란을 일으킨 소식을 전한다.

    이준은 이렇게 말한다: 

    주고후의 병력은 기세가 대단하다. 그날로 제남을 공격하여 함락했을지도 모른다. 그 후에는 병력을 이끌고 경사로 향할 것이다.

    소식을 들은 후, 주첨기는 즉시 이준을 행재좌첨도어사로 임명한다.

    이어서, 주첨기는 적시 중관 후태(侯泰)로 하역므 조서를 가지고 주고후를 만나러 가도록 한다. 주첨기는 조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전에 매청이 경성으로 와서 말하기를 황숙이 나의 과실을 질책했다고 해도 믿지 않았었다. 황고의 지친은 이제 이숙(二叔) 한 사람만 남았다. 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도 이숙 한 사람 뿐이다. 소인들이 숙질간의 골육을 이간질하려 했다. 이제 나는 부득이 이숙에게 내 마음 속의 숙부에 대한 성의와 간절함을 나타내고자 한다. 소인은 지친간의 정을 이간질할 수 없다. 다만 이런 소식이 전해지면 민중들이 두려워하고 의심할 것이니 처리하기 어렵다. 아마도 누군가 그 기회를 틈타 암중으로 사건을 일으키려 할 것이다. 이런 여러가지 때문에 나는 서신을 내려 뜻을 밝힐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화근이 생기는 것을 막고자 한다. 이숙께서는 잘 살펴주시기 바란다.


주첨기가 주고후에게 내린 조서를 보면,

1. 주첨기는 바로 주고후의 증거가 확실한 모반행위를 대역죄로 규정하지 않았다.

2. 주첨기는 사람을 주고후에게 보내어, 갈등을 완화시키고자 하는 모습을 보이고, 무력을 쓰고 싶지 않다는 뜻을 밝힌다.


3. 주첨기의 이런 양보는 골육에 대한 정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도 있고, 숙부를 두려워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또한 자신감이 부족하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나아가 조정의 실력을 확신하지 못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백성들을 아끼는 마음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도 있고, 완병지계라고 볼 수도 있다. 그 중 어떤 것인지에 대한 해석은 아주 복잡한 문제이다.


어쨌든 후태는 주첨기의 조서를 들고 낙안주로 간다.


주고후는 반란을 일으키겠다는 뜻을 이미 굳혔다. 그리하여 그는 조정의 사자인 후태를 맞이할 때, 병사들을 줄지어 서게 하여, 기세를 드러낸다.


그외에 당금 황제의 조서를 들고 온 후태를 맞이할 때, 주고후의 태도는 오만했다. 예의에 따라 조서에 대하여 절을 하지 않았고, 남쪽을 향해 앉아서 후태로 하여금 자신에게 무릎을 꿇고 만나도록 했다.


황제의 사자인 후태의 앞에서, 주고후는 거리낌없이 큰소리친다.


"영락기간에 선황은 참언을 덛고 나의 호위를 삭감하고, 나를 무슨 도적을 방비하듯이 방비했고, 나를 낙안으로 쫓아보냈다; 인종황제때는 그저 금,은,비단으로 나를 다독일 줄 밖에 몰랐다; 당금 천자는 걸핏하면 조종의 법도를 가지고 나를 압박하려 한다; 이 모든 것은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고, 울적함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내가 어찌 이곳에 평생동안 오래 머물고 있겠는가. 눈앞을 보라. 나의 병마는 강성하고, 양초도 충분하다. 내가 천하를 횡행할 수 없단 말인가? 돌아가서 천자에게 보고해라. 즉시 간신을 묶어서 나에게 보내라고 해라. 그 후에, 우리가 다시 앉아서 천천히 내가 뭘 원하는지 얘기해보도록 하자."


주고후의 진세에 후태는 어느 정도 놀랐다. 주고후의 기세 앞에서 이 황제의 사자도 그저 예,예 하며 따르는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후태가 궁으로 돌아간 후 주첨기가 묻는다:

"한왕에게 갔는데 황숙은 너에게 뭐라고 말하던가?"

후태는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고 그저 이렇게 답한다:

"한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첨기가 다시 묻는다.

"황숙의 병사들은 어떤 상황이더냐?"

후태는 단지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한왕의 병사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생각해보면, 후태는 궁안에 있던 사람이고, 그는 조정과 관료사회의 권력투쟁만을 보았을 뿐이다. 아마도 그는 주체가 주윤문의 강산을 빼앗은 내력을 알고 있을 것이다. 권력이 가장 집중된 곳에 있으면서 후태는 아마도 실력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이치를 알고 있었던 것같다. 숙질간의 싸움에서 승패는 알 수가 없다. 주첨기의 권력은 확실히 주고후보다 컸다. 다만, 병력을 이끌고 전투를 하는 능력이나 오랫동안 조정에서 지녔던 위세, 계속하여 쌓아온 인맥등은 주고후가 당금 천자에 밀리지 않는다. 그래서 후태는 주첨기에게 대답할 때, 조서를 내릴 때 듣고 보았던 모든 상황을 그대로 말하지 않은 것이다.


당연히, 주첨기도 스스로의 판단이 있다.

후태가 명을 받은 후 그의 대답을 근거로 주첨기는 추측한다:

후태는 이미 두 마음을 먹었다.


후태의 두 마음은 그의 당금왕조 역사경험의 총합이라고 할 수도 있고,

후태의 두 마음은 그의 쌍방실력에 대한 판단이라고 할 수도 있으며,

후태의 두 마음은 그가 명철보신하려는 기지라고도 할 수 있다.


생각해보라 후태가 뭐라고 대답하든 조정은 아마도 그가 하는 말을 그대로 믿지는 않을 것이다. 역모를 일으키고 반란을 일으키는 국면하에서 약간만 머리가 돌아가는 권력자라면 절대로 쉽게 마음을 놓지 못할 것이다.


조정은 조정의 우세가 있다. 사자를 파견하여 화해를 말하고, 다독이는 것을 시도하는 외에, 조정은 당연히 여러가지 조치를 취하고 있다. 모든 정보를 장악하고, 각종상황에 따른 조치와 수단을 준비해 둔다. 만일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 조정은 거의 목숨이 위중한 상태라고 봐야 할 것이다.


후태가 돌아와서 보고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후태와 동행했던 금의위의 관리가 몰래 황제를 접견한다. 그리고 이번에 가서 보고 들은 모든 것은 주첨기에게 상세히 보고한다.


금의위 관리의 보고를 듣고나서, 주첨기는 후태에 대하여 크게 분노한다.


선덕원년 음력초엿새(정묘), 즉 1426년 9월 7일, 주고후는 백호(百戶) 진강(陳剛)을 보내어 주첨기에게 상소문을 올린다. 그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 인종황제가 재위할 때 홍무, 영락시기의 옛 제도를 위반하여, 문신에게 고칙봉증(誥勅封贈)등을 내렸다. 이것은 장법에 맞지 않는다.

2. 당금황상은 남순석전등을 수리하는데 있어서, 조정에 큰 죄가 있다.

3. 조정의 2,3명 대신 예를 들어 하원길(夏元吉, 夏原吉이라고 적기도 한다)등의 간신들을 질책하며, 조정에 이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잡아가서 죽이겠다는 것이다.


직접 조정에 상소를 올리는 외에 주고후는 여론공세도 시작한다.


그는 조정의 공후대신들에게도 문서를 보내어, 격렬한 언사로 조정을 공격하고, 황제를 욕한다.


이 모든 것이 분명해진 상황하에서 주첨기는 어쩔 수 없이 탄식하며 말한다:


"한왕은 과연 반란을 일으켰구나!"


처음에 주첨기는 조정대신의 회의를 소집하여, 양무후(陽武侯) 설록(薛祿)으로 하여금 병력을 이끌고 가서 주고후의 반란을 진압하게 하려 했다. 대학사 양영(楊榮)등은 극력 황제 주첨기가 친정하기를 권한다.


생각을 해본 후에 주첨기는 친히 가기로 결정한다:


이어서 주첨기는 장보를 불러서 말한다:

"나는 어가친정할 것이다."

장보는 이렇게 대답한다.

"한왕은 지금까지 겁이 많았습니다. 현재 알고 있는 상황을 보면, 한왕의 곁에서 일을 꾸미는 자들은 모두 모략이 있거나 전투를 잘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성상께서 신에게 병사 이만명을 주시면, 신이 병력을 이끌고 나서서, 한왕을 잡아와서 황상께 바치겠습니다."


주첨기는 말한다:

"경의 능력으로 확실히 적을 붙잡을 수 있다. 다만 자세히 생각해보니 짐이 막 등극했고, 인심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하에서, 소인들이 두 마음을 먹을 수도 있지 않느냐. 그래서 짐이 친정하지 않으면 대국을 주재하고 인심을 안정시키는데 부족하다. 그래서 짐의 뜻은 이미 결정되었다 반드시 친정하여 적을 붙잡겠다."


주첨기가 장보에게 한 말 중에 소위 '소인들이 두 마음을 먹을 수도 있지 않느냐'는 것은 아마도 그가 일부러 장보에게 들으라고 한 말일 것이다. 왜냐하면 주고후가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장보에게 경사에서 내응해달라고 요청하여, 함께 거벙하자고 한 바 있기 때문이다. 비록 장보가 주고후를 고발했지만, 황제의 마음 속에는 장보에 대하여 완전히 믿는 것은 아닐 수 있다.


이어서 주첨기는 명을 내린다:

1. 지휘 황겸(黃謙)을 파견하여 총병(總兵) 평강백(平江伯) 진선(陳瑄)과 함께 회안(淮安)을 방어하게 한다. 반란군이 남쪽으로 확장할 수 없도록 막기 위함이다.

2. 지휘 예훈(芮勛)으로 하여금 거용관(居庸關)에 주둔하며 방어하게 한다.

3. 법사(法司)에 모든 군,기 관할하의 형을 살고 있는 인원을 풀어주어, 이들이 군을 따라 출정하도록 한다.


그해 음력 팔월 초칠일(무진), 즉 1426년 9월 8일, 주첨기는 다시 아래와 같은 조치를 취한다.

1. 정국공(定國公) 서경창(徐景昌), 팽성백(彭城伯) 장창(張昶)으로 하여금 황성을 수비하게 한다.

2. 안향백(安鄕伯) 장안(張安), 광녕백(廣寧伯) 유서(劉瑞), 기성백(圻城伯) 조영(趙榮), 건평백(建平伯) 고원(高遠)으로 하여금 경사를 수비하게 한다.


그해 음력 팔월 초팔일(기사), 즉 1426년 9월 9일, 주첨기는 다시 배치를 한다

1. 풍성백(豊城伯) 이현(李賢), 시랑(侍郞) 곽진(郭璡), 곽돈(郭敦), 이창(李昶)으로 하여금 군수물자를 관리감독하도록 명한다.

2. 정왕(鄭王) 주첨준(朱瞻埈, 주고치의 차남), 양왕(襄王) 주첨선(朱瞻墡, 주고치의 오남)으로 하여금 북경을 유수하게 한다.

3. 광평후(廣平侯) 원용(袁容), 무안후(武安侯) 정형(鄭亨), 도독(都督) 장승(張昇), 산운(山雲), 상서(尙書) 황준(黃準), 황복(黃福), 이우직(李友直)으로 하여금 북경을 방어하는데 협조하도록 명한다.

4. 소사(少師) 건의(蹇義), 소부(少傅) 양사기(楊士奇), 소보(少保) 하원길, 태자소부 양영, 태자소보 오중(吳中), 상서 호영(胡濙), 장본(張本), 통정사(通政使) 고좌(顧佐)로 하여금 자신을 따르도록 명한다.

5. 양무후 설록을 선봉장으로 삼는다.


그 해 음력 팔월 초십일(신미), 즉 1426년 9월 11일, 주첨기의 친정대오는 경사에서 정식 출발한다.


그 해 음력 팔월 십이일(계유), 즉 1426년 9월 13일, 어가친정부대가 양촌(陽村)을 지날 때, 주첨기는 말 위에서 머리를 뒤로 돌려 따라오는 대신들에게 말한다:

"너희는 추측해 보라. 한왕 측에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을지?"


누군가 이렇게 대답한다:

"낙안성은 작아서, 그들은 분명히 먼저 제남(濟南)을 공격하여 취하려 근거지로 삼으려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대답한다.

"이전의 정황이나 관찰에 따르면, 한왕은 일찌기 남경을 떠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거병했으니 그는 분명히 병력을 이끌고 남으로 갈 것입니다."


주첨기는 듣기를 마치고 이렇게 말한다: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제남은 비록 낙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지만, 제남은 쉽게 공격하여 취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게다가 만일 그가 조정대신들이 밤을 새워 출발하여 곧 도착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면 그들은 제남을 공격하여 취할 시간이 없다고 여길 것이다."

주첨기는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그들의 호군은 집이 낙안에 있다. 이들은 분명 가족을 버리고 낙안을 떠나 남경으로 가려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한왕의 사람됨이 겉으로는 가식적이고 과장하기 좋아하며 교활하지만, 안으로는 겁이 많고 유약하다. 게다가 그는 일을 처리하면서 망설이고 의심이 많아서 쉽게 결정하지 못하며, 이리저리 생각하며 결단을 못내린다. 지금 한왕이 감히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은 내가 나이어리고, 새로 황제 에 올라 사람들의 마음이 아직 나를 향하고 있지 않다고 보아 경시하기 대문이다. 그가 생각하기로, 나는 분명히 어가친정을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 만일 내가 장수를 보내어 공격하면, 한왕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감언이설과 두터운 이익을 미끼로 삼아서 가볍게 그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주첨기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인다:

"이런 여러가지를 보면, 한왕의 행동은 요행심리를 품고 있는 것이다. 현재 그들은 내가 친히 나서서 반역자를 토벌하겠다고 하는 것을 들었다. 아마도 일찌감치 간담이 서늘해져 있을 것이다. 감히 나와서 맞싸우겠는가? 우리의 대군이 도착하기만 하면 그들은 바로 붙잡을 수 있다."


주첨기의 이런 말을 들으면 그는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다. 어쨌든 주첨기의 말은 모두 조정군대의 사기를 북돋우는 것이다.


그해 음력팔월십칠일(무인), 즉 1426년 9월 18일, 주첨기의 친정군이 낙안에서 투항해온 사람을 얻게 된다. 그리하여 주첨기는 주고후쪽의 상황을 더욱 상세히 알 수 있었다. 이 투항해온 인사가 전해준 정보는 개략 다음과 같았다:

1. 처음에 주고후는 근영과 약속했다. 제남을 공격하여 취하기로. 다만, 주고후의 모반사실이 산동포정사, 안찰사의 관리들에게 바락되었고, 양사에서는 근영을 엄히 감시하여, 근영이 병력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2. 이어서, 주고후측은 조정의 대군이 곧 도착한다는 말을 듣고는 더더구나 감히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그동안 주항은 일찌기 주고후에게 건의한 바 있다: 정에병을 이끌고 급히 남경으로 가야 한다고, 만일 남경을 차지하면 대사를 이룰 수 있다고. 다만, 주항은 응천(남경) 사람이어서, 그가 남경을 취하자는 책략을 낸 후에 주고후 곁의 사람들은 모두 원치 않았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남경을 취한다는 것은 주항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처럼 집이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어떡하란 말인가?

3. 그외에, 막 시작했을 때, 주고후는 조정에서 양무후 설록등으로 하여금 군대를 지휘하게 하여 작전을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주고후는 소매를 떨치고, 팔을 드러내며 아주 흥분하여 말했었다: 이들은 모두 쉽게 상대할 수있다(보기에, 병력을 지휘하는 장수를 선발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확실한 소식이 전해지면서, 어가친정한다는 말을 듣고, 주고후측은 겁을 먹기 시작했다.


그는 반란평정에 공이 있으므로 주고후측의 정보를 전해준 주첨기측의 인사는 조정에서 관직을 수여받고, 후한 상을 받는다. 그외에 조정은 그에게 임무를 부여한다. 그로 하여금 조정의 방령(榜令)을 가지고 낙안으로 돌아가서 백성들에게 이를 알리는 것이다.


이때 주첨기는 다시 주고후에게 조서를 보낸다. 조서에는 이렇게 썼다:

1. 장오(張敖)가 나라를 잃은 것은 모두 관고(貫高)의 종용때문이다.

 - 장오(기원전241-기원전182), 외황(지금의 하남성 민권현) 사람. 조왕(趙王) 장이(張耳)의 아들. 유방의 외동딸 노원공주(魯元公主)를 취하고, 그의 딸 장언(張嫣)은 한혜제(유영)의 황후이다. 한고조7년(기원전200년), 유방이 외황을 지날 때, 장오는 사위의 예로서 아주 공손했으나, 오히려 유방에게 욕을 얻어먹는다. 조상(趙相) 관고등이 이를 이유로 유방 암살계획을 세우나 실패한다. 다음 해에 사건이 벌어지고 장오는 연루되어 감옥에 갇힌다. 그후 관고가 극력 변명해주어서, 장오는 사면된다. 노원공주를 취한 덕분에 선평후로 작위가 강등된다. 여후6년(기원전182년, 장오는 사망한다.


2. 회남왕이 주살된 것은 오피(伍被)의 고혹을 받았기 때문이다.

- 유안(劉安, 기원전179년-기원전122년), 패군 풍현(지금의 서주 풍현) 사람이다. 회남(지금의 안휘성)에서 태어났고, 한황실의 종실이다. 서한의 사상가이며 도가인물이고 문학가이다. 한고조 유방의 손자이다. 회남왕 유장의 아들로 독서를 좋아하고 글을 잘 썼다. 일찌기 그가 초치한 빈객 방사만 수십명이었다. 집단으로 <회남홍열>(즉 <회남자>)를 썼다. 빈객 중에서 오피는 재능이 출중해서 으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유안이 나중에 모반을 꾀하는데, 오피가 기획한다. 오피는 오자서가 오왕에게 간언한 것을 얘기한다. 오왕이 그의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자살할 수 밖에 없었던 이야기로 유안에게 간한다. 유안은 이에 분노하여 오피의 부모를 삼개월간 잡아둔다. 나중에 유안의 모반사실이 누설되고, 오피는 회남왕과 모반을 꾀한 사실을 자백한다. 천자는 오피가 한왕조를 좋게 얘기하자 주살하지 않으려 한다. 그때 어사대부 장탕이 진언하기를 '오피는 유안에게 모반을 설계해주었으니 주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주살된다. 이 사건으로 주살된 자가 수천명에 이르고 유안도 자살한다.


3. 현금 육사(六師, <서경. 강왕지고>에는 '장황육사(張皇六師), 무괴아고조과명(無壞我高祖寡命)"이라는 말이 있다. 육사는 천자의 육군을 의미하며, 주나라제도상 1개 사는 12,500명이다)가 밀려오고 있다. 한왕에게 명령하니 즉시 모역을 창의한 난적을 붙잡아 짐의 면전에 바치라. 그려면 나는 너의 과실을 묻지 않겠고, 너를 예전과 같은 은혜와 예의로 대해주겠다. 만일 말을 듣지 않으면, 조정의 대군을 움직여 일전에 한왕의 인마를 모조리 체포할 것이다; 게다가 누군가 아마 한왕을 기화(奇貨)로 여겨 붙잡아서 짐에게 바칠 수도 있다. 과연 그렇게 되면 한왕이 아무리 후회하더라도 이미 늦었을 것이다.


주첨기의 어가친정(御駕親征)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이렇게 형용한다.

위로는 군대의 지휘자인 황상이 영창신무(英暢神武), 사지명장(詞旨明壯)하고,

아래로는 조정의 군대의 기세가 강성하고, 군용이 장관이며, 용기(龍旗)가 휘날리고, 북소리가 하늘을 진동하는데 천리를 가도록 이어졌다.


그 해 음력 팔월십구일(경신), 즉 1426년 9월 20일, 조정측의 인원이 상소를 올려, 대군의 선봉이 낙안경내에 도착했다고 알린다. 한왕과는 이미 약속을 하여 다음 날 출전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주첨기는 대군에 명령을 내려 잠시 휴정하도록 하며, 아침 식사도 거르고 밤을 낮삼아 속도를 배가하여 행군하여, 전투에 참여하도록 명한다.


이때 문관은 건의하기를: 황상께서는 신중하게 처리하시옵소서.

무관은 이렇게 분석했다: 숲이 있으니 상대쪽에서 매복을 숨겼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급히 행군하시는 것은 안됩니다. '백리추리(百里趨利)'의 위험이 있습니다.


여기서 백리추리라는 것은 <사기> 권65 <손자오기열전제5>에 나온다: "병법에 이르기를 하루에 백리를 급히 행군하여 적과 싸워서 이기고자 하면 장군이 죽고, 오십리를 급히 행군하여 적과 싸워서 이기고자 하면 사병 절반만이 도착한다."


주첨기는 유시를 내린다:

병귀신속(兵貴神速). 병법은 빠르게 하는게 좋다. 아군의 일단 신속히 적의 성 아래 도착하여 군영을 설치하면 상대방은 함정에 빠진 맹호와 마찬가지로, 설사 발톱이 날카롭다고 하더라도 이를 펼칠 공간이 없을 것이다. 상대방은 모두 오합지졸이고, 듣기로 조정대군이 오니, 그들은 안에서 논의가 분분하며, 어찌할 바를 모른다고 들었다. 무슨 매복을 설치할 여유가 있었겠는가.


그리하여, 조정대군은 주첨기의 명령에 따라, 계속 전진한다.

한밤중에 주첨기는 양신(陽信, 지금의 산동성 빈주)에 도착한다.

이때 조정이 이전에 임명한 경운(慶雲, 지금의 산동성 덕주), 양신등지의 지방관리들은 모조리 일찌감치 한왕의 번국 소재지인 낙안성에 들어가 있었다. 비록 황제의 어가가 도착했지만, 지방관리는 한 명도 나와서 맞이하지 않았다.


그 해 음력 팔월 이십일(신사), 즉 1426년 9월 21일, 날이 밝았을 때, 주첨기는 이미 낙안성의 북쪽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때는 아직 낙안성은 어둠이 싸여 있었다.

낙안성의 네개 문을 제외하고는 이미 모조리 조정대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낙안성 안의 한왕 군대는 낙안성의 지리형세를 빌어 포를 성밖의 조정군대를 향해 쏜다. 조정대군은 성밖에서 성안으로 신기총전을 쏜다. 전투가 시작되자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난다. 성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렇게 큰 소리가 나는 것을 듣자 간담이 서늘해져서 겁을 먹었다고 한다.


황제의 친정에 조정의 장수들은 용맹하게 앞장선다. 즉시 공성을 진행하가조 청한다.

주첨기는 응락하지 않는다.


주첨기는 먼저 칙서를 내려 사람을 시켜 한왕에게 보낸다. 그러나 주고후는 본체만체한다.

이어서 주첨기는 두번째 칙서를 내려 사람을 시켜 한왕에게 보낸다. 주고후는 여전히 아무런 답도 하지 않는다.


황제의 어가친정군대가 이미 성밖에 도착하고, 조정군대의 위세가 이토록 강성하며, 인마가 이렇게 많은 것을 보자, 낙안 성안의 어떤 사람은 주고후를 붙잡아, 황제폐하에게 바치려고까지 생각한다.


주고후는 형세에 대한 판단을 한 후에 비밀리에 심복을 보내어 주첨기를 배알하게 한다. 그리고 황제에게 하룻 밤의 시간을 주면, 처자식과 결별한 후, 다음 날 아침에, 조정에 투항하여 처벌을 받겠다고 말한다.


주첨기는 주고후의 요청을 받아들인다.


그날 저녁, 주고후는 모든 병기를 불태워 없애고, 모든 반역과 관련된 문서와 대외연락했던 서신을 없애버린다.


그해 음력팔월이십일일(임오), 즉 1426년 9월 22일, 주첨기는 낙안성의 남쪽으로 옮긴다.


주고후가 성을 나와 투항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을 때 왕빈등은 극력 말리며 말한다:

"차라리 한번 싸우고 죽지, 스스로 손을 묶고 잡히지는 말아야 합니다."


주고후는 그들의 말을 듣는 척하며, 왕궁으로 되돌아간다.


돌아간 후, 주고후는 몰래 비밀통로로 들어가서 성밖으로 빠져나와 황제를 만난다. 그리고 용서를 구한다.


대신둘은 주첨기에게 주고후를 법에 따라 처벌하라고 건의한다.


주첨기는 응락하지 않는다.


주첨기는 대신들이 주고후를 탄핵한 상소문을 주고후에게 주며 읽어보라고 한다.


주고후는 머리를 숙이며 말한다: 

"신의 죄는 만번 죽어도 마땅합니다. 폐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그리하여 주첨기는 유지를 내린다:

1. 한왕에게 아들을 모두 불러모으게 하고 함께 북경으로 가도록 명령한다.

2. 낙안성안의 무고한 백성들을 사면한다.  

3. 이번 변란에서 한왕과 공모한 인원만을 처치한다.

4. 이번 모반에서 협박을 받아 따른 자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는다


그리하여, 왕빈등은 체포되어 금의위 감옥에 갇힌다.


그해 음력팔월이십이일(계미), 즉. 1426년 9월 23일, 주첨기는 상서 장본에게 낙안을 위무하도록 명하고 낙안을 무정(武定)으로 개명한다.


장본(1366-1431), 자는 치중(致中), 동아(東阿, 지금의 산동성 요성) 사람이다. 관료로서 청렴하고, 주체와 잘 알았고, 주첨기와도 사이가 좋았다. 주체가 북정할 때, 장본은 여러번 양초운송을 책임진다. 주고치가 즉위한 후, 장본은 남경 병부상서 겸 장도찰원사무가 된다. 그를 접견할 때 시정의 득실을 논하는데, 그는 무기장비의 준비를 엄격히 할 것을 청하고, 주고치는 그의 건의를 받아들이고, 그를 병부에서 일하도록 한다. 주고후를 진압할 때, 장본이 따라갔으며 군수물자를 책임졌다. 선덕6년(1431년), 장본이 병사한다. 황상은 그에게 삼만민의 장례비를 하사한다.


그해 음력 팔월이십사일(을유), 즉 1426년 9월 25일,

주첨기는 회군하여 북경으로 돌아온다.


주첨기는 중관에게 명하여 밧줄로 주고후 부자의 목을 묶어서 경사까지 압송하도록 한다.

조정으로 돌아온 후, 주첨기는 주고후 부자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들고 서안문내에 집을 지어 가둔다.


주첨기는 금의위에게 형구를 써서 왕빈(王斌), 주항(朱恒), 성견(盛堅), 전장(典仗) 후해(侯海), 장사(長史) 전손(錢巽), 교수(敎授) 전상(錢常), 정수(井授)등을 묶어서 경사로 압송한다. 그리고 가장 엄한 형벌을 내려, 이들을 모두 주살한다.


오직 장사 이묵(李默)만이 주고후에게 모역을 하지 말라고 권하여 사형을 면제받고, 구북(口北, 장성이북을 가리킨다. 주로 장가구 이북의 하북성 북부와 내몽고자치주의 중부를 가리킨다. 口外라고도 한다)으로 유배보내어 일반백성으로 삼는다.


근영을 주살한다.


근영의 아들 근의(靳義), 천진진수도독 손승(孫勝), 산서도지휘 장걸(張傑), 양운(楊雲), 청주좌위지휘사 성(誠), 창주위지휘 정전(鄭典)등은 모두 함께 거사하여 주고후에 호응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그들은 먼저 주고후에게 병사, 전마, 양식, 무기들을 많이 바쳤다.


이런 일들이 발각된 후, 조정은 연이어 640여명을 주살한다. 그중에는 고의로 방종하거나 은닉하여 변방으로 유배간 자도 1500여명에 이르고, 변민으로 재편된 자도 720명에 이른다.


처음에 주고후가 갇혀 있던 곳은 소위 소요성(逍遙城)이라는 곳이다.


하루는 주첨기가 주고후를 보러 가는데, 좌우의 인원들이 가지 말라고 말렸다.


주첨기는 듣지 않고, 굳이 보러 간다.


소요성에 도착하여, 주첨기는 주고후를 자세히 살펴본다.그리고 오랫동안 살펴본다.


주고후는 주첨기가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서, 발을 뻗어 주첨기를 건다. 그리하여 주첨기는 땅에 쓰러지고, 좌우에 따르던 인원들이 급히 부축하여 일으킨다.


그리하여, 주첨기는 분노한다. 즉시 장사(壯士)로 하여금 구리항아리(銅缸)를 가져 오게 하여, 주고후를 뒤집은 구리 항아리 가운데 넣는다. 이 구리항아리는 무게가 300근이다. 주고후는 힘이 세서, 구리항아리 아래에서 구리항아리를 움직였다.


주첨기는 명령을 내려 목탄을 구리항아리 주위를 둘러싼다. 목탄을 산처럼 쌓은 후, 목탄에 불을 붙인다. 한참을 타서 주고후는 구리항아리 안에서 타서 죽는다.


주고후가 죽은 후, 그의 아들들도 모조리 처형당한다.


주고후의 죽음까지 다 말했으므로, 다시 되돌아가서 이 역사를 살펴보기로 하자. 결론이 아닌 요약을 해보기로 한다.


1. 정규의 역사는 모두 성공자가 쓴다. 그리하여 우리가 눈에 보는 것은 기본적으로 모두 '성자왕후패자구(成者王侯敗者寇)'의 틀이다. 이에 대하여 철두철미한 역사회의론자가 될 필요는 없다. 모든 역사는 날조되고 변조된 것이라고 여길 필요는 없다. 그렇게 되면 아마도 역사허무주의자가 되어버릴 것이다.


2. 보황파(保皇派)의 문자기술은 모두 황제에 편향된 것이다.


3. 전통 사대부의 사장은 한계가 있어서, 반드시 보황하지는 않는다. 다만, 일반적으로 예제를 지킨다. 예제를 지킨 결과, 왕왕 제도를 준수한 사람을 미화하고, 제도를 파괴한 사람을 추화한다.


4. 이 시기의 역사기술을 보면, 주고후는 그다지 나쁜 사람이 아니고, 주첨기도 그다지 영무하지는 않다.


5. 주체는 주고후가 자신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를 총애해서만이 아니고, 주고후가 정난지역때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6. 주체는 조카 건문제 주윤문으로부터 강산을 빼앗을 수 있었다. 그가 시작했고 모범을 보였으므로. 주고후는 당연히 조카인 명선종 주첨기로부터 황위를 빼앗을 수 있었다. 하물며 그는 부친과 그렇게도 닮았다.


7. 만일 주고후의 반란이 성공했더라면, 홍희제, 선덕제의 연호는 아마도 건문제의 연호처럼 폐기되었을 것이다. 이 두 해는 아마도 영락연호를 계속 쓰는 것으로 고쳐썼을 것이다. 주고치, 주첨기의 황제칭호도 아마 삭탈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역사에서는 아마 '제2차 정난지역'이라고 적었을 것이다. 이것은 비록 무료한 가설이기는 하지만, 모두 주체의 일처리를 근거로 하는 것이다. 역사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제도를 고치거나 파괴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제도도 파괴되거나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사후에 반드시 자신의 제도가 바뀌거나 파괴되는 것을 직면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


8. 주고치가 봉록을 늘여주고 하사품을 많이 주었는데도, 주고후는 아들 주첨기(朱瞻圻)로 하여금 주고치의 등극을 전후하여 경사에서 얻어낸 정보 및 조정의 일을 모조리 조정에 보고한다. 이 기술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9. 이 사건에서 주첨기는 640여명을 죽였고, 변방으로 유배보낸 자가 1500여명이며, 변민으로 재편된 자가 720명이다. 이렇게 보면, 주고후의 실력은 확실히 적지 않았다. 낙안성의 전투에 관한 기술을 보면, 성안에서 성밖으로 포를 쏘고, 성밖에서 성안으로 신기총전을 쏘았다고 한다. 이를 보면 전투는 확실히 있었다. 그저 속수무책으로 붙잡힌 것은 아닌 것이다.


10. 주첨기는 주고후가 그의 발을 걸어 넘어뜨렸기 때문에 살심이 생긴 것일까?


11. 구리항아리를 뒤집어 놓고, 목탄을 쌓아서 그를 태워죽였는데, 이것이 모두 그의 발을 걸어 넘어뜨렸기 때문이라고 하면 너무 잔인한 조치이다. 주첨기가 너무 속이 좁은 것으로 보인다.


12. 주고후를 불태워죽인 후, 다시 그의 아들들을 죽이는데, 이것은 발을 걸어 넘어뜨린 것때문이 아니라, 일부로 핑계를 찾은 것이고, 변조한 ㄴ기술인 것처럼 보인다.


13. 권모술수를 쓸 수 밖에 없고, 권모술수 속에서 놀아나는 황제는 개별적으로 정말 바보이거나 권력이 없었던 경우를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모두 얼굴이 두껍고 마음이 검다. 포장을 잘하면 잘할 수록 화장을 잘하면 잘할 수록 더욱 염치가 없고, 한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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