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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황삼병(黃森屛): 주원장의 부하장수였다가 동남아로 도망쳐 발니국왕(渤泥國王)이 되다.

by 중은우시 2018. 12. 11.

작자; 미상



우리는 주원장의 수하에 천하를 많은 장수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모두 잘 알고 있는 사람으로는 서달(徐達), 상우춘(常遇春), 풍국승(馮國勝)등이 있다. 이들은 몽골을 중원에서 몰아내고 대명왕조를 세운다. 대명은 267년간 존속한다.


주원장의 부하들 중에 맹장이 많았다. 위에서 언급한 명장들 외에도 기실 아주 많은 인물들이 있고, 역사의 안개 속에 가려져 있다. 오늘 소개할 사람은 대명왕조를 건립하기 전에 주원장을 따라 다니며 전투를 하고, 대명왕조가 건립된 후에는 동남아에 사신으로 갔다가, 거기서 나라를 하나 세우게 된 인물이다.


그의 이름은 황원수(黃元壽, 1342-1408)이다. 더 많이 알려진 이름은 황삼병이다. 자는 창년(昌年) 호는 희춘(熙春)이다. 황삼병은 1342년 복건성 천주에서 황양보(黃良輔)의 장남으로 태어났고, 주원장을 따르면서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명나라를 건립하는데 공을 세웠다. 주원장은 그에게 황삼병이라는 이름을 내리고 그를 중용한다. 홍무8년 그는 운남 영창 등충위(騰沖衛) 총병(總兵)에 임명되어, 운남성 등충에 주둔한다. 당시, 운남 등충은 변방의 요새였고, 전란이 수시로 발생했다. 한번은 전란에서 황삼병이 패배한다. 패전후의 엄중한 처벌을 피하기 위하여, 그는 전체가족과 수천의 수하를 이끌고 버마를 거쳐 파라주(婆羅州)로 간다. 파라주는 지금의 칼리만탄섬이다.


그들이 칼리만탄의 큰 강의 하구에 도착한 다음 점점 세력을 키워간다. 황삼병 일행은 원래 용맹하고 전투를 잘했으며, 자신이 데려온 친병부대원들과 가족들을 데리고, 금방 현지에서 세력을 키운다.현지의 번인(番人)들은 황삼병을 "랍도(拉闍)"라고 부르는데, 왕이라는 뜻이다.



키나바탕안강의 북쪽지구는 국력이 약한 발니국(渤泥國)이 있었다. 남으로는 인도네시아의 위협을 받아 자주 약탈을 당했고, 동으로는 필리핀남부의 술루술탄국으로부터 수시로 침략을 당했다. 당시 새로 즉위한 발니국의 술탄(국왕)은 황삼병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도와달라는 뜻과 양자합작의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마하모사는 딸을 황삼병에게 시집보낸다. 그리고 황삼병에게 "Maharaja Lela(幷肩王)"라는 칭호를 준다; 마하모사는 자신의 동생 Ahmad로 하여금 ,황삼병의 여동생 황원려(黃元麗)를 취하게 하고 그녀에게 Puteri Kinabatangan(중국바탕간에서 온 공주)이라는 칭호를 내린다. 두 정권은 통치자간의 혼인관계로 긴밀한 동맹을 형성한다. 황삼병과 중국인부대의 분전으로 술루의 침입을 막아내어 발니국은 멸망의 위기를 넘긴다.


이후 30년간 두 정권은 점점 융합되고 강대하게 발전하였으며 지금의 브루네이가 된다.  사건이후, 황삼병의 세력은 인도네시아 일대에서 안정되기 시작한다. 그후 황삼병은 신속히 동북으로 확장하여, 현지에 연이어 중국성(中國城), 중국진(中國鎭)등의 도시를 만든다. 이곳이 오늘날 말레이시아 동부의 대도시인 코타키나발루와 지나루트등의 도시이다.


남양에서 반평생을 분투하던 황삼병은 계속 고국을 잊지 못했다. 1408년 황삼병은 자신의 누이동생으로 하여금 발니국에 남아서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150여명의 친위대를 이끌고 중국으로 조공을 떠난다. <명사>에는 발니국왕 마나러자나(痲那惹加那)라고 적었다. 영락제는 아주 기뻐하며 특별히 명을 내려 연도의 모든 부현에서 연회를 베풀어 접대하도록 명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직접 고국의 변화된 모습을 느끼게 해주었다.


나이가 이미 많이 들었던 황삼병은 배와 가마를 타고 먼 길을 가는데 지쳐서 그해 십월 남경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고 만다. 사망하기 전에 그는 명성조 영락제에게 3가지 요구를 한다. 하나는 '경토실속직방(境土悉屬職方)', 즉 발니와 카나바탕안강유역의 토지는 모조리 중국의 판도에 들어간다는 것이고, 둘은 '걸봉국지후산위일방진(乞封國之後山爲一方鎭)", 동남아에서 가장 높은 산(키나발루산. 의미는 중국과부산이라는 뜻임)을 발니국의 진산(鎭山)으로 삼고 아름다운 이름을 하사하여 영원히 남양의 대지를 안정시키게 해달라는 것이고, 셋은 "탁체백어중화(托體魄於中華). 자신이 중국에 안장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영락제는 지금의 남경 안덕문 밖의 석자강의 동쪽 향화촌 오귀산에 그의 묘를 세워준다. 그리고 왕의 예로 매장한다. 그리고 그의 아들 하왕(遐旺)을 새로운 발니국왕에 임명하고; 발니국의 후산에 '장녕진국산(長寧鎭國山)'이라는 이름을 하사하며 친히 비문을 쓴다. 그리고 태감 장겸(張謙)등에게 내려가서 돌에 글을 새기고 비석을 세우도록 명한다.


1408년 발니국의 새로운 왕 하왕은 태감 장겸, 행인 주항(朱航)등의 호송하에 귀국한다. 장겸등은 키타발루산의 아래에 석비를 세우고, 자바에 영락제의 명을 전달한다: 발니국에 다시는 조공을 요구하지 말라. 장겸, 주항의 일행은 발니국에 1년간 머무르다가 귀국한다.


발니국으로 돌아온 하왕은 황삼병의 발니국에서의 지위와 영향력을 물려받아 계속하여 발니국의 정무를 장악한다. 현지 화인들은 그를 여전히 '총병'이라고 불렀다. 그는 1412년 다시 중국으로 가서 영락제에게 조공을 바친다. 황삼병의 처은 죽은 후에 장녕진국산에 묻힌다. 이 산은 그리하여 현지인들에게 '중국과부산'이라고 불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