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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한억(韓億): 평민출신 재상으로 8명의 아들이 모두 진사, 그중 3명은 재상에...

by 중은우시 2018. 7. 31.

글: 만풍모우(晩風暮雨)


하묵성 영수현(靈壽縣) 우성향(牛城鄕) 중경정촌(中傾井村)은 그다지 유명할 것도 없는 작은 마을이다. 다만 송나라떄 이곳에서는 유명한 인물이 나왔다. 부자 9명이 모두 진사에 급제하고, 그중 4명은 재상에 오른다. 재상은 현재로 따지면 총리인데, 이런 작은 마을에서 4명이나 총리를 배출하다니 경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중경정촌에는 청나라때 지어진 "한씨선사(韓氏先祠)"가 있다. 사재상사당(四宰相祠堂)이라고도 부른다. 후세자손이 선조를 기념하여 건립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마을에서 나온 송나라때의 명인은 누구일가? 4명의 재상은 또 누구일까?


그는 바로 송인종(宋仁宗)때 부재상인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역임한 한억(韓億)이다.


북송때, 한씨는 중원지역의 명문집안이다. 당시에는 상주한씨(相州韓氏)와 진정한씨(眞定韓氏)의 두 갈래로 나뉘었는데, 두 갈래의 한씨는 모두 명인을 배출한다.


상주한씨는 한기(韓琦)를 대표로 한다. 후세에서는 매화한씨(梅花韓氏)라고 부른다. 한기는 북송인종, 영종, 신종의 3조재상을 지낸다. 후대명인으로는 송휘종때 재상을 지낸 한충언(韓忠彦), 고립된 성을 지키다가 금나라군대와 거리전을 벌이다 죽은 유주지주 한호(韓浩), 남송의 권신 한탁주(韓侂胄)등이 있다.


오늘 얘기할 주인공 한억은 바로 진정한씨의 대표인물이다. 진정한씨는 영수한씨(靈壽韓氏)라고도 부른다. 집의 문앞에 오동나무가 심어져 있어서, 오동한씨(梧桐韓氏)라고 부르기도 한다. 송나라때에는 "당체행중위재상(棠棣行中爲宰相), 오동명상식한가(梧桐名上識韓家)"라는 싯구도 있다.


한억은 자가 종위(宗魏)이고, 조적은 진정 영수이다. 나중에 옹구(雍丘)로 이주한다. 송진종 함평5년(1002년)에 진사급제한다. 박학하고 다재다능한 한억은 재상 왕단(王旦)의 인정을 받아, 나중에 왕단의 딸을 처로 취한다. 그리하여 왕씨집안의 사위가 된다. 한억은 사람됨이 정직하고, 관료로서 청렴했다. "여러번 외직을 맡으면서, 잘 다스린다는 명성을 얻는다." 나중에 조정으로 불려와서, 어사중승이 된다. 한억은 '법을 집행하는데 권력귀족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황제 송인종의 인정을 받아 참지정사가 되고, 진국공(陳國公)의 작위를 받는다.후세의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집안을 엄히 다스렸던 한억은 설사 집에서 쉬고 있을 때도 나태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가난한 친척이나 친구를 보면 장례나 혼인을 치를 수 있도록 돈을 도와주곤 했다.


한억은 아들도 잘 가르쳤다. 후손들에게 엄격했다. 8명의 아들은 한강(韓綱), 한종(韓綜), 한강(韓絳), 한역(韓繹), 한유(韓維), 한진(韓縝), 한위(韓緯), 한면(韓緬)으로 모두 진사에 급제하고 관직이 높았다. 그중 3명의 아들은 전후로 재상이나 부재상을 맡는다. 게다가 한억도 부재상을 맡아서 부자양대의 9명 중에서 4명의 재상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씨는 당시에 "형제동포에 8명의 대학사, 조손에 모두 한 조정에 4국공이 있었다"는 말을 듣는다.


재상을 맡은 두 아들은 셋째아들 한강과 여섯째 아들 한진이다. 부재상을 맡은 아들은 다섯째 아들 한유이다.


한강(韓絳). 자는 자화(子華), 진주통판, 개봉지부, 추밀부사등의 직위를 역임했고, 송신종 희녕3년(1070년)에 참지정사가 된다. 나중에 스스로 나서서 변방으로 가서 독전했으나,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관직을 잃는다. 한강은 왕안석과 아주 가까웠고, 여러번 송신종에게 추천하여, 왕안석이 마침내 중용되어 재상에 오른다. 그는 이때부터 변법을 강행한다.


왕안석이 처음에 재상에서 파직된 후, 한강이 대신 재상에 오른다. 그는 계속하여 변법을 추진했다. 송철종때 그는 강국공(康國公)에 봉해진다. 한강이 사망했을 때, 송철종은 특별히 이틀간 조회를 중단하고, 그에게 태부(太傅)로 추증하고 시호를 헌숙(獻肅)이라 한다.


한진은 자가 옥여(玉汝)이고 경력2년에 진사급제한다. 회남전운사, 지추밀원사를 역임하고, 송철종이 즉위한 후, 상서우복야 겸 중서시랑이 된다. 집정기간동안 '가혹'한 것으로 유명했다. 당시 사람들은 놀려서 이렇게 말했다: "차라리 호랑이는 만날지언정 옥여는 만나지 말라" 소성4년에 사망하고 숭국공(崇國公)에 봉해진다. 시호는 장민(莊敏)이다.


한유는 자가 지국(持國)이고, 송영종때 동수기거주로 옮겨가고, 지제고가 된다. 송신종이 즉위한 후, 용도각직학사가 된다. 왕안석, 사마광, 여공저와 교분이 있었고, 세상사람들은 이들 4명을 "가우사우(嘉祐四友)"라 불렀다. 한유는 여러번 황제에게 왕안석을 추천하고, 왕안석이 변법을 추진한 후, 한유는 신법의 폐단을 보고 직언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왕안석과 사이가 나빠지고, 지방으로 쫓겨난다. 송철종때, 문하시랑으로 불려들어오고 나중에 태자소부가 된다. 소성2년(1095년) 원우당(元祐黨) 사람으로 낙인찍혀 다시 유배를 가고, 원부원년에 사망한다.


한억의 나머지 다섯 아들도 비록 재상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모두가 일세의 영걸이었다.


장남 한강. 상서수부원외랑,지광화군등의 관직을 맡는다. 나중에 부하사병이 반란을 일으켜 한강은 처자를 이끌고 성을 버리고 도망친다. 그리하여 조정에서 관직을 파면한다.


이남 한종, 천성8년(1030) 진사가 되고, 개봉부추관을 지내고 활,허,원지주로 나가고, 형부원외랑, 지제고등의 직위를 받는다.


사남 한강, 비서승, 통판군부 겸 관내권농사, 제거부학의 관직을 맡았었다.


칠남 한위, 비부낭중. 비부(比部)관청이름이다. 위진시기에 처음 설립되었고, 상서의 반열에 드는 조의 하나이다. 장부와 전적을 감사하는 것을 책임진다. 후세에 이어져서 북송초기에 삼사구원, 마감사, 이흠사에 속하며 직위가 없는 관리가 맡았다. 원풍 제도개혁후에는 원래의 직권을 회복하여, 다시 내외장부와 전적을 감사하는 일을 책임진다.


팔남 한면, 광록시승을 맡았다.


한억의 손자대에도 인재가 많이 배출된다. 조정에서 관직을 얻은 자만 이십여명에 이른다. 더 아래로 내려가서는 비록 관료로 나서는 경우는 있지만 모두 하급관리였고 영향력이나 지명도는 조상들에 비할 바 못되었다.


한억의 가족들은 대량의 시문작품도 남겨서 송나라 문학사상에 한 자리를 차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