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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대초황제(大楚皇帝) 장방창(張邦昌): 실제는 매국노가 아니라 소심한 인물일 뿐...

by 중은우시 2018. 8. 9.

글: 취역사(趣歷史)


고대통속소설 <설악전전(說岳全傳)> 이나 평서 <악비전(岳飛傳)>을 들은 사람이면 분명히 장방창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설악전전>에 근거하여 출판된 <장방창매국(張邦昌賣國)>이라는 연환화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설악전전>에는 두 명의 간신이 있다. 하나는 장방창이고 다른 하나는 진회(秦檜)이다. 장방창이 책에 나오는 것은 무장원 과거시험의 주시험관이다. 악비는 무과 과거시험에 참가하는ㄷ, 결과적으로 장방창이 애를 먹인다. 악비가 창으로 소양왕(小梁王) 시계(柴桂)를 찔러죽이자, 장방창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악비를 참수하려 한다. 다행히 우고등 결의형제들이 도와주어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후 장방창은 금나라의 내응이 되어, 계책으로 북송황제의 모든 재산을 금나라에 선물로 보낸다. 그리고 강왕 조구를 속여서 금영(金營)으로 보내어 인질이 되게 하고, 마지막에는 송휘종,송흠종 두 황제를 금영에 인질로 속여서 보낸다. 그리하여 북송의 멸망이 가속화된다. 악비의 정충보국의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매국으로 부귀영화를 누리려한 장방창은 악명이 자자한 역적이 된다. 장방창의 고향인 지금의 하북성 동광현 대룡만향은 장방창이 대룡만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를 보면 악명이 높은 인물은 고향사람들도 부끄러워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실 소설은 소설이고, 역사는 역사이다. 소설은 그저 작자 마음 속의 역사이다. 진실한 역사와는 큰 차이가 있다. 장방창이라는 사람을 가지고 얘기하자면, 전형적으로 소설에서 오명을 뒤집어 쓴 사람이다. 그렇다면 역사상 진정한 장방창은 어떤 사람일까? 일부 역사자료를 보면 장방창은 기실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절대로 나라를 팔아먹을 담량이 없다. 그는 흐리멍텅하게 구오지존(九五之尊,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욕을 먹었다. 결국은 이로 인해 목숨까지 잃는다. 그는 당시에 가장 억울한 관리였다고도 할 수 있다.


역사상 장방창은 진사출신이다. 송휘종때 상서우승, 좌승, 중서시랑을 역임하고, 송흠종 재위때 소재(少宰)가 된다. 이들 직무는 모두 부재상(副宰相)급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부재상이 많았고, 조정은 채경(蔡京)을 우두머리로 하는 "육적(六賊)"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장방창은 확실히 미미한 존재였다. 그가 처음 후인들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강왕 조구를 따라 금나라에 인질로 갔을 때이다. 이때는 바로 금나라의 대군이 변경으로 밀려올 때이다. 금나라군대가 개봉을 포위하고 북송에 친왕을 인질로 보내라고 요구하고, 강왕 조구 즉 미래의 송고종이 스스로 나서서 금나라에 인질로 간다. 같이 따라간 사람들의 우두머리가 바로 장방창이다. 장방창과 조구는 금나라군영에서 몇 달을 머무른다. 그들은 환난지교라 할 수 있다. 다만 장방창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나중에 결국 강왕 조구의 손에 죽게 된다는 것이다.


나중에 송금이 화의하면서, 북송은 월왕 조시(趙偲)를 조구를 대체하는 인질로 보내고,최종적으로 북송왕조는 천만냥 백은 및 북방삼진의 댓가로 마침내 금나라군대의 철군을 얻어낸다. 그리고 짧은 기간의 안녕을 얻어낸다. 그러나 좋은 시절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겨우 반년 후, 금군은 다시 권토중래한다. 기세는 더욱 컸다.정강원년, 1126년 팔월, 금군의 제2차남침은 파죽지세이고, 십일월 개봉외성이 무너지고, 송휘종, 송흠종의 두 황제는 금군에 끌려간다. 당연히 그들이 포로로 잡힌 것은 소설에서 쓴 것처럼 장방창이 나쁜 짓을 해서가 아니다. 실제로 이 일은 장방창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당시 금군은 개봉성을 삼척이나 팠고, 돈이 될만한 것은 모두 긁어간다. 송흠종 조환(趙桓)은 고생이 막심했다. 그는 대신 이약수(李若水)의 건의를 받아 금나라군영으로 가서 담판을 벌인다. 그 결과 조환은 금나라병사들에게 억류되고, 나중에 그의 황위는 금나라사람들에 의하여 폐위된다. 이어서 금나라군대는 다시 송휘종 조길 및 황실의 모든 구성원을 성에서 끌어낸다. 그리고 그들을 모두 가둔다. 이렇게 나라를 세운지 160여년의 북송왕조는 철저히 멸망한다.


금나라군대는 북송의 두 황제를 포로로 잡은 후 다시 괴뢰정권을 수립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말을 잘 듣는 송나라 허수아비를 찾는다. 그렇게 국면을 다독여서 자신의 이익을 만족시키고자 한다. 이런 모습은 800년후의 일본침략자에 의하여도 다시 사용된다. 그러나 금군이 알고 있는 송나라사람은 아무래도 한계가 있다. 그래서 송나라조정 내부에서 한 명을 뽑으라고 한다. 다만 조건이 있었다. 이 괴뢰황제는 조씨여서는 안되고 반드시 다른 성씨여야 한다. 개봉 내성에 남은 대신들은 모두 머리가 아팠다. 누구든지 그 자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누구도 그런 천고의 욕을 먹을 지위에 앉으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계속하여 뽑지 못하고 있었다. 금나라사람들은 그렇게 인내심이 없었다. 금나라군대의 총사령관인 완안종한(完顔宗翰), 즉 대명자자한 금나라의 대태자 점한(粘罕)은 최후통첩을 보낸다. 사람을 빨리 뽑지 않으면 금군이 내성으로 진입해서 성을 도살하겠다고.


그의 이런 위협은 과연 효과를 나타낸다. 사람을 정말 뽑은 것이다. 상서원외랑 송제유(宋齊愈)는 자신의 손바닥에 세 글자를 써서 다른 사람에게 보여준다. 이 세 글자는 살마들에게 마치 보배같았다. 모두 동의한다. 그 세 글자는 바로 '장방창'이었다. 송제유와 장방창은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다. 그리하여 관건적인 순간에 그에게 한방을 날린 것이다. 장방창은 자신이 뽑혔다는 것을 알고는 번개맞은 것같았다. 그는 원래 담량이 작고 겁이 많은 사람이다. 황제를 칭하려는 생각은 없었다. 어찌 그런 큰 자리를 차지할 엄두를 낼 것인가. 그의 반응은 아주 격렬했다. 금나라사람의 필기에 따르면, 장방창은 곡을 하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기둥에 머리를 박으며 죽겠다고 하다가 겨우 사람들이 말린다. 그는 끝까지 맡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금나라사람들도 인내심을 잃었다. 네가 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그럼 우리를 원망하지 말라. 삼월 초칠일 네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는 개봉성을 도살하겠다. 여러 신하들이 그 상황을 보고, 그에게 개봉성의 만백성이 모두 당신의 손에 달려 있다. 만일 받아들이지 않으면 개봉성은 피바다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장방창도 그런 광경이 발생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자신때문에 만백성이 재난을 당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따르게 된다. 그리하여 1127년 삼월 초칠일 황제위에 즉위한다. 국호는 "대초"라 한다.


황제가 되는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꿈에도 그리는 일인가? 그러나 장방창에게는 악몽이었다. 그날 그는 통곡하면서 황제위에 오른다. 그는 자신의 최후가 송휘종, 송흠종의 두 황제보다 더욱 참혹할 것이라고 예감한다. 이때 금나라군대는 개봉성을 몇달동안이나 긁어가면서도 여전히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장방창은 화가 난 나머지 친히 금나라사람에게 가서 교섭을 한다. 결과는 상당한 성과가 있었다. 금나라 사람들이 개봉성에 대한 수탈을 정지하고, 조씨종묘를 훼손하지 않는다. 금나라병사들은 시종 개봉 백성을 도살하지 않는다. 이것은 오랑캐의 땅에서 와서 아직 완전히 개화되지 않은 그들에게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장방창의 알선도 큰 역할을 한다. 또 다른 방면에서 장방창도 개봉성의 재건업무를 주재한다. 백성들의 생활도 점점 정상으로 회복한다. 그리하여 금나라군대는 두 명의 송나라황제를 이끌고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금은재화를 만족스럽게 가지고 떠난다. 장방창도 정식으로 그의 괴뢰황제의 생애를 시작한다.


말은 황제이지만, 실제로는 집을 지키는 마름과 비슷했다. 장방창은 황궁에 감히 들어가지도 못한다. 그저 상서성에서 일을 보았다. 대전에 들어가서도 감히 용상에 앉지를 못한다. 그저 용상의 서쪽에 작은 의자를 놓고 앉았다. 그리고 황제의 전용단어도 쓰지 않는다. "짐(朕)"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여(予)"라고 하고, "조서(詔書)"라는 말 대신에 "수서(手書)"라는 말을 쓴다. 평상시에는 용포를 입지도 않고, 금나라사람들이 왔을 때만 입는다. 금나라사람들이 떠나면 벗어버린다. 그는 정전(正殿)에서 일을 보지도 않고, 조회도 거행하지 않고, 대신을 접견하지도 않았다. 대내(大內)의 모든 방문은 다 걸어잠궈 놓고, 봉조(封條)를 붙여서 "신장방창근봉(臣張邦昌謹封, 장방창이 삼가 봉하다)"라고 쓴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황공한 마음으로 보낸다. 금나라군대가 철수한 후, 황하를 건너, 연경 부근까지 갔을 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며, 퇴위를 선포한다. 그리고 민간에 흘러들어간 맹태후(孟太后)를 찾아내서 그녀에게 수렴청정을 하도록 청한다. 이어서 사람을 보내어 강왕 조구를 찾아, 그에게 돌아와 즉위하도록 청한다.


1127년 오월, 조구는 하남 상구(商丘)에서 즉위한다. 장방창은 거기로 가서 배알하고, 전국옥새(傳國玉璽)를 바친다. 조구도 보답을 안다. 장방창의 모든 죄명을 면제해준다. 그리고 그를 동안군왕(同安郡王)에 봉해주고, 태부(太傅)로 승진시킨다. 다만, 장방창의 좋은 날은 오래 가지 않는다. 그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놓고 조정내부에 큰 논쟁이 벌어진다. 재상 이강(李綱(은 장방창을 죽이자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이강은 충신이다. 장방창과 개인적인 은원은 없다. 그가 극력 장방창을 죽이자고 주장한 것은 그저 정통의 신하로서 장방창의 참월행위를 참고 넘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황권의 권위에 대한 멸시라고 여겼다. 이런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마지막에 조구는 그래도 살려준다. 장방창을 담주(潭州) 즉 지금의 호남지구로 보낸다. 장방창이 담주에 도착한지 며칠 되지 않아, 조구는 돌연 성지를 내린다. 장방창을 사사한다. 원래 누군가 장방창이 심궁대내에서 궁녀와 밤을 보냈다고 탄핵했다. 이 죄명은 그가 황제에 오른 것보다 컸다. 죽이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결국 장방창은 담주 천녕사에서 목을 매어 자결한다.


장방창이 정말 그런 잘못을 저질렀는지에 대하여는 악비의 죄명과 마찬가지로 "막수유"이다. 생각해보라 장방창이 황제로 있던 며칠동안 그는 맹리 전전긍긍했는데, 살얼음을 밟는 것같았다. 어찌 대내황궁에서 궁녀와 밤을 보낼 수 있었겠는가? 죄를 물으려고 마음먹으면 무슨 죄이든 꾸밀 수 있다. 장방창을 미워하며 제거하려고 생각한 사람은 많다. 그들이 궁녀를 매수하여 황상에게 그런 상소를 올리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아무런 조사가 증거수집도 없이 사사한다. 악비처럼 그럴 듯하게 재판을 벌이고 나서 판결을 선고한 것도 아니다. 장방창은 재판조차 받지 않고 사사된다. 악비보다도 더 억울하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보면 정치투쟁은 잔혹하고 무정하다. 너무 성실한 사람은 확실히 관리에 적합하지 않다. 장방창은 바로 다른 사람에게 이용당하다가, 이용가치가 없어지자 그의 머리를 잘라서 자신의 권위를 세운다. 더욱 비참한 일은 장방창이 죽은 후에도 편하게 지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악비는 억울하게 죽고나서 금방 명예홰복된다. 그러나 장방창은 사사된 후에 명예회복이 되지도 못했고, 오히려 갈수록 오명이 더 덧씌워진다. <송사>는 그를 간신전에 넣었다. 그리고 악비를 묘사하는 소설과 영화드라마작품에서는 장방창이 극악무도한 간신으로 나온다. 인욕부중(忍辱負重), 사기위인(舍己爲人)의 충신이 이렇게 경솔하게 역사에 규정되다니, 정말 비극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