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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유방)

유방의 신비한 신세내력 (3): 유방은 유태공 일가를 어떻게 대했는가?

by 중은우시 2018. 10. 23.

글: 정보(程步)


유태공의 일가는 모두 8명이다. 유태공과 정실부인 사이에는 2남1녀가 있다. 유방의 모친 유온은 동모이부(同母異父)의 두 아들이 있다. 8명의 가족이 한 지붕 아래에서 살면서 두 가지 서로 다른 가풍을 가졌고, 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그러했다. 유방이 황제가 된 후에도 여전히 물과 기름이었다.


큰형수는 유방이 자주 공짜밥을 먹으러 오는걸 미워해서, 솥을 긁어서 손님을 쫓은 후부터 아마도 내왕이 없었던 것같다. 그저 열심히 돈만 벌던 둘째형 유중은 아마도 제대로 된 일도 하지 않는 두 동생을 무시했던 것같다. 유방이 거병하고 이미 패공이 되었는데도, 둘째형 유중과 큰형의 아들 유신(劉信)은 참가히지 않는다. 이것은 이해할 수 있다. 겨우 일구어낸 사업인데, 동생을 따라 반란을 일으키게 되면, 산업을 포기하는게 되는 것이다. 반평생의 노력이 물거품이 된다. 만일 거사에 실패하면, 멸문지화를 당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공이 수포로 돌아간다. 그러나, <시경>을 배운 동생 유교는 아무런 망설임없이 즉시 유방을 따른다. 그리고 그의 장점을 발휘하여 유방이 다른 반란군과 합종연횡하도록 도운다. 유방의 육십세된 모친도 유방을 따라 반란의 행열에 가담한다.


유태공과 두 형 및 가족들은 유방을 멀리하고, 유방도 자연스럽게 그들을 한 가족으로 보지 않는다. 유방이 성공하여 황제가 된 후, 한6년, 친척친구들은 모두 봉상(封賞)을 받는다. 육년 정월, 동생 유교를 초왕(楚王)에 봉하고, 큰처형 여택(呂澤)을 주여후(周呂侯)에 봉하고, 둘째처형 여석(呂釋)을 건성후(建成侯)에 봉한다. 유방의 혼전에 낳은 아들인 유비(劉肥)도 제왕(齊王)에 봉하고, 칠십여개성을 갖게 한다. 유독 둘째형 유중과 큰형의 아들 유신만 제후에 봉하지 않는다. 물론 유태공도 무시한다.


이건 정말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다. 너무 창피한 일이다. 양성방인들도 모두 봉상을 받았다. 소하, 조참은 말할 것도 없고, 이웃의 노관도 연왕(燕王)에 봉해진다. 일찌기 유방을 배반했던 옹치(雍齒)도 십방후(什方侯)에 봉해진다. 항우의 부장 이기(利幾)는 항우가 마지막에 패퇴할 때 비로소 유방에 투항했는데, 역시 영천후(潁川侯)가 된다. 여후의 죽은 부친까지도 여선왕(呂宣王)에 봉한다. 단지 유태공과 그의 아들 유중, 그의 손자 유신만이 봉상을 받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유태공은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다.


유태공은 역시 시정의 바닥에서 구른 사람이다. 그에게도 수단이 있었다. 체면을 내려놓는 것이다. "소돼지를 잡아팔고, 술을 팔고 전을 팔며, 투계와 축국을 즐기는" 사람은 나름대로의 생존능력이 있다. 하루는 유방이 찾아왔다. 유태공은 집안의 노비처럼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빗자루를 들고, 문앞까지 뛰어나가 유방을 맞이한다. 유방은 만난 후에는, 몸을 숙이고 뒷걸음질치며 유방을 안으로 모셨다.  비굴하게 몸을 숙이고 무릎을 궆히며 절을 하는 것처엄 보이는 것은 실은 비중유항(卑中有亢), 소리장도(笑裏藏刀)이다. 네가 나보고 네 부친인 것처럼 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너는 네 모친의 신분을 감히 드러내지 못하지 않느냐. 그리고 친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말하지 못하지 않느냐. 좋다. 네 곁에 있는 문신, 무장들에게 보게 해주자. 이렇게 친아버지를 대하는 법이 있는지. 내가 너의 친아버지가 아니냐? 문무대신은 바로 너의 친아버지에 대하여 소문이 자자하고 인심이 안정되지 못했는데, 너의 가장 가까운 심복들, 처음부터 너를 따르던 무장들도 반란을 일으키는데, 정말 다 까발리면 네가 계속 황제에 앉아 있을 수 있는지 보자


유태공의 이런 수완은 바로 효과를 발휘한다. 유방은 깜짝 놀라서 급히 황제의 거드럼을 내려놓고, 몸을 숙여 유태공을 부축한다. 유태공은 기회를 잡자 놓지지 않고 바로 유방에게 유중과 유신을 제후로 봉해달라고 얘기한다. 유방은 방법이 없어서 할 수 없이 받아들인다. 유태공을 태상황으로 봉하고, 유백의 아들 유신을 후(侯)로 봉하고, 둘째형 유중을 대왕(代王)에 봉한다. 유방은 바로 조서를 내린다. 조서에는 생부인지 양부인지를 모호하게 적었고, 그저 과인에게 오늘이 있게 된 것은 모두 태공의 가르침 덕분리라고 한다. 사마담은 아마도 여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듯하다. 모호한 문구로 '부왈태공'이라는 글자를 적은 것이다.


"조서에 이르기를, 사람중 가장 가까운 것은 부자만한 것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아비가 천하를 얻으며 아들에게 넘겨주고, 아들이 천하를 얻으면 아비를 노피 받든다. 이것은 인간의 도리이다. 이전에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곳곳에서 거병했고, 백성들이 고통을 겪었는데, 짐이 친히 무기를 들고, 병사들과 함께, 위난을 헤치며 폭란을 평정하고, 제후를 세우고, 전쟁을 끝내서 천하를 태평하게 만든 것은 모두 태공의 교훈때문이다."


다만 유방은 선한 인물이 아니다. 협박을 당해서 하고는 그 억울함을 그냥 안고 있을 사람이 아니다. 태상황에 봉하고나서 바로 심복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이렇게 묻는다: "과인이 보기에 아무리 봐도 태상황이 우울하고 처량한 것같다."


황상이 말하기를 태상황이 우울하고 적적하다는데, 아랫사람이 누가 감히 "아닙니다. 태상황은 잘 지냅니다"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만일 정말 그렇게 애기하는 자가 있다면, 가볍게 보면 안목이 없는 것이고,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것이어서 파관면직될 수 있고, 심하게 보면 알고도 알리지 않았으며 태공이 즐겁지 않은 진상을 감춘 것이 되니 기군망상이 되어 죽임을 당하고 멸문을 당할 죄인 것이다. 그래서 황제가 이렇게 묻자, 아랫사람들은 그저 만세를 외칠 분이다: "황상성명(皇上聖明), 황상명찰추호(皇上明察秋毫), 태상황은 확실히 우울하고 처량한 것같습니다."

"왜 그럴까?"

"황상께서 알고 싶으시면 태상황께 물어보시지요!" 누가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유방이 정장으로 있을 때의 현태야나 상사들은 모조리 끌려와서 모욕을 당했다. 유태공을 대하는데는 더더욱 문무대신들이 모두 있는데서 냉대한 것이다. 만일 정말 알고 싶다면 직접 찾아가서 물으면 되지 너희들 신하들 앞에서 물어볼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임금을 모시는 것은 호랑이를 모시는 것과 같다. 황상의 앞에서 목숨을 지키려면, 나아가 승진하려면, 황상의 뜻을 잘 헤아려야 한다. 그래서 이런 걸 아는 사람들은 바로 아뢴다: "황상께 아룁니다. 유태공은 평생 좋아하는 것이 모두 소돼지를 잡아서 팔고, 술과 전을 팔며, 투계와 축국을 즐기는 것인데, 지금은 이런 것을 모두 못하니 우울한 것입니다."

"아, 원래 그런 것이군. 네 공로가 크다. 상을 내리겠다."


그리하여 유방은 핑계를 찾아 도성 장안에는 유태공이 잘 아는 친구들이 없으니, 태공이 우울해한다고 하고, 장안에서 백리정도 떨어진 여산의 아래 진시황릉의 곁에 몇 개의 건물을 짓고 담장을 둘어서 신성(新城)을 짓는다. 그리고 듣기좋은 이름을 붙인다: 신풍(新豊). 풍읍 중양리의 유태공의 "소돼지잡고, 술과 전을 팔며, 투계와 축국을 즐기는" 자들을 불러모은다. 무릇, 유방이 어떤 자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이 신풍으로 옮겨서 살게 한다. 그리고는 성지를 내려서 유태공을 도성 장안에서 쫓아버리고, 황량한 여산자락으로 옮겨가게 한다. 마치 진시황릉을 지키는 것같다.


사마담은 이렇게 적었다: "태상황이 그러자 기뻐했다." 유태공이 정말로 기뻐했을까? 웃기는 말이다. 


이렇게 부친에게 효도하는 경우도 있단 말인가? 정말 부친에게 효도하려면 그렇게 큰 도성 장안에 일거에 유방의 무수한 장군,대신, 노비들이 들어와 살고 있는데, 태상황을 잘아는 수십호의 인물들이 들어와 살 곳이 없단 말인가.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성지를 내러 12만호의 호족과 부호를 함양으로 이주시켰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호족, 부호"이다. 일반 평범한 5명짜리 식구가 아니다. 유방의 모신 장량의 부친 장평은 한왕이 상국을 지냈다. 진시황이 함양으로 이주시킬 때 장량의 집안에서는 노비만 3백명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도 다 살 수 있었는데, 태상황과 그 이웃들 수백호 정도야 뭐가 문제겠는가? 이것은 북경으로 치면, 자금성에도 거주하지 못하게 하고, 북경성내에도 거주하지 못하게 하면서 굳이 멀리 떨어진 청동릉 가에 담장을 치고 그 안에 살라고 하는 것이나 같다. 태상황은 자기가 어디로 가고 싶다고 거기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장안으로 가서 아들을 보고 싶어도, 어르신의 안전을 고려해서 황상의 비준을 받아야 하고, 그가 명산대천으로 놀러가고 싶어도 어르신의 신체건강을 고려하여 황상의 비준을 받아야 한다. 비준은 층층이 올라가야 해서 황상의 어탁에는 올라가기가 쉽지 않다. 황제는 윤허하지 않거나 아예 답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디든 갈 수가 없다. 복을 누리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이것은 연금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유방의 의도는 아주 분명하다. 다시는 도성에서 쓸데없는 짓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황량한 여산 자락의 신봉성에서 지내라는 것이다. 좋게 말한면 말년을 즐기는 것이고, 듣기싫은 말로 하면 그냥 먹고 싸면서 죽기를 기다리라는 것이다.


과연 겨우 2년만인, 한고조 십년 칠월, 유태공과 그의 정실부인은 연이어 죽는다.


태상황이 죽으면, 당연히 장례를 치러야 한다. 황제 유방과 그의 여러 아들, 그리고 문무대신은 모두 장례에 출석해서 장례식을 치르고 애도를 표해야 한다. 그러나 유방은 장안에 있으면서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는다. 유방의 몇몇 아들도 모두 장안에 있으면서 한 명도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 뿐 아니라, 소하, 조참등 문무대신들, 이성제후왕도 모두 나타나지 않는다. 그저 초왕 유교는 유태공의 친아들이어서 멀리 초의 땅에서 달려와 장례에 참석한다. 도중에 양(梁)국을 지나는데, 양왕 팽월이 예의상 동반하여, 유일하게 장례에 참가한 중요인물이 된다.


그러나 팽월은 아부를 제대로 하지 못한 듯하다. 장례는 역대이래로 아주 정치적이다. 출석할지 말지, 어떤 직급의 인물이 출석할지 며칠을 애도할지는 모두 법도에 정해진대로 해야 하고 조그만치의 차질이 생겨도 안된다. 그러나 호비(湖匪) 출신인 팽월은 대유 숙손통이 제정한 제사의법에 아직 적응하지 못했다. 태상황이고, 초왕 유교가 천리 먼길을 달려가서 장례를 치르니, 자신이 비록 양왕이지만, 유씨집안 덕분에 밥을 먹고 사니 당연히 따라가야 한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큰 화를 자초했다는 것을 몰ㄹㅆ다. 얼마 후 유방은 그를 죽여버린다. 그리고 그의 삼족을 멸한다. 이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그의 시신도 다져서 육장으로 만든다. 그리고 각 제후왕에게 보낸다. 당연히, 팽월이 멸문을 당하고 시신이 난도질당한 화는 아마도 출석하지 말아야할 장례식에 출석해서만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번 태상황 장례의 규격은 모든 것을 말해준다.


다시 유방이 어떻게 그의 둘째형 유중과 조카 유신을 혼내주었는지 알아보자.


유방은 한7년 중반에 유신을 후로 봉한다. 유신은 약간의 전공이 있었다. 한7년, 유신은 낭중장의 신분으로 유방을 따라 흉노에 투항한 한왕신을 공격한다. 그러나 그렇기는 해도 유방은 그에게 모욕적인 명호를 내린다. 갱힐후(羹頡侯). '힐(頡)'은 원래 의미는 새가 아래 위로 춤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파생된 의미는 '날아갔다',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후로 봉하면서, 국이 남아있는지 아닌지 모른다는 것이니, 네가 먹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는 것이다.(*頡은 '힐'과 '갈'로 발음이 되며 '갈'로 발음될 때는 긁는 소리라는 뜻이 있다. 결국 큰 형수가 밥솥을 긁어서 친구들을 쫓아더린 것에 대한 화풀이를 그 아들의 작위 명칭을 정할 때 쌌다고 할 수 있고, 이 경우라면 '갱갈후'라고 발음해야할 것으로 보임). 그리고 얼마후 핑계를 잡아 그에게서 갱힐후 작위를 박탈하고 관내후(關內侯)로 고쳐 봉한다. 관내후는 세습할 수 없다. 그래서 유신이 죽은 후 자손들은 작위를 잃어버리고 평민이 된다. 나중에는 어디에서 죽었는지도 모른다.


둘째형 유중은 유방에 의해 대왕에 봉해진다. 이것은 봉상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죽으러 보냈다고 하는 편이 낫다. 대(代)의 땅은 흉노에 가까이 있어서, 아주 위험한 곳이다. 유방은 처음에 한왕신을 대왕에 앉혀서 흉노를 막게 한다. 얼마후 한왕신은 퓽노에 포위되고 패배한다. 그리고 투항해서 흉노와 함께 태원을 공격한다. 유방은 그 소식을 듣고 친히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평정하러 나선다. 날씨가 추워서 유방의 병사들은 동상으로 손가락을 잃는 자가 열에 두,셋이었다. 유방은 평성에 도착하였으나 불행히도 흉노에 포위된다. 칠일밤낮을 포위망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나 실패한다. 하마터면 얼고 굶주려서 죽을 뻔했다. 다행히 진평이 기발한 계책을 내서, 유방이 포위망을 뚫고 나올 수 있었다.


나중에 유방의 주력장수 번쾌가 흉노를 격퇴하여 대의 땅을 평정한다. 이런 때, 이렇게 험악한 곳에 날씨가 너무 추워서 새가 알도 낳지 않는 곳에 유방은 유붕을 보내어 대왕으로 앉힌 것이다. 유중은 그저 돈버는 일만 아는 사람이다. 군대를 이끌고 전투를 하는 것은 아예 모른다. 어려서부터 회남의 초의 땅에서 자라, 날씨가 좋았다. 이렇게 추운 곳에서 견딜 수가 없었다. 유중은 힘들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 분명히 알았다. 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한시간이라도 더 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다음 해에 흉노가 공격해 오자, 유중은 급히 장안으로 도망쳐온다. 유방은 그의 대왕 작위를 빼앗고, 합양후(合陽侯)로 강등시킨다.


재미있는 것은, 사마담이 이 역사를 쓸 때, 고의로 한왕신이 대왕에 봉해진 것고, 이어서 흉노의 공격을 받아 투항한 일, 유방이 군대를 이끌고 대의 땅으로 갔다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 일을 쓰고 그 후에 즉시 유중을 대왕에 앉힌 일을 적었다. 이 세 가지 사건을 같이 적은 것이다. 이렇게 쓰는 것은 일종의 암시이다: 대왕은 좋은 자리가 아니다. 유교의 초왕, 유비의 제왕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유중이 대의 땅에서 죽지 않은 것은 그가 멍청하지 않고, 발걸음이 빨라서 제때 도망쳤기 때문이다.


유태공의 또 다른 친척인 유가(劉賈)는 유중처럼 운이 좋지 못했다. 유가는 사람됨이 강직하여, 유방은 원래 그를 혼내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장사하는 유중처럼 매끄럽지 못했다. 그저 죽어라 성을 지키다가, 결국 죽고 만다. 일가족이 모조리 전투중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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