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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유방)

유방(劉邦)의 신비한 신세내력 (1) ; 부친은 누구인가?

by 중은우시 2018. 10. 23.

글: 정보(程步)


유방은 한(漢)왕조의 개국황제이고, 중앙집권 봉건전제국가형태의 창시자이다(진시황이 창립한 것은 군주입헌제의 국가체제이다). 유방이 건립한 유씨 한왕조는 기원전206년부터, 12대를 이어져 8년까지 214년간 존속하니 역사에서 '서한(西漢)'이라 부른다. 나중에 왕망(王莽)이 찬탈했으나, 유수(劉秀)가 복위하여, 유씨왕조는 다시 12대 212년간 존속하니, 역사에서는 '동한(東漢)'이라 부른다. 농민반란, 군벌혼전을 거쳐, 위, 촉, 오의 삼국할거가 이어지며, 유씨의 한왕조는 철저히 멸망한다. 그러나, 그가 창립한 중앙집권봉건전제의 국가체제는 이천여년간 지속된다. 1912년 신해혁명으로 끝이 난다.


이런 국운이 융창하고 자손이 번성한 나라의 개국황제는 원래 상세하고 완전한 전기가 남아 있어야 한다. 그의 조상의 내력과 평생의 사적을 기록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가 못하다.


유방은 전국말기의 패현(沛縣) 풍읍(豊邑) 중양리(中陽里)에서 태어난다. 진시황의 치하에서 15년간 생활했다. 진나라는 완비된 호적제도를 가진 나라였다. 유방이 중양리에서 근 40세가 되도록 살면서, 처자식을 두었고, 관직을 얻었으며, 부모가 건재하고 형제가 살아 있고, 자손이 많았다. 사방을 유리걸식한 것도 아니고, 집안이 망한 것도 아니다. 이웃도 있고, 동료도 있다. 이들 이웃과 동료들 중에는 당시에 유방의 호적정보를 담당하고 있던 관리도 있었으며, 나중에 그의 부하가 된다. 그리고 함께 함양 부근의 한왕조의 도성 장안에서 생활했고, 자손을 많이 두어서 계속 이어졌다.


한왕조는 오랑캐여서 미개했던 왕조도 아니고, 중무경문(重武輕文)의 시대도 아니었다. 일찌기 여러 왕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혼란된 시기에도, 상국(相國) 소하(蕭何)는 진나라 율령전적의 수집과 보호에 심혈을 기울였다. 반란군이 함양에 입성한 후, 다른 사람들은 모두 돈과 재물을 찾는데, 소하는 사람을 데리고 진나라의 법률자료를 수집하고 보보했다. 새 정권이 막 건립되자, 유방은 명을 내려 일련의 문장제도, 법규예의를 만들도록 한다. "소하는 율령(律令)을 정하고, 한신(韓信)은 군법(軍法)을 정하고, 장창(張蒼)은 장정(章程)을 만들고, 숙손통(叔孫通)은 예의(禮儀)를 정했다."


한나라는 또한 인물전기가 가장 흥성했던 왕조이다. 사관 사마담(司馬談), 사마천(司馬遷) 부자는 <사기>를 써서, 중국인물전기의 시효가 되고, 이천여년 사서의 풍비(豊碑)를 세워, 사가문인의 존경을 받는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있다. 이런 인물, 이런 왕조 ,이렇게 심후한 역사기록의 토양이 있는 국가에, 그리고 그 자신이 개국황제인 유방의 경우, 일부 가장 기본적인 정보, 예를 들어, 어느 해에 태어났는지, 부친은 누구인지, 조상은 어디 사람인지 등등이 모두 수수께끼이다. 모호하게 적혀 있다. 그래서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유방의 일생은 겨러가지 안개로 덮여 있다. 여러 기이한 행동과 연이어 발생하는 신비한 사건은 모두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궤이한 일의 배후에는 반드시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을 것이다. 모호하게 말한 것에서 흔적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사서를 상세히 읽어보기만 한다면, 유방의 여러가지 궤이한 행동과 연이은 신비한 사건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유방이 극력 감추고자 했고, 여후의 아들이 입을 꾹 다물고 말하지 않았고, 가까운 대신들은 말하기를 꺼렸으며, 사마담, 사마천 부자는 할듯 말듯 말을 멈추었다. 유방의 신세내력에는 어떤 경천동지할 비밀이 숨어 있을 것일까? 누가 장난을 친 것일까/


유방의 평생사적은 주로 한나라의 태사령(太史令) 사마담, 사마천 부자 두 사람이 공동으로 쓴 <사기. 고조본기> 및 관련 편장이다. 그러나, <고조본기>의 첫부분 22글자는 좀 다르다. 그래서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고조(高祖), 패풍읍중양리인(沛豊邑中陽里人), 성유씨(姓劉氏), 자계(字季), 부왈태공(父曰太公), 모왈유온(母曰劉媼)"

고조는 패현 풍읍 중양리 사람이다. 성은 유씨이고, 자는 계이다. 부친은 태공이라 하고, 모친은 유온이라 한다.


만일 스물 두 글자를 오늘날의 말로 바꾸면 이러하다. "한고조 유방은 패현 풍읍 중양리 사람이다. 성은 유씨이고, 자는 계이다. 부친은 어르신이이라 하고, 모친은 유할머니라 한다." 이런 글을 초등학생이 작문으로 썼더라도 분명히 선생님에게 혼났을 것이다. 어떻게 전기를 쓰면서 부친의 이름을 '어르신'이라고 적는단 말인가? 설마 천하의 어르신이 모두 유방의 부친이란 말인가? 모르면 안쓰는 것이 낫지 않은가? 쓸려면 바로 써야 될 것이다.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인지. '부왈태공'이라는 글은 화사첨족이 되어 오히려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할 것이다.


후세의 사가문인들은 반드시 '부왈태공'이 부적절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사마담의 과실을 메워주려고 한다.


당나라때의 사마정(司馬貞)은 <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 이렇게 말한다: "황보밀(皇甫謐)이 말하기를, 유방의 부친의 이름은 유집가(劉執嘉)라 한다. 그외에 왕부(王符)는 유방의 부친의 이름이 유단(劉煓)이라 한다."


그러나, 당나라의 장수절(張守節)은 <사기정의(史記正義)>에서 이렇게 말한다: '집가'는 유방의 이름이다. <춘추악성도(春秋握成圖)>에는 이런 말이 있다. 유방의 모친 유온이 꿈에 적조(赤鳥)가 용과 같은 데 자기를 희롱하는 것을 보았고, 집가를 낳는다. 하마터면 부자를 혼동할 뻔했다.


<한서>는 신찬(臣瓚)의 글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유방의 할아버지는 풍공(豊公)이라 한다. 풍공은 태상황 유태공의 부친이다. 그러나, 다시 유향(劉向)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유태공 일가가 풍읍에 살았던 기간은 아주 짧다. 선조가 현지에 묻혀 있지 않다(鮮焉). 원래 '선(鮮0'은 드물다는 뜻인데, 이곳에서는 '없다'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 이것은 고인들이 완곡한 표현이다.


위의 여러가지 주장을 보면 한마디로 말해서, 혼란. 모순이다.


집가는 언제는 유방의 이름이다가, 언제는 유태공의 이름이 된다. 어찌 모순이 아니겠는가? 만일 유태공의 부친이 풍공이라면 당연히 풍읍의 주인이고, 호족가문이다. 유태공 일가가 어찌 빈곤한 처지로 전락할 것인가. 형수는 유방의 몇몇 친구들이 와서 밥을 몇끼 먹자, 안면을 바꾸어 주걱으로 밥솥의 바닥을 긁어서 손님을 쫓았겠는가? 유태공은 왜 돈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서 아들에게 돈을 벌어오라고 재촉했을까? 유방이 거병했을 때, 확실히 풍공은 이미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풍읍에 묻혀 있지 않다면 도대체 어딩 묻혀 있는 것일까? 그의 처, 첩, 자제들은 어디에 묻혀 있는 것일까?


청나라때의 <풍현지(豊縣誌)>는 아마도 이런 혼란과 모순을 해석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아예 이렇게 적어 버렸다: "풍공은 성이 유씨이고 이름은 청(淸)이다. 한고조의 할아버지이다. 3세를 전해 태공을 낳았는데, 이름이 단이고, 자는 집가이며 아들 네 명을 낳았다: 백(伯), 중(仲), 계(季), 교(交)...... 진나라가 위를 멸하고, 양(梁)으로 이사가서 청(淸)을 낳고, 청이 패현의 풍읍으로 이사와서 거주하며 인호(仁號)를 낳고, 인호가 단을 낳고, 단이 고조를 낳았다."


다시, 유방의 모친을 보자. 마찬가지로 혼란, 모순이다. 황보밀은 유방의 모친은 성이 왕씨(王氏)이며, 이름은 함시(含始)라고 적었다. 근거는 마찬가지로 위에서 언급한 <춘추악성도>이다. <춘추악성도>에는 집가의 처인 함시가 낙지(洛池)에서 놀다가, 보계가(寶鷄街) 동쪽에 붉은 구슬이 나와서 눈부셨는데, 그것을 삼킨다. 그 후에 유방을 낳았다고 적었다. 그러나, 당나라때 또 다른 사람은 유방의 모친은 성이 왕씨가 아니라 온(溫)씨라고 하였다. 전해지는 바라는 명나라때 왕세정(王世貞)이 우연히 반고(班固)의 사수정고석비문(泗水亭古石碑文)을 얻었는데, 거기에 분명하게 "온(溫)"자가 쓰여 있었다고 한다.


황보밀, 신찬은 양한이후 삼국,서진때의 사람이다. 유방이 살았던 때로부터 4백년이 지난 후이다. 사마정, 장수절은 당나라때 사람으로 유방으로부터 800년이 지난 후이다. 청나라의 <풍원지>는 더더욱 2천년 뒤의 일이다. 그들이 모두 유방의 부모 이름을 찾아내고 유방의 조상이 누구인지 알아냈는데, 어찌 한나라때 사람이며 출신이 혁혁하면서 사관이었던 사마담이 어찌 몰랐을까? 그냥 "부왈태공, 모왈유온"이라고만 적었을까?


사마담, 사마천 부자는 비록 유방과 동시대에 살지는 않았지만, 사마씨일문은 강호에 멀리 떨어져 살던 일반적인 문인이 아니었다. 진,한시대를 아우르는 호족가문 자제들이다. 오랫동안 경성에 몸을 담고, 권력의 중심에 가까이 있었다.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나 자제들과 접촉할 충분한 시간과 기회가 있었다.


사마담은 유방의 증손자인 한무제가 즉위한 초기인 건원에서 원봉 연간에 조정의 관리로 있었다. 약 기원전140년에서 기원전110년 사이이다. 이 시간은 유방이 창업하고 다스리던 시대로부터 50여년이 떨어져 있다. 그러나 이 오십여년은 공백으로 끊어져 있던 시기가 아니다. 사마담의 할아버지인 사마무택(司馬無澤)은 유방이 황제로 있을 때 한시장(漢市長)으로 있었고, 부친 사마희(司馬喜)는 관작이 오대부(五大夫)에 이른다. 사마담이 태사령으로 있을 때, 사마천은 이미 관직에 나아가 낭중(郞中)으로 있었으며, 황제의 곁에서 일했다. 사마담이 병사한 후, 사마천은 부친의 관직을 이어 태사령이 된다.


다시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진나라말기의 하늘과 땅이 뒤집어지는 대혼란시기는, 성공하면 왕이고, 패하는 도적이 되는 건곤이 뒤집히는 시대였다. 그러나 이런 시기도 사마씨 일문의 가족관운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같다. 사마담의 증조부인 사마창(司馬昌)은 진시황때의 주철관(主鐵官)이었다. 사마창의 할아버지인 사마근(司馬靳)은 진소왕(秦昭王) 때 장군이었다. 사마근은 백기의 장평지전에 참가하여 거짓으로 전공을 고했다. 조나라군사 사십여만명의 병졸을 모조리 장평에서 갱살했다고 한 것이다. 그리하여 진소왕은 형세를 오판하여 한단전투를 일으킨다. 그 결과 진나라군대는 대패하고, 거짓말이 들통난다. 그리하여 백기와 함께 두우(杜郵)에서 사사(賜死)된다. 사마근의 할아버지는 더욱 대단하다. 그는 진나라에서 유명한 3조노장군 사마착(司馬錯)이다.


이런 가족이라면 넘치는 것이 친구들이고, 자료를 찾는 것이 아주 쉽다. 태사령으로서, 자료를 살펴보고 사람을 찾아서 물어볼 수도 있다. 개국황제의 조상내력을 조사하여 기록하고 후세에 전하여야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유방 부모의 진실한 성명을 알아내지 못했을까? 그리하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부왈태공, 모왕유온"이라는 글을 남겼을까? 오히려 수백년후의 황보밀, 사마정등이 먼저 부모의 이름을 알아내게 놔두었을까?


그래서, 당나라대 사학자 안사고(顔師古)는 황보밀등의 주장을 배척하며 이렇게 말한다: "황보밀등이 함부로 날조하여 유방 부모의 이름을 지어준 것은 모두 정사에 기록된 것이 아니므로, 취할 바가 못된다. 만일 그 시대에 정말 사람들이 유할아버지, 유할머니의 이름을 알았더라면, 사마천이 어찌 기록해놓지 않았겠는가?"


안사고의 주장은 이치에 맞는다. 그러나 그는 절반만 얘기한 것같다. 황보밀등이 마음대로 지어버리고, 마음대로 유방 부모의 이름ㅇ르 지어준 것은 맞다. 유방 부모가 이름을 남기지 않았고, 사마담이 유방의 부모 이름을 몰랐으며, 만일 알았더라면 기록했을 것이라는 것은 반드시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유방은 비록 미천한 출신이지만, 명태조 주원장처럼 어려서 집안이 망하고, 절에 들어가 중이 되지는 않았다. 주원장은 부모와 형이 모두 어려서 죽었고, 소년시절에 출가하여 스님이 된다. 나중에 유방과 마찬가지로, 반란을 일으켜 강산을 차지한다. 이렇게 일찌기 속세와의 인연이 끊어졌던 사람도 사서에는 명확하게 부친의 내력을 적어두고 있다. 부친은 주세진(朱世珍)이고 모친은 진씨(陳氏)이며, 아들 넷을 낳았다. 주원장은 셋째이다.


유방은 패현 중양리에서 태어났고, 태어난 후 자라면서 사방을 돌아다니지 않았다. 성년이 된 후에도 현지에서 관리로 지내며, 처를 얻고 자식을 낳는다. 부모형제도 모두 살아 있었다. 가족도 있고, 이웃도 있고, 동료도 있다. 이들 이웃과 동료들 중 많은 사람들은 유방과 함께 반란에 가담하여, 성공한 후에는 함양에 살았고, 그들 자손은 모두 가까이에 있었다. 유태공은 유방이 황제를 칭할 때까지 살아 있었고, 태상황으로 여러 해동안 지냈다. 그의 자손친척들이 그의 이름을 몰랐을 리 없다. 진나라때는 일찌기 호적제도가 있었고, 유태공은 중양리에 살았는데, 성이 무엇이고 이름이 무엇인지를 등기해놓지 않았을 리 없다. 유방은 관직에 나아가 사수정장으로 있었는데, 집안배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소하는 패현의 주리(主吏)이고, 그는 문서를 아주 중시했다. 유방 부모의 이름을 기록해놓지 않았을 리 없다. 그래서 유방의 부모, 특히 유태공이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말이 되지 않는다.


숙손통은 진,한 양대에 걸친 거유(巨儒)이다. 유가는 법선왕(法先王), 배조종(拜祖宗)을 중시한다. 숙손통은 태상이 된 후 한나라를 위하여 완전한 종묘예법을 만든다. 유태공은 태상황으로 봉해지는데, 어찌 전책문빙(典冊文憑)이 남아 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유방과 그 자손은 봄 가을에 두 번에 걸쳐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조상의 위패를 모시지 않을 리 없다. 황제의 부친의 성과 이름을 모른다면 웃음거리가 아니겠는가?


전왕조의 옛일에 대하여 사마담은 열심히 사실을 아는 사람을 찾아다녔고, 진실하고 믿을만한 자료를 구했다. 전국시대 말기 형가자진왕(荊軻刺秦王)은 진시황20년(기원전227년)에 발생한 일이다. 사마담이 태사령이 되기 80여년 전의 일이다. 사마담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당시의 일을 아는 사람들을 찾아갔고, 원시자료를 얻는다. 그 후에 비로소 글을 써서 남겼다. 하무차(夏无且)는 진시황의 어의(御醫)이다. 형가가 암살할 때 하무차는 대전의 아래에 서 있었다. 진시황의 검이 길어서 일시에 검집에서 빼들지 못하고, 형가는 손에 독약을 묻힌 비수를 들고 계속 뒤쫓았다. 이 위기일발의 순간에, 하무창은 등에 짊어지고 있던 약낭을 던져 형가를 맞혀, 진시황의 목숨을 구한다. 사마담은 두 노인 공손계공(公孫季功)과 동생(董生)이 옛날에 하무차와 교분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는 두 사람을 찾아간다. 그리고 상세하게 상황을 물어본 후에 비로소 <자객열전>의 형가자진왕을 썼다.


한 자객을 쓰면서도 이렇게 엄격하고 세밀하게 일을 했는데, 개국황제의 대전을 쓰면서 어찌 부주의해서 부모의 성명을 누락할 수 있단 말인가? 하물며, 만일 정말 부주의해서 누락했다면, 그냥 쓰지 않고 비워두면 된다. "부뢀태공, 모왈유온"의 여덟글자를 삭제하면 된다. 그래도 큰 문제는 없다. 아무도 비판하고 추궁하지 않았을 것인데, 굳이 화사첨족으로 적어넣어서 필묵만 낭비한 셈이다.


가장 먼저 사마담의 화사첨족을 비판한 사람은 반고이다. 반고는 32년에 태어나서 92년에 죽었다. 사마담보다 약 200년 뒤의 사람이다. 반고는 엄격하면서 조심스럽고 자부심이 강한 역사학자였다. 그는 <한서>를 쓸 때, 왕조전기의 일은 대부분 사마씨부자의 <사기>를 베껴쓴다. 그가 부당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을 만나면, 그는 비판하는 방식으로 삭제해벼렸다. 반고가 <사기>에서 삭제해버린 것은 대부분 이치에 맞는 것들이다. 다만, 유방을 만나면, 그의 궤이한 인생에 금기가 많았고, 사마담은 그의 자손들이 통치하는 왕조에서 일하므로 직접적으로 말하기가 불펺ㅆ다. 그러나 반고는 시기가 많이 흘렀고, 금기를 몰랐다. 그래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대로 해버린다. 그의 삭제수정은 약간 경솔한 측면이 있고, 쉽게 실수할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이곳에서 반고는 <한서.고제기>를 쓰면서, "부왈태공, 모왈유온"을 삭제한다. 그리하여, "고조, 패풍읍중양리인야. 성유씨"라고만 남겨둔다.


반고의 <한서.고제기>의 이 시작부분은 간명하다. 삭제한 것이 이치에 맞는다. 그러나, <사기. 고조본기>를 계속 읽어가다보면 문제가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