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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유방)

유방(劉邦)은 진시황(秦始皇)의 동생이다 (2)

by 중은우시 2018. 10. 27.

글: 정보(程步)


4. 유방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


200년간 존속한 왕조의 개국황제이고, 그 후에 부인 여후가 여러해동안 집권하였는데, 아무도 유바으이 조상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른다. 이것도 기이하지 않은가? 기이하다. 그래서 한나라이래로 여러 글에서 추측하고 논쟁했다. 어떤 사람은 유방의 조상이 위(魏)나라 사람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초(楚)나라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모두 확실한 사료를 증거로 내놓지는 못하고 있다.


기실 이 문제에 관하여, 일찌감치 한 중요한 인물이 확실하게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한나라이후 2천여년간,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말을 보고도 못본 척했다. 기이하지 않은가? 기이할 것도 없다. 시저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본다. 자기가 보고 싶어하지 않은 것은 설사 눈앞에 가져다 보여주어도 보지 않는다."  한나라이후 모두 진나라의 폭정을 추화하고, 아무도 위대한 지도자 유방이 진나라와 어떤 관련을 가졌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더더구나 아무도 유방이 진왕과 혈연관계가 있다는 말을 하려고 하지않았다. 그래서 많은 사실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데도, 역대학자들은 모두 못본 척한 것이다.


"유향(劉向)이 말하기를, 전국시대에 유씨는 진(秦)에서 위(魏)로 붙잡혀 왔다." 그리고 또한 이렇게 말한다: "이주한 기간이 얼마 되지 않아, 분묘가 풍에는 선유(鮮有)하다." 이 말은 유방 혈통의 진상을 보여준다. 유방은 진나라사람이다. 유방의 대에 진나라에서 위나라 풍읍으로 옮겨왔다. 그리고 위나라 패현 풍읍으로 옮겨온 것이 얼마 되지 않아서, 부친, 숙부등 일대로 풍읍일대에 묻힌 사람이 없다.


유향은 유방의 후손이며, 한나라의 대학자이다. 비록 그의 많은 저작이 문학작품이지만, 한나라때 진나라를 원수시했고, 세상사람들은 진나라를 피하기에 급급했고, 유향도 많은 글에서 진나라를 욕하고 진시황을 욕했다. 만일 사실이 아니라면, 선조를 욕되게 할 리가 없는 것이다. 유뱡이 감히 유방은 진나라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절대 거짓이 아니라 할 것이다.


유향의 이 주장은 또 다른 중요한 정보를 알려준다. 유온은 진나라에서 유방의 생부와 관계를 가져서 임신한 것이다. 그리고 임신한 몸으로 진나라를 떠나 패현 풍읍으로 온 것이다. 만일 유방의 생부도 진나라에서 풍읍으로 같이 이주했다면, 분명 누군가 알았을 것이고, 죽어서도 풍읍에 묻혔을 것이다.


유향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글을 알은 유온은 진나라의 한 대갓집에서 임신한 상태로 도망쳤다. 위나라의 풍읍으로 와서 성과 이름을 감추고 살았다. 유온은 풍읍에 부모가족이 없다. 친처고 아는 사람도 없다. 유방의 생부는 진나라의 대갓집 남자이다. 세력이 크다. 유온과 유태공이 천리밖의 풍읍으로 도망쳤지만, 감히 신분을 드러낼 수 없다. 유방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도 드러내지 못했고, 황제가 된 후에도 감히 발설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 대갓집의 이렇게 대단한 남자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5. 유방은 왜 현령등 상사를 눈아래 두지 않았을까?


유방의 여러가지 괴이한 행동은 바로 그의 범상치 않은 신세내력을 짐작하게 해준다.


<사기.고조본기>에는 그가 사수정장으로 있을 때, 현령이 현의 고위관료들에게 연회를 베풀 때 1천전을 내지 않으면 당하에서 먹고마셔야 하는데, 사수정장에 불과한 유방은 1만전을 내겠다고 하고는(몸에는 한푼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상석에 앉아서 먹고 마시고 떠들 수 있었을가? 그리고, 정장에 불과한 유방이 어찌 다른 고위관리들을 모욕줄 수 있었을까? 일개 평민이 겨우겨우 정장 자리를 꿰찼는데, 이런 식으로 행동할 수 있을까? 그에게는 윗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단 말인가?


현실생활에 이런 사람이 있으면, 그것은 분명 고광자제일 것이다. 부친이 국장이면 계장이 눈에 들어오겠는가? 유방의 부친이 진왕이고, 형이 진시황이면, 이렇게 감출 수 없는 우월감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이해가 된다.


6. 유방은 왜 함양으로 가기를 좋아했을까?


<사기.고조본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유방은 자주 함양으로 갔다." <사기>, <한서>의 기록을 보면, 유방은 함양에 여러번 갔다.


패현은 함양과 3,4천리나 떨어져 있다. 설사 오늘날처럼 교통이 편리한 때라고 하더라도, 서안으로 가서 병마용을 구경하거나, 사업때문에 가는 것이 아니라면, 강소 사람이 서안으로 자주 갈 이유는 없다. 하물며 당시는 육국이 진나라를 적국으로 보고 있었고, 진나라사람들은 마귀로 보았으며, 누구도 진나라사람과 교류하고자 하지 않았었다. 진나라의 본거지인 함양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래서 함양으로 가서 일하는 것은 패현 사람에게 고역이었다. 그런데 매번 유방에게 가도록 하고, 현아에서 돈을 모아서 주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사기.소하세가>에도, "한고조가 함양으로 일하러 갈 때 다른 관리들은 3전을 내는데, 유독 5전을 냈다."


함양에서의 공사에 동원되는 각국의 사람들이 많다. 규모가 작은 패현에서는 몇 명되지 않을 것이다. 이 일을 돌아가면서 맡는다고 하더라도 사수정까지 내려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이런 일은 항상 유방이 맡게 되었을까?


한번 떠나면 몇달간 풍찬노숙해야 한다. 처를 데려가지 못할 뿐아니라 도적을 만날 수도 있다. 혹은 병이 나서 타향에거 객사할 수도 있다. 누가 가려고 할 것인가> 유방이 가려고 했고, 아주 기꺼이 갔다는 것은 함양과 무슨 특별한 관계가 있어서일 것이다. 하필 그렇게 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7. 왜 진시황이 죽자 유방은 사직하고 반란을 일으켰을까?


왕충의 <논형기요편>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한고황제(유방)는 진시황이 붕어하는 해에, 사수정장으로 있으면서 사람들을 여산으로 보냈다." 진시황이 붕어할 때, 유방은 다시 한번 사람들을 데리고 함양으로 일하러 갔다. 가는 도중에 그는 돌연 이들에게 말한다: "너희들도 모두 떠나라. 나도 이제부터 사라지겠다!"


사라져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장사를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승진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도적이 되겠다는 것이다. 유방이 도적이 된 시기는 진승, 오광의 반란보다 빠르다.


왜 유방은 바로 이 때 잘 하던 관직을 버리고 도적이 되었을까?


<사기>의 설명은 유방이 데려가던 사람들이 많이 도망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로 인해 관직을 버리고 반란에 가담했다는 것은 그다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유방이 사람들을 데리고 패현을 출발해서 수십리도 가지 않았을 때, '사람들이 많이 도망치는'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이때 만일 유방이 퍠현으로 돌아가 상황을 보고하면 어떤 처분을 받을까? <운몽진간>의 기록에 따르면, 요역을 징발당했는데 가지 않으면 갑옷2벌의 벌금을 내야 한다. 하물며 유방은 그가 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 데리고 가던 사람들이 도망친 것이다. 이 점이 분명 죽을 죄는 아닐 것이다. 이런 방증도 있다. 나중에 유방이 도망쳤는데, 그저 그의 처인 여후가 붙잡혀 며칠간 감옥에 갇혔을 뿐이다.


유방은 머리가 없는 사람이 아니다. 이것은 그가 나중에 전란때 보여준 행동으로 증명이 된다. 유방은 곧이어 진승,오광의 난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했을 리도 없다. 이런 점에서 받을 가능성도 크지 않은 처벌을 겁내서, 처자식까지 버리고, 자신의 목숨까지 걸고 도적이 되고자 한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또 다른 주장도 있다. <서경잡기>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한고조가 사수정장으로 있을 때 사람들을 여산으로 보냈다. 유방이 고향사람들과 헤어져서 갔다. 사람들과 병사들은 고조에게 술 두 병, 사슴내장, 소간 각 하나를 줬다. 고조는 따르는 사람들과 술과 고기를 먹고 갔다. 나중에 황제에 즉위하고나서도 아침에는 이 두 가지 고기와 술 두 병을 마셨다." 이 견해에 따르면, 사람들이 도망친 일도 없고, 그저 유방이 스스로 그들과 헤어져서 떠난 것이다. 그리고 떠날 때에는 사람들과 수행군졸들이 헤어지는게 아쉬워서 돈을 내서 송별연까지 베풀어 준다. 먹은 것은 제법 풍성했다. 사슴내장, 소간, 그리고 술 두병.


과거에 사람들은 이 견해를 그다지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나라때, 진나라를 호랑이차럼 무섭고 비인간적이라고 묘사했기 때문이다. 백성들이 관리들과 사이가 가까울 리도 없다고 생각하고, 요역을 하러 떠나는 사람들은 관리를 원수처럼 여기는데, 어찌 관리들에게 술과 고기를 대접할 수 있단 말인가? 나중에 운몽진간이 출토되면서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원래 진나라에서 요역에 참가하면 돈을 받았다. 이렇게 보면, 이 기재는 믿을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료를 증명해준다. 유방은 부득이하여 반란에 가담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 한 가지 사건때문에 큰 일을 하겠다고 결정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사수정장이라는 철밥통도 버리고, 가족의 평안도 버리고, 자신의 생사도 버렸다. 무슨 일이 유방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을까? 그의 형인 진시황이 죽은 것이다. 조카인 호해가 즉위하여 온갖 나쁜 짓을 다하고, 진시황의 이십여명 아들을 모조리 죽여버린 것이다. 죽은 진시황의 아들은 유방의 조카이다. 그래서 유방은 대노하여 산하를 되찾겠다고 일어선 것이다.


8. 유방은 왜 죽음을 무릅쓰고 함양을 공격했을까?


진나라말기의 전란때, 모든 반란자들은 한 지방을 차지하고 왕을 칭한다. 오직 유방만이, 점령한 지역을 버리면서까지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함양까지 공격해 들어간다.


당시의 모든 반란자들은 모두 함양을 공격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전철이 있기 때문이다. 반년전에, 반란자인 주문(周文)이 70만대군을 이끌고 함양부근의 희수(戱水)까지 쳐들어간다. 그러나 한달여만에 진군에게 전멸당하고, 주문도 피살된다. 그런데, 겨우 몇만을 이끄는 유방은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서진하였다. 그가 황하이남에서 점령해둔 땅은 이미 다른 반란자들보다 훨씬 많았다. 그러나 그는 이 땅을 버리면서, 서진을 감행하여 함양을 차지한다. 왜 그랬을까? 


사마천은 이렇게 말한다. 유방이 이렇게 한 것은 초회왕 웅심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라고. 먼저 관중에 들어가는 자가 왕이 된다는. 다만 당시의 형세와 유방을 고찰해보면 이런 주장이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방은 원래 무슨 신용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다. 당시 반란자들중에서도 신용을 지키는 사람은 없었다. 진승은 무신(武臣)을 파견하여 조나라땅을 탈취했다. 무신은 조나라땅을 점령한 후 스스로 조왕을 칭한다. 무신은 이량(李良)을 파견하여 영토를 빼앗게 한다. 이량은 뭔가에 기분이 상하여 돌아와서 무신을 죽인다. 초회왕 웅심은 허수아비이다. 누가 그의 말을 진짜로 믿겠는가? 항우는 웅심이 상장군으로 임명한 송의(宋義)를 한 칼에 죽여버리지 않았는가? 그러자 초회왕은 급히 항우를 상장군에 임명하지 않았던가?


유방은 바보가 아니다. 다른 목적이 없다면, 무슨 숭고한 신념이 없다면, 그는 절대로 주문이 80만대군을 이끌고 함양을 공격했다 전멸한 전철을 밟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목적은 무엇일까? 형인 진시황이  파괴한 강산을 다시 바로 세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