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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유방)

유방의 8명 아들의 운명

by 중은우시 2018. 8. 2.

글: 춘지와(春之蛙)


1. 제왕(齊王) 유비(劉肥): 하마터면 피살될 뻔했으나, 최후는 괜찮았다.


유비는 유방의 큰아들이다. 유방이 아직 결혼하기 전에 조씨(曹氏)와 좋아지내면서 유비를 낳았다. 서출이다보니 태자가 되지 못했다. 유비는 모친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유방이 이 어미없이 자라는 아이를 동정하고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약간은 보상을 해주어야한다고 생각했다. 모친의 사랑을 잃은 그에게 부친이 사랑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부친으로서의 직책을 다하지 못한 유방은 이 아들에게 봉상을 아주 많이 내리게 된다. 한고조 6년 그를 제왕으로 봉하고, 봉지로 70개 성을 준다. 이는 유방의 아들 중에서 가장 일찍 왕에 봉하고, 가장 넓은 봉지를 내린 경우이다.


효혜제2년, 입경하여 황제를 배알한다. 그러나 계모인 여후(呂后, 呂稚)는 그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그저 이 서출의 아이에게 그렇게 큰 땅을 줄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에게 독주를 내린다. 그러나 독주를 효혜제가 들어서 마시려고 했다. 그러자 여후는 놀라서 급히 효혜제에게서 잔을 빼앗는다. 이 거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든지 알았을 것이다. 유비는 숙소로 돌아온 후 마음이 급해진다. 이제 끝났다. 이 계모는 나를 아끼지 않는다. 만일 태후가 나를 죽이려고 한다면 얼마나 쉬운 일인가. 그런데 그의 내사(內史)는 아이디어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성양군(城陽郡)을 선물로 노원공주(魯元公主, 여후의 딸)에게 주라고 한다. 그 결과 여후는 아주 기뻐하며, 그를 돌려보낸다.


제왕 유비는 13년간 재위했고 효혜제6년에 사망한다. 그의 봉국은 일찌기 여씨들에게 나뉘어졌으나, 효문제가 즉위하면서 유비의 7명 아들을 왕으로 삼아서, 제국은 7개로 나뉜다. 나중에는 다시 중앙에 귀속된다.


2. 혜제(惠帝) 유영(劉盈): 인약(仁弱)한 천자.


혜제는 유방의 적장자이고, 여후의 친아들이다. 한고조12년, 유방이 붕어하고, 17세의 유영이 즉위하고, 여치는 태후가 된다.


유방이 재위하던 때 항상 유영이 자기와 닮지 않았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를 폐위시키고 동생을 태자로 앉힐 생각을 한다. 유영의 태자 지위를 지켜내기 위하여 여후는 일찌기 장량(張良)에게 의견을 구한다. 장량이 계책을 내서 "상산사호(商山四皓)"를 모셔와서 보필하게 한다. 이 '상산사호'가 무슨 능력이 있는지는 사서에 소개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유비는 이를 보고 그에게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세외고인을 모셔올 수 없었는데, 그는 불러오다니. 그제서야 유방은 그를 폐위시킬 생각을 버리게 된다.


혜제가 즉위한 후 비록 큰 업적은 없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비교적 청명(淸明)했고, 사회도 비교적 안정되었다. 혜제는 우유부단하고 연약무능했다. 재위기간동안 곳곳에서 모친의 견제를 받았다. 태후가 자기와 뜻이 다른 사람들을 제거할 때, 성공적으로 큰형을 보호했다. 그러나, 셋째동생(조왕 여의)은 보호하는데 실패한다. 여후가 조왕 여의를 독살하고, 여의의 모친 척희(戚姬)를 '인치(人)'로 만든다. 그리고 일부러 유영을 불러서 이를 보게 한다. 유영은 핏물이 흐르는 괴물을 보니 사람같은데 수족이 없고 머리카락도 다 잘렸다. 입은 찢어져서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눈은 두 개의 구멍이었다. 물어보고 난 후에냐 척부인이라는 것을 알아낸다. 그 자리에서 모친에게 불만을 표시하고, 이 놀라운 경험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이후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한다. 하루종일 술을 마시고, 결국은 우울하게 생을 마친다. 향년 겨우 24세였다. 재위기간은 7년이다. 혜제가 죽은 후, 여후는 누구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누구에게 황제를 맡겨도 안심을 하지 못한다. 결국은 아무 손자나 데려다가 괴뢰로 삼고, 자신이 8년간 명실상부한 여황이 된다.


3. 조왕(趙王) 유여의(劉如意): 최후가 가장 비극적이다.


유방이 한왕(漢王)에 봉해지던 해에 정도(定陶)에서 척희를 만나게 된다. 척희는 수단이 있었고, 금방 귀비가 된다. 조왕 유여의는 바로 척희의 아들이다.


유방은 유영이 연약하고 무능한 것을 보고, 마음 속으로 생각한다. 이 아이는 아비와 어미는 모두 사람들 중에서 엘리트인데, 어찌 이 아이는 아무도 닮지 않았을까? 유여의는 바로 그의 모습을 닮았다. 그의 모친인 척희도 계속하여 유여의를 태자로 삼아달라고 요구한다. 유방도 그런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태자를 폐위시키는 것은 국가대사이다. 유방이 혼자 결정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 대신들을 불러모아서 물어보는데, 주창등의 반대가 극심했다. 게다가 장량은 여후에게 세외고인을 모셔서 유영을 보좌하게 하라고 아이디어를 주어 상산사호를 모셔온다. 폐장입유는 힘들다는 것을 알고 할 수 없이 유여의를 조왕에 봉하여 모친과 함께 경사를 떠나 조로 가도록 한다. 유방이 죽을 때, 나중에 여후가 이 모자를 괴롭힐까 걱정하여 고의로 여후에게 은혜가 있는 주창(周昌)을 조국의 국상(國相)으로 보낸다. 이를 통해 유여의 모자를 보호하고자 했다.


유방이 죽은 후, 여후는 척희를 원수로 보고, 유여의는 정적으로 보았다. 그래서 조왕이 입조한 기회를 틈타, 참초제근하기로 마음먹는다. 주창은 일찌감치 여후의 생각을 알아차렸다. 세번이나 불렀지만 모두 주창이 받지 않고 돌려보낸다. 여후는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먼저 주창을 부르고 다시 조왕을 부른다. 유여의는 이 무서운 계모에게 항명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장안으로 간다. 다행히 여후는 악독했지만, 형인 유영은 선량했고, 갖은 방법을 써서 동생의 생명을 지켜주려고 한다. 여후는 성밖에서 손을 쓰려고 하는데, 유영이 친히 성밖으로 나가서 맞이한다. 그 후에 동생과 같이 먹고 같이 잔다. 그리하여 여후가 손을 쓸 수 없게 만든다. 다만 호랑이도 졸 때가 있는 법이다. 유영은 일찍 일어나서 활쏘기를 하는 습관이 있는데, 14살짜리 동생이 아직 단잠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차마 깨우지 못하고 동생을 황제의 침궁에 남겨둔다. 유영이 돌아와서 옷을 갈아입으려고 할 때, 용상에 누워있던 유여의는 이미 칠교(窍)에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다. 유여의의 모친도 여후에게 잔인하게 '인치'가 되었고 모갱(茅坑)에서 3일간 갖은 굴욕과 고통을 겪으며 죽어갔다.


4. 한문제(漢文帝) 유항(劉恒): 서한이 계속 이어지게 한 황제.


대왕(代王) 유항은 유방의 넷째아들이다. 모친의 성은 박(薄)이다. 대신들이 여씨집단을 주살할 때, 그는 참여하지 않고, 계속 관망한다. 주발(周勃), 진평(陳平)등이 조정에서 회의를 열어 논의하여, 가장 적합한 황제후보자는 역시 대왕 유항이라고 결정한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유항을 영접한다. 유향의 곁에 있던 사람은 소심하고 조심스러운 사람들이었다. 이들 대신은 모두 백전노장이고 궤계가 많은 사람들이어서 가볍게 맏을 수 없다고 여긴다. 단지 중위(中尉) 송창(宋昌)만이 극력 대왕의 진경을 지지한다. 대왕은 모친 박태후와 상의한 후, 마지막으로 점을 친다. 그리고 사람을 경성으로 보내어 허실을 알아본다. 확실하게 알아본 다음에 비로소 움직인다. 가는 도중, 대왕의 진경을 지지하던 중위 송창은 유항과 같은 수레에 앉는다. 송창은 이때부터 성공가도를 달린다.


유항은 역사상 유명한 한문제이다. 재위기간동안 일련의 개혁개방정책을 실시한다. 대내적으로, 농업개혁을 실행하여 두 차례에 걸쳐 조세를 감면하여 농민의 부담을 줄여준다. 그리고 선전과 여론조작을 중시하여, 친히 농사를 지어 모범을 보인다. 당시의 농업생산력을 끌어올리는데 적극적인 작용을 한다. 법제개혁에서도 육형과 비방요언죄등 가혹한 법률을 폐지한다. 조직인사개혁에서는 사람을 잘 기용했고, 의견을 잘 받아들였으며 일련의 인재를 등용한다. 생활에서도 그는 절검하고 자신에게 엄격했고, 자신은 기워입은 옷을 입곤 했다. 황후와 비빈들에게도 치마가 땅에 끌리지 않도록 하라고 명령한다. 재정과 도시건설에서도 그는 긴축하여 돈을 함부로 쓰지 않는다. 보여주기 위한 공사는 하지 않는다. 장례제도도 개혁하여 후장에 반대하고, 자신의 배장품은 모조리 도기로 하라고 하며, 금은등 귀중품을 넣지 말도록 한다. 한문제는 전후로 유흥거(劉興居)와 유장(劉長)의 반란을 진ㅇ바하고, 가의(賈誼)가 내놓은 대제후를 분할하는 건의를 받아들인다. 이렇게 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한다. 대외적으로, 그는 남월 및 흉노와의 관계를 적절하게 처리한다. 동시에 변방의 군사력을 강화한다. 한문제는 재위23년만에 미앙궁에서 병사한다. 그의 아들 유계(劉啓)가 황위를 이어받으니 하로 한경제(漢景帝)이다.


5. 양왕(梁王) 유회(劉恢): 목을 매어 자결한다.


유회는 처음에 양왕에 봉해지고, 기원전180년 유우(劉友)가 죽은 후 조왕(趙王)으로 고쳐진다.


봉왕때 그는 아직 어린아이였다. 현재는 다 컸는데 돌연 조왕으로 고쳐서 봉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주요 원인은 바로 조(趙)의 땅은 불길하기 때문이다. 앞의 두 명이 조왕이 모두 비명에 죽었다. 그는 앞날이 흉다길소일 것이라고 여긴다. 태후는 다시 그에게 여산(呂産)의 딸을 왕후로 삼으라고 명한다. 이 여씨왕후는 태후의 위세를 믿고 유회를 눈에 두지 않았다. 유회가 다른 비빈을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할 뿐아니라, 심지어 유회가 딸을 만나지도 못하게 한다. 도처에 '심복'을 심어놓고 유회의 거동을 감시했다. 유회는 계속해서 참았으나, 결국은 남자이다. 피가 끓어올라서결국 이 태후의 질녀와 싸우게 된다. 이 여인의 악독함은 그녀의 고모인 여후에 못지 않았다. 그는 암살의 수단으로 유회가 아끼는 첩과 딸을 죽여버린다. 그리고 드러내놓고 암살을 저지른다. 유회는 아주 비통하여 마음 속으로 생각한다: 나는 어쨌든 왕이 아닌가. 어찌 지금은 이런 멍청이가 되어 버렸는가, 그는 분노와 절망을 느낀다. 어느 월흑풍고(月黑風高)한 밤에 그는 자신의 허리띠를 풀어서 목에 걸고 자결한다.


태후가 그 소식을 듣고 마음 속으로 기뻐한다. 그녀는 이렇게 생각한다. 어쨌든 이것은 그가 원한 결과이다. 유씨왕이 하나 죽으면 왕위가 하나 더 생겨나는 것이고, 적수가 하나 줄어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자신의 조카인 여록(呂祿)을 조왕에 앉힌다. 그러나 조의 땅이 악운이라는 것은 성씨를 바꾼다고 달라지지 않았다. 여록의 최후도 옆의 몇 명의 조왕과 다르지 않았다.


6. 회양왕(淮陽王) 유우(劉友): 굶어죽다.


유우는 처음에 회양욍에 봉해지고, 유여의가 독살된 후에는 여후가 그를 조로 옮겨서 조왕으로 고친다. 그리고 여씨일족의 여인을 왕후로 보낸다. 이 여후는 병적이다. 자신이 유씨집안에 시집갔고, 집안의 여인을 모조리 유씨에게 시집보낸다. 그녀가 유방에게 시집갔다고 뭐가 어땠는가? 유방은 매일 바깥에서 계집질을 하고 다녔다. 집안 사람의 생사는 전혀 신경쓰지도 않았다. 여후는 젊었을 때 고생을 많이 겪는다. 여섯째 아들 유우는 여후가 보내준 여씨왕후에게 아무런 애정이 없었다. 좋아하지 않지만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저 경이원지(敬而遠之)했다. 여왕후를 집안에 묶어놓고 자신은 좋아하는 비빈과 놀아났다. 그 결과 여왕후는 화가 난 나머지 친정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여후에게 자신이 남편이 모반을 꾀하고 있다고 밀고한다.


모반은 최대의 죄이다. 여후가 어찌 그냥 놔두겠는가. 유우를 장안으로 불러서 구금하고, 먹을 것을 주지 않는다. 유우는 꼼짝없이 굶어죽는다. 임종때는 노래를 지었다:


제여용사혜유씨위(諸呂用事兮劉氏危)

박협왕후혜강수아비(迫脇王侯兮强授我妃)

아비기투혜무아이악(我妃旣妬兮誣我以惡)

참녀난국혜상증불매(讒女亂國兮上曾不寐)

아무충신혜하고기국(我無忠臣兮何故棄國)

자결중야혜창천거직(自決中野兮蒼天擧直)

우차불가회혜녕소자재(于嗟不可悔兮寧蚤自財)

위왕이아사혜수자련지(爲王而餓死兮誰者憐之)

여씨절리혜탁천보구(呂氏絶理兮託天報仇)


7. 회남왕(淮南王) 유장(劉長): 내력도 바르지 못하고, 이상하게 죽은...


유장은 유방의 '원나잇' 산물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이전의 조왕(趙王)은 장오(張敖)였다. 유방이 조국을 지나갈 때, 장오는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자신의 비(妃)를 유방에게 바친다. 기실 이건 잠시 빌린 것일 뿐이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유방은 명중률이 높았다. 하룻밤을 지냈는데 조비(趙妃)가 임신을 해버린 것이다. 바로 이때 조상(趙相) 관고(貫高)가 모반을 일으키고, 장오도 자연히 연루되게 된다. 온 집안 사람들이 갇혔다. 조비는 여후의 애인인 심이기(審食其)를 통하여, 여후에게 그녀가 황제의 골육을 가졌다는 것을 알린다. 이 여후가 어떤 사람인가. 이 소식을 덮어 버리고 유방에게 말하지 않는다. 조비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유장을 낳고는 목을 매어 죽어버린다. 유방은 이 아이가 가련하다고 여겨서 여후에게 보내 기르게 한다. 여후는 그에게 괜찮게 대한 편이다. 두살 때 그는 회남왕에 봉해진다.


여후가 유씨자손을 제거할 때, 유장은 유일한 생존자이다. 아마도 모친이 여후와 다투지 않았고, 어려서부터 여후의 곁에서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여후가 아무리 악독해도 자신이 십여년간 기른 정은 있는 것이다. 그 외에 유장은 나이가 어려서 여씨에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 여씨들이 죽은 후에는 유장도 이제 어른이 되었다. 그는 이전의 일을 보복하기 시작한다. 핑계거리를 찾아서 심이기를 때려죽이고, 심이기가 죽어야할 세 가지 이유를 낫낫이 밝힌다. 한문제는 막 등극했고, 그를 처벌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를 더욱 방종하고 불손하게 만든다. 아마도 아직 어려서 강호의 험악함을 모르는 탓이리라. 그는 항상 한문제와 같은 수레를 타고 사냥했다. 봉국으로 돌아온 후에, 한나라의 법령과 제도를 지킬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자주 천자의 위엄에 도전한다. 나중에는 아예 흉노, 민월의 수령과 연합하여 반란을 도모한다. 한문제는 차마 그를 죽이지 못하고, 그의 왕위를 폐하고, 멀리 촉지로 유배보낸다. 그 결과 도중에 죽어버린다. 그의 죽음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질병이 악화되어 죽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정에서 사람을 보내어 죽였다는 것이다. 어쨌든 24살의 목숨은 이렇게 끝난다.


8. 연왕(燕王) 유건(劉建): 후사가 끊기다.


유건은 자질이 총명하고 생긴 모습이 가장 유방을 닮았다. 그리고 막내였다. 그래서 유방은 그를 아주 사랑하여 연왕에 봉한다. 그러나, 그는 부친처럼 운이 좋지는 못했다. 한번은 사냥때 미친 듯이 날뛰는 여우에 물려서 상처를 입는다. 그런데 이 여우는 광견병을 앓고 있었다. 유건이 전염된다. 그리하여 그는 젊은 목숨을 잃게 된다.


연왕은 비록 젊어서 아직 왕후를 정식으로 맞이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부친과 마찬가지로 바람둥이였다. 이미 아들이 있었다. 유건이 죽은 후, 여후는 여씨에게 유씨천하를 나눠갖게 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어 유건의 아직 강보에 쌓인 아들을 죽여버린다. 유건은 후사가 끊기고, 작위는 자연히 폐지된다. 봉국은 여씨의 천하로 바뀐다.


유방의 8명 아들 중에서 2명이 황제에 오르고, 6명은 왕이 되었다. 그러나 제왕 유비와 한문제 유항이 수종정침한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여후에 의하여 직접, 간접으로 죽임을 당한다. 유방과 여후의 애정세계에서는 동시에 불공대천의 원한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