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유방)

유방의 신비한 신세내력 (2) : 모친은 누구인가?

중은우시 2018. 10. 23. 15:12

글: 정보(程步)


<사기.고조본기>는 이렇게 적고 있다. "유온은 일찌기 대택(大澤)의 언덕에서 자고 있는데, 꿈에 신(神)을 만난다. 당시 천둥번개가 내려치고 깜깜하게 어두었다. 태공이 가서 보니(太公往視) 교룡(蛟龍)이 그녀의 몸 위에 있는 것이 보였다. 그 후에 임신을 했고, 고조 유방을 낳는다."


이 글은 소위 "용교설(龍交說)"이다. 후세 사가 학자들은 모두 이것을 사마천부자가 아첨하기 위하여 유방을 위하여 날조한 괴이한 이야기라고 여긴다. 황권신수(皇權神授)를 선양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런 류의 이야기는 예로부터 많이 있었다. 아무도 사실로 믿지 않는다. 그래서 아무도 이것을 가지고 따지지 않는다.


그러나 정말 따져본자면, "용교설"은 의문점이 아주 많다. 심지어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놀라운 점도 있다. 사마담이 이 글을 쓸 때, 너무나 상리에 부합하게 적지 않았다. 스스로 죽을 길을 마련한 것같다.


왜 "태공왕시"라는 문구를 넣었을까? 그리고 "그 후에 임신을 했고, 고조를 낳았다"고 작었을까? 이것은 바로 유방의 모친에게 임신하게 한 사람이 유태공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유태공은 곁에서 구경만 했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특별히 "그 후에 임신을 했다"고 강조한다. 교룡과 관계를 가진 후에 유망의 모친이 임신을 한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서 유태공과 방사를 가져서 얻은 것이 아니라. "고조를 낳았다." 이때 임신하여 낳은 것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유방이라는 것이다. 앞뒤가 딱딱 들어맞게 적었고, 다른 해석을 하거나 가릴 여지가 없다. 사마담이 이 글을 쓸 때 설마 생각지 못했을까? 만일 유태공 태상황이 황권신수의 측면에서 생각하지 않고, 진짜로 따지고 들었다면 분명 대노했을 것이라는 것을. 혹은 그의 자손들이 황권신수의 측면에서 보지 않고, 유방은 유태공의 씨가 아니라고 욕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리하여 유방의 모친이 정숙하지 않아서 다른 사람과 야합하여 유방을 임신해 낳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중국인들은 종법혈맥을 아주 중시한다. 중국남자는 아들이 자신의 씨인지 아닌지에 신경을 많이 쓴다. 마누라가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한 것이 아닌지에 신경을 쓴다. 황상이 대노하면, 멸문지화를 당할 수도 있다. 그런데 사마담은 왜 이런 글을 남겨서 자손들에게 후환거리를 만들었을까?


사마담이 왜 이렇게 쉽게 보이는 중대한 잘못을 범할 것일까? 그것은 너무 멍청해서일까? 신기한 이야기를 제대로 만들어낼 줄 몰라서일까?


신하와 후인들이 제왕을 위하여 신기한 이야기를 만들어내서 아부하는 것은 군왕은 신령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이는 자고이래로 같다. 그러나 이런 문자에는 모두 한계가 있다. 사가문인들이 모두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첫째, 절대로 폄의(貶義)로 해석될 수 있도록 해서는 안된다. 나쁜 마음을 품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헛점을 발견해낼 수 없어야 한다. 둘째, 황제 및 부모에게 해가 되도록 해서는 안된다. 특히 성모(聖母)가 정절을 잃게 해서는 안된다. 이 한계를 지키지 않으면 그것은 아부가 아니라, 죽으러 가는 것이다. 고대의 많은 이런 류의 전설들을 참고할 수가 있겠다. 사마천부자는 <사기>에 한계를 넘지 않는 이런 류의 이야기들을 많이 적어 넣었다.


예를 들어, 황제(黃帝)의 이야기를 보면, "모친은 부보라 하는데, 기의 들로 간다. 큰 번개가 북극성을 도는 것을 보고, 감응하여 회임하고, 24개월후에 황제를 수구에서 낳는다." 감응하여 임신했다면 누구와 성교한 것이 아니다. 성모는 정절을 잃지 않은 것이다. 모계사회는 모친만 알지 부친은 알지 못한다. 그래서 황제의 부친을 해친 것도 아니다.


다시 예를 들어, 대우(大禹)이 이야기가 있다. "<제왕기>에서 말하기를, 부친 곤의 처 수이(脩已)는 유성이 앙(昻)을 관통하는 것을 보았고, 꿈에 접하는 느낌을 받았으며, 신주의이(神珠薏苡)를 삼키고, 가슴을 열고 우를 낳는다. 이름을 문명이라 하고, 자는 밀이라 하였으며, 키는 구척이촌이었으니, 원래 서이(西夷) 사람이다." 역시 감응으로 회임했고, 다시 신주를 삼켰다 마찬가지로 성모의 정절은 해치지 않았다.


다시 예를 들어, <사기.진본기>의 신기한 이야기를 보자. "진나라의 선조는 제전욱(帝顓頊)의 후손으로 여수(女修)가 있다. 여수가 베를 짜는데, 현조(玄鳥)가 알을 낳았다. 여수가 그것을 삼키고 아들 대업(大業)을 낳았다." 새알을 삼킨 것이니 특별히 문제될 것이 없고, 성모는 정벌을 잃지도 않았다.


쓸 수 있다면, 베낄 수도 있다. 베껴봐야 아무도 그것을 따지지 않는다. 왜 개국황제에 관해서 쓰면서, 가장 실수하면 안되는 사람을 적으면서 오히려 부주의해서 한계를 넘어버렸을까? 굳이 용안을 모범(冒犯)해야 했을까? 황제가 화를 내면 그는 죽은 목숨이고, 일가는 멸문을 당할 터이다. 그렇게 되면 거작을 완성하지도 못하고, 후세에 대대로 전해지게도 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런 가능성은 없을까? 한나라때 확실히 용교설에 대한 소문이 있었다고. 사마씨부자는 사실대로 적었고, 황제의 분노를 신경쓰지 않고, 그저 기록을 충실하게 했을 뿐이라고.


그런 가능성은 배제해도 된다. 만일 정말 그랬다면, 양전기미(兩全其美)의 방법도 있다. 그저, "태공왕시"의 네 글자만 삭제하면 된다. 그러면 봉흉화길(逢凶化吉)이 된다. 마찬가지로 유방의 군권신수를 알리면서, 유태공에게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 유태공이 없으면, 유방의 모친은 정절을 잃은 것이 아니게 된다. 교룡이 누구인가? 천상의 신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유태공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심지어 유태공이 바로 천상의 신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다. 그러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 아닌가?


황제에게 전기를 쓰면서 글자 한자한자를 신경쓰지 않았을 리 없다. 왜 사마담은 이렇게 부주의했을까? 굳이 화사첨족으로 이런 대역무도한 문자를 남겼을까? 그리고 왜 이른 대역무도한 문자를 남기고도 처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후세에 전해질 수 있었을까?


우리는 알고 있다. 표면적으로 불합리한 일도 존재한다는 것을. 그 깊은 속에 사람들이 잘 모르는 합리성이 있다는 것을. 소위, "존재는 즉 합리이다"


다시 돌아가서, "부왈태공"이라는 이 화사첨족처럼 수준이 떨어져 보이는 문구를 보자. 만일 사마담의 문자수준, 글쓰는 능력이 반고보다 못하지 않고, 더더구나 보통사람들 보다는 낫다고 보면, 초등학생도 범하지 않을 이런 저급한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믿어도 된다. 이것은 절대로 실수가 아니다. 사마담이 "부왈태공, 모왈유온"이라고 쓰고, "태공왕시"라고 쓴 것은 일부러 그렇게 적은 것이다. 목적은 바로 헛점을 남기는 것이고, 후인들이 의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깊이 따지고 연구하도록 만드는 것이고, 나아가 유방과 그 자손들이 극력 감추려고 하며, 사마담이 알고는 있지만 쓸 수는 없는 진상을 발굴해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 진상은 바로 이것이다: 


"유단, 혹은 유집가라는 사람. 나중에 태상황에 봉해진 유태공은 유방의 생부가 아니다. 유방의 생부는 따로 있다." 


이런 결론을 내리고 다시 돌아가서 보면, "부왈태공"이 그냥 보기에는 쓸데없는 말같지만, 기실 아주 교묘하고,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인들에게 의심과 탐구할 거리를 마련해 준 것이다. 그리고 생부, 양부 모두에게 죄를 짓지 않는 길이다. 만일 유방의 생부 이름을 그대로 적었다면 그것은 금기를 범하는 것이고, 황상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다. 유방의 신비한 일생은 그의 부친의 특수한 신분 때문에, 이 일련의 괴이한 일들을 벌여서 유방과 그의 부자관계를 감추려고 했는데, 만일 네가 그것을 써버린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황제가 대노하여 바로 죽여버리고 멸문지화를 내릴 것이다. 만일 '부왈유단'이라고 쓴다면 그것도 안된다. 황제가 또 노할 것이다. 누가 그 비천하고 돈만 좋아하며 일은 하지 않고 도박꾼을 쫓아디니길 좋아하던 자가 개국황제 한고조 유방의 부친이라던가? 다시 멸문지화를 당할 수 있다. "부왈태공"은 유태공이든 왕태공이든 누구에게도 죄를 짓지 않는 일이다. 유태공의 진짜 성과 이름을 밝혀야 한다면, 바로 '태공왕시'라는 한 마디가 말해준다. 유방의 모친을 '몽간(夢奸)'하여 임신하게 한 사람은 유태공이 아니다. 유방의 부친은 따로 있다.


사마담이 신경써서 쓴 글을 앞뒤를 제대로 살피지 않고 반고는 삭제해 버렸다. 그것은 애석하고 가소로운 일이다.


유사한 문자는 여러 곳이 있다. 유방의 신세내력의 수수께끼에 아주 중요하다. 아쉽게도 모두 반고가 잘못 고쳐 놓아서, 후세의 사가들이 놓쳤을 뿐이다.


고의로 화사첨족하고 헛점을 남겨두는 일은 사마담이 <사기>에서 여러번 사용한다. 유방에 대하여는 이런 것도 있다:


예를 들어, 유방의 한나라10년에 대하여 이렇게 쓰고 있다: "십년 십월, 회남왕 경포, 양왕 팽월, 연왕 노관, 형왕 유가, 초왕 유교, 제왕 유비, 장사왕 오예가 모두 장락궁으로 내조했다."


이 것을 쓰고 나서, 이어진 네 글자는 췌언같다: "춘하무사(春夏無事)"


이 네 글자는 겉으로 보기에 쓸데없는 말이다. 그래서 후세의 사학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렇다. "무사"한데 뭘 더 깊이 연구한단 말인가.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의심이 든다. 이렇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사마담은 왜 이곳에 이 네 글자를 굳이 더 적어넣었을까?


<고조본기>는 유방의 기거록(起居錄)이 아니다. 계절마다 모두 한 마디씩 쓸 필요는 없다. <사기>같이 오천년을 종관하는 사서는 모두 사건이 있으면 적고, 사건이 없으면 적지 않는 것이다. 수백년을 한 두마디로 지나간 적도 있다. 만일 사건이 없는 것도 적어야 한다면 편마다 모두 '무사'라는 두 글자를 써야 하지 않았을까? 반대로 말해서, 이렇게 큰 나라에, 전란도 아직 평정되지 않았는데, 정말 매달마다 사건을 적는다면, 어쨌든 사건을 찾아서 쓸 수가 있다. 왜 굳이 '무사'라는 쓸데없는 말을 적어놓았을까? 확실히 이 곳에서 화사첨족처럼 보이는 '무사'는 바로 후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저 그 일이 무엇인지 말하지 못하고, 분명하게 말할 수 없을 뿐이다.


반고의 <한서>를 뒤져보면, 확실히 사건이 있었다. <한서.고제기>에는 이렇게 적었다: "십년(十年), 하오월(夏五月), 태상황후붕(太上皇后崩)" 즉, 유태공의 정실부인이 죽은 것이다. 


유태공의 정처(正妻)의 이름은 남아 있지 않다. <사기>에는 그녀에 대하여 한 마디도 적지 않았다. 그저 <고조본기> 한왕2년, 4년에 은연중에 언급되었을 뿐이다. 2년, 항우는 "한왕의 부모처자를 패에서 붙잡았다." 4년, "항왕은 한왕의 부모처자를 돌려주었다." 이곳의 '모(母)'는 유방의 생모 유온이 아니다. 유온은 이미 몇년전 유방이 거사한 초기에 소황성(小黃城)에서 죽었다: 고조모기병시사소황성(高祖母起兵時死小黃城). 여기의 '모'는 유태공의 정실부인을 말한다. 유백(劉伯), 유중(劉仲)의 생모이고, 유방의 양모이다. 재미있는 것은, 반고가 특별히 오월의 앞에 '하(夏)'를 붙인 것이다. 마치 너 사마담이 '춘하무사(春夏無事)'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따지는 듯이. 너는 틀렸다. 여름 오월에 사건이 있었다.


태상황의 정실부인이 죽은 것이 사건이 아닌가? 당연히 사건이다. 이런 큰 사건을 이백년후의 반고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사마담이 몰랐을 리 있겠는가?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그러면 알면서도 왜 적지 않았을까? 오히려 '춘하무사'라는 네 글자만 적었을까?


확실히, 사마담은 우려했던 것같다. 세월이 흐른 후에, 사정을 아는 사람들이 모두 죽으면 후인들이 제대로 살피지 못해서, 유태공을 유방의 친부로 알고, 진짜 태상황으로 알아서, 유태공의 정실부인을 태상황후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이 네 글자를 적은 것은, 바로 후세의 사가, 독자들에게 유방은 유태공의 입을 막기 위하여, 그에게 태상황의 명호를 주었지만, 그의 정실부인에게는 태상황후라는 지위를 주지 않았다. 유태공의 정실부인은 그저 시골의 촌부이다. 죽으면 죽은 것이다. 국가대사가 아니다.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마담의 우려는 현실이 된다. 반고의 잘못이 바로 그 분명한 증거이다.


반고의 유사한 실수는 또 여럿이 있다. 예를 들어, <사기.초원왕세가>에 : "초원왕 유교는 고조의 동모소제(同母少弟)이다." 특별히 '동모소제'라는 말을 추가했다. 이것은 바로 '태공왕시'와 같이, 유방, 유교는 모친은 같지만 부친이 다르다는 것을 암시한다. 


반고는 그것을 잘 몰랐고, 사마담이 용심양고(用心良苦)로 유방의 생부는 따로 있다고 말하려는 것을 몰랐다. 그래서 이 네글자가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사기>에는 유방의 두 형을 적을 때 그저 '형(兄)'이라는 한 글자만 적었지 무슨 동모(同母)인지 이모(異母)인지는 쓰지 않았다. 아마도 반고는 사마담이 여기에서 글자를 잘못 썼거나, 후인들이 베껴쓰면서 실수한 것이라고 여겼던 것같다. 그래서 '동부(同父0'를 '동모(同母)'로 잘못 쓴 것이라고 생각한다. 혹시 유태공이 첩을 두어서 동생 유교를 낳았단 말인가> 그는 <한서.초원왕전>을 적을 때, 스스로 잘한다고 여기고 '모(母)'를 '부(父)'로 고친다: "초원왕 유교는 고조의 동부소제(同父少弟)이다." 이렇게 도치는 바람이 웃음거리가 될 것은 아마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종법예규나 행문습관에 따르면, 두 형제가 같은 성이면서 같은 부친이면 굳이 '동부'라고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반고가 만일 유방, 유교는 '동부이모'라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사기>의 '동모소제'가 틀렸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었다면, 당연히 '동모'를 '동부'로 고쳐야할 것이 아니라, '이모(異母)'라고 고쳐야 했다. 그리도 동시에 증거를 내놓아야 한다. 최소한 세 글자: "모친은 모씨이다(母某氏)" 그래야 의규문법에 들어맞는다.


후인들이 전인의 잘못에 의심을 가질 수는 있다. 그리고 전인이 쓴 것을 고치지 못할 것도 없다. 그러나 잘못이라고 하려면 이유를 밝혀야 한다. 전인의 글자를 고치려면 이유를 말해야 한다. 그래야 시비가 전도되지 않을 수 있고, 잘하려다 망치지 않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반문농부(班門弄斧)로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사마담은 왜 유방의 형들을 적을 때는 그저 '형'자만 적고, '동모'인지 '이모'인지 적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그들은 황제 유방과 원래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부친도 다르고, 모친도 다르다. 그저 한 지붕 아래서 살아가는 양성방인(兩姓傍人)일 뿐이다. 쓰지 않을 수는 없지만, 확실히 밝힐 수도 없다. 그래서 그저 서로 형,동생 햇을 것이므로 한 글자로 칭하고 지나간 것이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반고는 재주가 뛰어났다. 재주가 뛰어나면 자부심도 크다. 그는 <사기>를 옮겨쓸 때 여러 곳을 고쳤다. 어떤 곳은 제대로 고쳤지만, 어떤 것은 그렇지 않다. 특히 유방의 신비한 일생과 관련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사마담의 용심양고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에, 상식으로 추측하여, 여러 잘못을 범하게 된다. 그래서 상식으로 추정하여 고쳐버렸고, 왕왕 잘못고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조조의 아들 조비가 <전론.논문>에서 반고를 비판하며 이렇게 말한다: "문인상경(文人相輕). 즉 문인은 서로를 깔보는 것이 자고이래로 그러했다. 반고와 부의(傅毅)의 학문은 서로 비슷했는데, 반고는 부의를 멸시했고, 그의 동생 반초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부의를 폄하한다. 문인들은 모두 자신의 잘난 점을 보고, 상대의 못난 점을 본다."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만일 남이 자기가 한 일을 모르게 하려면, 가장 좋은 것은 하지 않는 것이다(若想人不知), 제비기막위(除非己莫爲)". 한 사람은 반드시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유방의 모친이다. 사마담은 유온에 대하여 많이 쓰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정보를 남겨두었다. 후세의 사가들에게 방향을 가르쳐 주는 것들이다.


선녀하범(仙女下凡), 무친무고(無親無故); 선녀하범(仙女下凡), 불식인간연화(不食人間煙火). 선녀가 인간세상에 내려오면 친척도 아는 사람도 없고, 선녀가 인간세상에 내려오면, 인간의 음식을 먹지 않는다. 유방의 모친은 바로 이런 여인이었다.


유온은 마치 패현 풍읍 현지 사람이 아닌 것같다. 풍읍 중양리에 친척이나 아는 사람이 없다. 부친도 없고, 모친도 없다. 유방이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유온은 한명의 친정사람도 데리고 참여하지 않았다. 유방이 성공하여 황제가 되고난 후에도, 유온의 친척들 중에서 그 덕을 본 사람이 한 명도 업다. 그 뿐만이 아니라, 유온은 상당한 신분이 있었던 것같고, 인간세상의 음식을 먹지 않은 것같다. 거주하는 작은 도시 풍읍의 시정 중양리와는 여러 모로 맞지 않았다. 남편 유태공과는 전혀 딴판이고 귀천이 분명했다.


유태공은 비루한 인물이다. 평생 시정의 무뢰배들과 어울렸다. 두 성년아들의 생활로 보더라도, 집안환경이 그다지 넉넉하지 않았고, 그래서 돈을 좋아했다. 자주 유방을 무뢰배라고 욕하고 돈을 벌 줄 모른다고 욕했다. 그의 둘째형인 유중만 못하다고 한다. 유태공은 먼저 정실부인을 취하여, 장남 유백, 차남 유중을 낳았고, 딸도 하나 있다. 나중에 유방의 모친과의 사이에 막내아들 유교를 낳는다.


그 시대에, 삼처사첩도 이상할 것이 없다. 남자들은 집안이 맞는 곳에서 정실부인을 데려와서 집안을 이룬다. 그 후에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첩으로 들인다. 일반적인 경우에 첩의 지위는 정실부인보다 낮다. 그래서 문화수준이 있고, 지위가 있고, 품행이 고아한 여인은 비루하고 빈천한 남자의 첩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아주 드물고, 아주 기이하다. 특수한 경우는 있을 수 있다. 유방의 모친 유온은 바로 이 드물게 보는 특이한 경우이다. 고아한 여인이 비루하고 빈천한 남자이 첩이 되었다.


작은 일 하나로도 여러가지를 알 수가 있다. 유태공의 정실부인이 낳은 두 아들은 모두 유태공의 뜻에 따라,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어 재산을 일군다. 차남 유중은 말할 것도 없이, 유태공이 가장 아낀 아들이다. 그래서 항상 그를 빗대어 유방을 혼낸다. 장남 유백은 일찌기 죽었고, 그의 부인은 인색했다. 이를 보면 유태공의 집안환경이나 가풍을 알 수 있다. 유방은 일찌기 친구들을 데리고 큰형수인 유백의 처 집에서 받을 먹은 적이 있다. 여러번 가고 난 후에 큰 형수는 골머리를 앓았다. 유방이 다시 갔을 때, 큰 형수는 멀리서 보고는 고의로 먹고 남은 밥솥의 바닥을 주걱으로 긁어서 소리를 냈다. 이를 통해서 먹을 것이 없다는 것과 싫어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유방의 친구들이 보고는 알아서 물러갔다.


차남 유중은 돈을 잘 벌줄 알았고, 장남 유백의 처는 돈을 아낄 줄 알았다. 보통의 집안이 이렇게 생계를 유지하는 건 아주 정상이다. 뭐라고 할 것이 없다. 그러나 유온의 두 아들 유방과 유교는 전혀 달랐다. 먼저 두 아들은 모두 공부를 하러 다녔다. 이때는 얼마나 오래된 옛날인가. 그리고 부유하지 않은 가정에서는 정말 특이한 경우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설사 오늘날이라고 하더라도, 수십년전이면 작은 도시, 시골농촌에서는 글을 읽어야 소용없다는 말이 유행했다. 일반가정에서 사내아이가 6,7세만 되면 소나 양을 기를 수 있다. 더 크면 일을 배우러 보낼 수 있다. 돈을 벌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한 사람의 식량은 아낄 수 있다. 어른이 되면 기술을 배워서 식구를 먹여살리게 된다. 그러나 2천년전의 유온은 그녀의 아들들이 이런 길을 걷도록 하지 않고, 글을 읽도록 한다. 특히 둘째아들 유교는 시작부터 어려운 것을 배운다. <시경>을 배우러 간 것이다. 스승도 보통 사람이 아니었고, 아주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은 부구백(浮丘伯)인데, 바로 전국시대 대학자 순자(荀子)의 문객(門客)이고, 당금재상 이사(李斯)의 사숙이다. 그 시대에는 아직 과거시험이 없었고, 글을 읽는다고 관리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돈을 벌 수가 없다. 오늘날에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석사, 박사를 따면 차례로 좋은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 최소한 부모에게는 자랑이 된다. 그러나 당시와 같은 전란의 시대에, 진나라의 칼 끝에서 위나라, 초나라는 비바람에 흔들리는 신세이고, 언제든지 나라가 망할 수 있고, 언제든지 온도시가 피로 물들 수 있으며, 아침에 저녁까지 살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 시절이었다. 이런 때에, 유온은 아들에게 이런 스승을 찾아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고아(高雅)한 허학(虛學)을 공부하게 한 것이다. 유온이 어떤 집안 출신이기에 이렇게 한 것일까?


다시 유온의 두 아들의 성격을 보자. 유교는 "책을 좋아하고, 재능이 많았다." 그의 모친과 마찬가지의 유형이다. 유방은 "베풀기를 좋아하고, 성격이 활달했다." 손에 돈은 얼마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통은 컸다. 돈을 흙처럼 여겼다. 이것은 유태공이 보기에 집안망칠 인간이다. 그래서 유태공은 유방을 아주 미워하고, 그를 무뢰배라고 욕한다.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유온과 같은 여인이, 어찌 유태공의 첩이 되었을까? 그리고 어찌 소첩이라는 비천한 지위로 이런 두 명의 "베풀기 좋아하고" "책을 좋아하고, 재주가 많은" 아들들을 길러냈을까? 유태공은 일가의 주인으로, 왜 싫어하고, 욕하지만 유온이 이렇게 하도록 놔두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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