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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유방)

유방(劉邦)은 진시황(秦始皇)의 동생이다 (1)

by 중은우시 2018. 10. 27.

글: 정보(程步)


유방은 진시황의 동생이다. <사기.고조본기>를 보면, "고조(高祖), 패풍읍중양리인(沛豊邑中陽里人), 성유씨(姓劉氏), 자계(字季). 부왈태공(父曰太公), 모왈유온(母曰劉媪). 기선(其先), 유온상식대택지피(劉媪嘗息大澤之陂), 몽여신우(夢與神遇), 시시뇌전회명(是時雷電晦冥), 태공왕시(太公往視), 즉견교룡어기상(則見蛟龍於其上), 이이유신(已而有身, 수산고조(遂産高祖)."


당연히, 현재 문자로 보면 우리는 유방이 진시황과 무슨 관계인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된 이유는 사마천이 일부 중요한 정보를 누락했기 때문이다. 후인들은 스스로 총명한 척하면서 원래 간단한 일에 미무(迷霧)를 입혀 놓았기 때문이다.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창호지는 찌르지 않으면 뚫리지 않는다. 만일 이 창호지를 뚫어버리려면 먼저 '미무'부터 거둬내야 한다.


1. "용교설(龍交說)"은 신하들이 유방의 황권신수를 선양하기 위하여 날조한 것일까?


이 미무의 책임은 사마천에게 있지 않고, 후인들이 스스로 총명하다고 만들어낸 미무이다.


신하와 후인들은 제왕을 위하여 신기한 이야기를 아첨하기 위하여 만들어내서, 군왕이 신령하다는 것을 선전한다. 이것은 자고이래로 똑같다. "태공왕시, 즉견교룡어기상, 이이유신, 수산고조."(태공이 가서 보니 교룡이 그녀(유온)의 위에 있었다. 그 후에 임신을 해서 고조(유방)을 낳았다). 후인들은 당연히 이것을 한나라 신하들이 아첨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신기한 이야기로 여겼다. 이를 통해 유방의 황권은 신으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점을 선전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하나의 중요한 문제를 놓치고 있다. 바로 이런 류의 신기한 이야기에는 모두 한도가 있다는 것이다. 즉, 절대로 폄의로 해석할 수 있게 해서는 안되고, 황제와 부모를 상처입게 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특히 성모(聖母)의 정절이 문제되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부를 하려고 한 것이 목숨을 잃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사기.고조본기>의 이 내용은 유방의 '용교설'을 소개하면서 이런 한도를 넘어섰다. '용교설'은 유방이 진룡천자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유방이 잡종이라는 것을 욕하려는 것인가? 만일 황제가 후자라고 여기면, 그를 잡종이라고 욕했다고 받아들일 것이다. 유태공은 그의 처가 외간남자와 바람피웠다고 생각하고, 그의 아들은 자기의 씨가 아니라고 여긴다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되면 이 이야기를 만들어낸 사람은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다. 이 유언비어를 사서에 써넣은 사마천, 반고는 스스로 죽을 길을 택했다고 해야하지 않겠는가. 유방이 멍청하고, 유태공이 멍청하더라도, 충신들 중에서 황제의 존엄을 보호하려고 하거나, 간신들 중에서 이간질을 하려는 사람이 없을 것인가?


한걸음 더 나아가 분석해보면, 유방이 황제를 칭하는데 반드시 신기한 이야기를 만들어서 황권신수를 홍보해야 할 것인가? 그 시대에 이미 "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있느냐?"고 외친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널리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다. 범죄자였던 경포로 왕을 칭하는데, 유방은 그래도 정장의 직위를 가졌고, 앞장서서 진을 멸했는데, 어찌 칭왕할 수 없단 말인가? 나중에 유방이 칭제하는 것도 누구에게 구걸해서 얻은 것이 아니지 않은가? 실력으로 얻어낸 것이다. 제후를 하나하나 격파하고나서 황제를 칭한 것이다. 이렇게 받들어 높이는 것인지 깔아뭉개 욕하는 것인지도 불분명한 이야기를 만들어내서 자신의 칭제를 합리화할 필요가 있었을까?


정말 유방을 빛내주고 싶었다면, 이렇게 저급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 <한서>는 이미 유방의 조상이 도당씨(陶唐氏) 즉 요(堯)임금과 통한다고 적었다. 유방이 요임금의 후손이고, 게다가 지금 실력으로 황제에 올랐다면 정정당당한 것이다.


설사 양보하여, 유방이 신기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싶었고, 신하들도 아첨하고 싶었다면, 고대의 전기에 많은 이런 류의 이야기를 참고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황제(黃帝)'의 이야기이다: "모친은 부보라고 하는데, 기의 들판으로 갔다. 큰 번개가 북두의 북극성을 돌아치는 것을 보고, 감응하여 회임한다. 이십사개월후에 황제를 수구에서 낳았다." 감응하여 회임하였으니, 누구와 성교를 한 것이 아니다. 성모는 정절을 잃지 앟았다. 모계사회는 모친만 알고 부친은 모르니, 황제의 부친에게 상처를 준 것도 아니다.


<사기>의 대우(大禹)의 이야기도 있다: <제왕기>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부친 곤의 처는 수이이다. 유성이 앙을 관통하는 것을 부고 꿈에 접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신주 의이를 삼킨다. 가슴을 열어서 우를 낳는다. 이름은 문명이고, 자는 밀이다. 몸은 구척이촌의 키이고, 원리 서이(西夷)사람이다." 역시 감응하여 임신했고, 다시 신주를 삼켰다. 마찬가지로 성모는 정절을 잃지 않았다.


<사기.진본기>의 신기한 이야기도 있다: "진나라이 조상은 제 전욱의 후손으로 여수라 한다. 여수는 베를 짜는데, 현조가 알을 떨어뜨린다. 여수는 그것을 삼키고, 아들 대업을 낳는다." 새알을 삼켰으니 대아(大雅)에 어긋나지 않고, 성모는 정절을 잃지 않았다.


사마천은 책을 많이 읽었으니, 황제, 대우, 진나라조상의 신기한 이야기를 잃어보지 않았을 리 없다. 그의 재주로 귀찮으면 이런 것을 베낄 수도 있다; 새로 만들고 싶으면 가지와 이파리를 덧붙이면 된다. 에를 들어, "꾸메 신을 만났는데 약을 한 알 주었다. 손바닥에 놓으니 빛이 났다. 그것을 삼키니 임에 향기가 남아 있었고, 임신이 되었다. 아이를 낳을 때는 집안에 붉은 빛이 가득했다. 그리고 밤에 빛이 몇번 솟아 올랐다. 이웃들이멀리서 보고는 놀라서 불이 난 줄 알고, 급히 구하려 달려왔으나, 도착하니 아무 것도 없었다. 그가 자라면서 용모가 준수하고, 기골이 장대하며, 뜻이 커서 다른 사람들이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정확한 결론은 이렇다. '용교설'은 신하들이 날조한 아첨하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다. 누구든 감히 이런 류의 이야기를 만들어서 아첨하지 않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반드시 확실한 권위있는 내력이 있다. 혹은 황제 유방 자신에게서 나왔거나, 혹은 유태공과 유방의 묵인하에 나온 것이다. 신하 사관은 그저 얘기하는대로 받아적은 것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진지하게 연구해야 한다.


2. 유방생모의 수수께끼


이백여년간 지속된 왕조의 개국황제로서 유방에게는 너무나 많은 수수께끼가 있다. 예를 들어, 생모의 신세성명이 있다. <사기>는 유방의 모친에 대하여 그저, "모왈유온"이라고만 했다. 즉 이는 유부인이라는 뜻일 뿐이다. 개국황제의 모친의 성도 모르고 이름도 모른다. 이것은 실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녀는 부모도 없고, 형제자매, 숙부 백부 외삼촌 이모도 없다. 누구도 그녀의 내력을 알지 못한다. 하늘에서 툭 떨어진 것같다. 이상하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반란을 일으켜 강산을 얻은 주원장과 비교하자만, 주원장은 어려서 부모가 모두 죽었다. 소년시절에 출가하여 화상이 된다. 이렇게 한때 속세와 인연을 끊었던 사람도 사서에는 모친의 성이 진씨(陳氏)라고 적어놓고, 부친의 내력도 자세히 적어놓았다: <명사.태조일>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태조개천행도조기입극대성지성인문의무준덕성공고황제는 휘가 원장이고 자가 국서이고, 성은 주씨이다. 주씨는 패에서 대대로 살다가,구용으로 이주했고, 다시 사천으로 이주한다. 부친 세진은 처음에 호주의 종리로 이주한다. 아들 넷을 낳았고, 태조는 그 셋째이다. 모친은 진씨이다."


역대학자들은 이에 대하여 기이하게 여겼다. 그래서 유방의 모친의 성명을 두찬(杜撰)했다.


<사기색은>에는 이렇게 적고있다: "황보밀이 말하기를, '온은 개략 성이 왕씨(王氏)이다. 그리고 <춘추악성도>에 따르면 집가(執嘉)이 처는 이름이 함시(含始)이다. 낙지(洛池)에서 어울리며 유계를 낳는다. <시함신무>에서는 또한 이렇게 말한다. 성과 자는 모두 장사에 나오는 것이 아니므로 개략 취할 수가 없다. 최근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모는 온씨(溫氏)'이다라고 했다. 정이 반고의 사천정장고석비문을 찾았는데, 거기에 분명히 '모온씨'라고 적혀 있다고 했다."


<사기정의>에는 이렇게 적었다: "<제왕세기>에서 말했다: 한소릉후함시유낙지(漢昭陵后含始遊洛池), 유보계가적주출현목(有寶鷄街赤珠炫目), 후탄지(后呑之), 생고조(生高祖)"


황보밀은 유방의 모친을 왕씨라고 보았다. <춘추억상도>와 <시함신무>에서는 유방의 모친 이름을 '함시'라고 했다. <제왕세기>에서는 함시가 낙지에서 놀 때, 보계가에서 적주가 나타나 눈이 부시고, 그것을 삼키고 고조를 낳았다고 했다. 당나라때 또 어떤 사람은 왕씨가 아니라 온씨라고 했다. 그리고 당나라때  반고의 사서정장고석비문을 찾았는데, 그 위에 분명히 '온'자가 적혀 있었다고 했다.


다만, <사기색은>은 이런 말은 모두 정사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믿을 수가 없다고 했다.


당나라때의 안사고는 이들 글을 반박하며 말하기를, "황보밀등이 함부로 날조한 것은 취할 수가 없다. 만일 그 시대에 정말 누군가가 유온의 성명을 알았다면, 사마천이 어찌 기록해두지 않았을까?"


우리는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왜 아무도 유방 모친의 성명을 모르는 것일까?


유온이 너무 일찍 죽어서 유방이 알 수가 없었을까? 아니다. 유온은 유방이 40세에 반란을 일으킨 후에까지 살다가, 소황에서 병사했다. 나중에 소황에 능묘를 만들었다. 시간적으로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다.


유씨지반이 빈곤하고 유온의 지위가 비천해서, 시골의 사람들은 그저 여자들을 남편의 성을 따서 부르기만 했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아무도 유온의 성명을 모르는 것이 아닐까? 역시 아니다. 유온은 아주 고아한 수양을 지니고 있다. 유방은 어려서 글공부를 했다. <사기>에는, "고조, 노관이 크면서, 모두 글을 배웠다." 그리고 유온은 그녀의 둘째아들 유교(劉交)에게는 한 대학자에게 <시경>을 배우게 한다. <한서.초원왕전>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초원왕 유교는 '책을 좋아하고, 재능이 많았다. 어렸을 때 노목생, 맥생, 신공과 함께 <시경>을 부구백에게 배웠다. 부구백은 손경의 문인이다."


유교가 시경을 배운 스승의 이름은 부구백이다. 그는 진나라재상 이사의 사숙이다. 대학자 순자의 문객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다. 시경을 배웠다는 것이다. 무슨 학문을 배우거나 장사를 배운 것이 아니다. 이렇게 고아한 수양을 지닌 유온이 어찌 아들이 성명도 모르게 할 수 있을까?


유방은 거칠고 불효하여, 모친에 관심이 없어서 유온의 성명을 남기지 않게 되었을까? 역시 말이 안된다. 유방등 자손이 모르더라도, 유방의 부친인 유태공이 모를 리는 없다. 신부가 어느 집안에서 왔는지,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인지, 그것도 모르고 어떻게 취한단 말인가? 하물며 유태공이 취한 것은 보통 여인이 아니다. 아들을 명사에게 학문을 배우도록 할 정도로 아주 고아함을 추구하는 여인이다. 유태공이 어찌 그녀의 이름을 모를 수 있단 말인가. 안다면 왜 말을 하지 못했을까?


유태공이 너무 일찍 죽어서 사관, 대신들에게 말하지 못한 것일까? 그것도 아니다. 유태공은 한고조10년에 죽었다. 그때 유방은 이미 황제로 여러 해 있었다. 유태공은 이미 태상황에 봉해졌다. 거유 숙손통은 이미 유방에게 완비된 예의를 만들어 주었으니, 황제 모친의 신세성명을 기록하지 않았을 리 없다. 하물며, 유방은 12년간 칭제하고, 신하들에게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황제의 친부모가 누구인지. 그렇게 하는 것이 제대로 아부하고 존경하는 것이다. 유방의 사후에 아들이 즉위하는데, 아들이 죽은 후에 유방의 부인 여후가 여러 해동안 권력을 잡는다. 신하들은 충분한 시간을 가졌을 뿐아니라, 충분한 채널도 있다. 황제의 집안일을 확실히 정리할 수 있었다.


유온의 혼인도 아주 의심스럽다. 이렇게 고아한 여인이 거칠고 속된 유태공에게 시집갔다. 유태공은 항상 유방에게 돈을 벌어오지 못한다고 욕했으며, 하루종일 백정, 술꾼등과 어울려 놓았다. 이런 혼인은 설사 출신을 따지지 않는 오늘날이라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거기에는 분명히 숨겨진 사정이 있다.


유방, 여후가 두번에 걸쳐 유온에게 봉호를 내린 것도 아주 괴이하다. 유방은 유태공을 태상황에 봉했는데, 자연히 모친은 태상황후에 봉해야 한다. 혹은 황태후로 봉해야 한다. 예를 들어, 진시황은 칭제후에 그의 모친 조희를 황태후로 봉한다. 그러나 조정의 모든 문무대신들이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유방은 모친을 소령부인(昭靈夫人)으로 봉한 것이다. 도대체 누구의 부인이란 말인가?


왜 유방의 모친은 이렇게 신비롭고, 괴이할까? 한나라강산은 200여년인데, 신하들은 그저 '유온'이라고 쓸 수밖에 없었다. 후세학자들이 머리를 짜내었지만, 역시 이 천고의 수수께끼를 풀어낼 수 없었다. 괴이한 것은 고아한 정취, 범상치 않은 혼인, 기묘한 봉호에 모두 걸쳐 있다.


답은 오로지 하나이다. 그것은 바로 황제 유방이 고의로 이 깜짝 놀랄 비밀을 감추었다는 것이다. 유방은 신하, 백성들이 이 비밀을 알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를 위하여, 유방, 유태공, 심지어 며느리 여후까지도 유온의 신세내력과 성명을 숨겨주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유방, 유태공은 언제부터 유온의 신세내력과 성명을 숨겨왔을까? 유방이 황제를 칭하기 전, 아니면 반란을 일으키기 전, 아니면 심지어 출생하기 전? 답은 유방이 출생하기 전, 심지어 유태공일가가 풍읍으로 이사올 때부터라는 것이다.


<사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유방의 집에는 노씨성을 가진 이웃이 있는데, 노씨집안의 아들 노관은 유방과 같이 나서 같이 자랐다. 관계가 아주 밀접했다. 그뿐 아니라, 유방이 사건을 벌이고 도망쳤을 때, 노관은 따라간다; 유방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노관은 역시 일당이다; 유방이 한왕이 된 후에, 노관은 유방의 침실을 수시로 드나들 수 있었다. 이렇게 친밀한 노관과 그 부모도 유방모친의 성명내력을 몰랐다.


유방에게는 또 다른 같이 반란을 일으킨 신하들이 있다. 소하, 조참, 번쾌등등. 역시 유방과 가까웠고, 하루이틀의 교분이 아니었지만, 마찬가지로 그들도 유온의 신세내력은 몰랐다.


유방, 유태공이 모든 사람들에게 유온의 신세내력과 성명을 감추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일까?


왜 유방과 유태공은 처음부터 유온의 신세내력과 성명을 감추었을까/


출신이 비천해서 남부끄럽기 때문에? 그건 말이 안된다.


패현 풍읍 중양리의 한 백성이 아들을 공부시킬 수 있고, 그것도 유명한 스승에게 시경을 배우게 한다면 어떻게 비천할 수 있을까? 하물며 그 시대에 빈민도 재상이 될 수 있었다. 이사처럼. 그리고 죄인도 왕이 될 수 있었다. 경포처럼. 왕후장상에 씨가 없는 때였다. 비천한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죽을 때까지 감출 이유는 없다.


범죄로 도망중이어서? 그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부녀자 한 명이 무슨 범죄를 저질렀겠는가? 설사 범죄를 저질렀더라도, 유방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더 이상 감출 필요는 없을 것이다.


부인의 정절을 지키지 않아서 명성이 나빠서일가? 그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그 시대는 정절을 크게 따지는 때가 아니다. 진나라황제의 모친인 조희는 먼저 여불위와 자고 다시 진장왕에게 시집갔다. 그래도 왕후에 봉해진다. 설사 유온에게 정말 그런 일이 있었더라도, 황제 유방의 명령 하나에, 이를 언급하는 자는 멸문시킬 수 있다. 아무 힘을 들이지 않고도 신세내력을 수십년간 감출 수가 있는 것이다.


유온은 대갓집의 부인이나 소첩인데, 외간남자와 풍읍으로 도망쳐와서, 만일 신분을 토로하면, 남편집안의 징벌을 받을까 두려워서일가? 그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만일 대갓집의 징벌이 두렵다면, 유방의 반란이전까지는 말이 된다. 일단 반란을 일으키고나서 한왕에 오르고 다시 황제에 올랐는데, 더 이상 감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왜 패현의 풍읍 중양리에 살고 있던 유태공은 감히 유온의 신분을 폭로하지 못했을까, 반란을 일으키고 나서도 감히 말하지 못하고, 유방이 황제에 오르고 난 후에도 죽을 때까지 비밀을 감추고있었을까?


3. 유방의 생부는 누구인가?


우리는 알고 있다. 유태공은 그저 유방의 양부라는 것을. <사기.고조본기>에 기록된 '용교'는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유온이 성교하여 임신하고 그리고 유방을 낳게 된 것은 유태공이 아니라는 것을. 유태공은 그저 방관자이다. '태공왕시' 나아가, 유태공이 유방의 생무라면, 분명 대노했을 일이다. 신하가 감히 이런 멸문지화를 불러올 내용을 쓰지 못했을 것이고, 유방의 자손들은 즉시 그 기록을 없애버렸을 것이다. 


여러 사료는 유태공이 양부라는 것을 증명해준다.


첫째. <사기.초원왕세가>: "초원왕 유교는 고조의 동모소제(同母少弟)이다." 특별히 '동모소제'라고 명확히 했다. 즉 여기에 숨은 뜻은 부친이 다르다는 것이다. 즉, 유방의 모친 요온은 유태공과 자서 유교를 낳기 전에,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 유방을 낳았다는 것이다. 유방의 생부는 따로 있다는 말이다.


둘째. 유태공이 한10년 칠월에 사망하는데, 유방은 장안에 있으면서 장례식에 가지 않는다. 유방만이 아니라, 여러 아들들도 가지 않는다. 그저 유방의 동생 유교만 불원천리 초나라땅에서 와서 장례에 참가한다. 이것은 상리에 맞는다. 유태공은 그저 유방의 양부일 뿐이다. 유방과 그의 아들들은 유태공와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다. 그러나 유교는 유태공의 친아들이다.


셋째. 유방이 장안으로 가고, 유태공은 여읍에 거주한다. 여읍이 어디인가? 바로 진시황릉이 있는 곳이다. 어찌 황제가 자신의 부친을 진시황릉을 지키도록 보낼 수 있을 것인가? <경서잡기>에는 이렇게 적고있다: "고조가 신풍을 만들어, 여러 옛고향사람들을 불러오니, 태상황이 기뻐했다." <한서.지리지>의 주석에 신풍을 이렇게 말한다: "신풍. 여산이 남쪽에 있다. 옛 여융국 자리이고, 진나라때는 여읍이라 한다. 고조7년에 설치한다." <사기.고조본기>에는 이렇게 적었다. 비록 유방7년에 신풍을 두었지만, 태상황이 구조한 기간동안 그곳은 계속 여읍이라고 불리웠다. 태상황이 죽은 후에 비로소 신풍이라고 개명한다. "칠월, 태상황이 역양궁에서 사망한다. 초왕, 양왕이 와서 장례를 치른다. 역양의 죄수를 사면한다. 그리고 여읍을 신풍으로 개명한다."


그럼 이제 물어보는 수밖에 없다. 유방의 생부는 누구인가?


인류가 모계사회를 벗어나 부계사회로 들어선 후, 그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부친이 누구인지 모르는 황제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같이 반란을 일으켜 황제에 오른 주원장과 비교하더라고, 어려서 부모를 잃고 절로 들어가 중이 되었는데, 사서에는 명확하게 그의 생부를 기록하고 있다: "부친 세진은..."


왜 유방은 생부가 없을까? 왜 유방의 생부는 유온보다도 더 신비할까?


유방의 모친은 어찌되었건 소황에 묘라고 남겼다. 그러나 유방의 생부는 이름도 성도 없고,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유방이 50살이 되어도 모친에게 생부가 누구인지 물어보지 못했을까? 그 시대에 처와 첩을 거느리는 것이 불법도 아니다. 창피한 일도 아니다. 유방 자신도 혼외정사로 아이를 낳았다. 조부인과의 사이에 장남 유비(劉肥)를 낳은 바 있다. 어떤 생부이길래 유방은 어려서부터 죽을 때까지 숨겨야 했을까? 평민에서 반란을 일으켜 한왕이 되고, 황제가 되어서까지 숨겨야 했을까? 은혜를 갚는 일조차 하지 않았을가?


앞에서 유방이 모친에 대하여 여러 신하들의 의심의 눈초리를 받으면서도 소령부인으로 책봉하고, 태상황후나 황태후로 보하지 않았는데, 왜 그랬을까? 이것을 가지고 이렇게 추단할 수 있지 않을까? 유방이 보기에, 자신의 생부의 소령부인이 되는 것이, 그 가짜 태상황후보다 존귀하고 정통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