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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명왕조 4대총비 (2): 만귀비(萬貴妃)

by 중은우시 2018. 9. 30.

글: 접련화(蝶戀花)


명나라의 황후는 절대다수가 모두 평민출신이다. 단지 2명의 신분이 고귀했다. 한 명은 주체의 황후인 중산왕 서달(徐達)의 딸인 서씨이고, 또 다른 한 명은 명헌종(明憲宗)의 폐후(廢后)인 회녕후(懷寧侯) 손당(孫堂)의 외생녀(外甥女) 오씨(吳氏)이다. 주체와 서황후는 사랑이 깊었으나, 오황후는 겨우 중년의 궁녀 만정아(萬貞兒)를 때렸다는 것으로 인하여 주견심(朱見深)에게 폐위당한다. 이건 어떻게 된 일일까?


토목보의 변 이후에, 주기진은 오이라트에 잡혀갔으므로, 손태후는 성왕 주기옥(朱祁鈺)을 잠시 황제의 자리에 앉힌다. 그리고 나이 겨우 2살된 주견심을 태자에 앉혔다. 그리고 19살된 만정아를 보내어 어린 주견심을 돌봐주도록 한다. 나중에 경태제 주기옥이 주견심을 태자의 자리에서 폐하고, 기왕(沂王)으로 봉한다. 하루종일 불안하게 사는 동안에, 주견심은 말을 더듬는 버릇이 생겼다. 이것만 보아도 그가 받은 정신적 압박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때 그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돌봐준 사람이 만정아이다. 그녀는 어린 주견심의 기거를 돌봐주는 사람일 뿐아니라, 안위를 책임지는 보호자였다. 바로 이런 특수한 의존관계는 주견심으로 하여금 궁녀 만정아에게 완전히 의지하고 조금이라도 떨어질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나중에 명영종이 복벽하고나서 10살된 주견심은 다시 태자의 자리에 복귀한다. 주견심은 원래 환난을 같이 겪은 만정아를 자신의 태자비로 삼고 싶어했다. 그러나 만정아는 궁녀출신인데다가 나이도 주견심보다 17살이 많았다. 그리하여 부친 명영종의 반대에 부닥친다. 태자선혼은 여러차례의 선발을 거쳐서 순천 오씨가 "총명하고 글을 알며, 북과 금에 능하다"는 점으로 명영종이 임종전에 태자비로 점지한다.


황후에 오른지 얼마되지 않은 오황후는 나이가 어려서 만정아가 주견심의 마음 속에 어떤 지위를 차지하는지를 전혀 몰랐다. 만정아는 당시에 그저 명분이 없는 궁녀신분이었다. 그러나 주견심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었다. 만정아가 총애를 믿고 교만하자, 오황후는 황후의 신분으로 무례한 궁녀 만씨에게 장형(杖刑)을 내린다. 만정아가 얻어맞자 주견심이 분노하여, 애인을 위하여 화를 풀어준다. 주견심은 오황후를  폐위할 것을 고집한다. 그러나 명영종의 황후인 전씨 반대에 부닥친다. 그러나 주견심의 생모인 강인한 성격의 주귀비(周貴妃)는 이 기회를 틈타 전황후를 억누르고 자신의 위신을 수립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극력 아들을 지지한다. 주귀비와 주견심 모자가 고집을 부리자 전황후는 어쩔 수 없이 타협하게 된다. 그리하여 주견심은 "선제가 이미 왕씨로 정했었다"는 거짓말을 내세우며, 사례태감 우옥(牛玉)이 교지를 고쳐서 오씨가 태자비에 올랐다 한다. 그리고 우옥을 고문하여 자백을 받아내고, 오씨를 폐위시킨다. 이어서 오씨일가의 작위도 박탈한다. 주견심은 원래 이 기회에 만정아를 황후로 삼고자 했지만, 모친 주귀비가 극력 반대하여, 할 수 없이 원래 태자비때 최후의 3명에 뽑혔던 왕씨를 황후로 삼게 된다.


오황후가 폐위된 것아 조정에서 기회를 노리던 사람들에게는 경쟁자를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긴다. 그리하여 남경금사중 왕휘(王徽), 왕연(王淵), 주관(朱寬), 이고(李翱), 이균(李鈞)은 이 기회에 우옥(牛玉)과 이현(李賢)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다: "황제께서 태감 우옥이 선제의 유언을 위조하여 황후를 바꾸어버린 기군대죄를 발견하였으면, 반드시 그를 죽여야 할 것입니다. 폐하는 어찌 우옥을 효릉으로 보내어 농사를 짓는 벌만 내리셨습니까. 이것은 법에 맞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면 어찌 폐하 신변의 사람들이 겁을 먹겠습니까. 그리고 반드시 다른 관리들의 죄과도 추궁하셔야 합니다. 당시 선혼을 책임진 대학사 이현은 일을 잘못처리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현도 당파를 결성하여 황제를 속인 죄를 물으십시오, 그래야 마음 속에 불충한 생각을 품은 대신들에게 교훈이 될 것입니다."


원래 사례태감 우옥이 성지를 위조했다는 것은 명헌종이 오황후를 폐위시키기 위하여 만들어낸 날조일 뿐이다. 명헌종은 고문을 통해서 자백까지 하게 만든 우옥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 일을 확대시키는 것은 전혀 원치 않았다. 대신들이 다시는 이 일로 말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명헌종은 상소를 올린, 왕휘, 왕연, 주관, 이고, 이균등을 변방으로 유배보낸다. 이런 처리를 보면 역으로 우옥과 오황후는 억울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때부터 세상 사람들은 만정아가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새로 황후에 오른 왕황후는 감히 궁녀 만정아를 건드리지 못하게 된다.


오황후의 폐후사건을 보았으므로, 왕황후는 자연히 만씨와 총애를 다투려고 하지 않는다. 서원에 놀러 나갈 때도 만정아의 가마가 앞서고 왕황후의 가마가 뒤를 따랐다. 하사품이나 음식에서 황후보다 만귀비를 많이 주어도 황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렇게 처신을 잘 하였기 때문에 왕황후는 황후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만일 만정아를 황제로 앉히려는 것에 반대하는 주태후가 주견심보다 먼저 죽었다면, 왕황후가 아무리 조심스럽게 처신한다고 하더라도 황후의 자리를 보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죄유록>에는 "왕황후는 평생동안 황제를 모신 것이 10번도 되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보더라도 만정아의 총애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주견심이 만정아를 황후로 앉히려는 시도는 계속 실패한다. 그러나 그에게도 방법이 있었다. 무슨 방법이냐고 모빙자귀(母憑子貴). 만정아로 하여금 자신의 장남을 낳게 하려 했다. 이 목표를 위하여 주견심은 궁녀 만정아만을 총애했다. 후비들은 황제와 잠자리를 같이하는 것이 드물었다. 마침내 궁녀 만정아는 황장자를 낳는다. "성화2년 정월 임술, 황장자를 만씨가 낳는다." 명헌종은 기뻐서 어쩔 줄 모르면서, 즉시 만정아를 궁녀에서 귀비로 올려준다. 그러나 만정아의 아들은 겨우 10달만에 요절하고 만다. 비록 명헌종이 여전히 만귀비만을 총애했지만, 유감스럽게도 만귀비는 이미 나이가 많았다. 더 이상 자식을 낳지 못한다.


이미 생육기를 넘긴 만정아에게서 아들을 낳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려워지자, 주견심은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을 아들을 낳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백비(柏妃)가 아들을 낳는다. 그러나 만귀비가 상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주견심은 대신들이 청했지만, 아들의 출생을 알리지 못하게 한다. 그리하여 백비는 아들을 낳고도 승급을 하지 못한다.


백비는 보통의 궁녀가 아니었다. 원래 '1후2비'로 뽑힌 지위가 있는 후비였다. 만귀비로서는 일을 벌이기 어려웠다. 그러나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명헌종은 몰래 여사(女史) 기씨(紀氏)를 품어서 회임하게 한다. 만귀비는 기씨의 배가 불러오는 것을 보자, 대노한다. 기씨는 명분이 있는 비빈이 아니었다. 그래서 만귀비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기여사를 벌준다. 그러나 그렇게 하여도 낙태되지 않았다.


<명사>를 포함한 여러 사서에서는 명헌종이 기씨가 임신해서 자식을 낳은 것을 몰랐다고 적었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이다. 만귀비를 사랑하면서도 무서워했던 명헌종은 만귀비가 분노한 것을 보자 기씨의 배가 부른 것은 임신이 아니고, 배에 병이 들어서 부른 것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그후에 몰래 임신한 기씨를 안락당으로 보낸다. 그리고 누구도 만귀비에게 이 일을 고하지 말도록 명한다. 이렇게 하여 이 일을 명헌종이 감출 수 있었던 것이다. 태감 장민(張敏)과 오폐후의 주도면밀한 보호와 보살핌으로 안락당에 버려진 기씨모자는 마침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 후의 5,6년간 명헌종은 만귀비 이외의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서 지낸다. 그러나 성화11년(1475년) 오월에 변화가 발생난다. 그런데 이것은 또한 성화8년(1472년) 정월에 백현비가 낳은 황이자(皇二子)의 요절부터 얘기해야 한다.


성화7년(1471년) 십일월 갑인일, 명헌종은 황이자를 태자에 봉한다. 그러나 황이자는 태자가 된 후 2달도 되지 않아 천화(천연두)로 요절하고 만다. 황삼자(皇三子)를 기르고 있던 사람들은 이제 황삼자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낼 때가 되었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황삼자의 소식을 궁밖으로 퍼트리기 시작한다. 수보(首輔) 팽시(彭時)는 명헌종에게 황삼자의 신분을 공개할 것을 청한다. 그러나 명헌종은 만귀비가 이 일을 알까봐 겁낸다. 팽시등은 황삼자의 일로 명헌종과 만귀비에게 밉보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다시는 이 일을 거론하지 않고, 누군가 나서주기를 기다린다. 2,3년이 지났다. 보신(輔臣)들이 나서지 않으려 하는 것을 보자, 결국 참지 못하고 나서는 사람이 나온다. 그는 바로 황삼자를 돌보고 있던 태감 장민이었다! 황삼자의 신분공개를 더 이상 미루게 되면, 출신이 미천한 황삼자가 명헌종의 인정을 받을 가능성이 없어진다고 여겼다. 그렇게 되면 황삼자는 그대로 묻히고, 자신의 고생도 수포로 돌아간다고 여겼다. 그래서 장민은 도박을 건다. 그는 이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은 만귀비라고 여긴다. 그리하여 돈을 많이 써서 만귀비의 심복인 태감 단영(段英)을 매수한다. 성화11년 오월 십구일 아침, 단영은 황삼자의 존재를 만귀비에게 알리고, 교묘한 말로 설득한다. 만귀비는 이를 듣고, 자신은 이미 자식을 낳을 수 없고, 주견심에게는 대통을 이을 아들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만일 자신이 이 아이를 직접 기를 수 있다면, 태자의 양모 신분으로 '모빙자귀'할 수 있다고 여긴다. 이렇게 결정을 내린 만귀비는 명헌종에게 황삼자를 인정하도록 말한다. 그리고 이름을 주우탱(朱祐樘)으로 짓는다. 그리고 만귀비가 친히 기르며, 태자로 세울 준비를 한다. 그러나 대신들은 날씨가 덥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명헌종에게 가을이 되어 선선해지면 태자로 책봉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고, 명헌종도 동의한다.


각신(閣臣) 상로(商輅)는 황제가 황삼자를 궁중에 머물게 하면서, 기비(紀妃)는 여전히 서내(西內)에 거주하고 있었다. 상로는 다른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하여 이렇게 상소를 올린다: "만귀비께서 친히 길러주시고 잘 보호하고, 두텁게 사랑하는 것이 자신의 친아들보다 더하다. 이는 내외의 신하들과 도성의 백성들이 모두 듣고는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만귀비가 현숙하여 비할 바 없으니, 종사의 무궁한 복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밖에서는 이런 말도 한다. 황자의 모친이 병으로 딴 곳에 머물며,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 이는 인정에 맞지 않는다. 황상께서 모친을 가까운 곳에 거주하게 하여, 황자는 여전히 만귀비가 양육하면서 조석으로 생모를 만날 수 있게 하여 모자간의 정을 나누게 하십시오."


그러나, 일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바뀌고, 대신들이 후회막급하게 된다.


명헌종은 비빈이 많았지만, 자식을 많이 낳지 못했다. 주태후는 이를 만귀비와 관련이 있다고 여기고, 겨우 얻은 황삼자에게 불측의 사태가 생길 것을 우려했다. 그리하여 며칠이 지나지 않아 주우탱을 만귀비의 소덕궁에서 데려가 자신이 직접 기르게 된다. 그리고 사사건건 자신이 직접 처리하여 한치의 소홀함도 없도록 한다. 이로 인하여 만귀비는 수치를 느끼면서 또한 겁이 났다. 양모의 신분을 잃은 만귀비는 이로 인하여 명헌종이 주우탱을 태자로 앉히는 것을 원치 않게 된다.


상황이 바뀐 것을 눈치챈 대신들은 후회를 금치 못하면서 더 이상 날씨가 덥고 말고를 따질 것없이 급히 육월 초칠일에 상소를 올려 명헌종에게 태자를 책봉하자고 재촉한다. 그러나 명헌종은 황자가 더 자란 후에 보자는 핑계를 대며 미룬다.


만귀비는 주우탱의 양육권을 잃은 후, 특별히 기씨에게 황태후나 황후만이 입을 수 있는 황포를 내릴 것을 청한다. 그리고 이는 기씨가 살아 있을 때 황포를 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이것에 대하여 만귀비가 기씨를 협박한 것으로 이해했다: "황포를 입고 황후, 황태후가 되고 싶으냐. 네가 살아서는 어림도 없다!" 그후 명헌종은 더 이상 의원을 보내어 치료해주지 않는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기씨가 죽는다. 기씨는 죽은 후 3일만에 장례를 치르고 숙비(淑妃)로 추봉한다. 이를 보면 명헌종의 기씨모자에 대한 태도는 모두 만귀비의 뜻에 따라 좋았다가 나빠졌다 했음을 알 수 있다. 만귀비가 황포를 내려달라고 청한 괴이한 거동과  얼마후 기씨가 사망한 것을 엮어서 사람들은 속속 기씨가 만귀비에 의하여 독살되었다고 말한다.


기씨가 죽은 후 5개월이 지난 십일월, 대신들의 재촉하에 주우탱은 마침내 황태자로 책봉된다.


주우탱을 주태후가 데려간 후, 만귀비는 주태후가 자신을 의심한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내심 두려워진 만귀비는 더 이상 명헌종의 성생활을 단속하지 못한다. 주태후가 얼마나 대단한 여인인가. 하물며 주우탱은 미래의 황제가 아닌가. 이 두 사람이 그녀를 의심하고 미워한다면,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원래, 주태후는 명영종이 생전에 전태후를 사랑하였던 것에 대한 질투심에서, 그리고 자신의 위신을 세우기 위하여 고의로 만정아를 지지하고, 오황후를 폐위시키는데 동의했었는데, 어찌 그녀가 이렇게 총애를 독점하며 교만해질 줄 알았겠는가. 만일 주견심마저도 그녀가 너무 심하게 단속하여 기분나빠지고 더 이상 그녀를 찾지 않는다면, 이미 주태후와 황태자에게 미움을 산 그녀로서는 처지가 더욱 위험해질 터였다.


이렇게 하여 만귀비는 명헌종을 풀어주게 되고, 이때부터 행복한 후궁생활을 즐기게 된다. 황삼자 주우탱이 황태자에 오른 후, 명헌종의 생육율은 급상승한다. 짧은 12년만에 11명의 황자와 6명의 공주를 얻는다. 앞의 12년간 모두 3명밖에 얻지 못했는데, 뒤의 12년간은 1년에 평균 1.5명을 낳는다. 명나라에서 자식을 많이 둔 황제가 된다. 황사자 흥헌왕 주우원(朱祐杬)이 성화12년 칠월 초이틀에 태어나는데, 10개월간 임신하는 것으로 계산하면 성화11년 칠월이후이다. 명헌종은 이때부터 풀리게 된 것이다.


만귀비는 황태자 주우탱이 그녀를 배척하는 것을 보고 겁을 냈고, 마찬가지로 나중에 황태자에게 청산당할 우려에 처한 양방(梁芳)등은 만귀비를 시켜 명헌종에게 주우탱을 황태자에서 폐위시키고 흥원왕을 황태자로 세우도록 멀한다. 그러나 명헌종이 황태자교체의도는 사례감장인태감 회은(懷恩)의 결사반대에 부닥치고, 만귀비의 편에 서 있던 수보 만안(萬安)등도 소극적이었다. 바로 이때 국가권력을 상징하는 태산(泰山)에 지진이 발생한다.


흠천감에서는 점을 친 후에 상소를 올린다:" 태산이 연속하여 지진이 일어난 것은 하늘이 경고하는 것이라고. 만일 태자를 바꾸면 반드시 동란이 일어날 것이다. 명헌종은 겁을 먹고 더 이상 황태자 폐위에 관한 말을 올리지 못하게 명한다. 주우탱의 황태자 자리는 이렇게 하늘의 도움으로 지킬 수 있었다.


<명사>에서는 만귀비의 악독한 행동을 과장하여 적었고, 명헌종이 황삼자에 대한 것을 전혀 몰랐고, 태감 장민이 박해를 받았다고 적었다. 한편으로 유가의 존처폄첩(尊妻貶妾)의 이념의 필요에 의해서 다른 한편으로 당시 사람들이 만귀비의 편에 붙은 왕직, 만안등을 미워하는 것이 반영되었다. 확실히 만귀비의 질투와 교만횡행과 명효종의 모친 기씨의 죽음은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 그러나 만귀비의 행위는 모두 명헌종의 묵인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강인한 주태후가 살아있으니 만귀비로서는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주견심이 다른 여인을 만나지 못하도록 하고, 임신한 기여사를 때리기도 했지만, 명분이 있는 후궁에 대하여는 감히 쉽게 손을 쓰지 못했다.


사계좌(査繼佐)의 <죄유록>에는 만귀비가 "모웅성거(貌雄聲巨), 류남자(類男子)"(모습이 남자같고 목소리가 커서 남자같았다). 미모도 아니었다. 그래서 주귀비가 아들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그녀가 어디가 예뻐서 승은을 많이 내리느냐?" 이에 대한 주견심의 대답은 이러했다: "그녀가 나를 쓰다듬어주면 내가 편안합니다. 용모때문이 아닙니다." 어려서부터 오랫동안 두려움 속에서 생활하다보니, 주견심은 말을 더듬는 버릇이 생겼을 뿐아니라, 어른이 되어 일국의 황제가 된 후에도 극도의 불안감을 보인다. 만귀비가 죽은 후, 명헌종은 7일간 조회를 열지 않고, "만비가 갔으니, 내가 어찌 더 오래 있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리고 몇 달 후에 따라 죽는다.


명헌종은 만귀비에게 "공숙단신영정황귀비(恭肅端愼榮靖皇貴妃)"라는 시호를 내린다. 이것은 명나라에서 처음으로 '황귀비'라는 칭호를 지어준 것이다. 이는 명헌종이 자신의 마음 속의 황후인 만정아에게 붙여준 특수한 영예칭호이다. 그리고 그는 황귀비 만정아를 황후의 예제로 장례를 치르도록 명하나. 대신들의 반대에 부닥친다. 명헌종이 이렇게 한 것은 그가 죽은 후에 만귀비와 합장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명나라에는 황후와 황제만이 합장된다. 유일한 예외는 귀비 전수영과 숭정제가 합장된 것인데, 이는 완전히 하늘의 명이다. 숭정제와 주황후가 죽은 후에 갈 곳이 없어서 할 수 없이 전귀비의 묘에 들어가게 된 것이니까. 명헌종과 만귀비는 이십사년간 고심하며 노력했지만, 생전에는 황후로 봉하지 못했고, 죽어서는 합장되지 못했다. 황귀비 만정아가 죽은지 8개월이 지난 성화23년 팔월 이십이일, 애인과 같은 묘에 합장되지 못한 명헌종 주견심은 유감을 품고 죽는다. 결국 명헌종과 합장된 것은 계후인 왕황후와 살아서 황포를 입지 못했던 기씨이다.


오황후는 비록 억울하게 폐위되었지만, 우연히도 기씨와 이웃이 되어, 그녀는 기씨모자를 보살펴주었다. 명효종은 그녀에 대하여 평생동안 고마워했다. 비록 명효종이 오씨의 황후 지위를 회복시키려 했지만, 계후인 왕황후의 반대에 부닥친다. 그러나 효종은 시종 태후의 예로 그녀를 보살펴주었다. 이는 하늘이 그녀의 불행에 대한 연민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폐후에 대하여는 감격하고 존중해주었지만, 만귀비에 대하여는 절치부심했다. 비록 부친과 조모의 체면을 봐서 추궁하지는 않았지만, 만귀비의 동생 만희(萬喜)등의 관직, 부동산과 금은을 회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