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명왕조 4대총비(1): 손귀비(孫貴妃)

중은우시 2018. 9. 28. 18:58

글: 접련화(蝶戀花)


명나라때 가장 유명한 총비(寵妃)는 4명이 있다. 시간순서대로 말하자면 명선종(明宣宗)의 손귀비, 명헌종(明憲宗)의 만귀비(萬貴妃), 명신종(明神宗)의 정귀비(鄭貴妃)와 명사종(明思宗)의 전수영(田秀英)이다. 비록 그녀들은 사관의 글에서는 총비이지만, 실제로는 크게 차이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왜곡된 부분들이 있다. 오늘은 손귀비에 대하여 얘기해보기로 한다.


<명사.후비전>에서는 모두 4명의 비빈에 대하여 미모를 칭찬했다. "명선종 효공황후 손씨, 어려서 미색이 있었다(幼有美色)"; "헌종비 효혜소태후는 용색(容色)이 있었다"; "가정제의 조비(曹妃)는 색(色)이 있었다"; "명사종의 전비는 섬연(纖姸)하고, 성격상 말이 적었으며, 재주가 있었다." 손귀비는 4대미인에 들어갔고, '어려서 미색이 있었다'는 것은 바로 나이가 어린 손씨가 아주 예뻤기 때문에, 명인종의 장황후(張皇后)(명인종이 당시에는 아직 태자였다)의 모친인 팽성백(彭城伯) 부인의 눈에 바로 들어서, 그녀가 극력 당시의 황제인 주체에게 추천하게 된다. 그리하여 나이 겨우 10살된 손씨는 궁에 들어가서, 황손(皇孫) 주첨기(朱瞻基)의 동양식(童養媳)으로 궁안에서 자란다. 모든 사람들의 눈에 미모의 손씨는 미래의 황후였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일이 발생한다. 원래 확정된 것처럼 보였던 일에 문제가 생긴다. 아마도 누군가가 주체에게 주원장이 정한 원칙을 얘기하며 권했을 수도 있다: "무릇 천자, 친왕의 후, 비, 궁빈은 신중하게 양가집 딸중에서 선발해야 하고, 바치는 자를 받지 않는다."는 규칙이다. 황손 주첨기의 혼인연령이 되자, 주체는 돌연 생각을 바꾸어, 조서를 내려 주첨기를 위하여 선혼(選婚)을 하겠다고 공표한다. 그리하여 명나라 최초의 상서(祥瑞)황후가 등장한다. 그녀는 바로 호선상(胡善祥)이다.


주체가 조서를 내려 황태손의 혼처를 선발하겠다고 할 때, 사천감(司天監)에서는 바로 상소를 올려 비범한 성기(星氣)가 제녕(濟寧)에 출현했으니 황태손비로 '하늘의 명을 받은 여인'이 제녕이 있다고 아뢴다. 주체는 그 말을 듣고, 하늘이 성기로 알려주었으면 굳이 선발할 필요가 없겠다고 결정하고, 직접 사람을 제녕으로 보내어 하늘의 명을 받은 황태손비를 데려오게 한다. 그리하여, 명목상으로는 조서를 내려 선발한 것인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사천감이 황후를 정한 것이다. 이 호선상은 배경이 만만치 않았다. 그녀의 언니인 호선위(胡善圍)는 궁중의 지위가 높은 여관(女官)이었다. 부친인 호영(胡榮)은 금의위지휘(錦衣衛指揮)였다.


사천감이 말한 성기(星氣)는 성상(星象)이 아니었다. 성상은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유소비(劉昭妃)가 천계제의 후로 선발되는 날 천상은 계속하여 경계를 발했다. 대낮에 태양에 검은 기운이 있고, 저녁에는 동방에서 붉은 별이 출현한다. 이렇게 대흉의 천상은 조야를 깜짝 놀라게 했다. 전비(田妃)가 죽었을 때도 '국파군망(國破君亡)'의 징조가 있었다. "돌연 공중에서 큰 벽돌이 대전앞으로 날아왔다. 연속하여 열일곱개가 날아온 후에 멈추었다." "임자년 황귀비 전씨를 장례지냈다. 밤에 별이 달의 가운데로 들어갔다. 점을 치니 말하기를, '국파군망'이라 했다." 이것은 모두 누구나 볼 수 있는 진정한 하늘의 계시인 성상이다. 소위 '성기'의 기(氣)는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다. 검증이 불가능한 것이다. 성기라고 하는 것은 그저 큰 이익을 얻기 위하여 호선상의 언니와 부친이 사천감과 결탁하여 만들어낸 말일 뿐인 것이다.


이렇게 하여 사천감이 지정한 '상서' 호선상이 황태손 주첨기의 정비(正妃)가 된다. 몇년전에 원래 정비로 예정되었고, 일찌감치 궁중에서 주첨기와 청매죽마로 자란 손씨는 그저 빈(嬪)으로 봉해질 수밖에 없었다. 만일 호선상이 정상적인 선비(選妃)절차를 통하여 선발되었다면, 8개의 관문을 하나하나 거쳐서 올라왔다면, 분명히 재능과 용모가 뛰어났을 것이고,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호선상은 선발된 것이 아니라, 사천감이 검증할 수 없는 상서로운 기운을 지녔다는 것으로 직접 뽑혔다. 그래서 정당한 방법으로 오른 것이 아니었다. 자연히 재능과 용모가 다른 여인들보다 뛰어나지 못했다. 미모가 뛰어났던 손씨와는 비교할 수가 없었고, 사람들은 그녀를 인정하지 않았다. 부정한 방법으로 용모와 재능에서도 손색이 있는 호선상이 용모가 뛰어난 손씨의 자리를 차지한 것에 대하여 주체의 장모인 손씨를 좋아하는 팽성백부인이 불만을 갖는다. 그리하여 자주 딸인 장황후에게 원망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호선상은 장황후의 환심을 샀고, 장황후는 팽성백부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나 명인종은 호선상이 부정한 방법으로 자리를 차지했고, 손씨가 억울하다고 여겨서, 주체가 죽은 후에 황위를 이어받은 송인종은 태자비를 책봉할 때, 손빈에게 태자비 호선상과 같은 관복을 입게 했다. 이는 명인종이 호선상을 공개적으로 부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명인종이 죽은 후 주첨기가 등극한다. 모친 장황후를 황태후로 모시고, 다시 이 일을 거론한다. 그러나 장태후는 이렇게 명을 내린다: "두 사람의 자리는 정해진지 오래 되었으니, 다시 논의할 수 없다." 그리고 호선상을 황후로 책봉하고, 손씨를 귀비로 책봉하도록 고집한다. 주첨기는 어쩔 수 없이 모친의 명을 따른다. 자신이 사랑하는 손씨를 황후로 세울 수는 없었지만, 손씨에게 예제를 벗어나 특별한 대우를 하게 할 수는 있었다. 명나라는 원래 황후를 책봉할 때만 금보금책(金寶金冊)을 사용했고, 황귀비에게는 그저 금책무보(金冊無寶)였다. 그러나 주첨기는 손씨에게 황후와 같은 금보금책을 내린다. 이뿐 아니라, 주첨기는 손귀비의 가족들에게 호선상의 가족들보다 높은 대우를 해주었다. 손귀비의 부친인 손충은 15등급을 올려서 종9품에서 정2품이 되도록 한다. 두 오빠인 손계종과 손소종은 백정에서 정3품으로 올려준다; 그러나 호선상의 부친 호영은 종3품에서 정2품으로 올라서 겨우 3급이 올랐고, 그녀의 오빠인 호안은 정4품을 그대로 유지하여, 1급도 올려주지 않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손귀비는 황후의 명호를 가지지 않았을 뿐, 모든 대우는 황후와 같거나 더 높았다.


다만, 이것으로 충분할까? 호선상은 상서를 위조하여 부정한 방법으로 남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는 주첨기의 마음 속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주첨기는 계속하여 기회를 엿본다. 그는 반드시 청매죽마인 손씨를 진정한 황후에 앉히려 했다. 손씨에게 그녀가 원래 가져야했던 것을 돌려주려 한 것이다. 여기에는 장태후가 문제였다. 황후폐위를 반대하는 장태후는 성격이 강한 인물이다. 장태후는 시아버지인 주체로부터 현혜대도(賢惠大度)하다고 칭찬을 받았지만, 명인종이 죽은 후 명인종이 총애하던 아들 셋을 낳고 집안이 후작의 작위를 받은 훈구대신의 딸이면서 법도에 따르면 순장하지 않아야할 곽귀비를 순장시킨다. 그리고 곽귀비의 장남인 이미 17살된 등회왕 주첨개도 1달후에 급사하고 철번된다. 주원장이 정했던 후궁순장제도는 이러했다: 귀비등 고급명호를 가진 경우나, 아들을 낳거나 아들이 번에 봉해진 경우, 혹은 친정이 원래 공훈이 있는 경우에는 모두 순장대상에서 제외된다. 부친이 총애하던 곽귀비 모자가 이렇게 잔혹한 박해를 받는 것을 보자, 주첨기는 겉으로 보기에 현숙해 보이지만 부정한 수단으로 황후에 오른 호선상에 대하여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일막이 나중에 자신이 사랑하는 손귀비에게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고 손귀비 모자가 자신의 사후에 호선상의 박해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명선종은 호선상을 황후에서 끌어내릴 결심을 한다.


선덕2년 십일월, 손귀비는 이미 서른이 된 명선종을 위하여 장남 주기진(朱祁鎭)을 낳는다. 그러나 호선상은 딸만 둘을 낳았을 뿐이다. '하늘이 정해주었다'는 호선상을 하늘이 돌봐주지 않은 것이다. 아무리 해도 아들을 낳지 못했던 것이다. 장남이 출생하자 기회를 찾던 명선종은 과감하게 손을 쓴다.


얼마 후, 박력있는 명선종은 태어난지 겨우 4개월된 주기진을 황태자에 봉한다. 그리고 황태자책봉대전에서 손귀비에게 황후의 예우를 해준다.


그 후에, 명선종은 신하를 불러서 폐후를 결으한다. 호선상은 '명에 아들이 없다(命中無子)'고 한 것이다. 이는 주첨기가 호선상의 소위 '천명상서'를 비웃은 것이다. 총명한 선덕제는 상대의 방식대로 상대를 처리한다. 천명을 들이밀어 황후에 오른 호선상으로서는 뭐라고 할 말이 없게 된 것이다. 신하들도 반박할 방법이 없었다. 주첨기의 의지가 굳은 것을 보자, 신하들도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호선상의 체면을 생각하여, 폐위시키지 말고, 호선상으로 하여금 스스로 물러나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명선종에게 호선상에게 황후와 동일한 대우를 유지해줄 것을 요구한다. 이렇게 하여 호선상은 스스로 황후에서 물러나겠다는 글을 올리고, 주첨기는 마침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손씨를 자신의 황후로 앉힐 수 있었다.


그러나, 장황후는 아들이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에 불만을 있었고, 황후를 폐위시킨 것에 불만이 컸다. 그리하여 그녀는 호선상을 자신의 청녕궁(淸寧宮)으로 불러서 거주하도록 하고, 고의로 매번 궁중연회때 폐후인 호선상을 손황후보다 윗자리에 앉게 한다. 손황후를 난감하게 만드는 것이다. 


비록 주첨기는 장태후가 손황후를 계속하여 모욕하는 것을 저지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그의 방식으로 천하에 그의 손황후에 대한 총애를 선언한다. 손황후를 위하여 계속하여 법도를 깬다. 명선종은 명나라때 군공이 없으면 작위를 받을 수 없다는 규정을 깨고, 손황후의 부친인 손충을 영록대부, 주국, 백작의 3개 직위에 봉한다. 그리고 삼대를 추봉하고 세습하게 한다. 삼대만이 아니라 계속하여.


명선종은 자주 손황후의 모친을 입궁시켜 딸과 만날 수 있도록 하고, 상을 많이 하사했다. 더더구나 친히 손황후를 데리고 친정집에 가기도 했다. 이것은 명나라때 유일무이한 경우이다. 명선종은 죽기 전에도 여전히 자신이 사랑하는 손황후가 사후에 무슨 일을 당할까봐, 특별히 손황후를 위하여 유조를 남긴다: "집안과 나라의 중대한 일은 반드시 황태후, 황후에게 보고한 후에 시행하라." 바로 이런 유조가 있었기 때문에, 손황후는 명선종의 사후에도 장태후의 비난을 받지 않을 뿐아니라, 이로 인하여 나중의 정치풍파에서도 보장을 받게 된다. 


명선종이 유조로 권한을 주었기 때문에 손태후는 '토목보의 변'과 '탈문지변'을 거치면서 명나라의 통치와 국가안정을 유지하는데 역할을 했다. 더더구나 명영종으로 하여금 참혹하고 비인간적인 순장제도를 폐지하도록 하였으니, 공덕이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는 증명한다: 명선종은 잘못보지 않았다. 손귀비는 확실히 그가 말한대로, "덕의지무(德義之茂), 관어후궁(冠於後宮)"


그러나 명선종과 청매죽마인 손귀비의 사랑은 후안무치한 소인배들에 의하여 폄훼된다. <명사>에는 "손귀비가 자식이 없었다. 몰래 궁녀의 자식을 자신의 자식으로 하였으니, 그가 명영종이다. 그리하여 총애를 더욱 받았다."라고 썼다. 이것은 완전한 날조이다. 명선종이 호황후를 폐위시키고 손황후를 세우는데 방해세력이 많았다. 특히 폐후를 반대하는 장태후는 아주 강경한 사람이다. 그런 장태후를 명선종과 손귀비가 무서워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임신은 열달이 필요하다. 며칠로 되는 것이 아니다. 궁안에는 이목이 많다. 어떻게 모두를 속인단 말인가. <명실록>에서는 분며히 명영종의 모후는 손황후라고 적었다. 소위 손귀비가 아들을 빼앗았다는 설은 그저 손귀비와 명선종을 폄훼하기 위하여 날조한 것일 뿐이다. 이런 황당한 거짓말이 명나라가 망한 후에 동림당의 황종희등에 의하여 만청의 관방에서 쓴 <명사>에 들어가게 된다.


어떤 사람은 왜 명영종이 나중에 호선상의 황후위를 복위시켰는지에 의문을 표시한다. 그것은 모친인 손귀비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이는 "손귀비가 몰래 궁녀의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삼았다"는 것과 관련이 있을까? 


이것은 명영종이 직면한 복잡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서 나온 것이다. 명영종은 토목보의 변으로 오이라트에 포로로 잡힌다.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처인 전황후(錢皇后)는 한편으로 궁안의 재산을 팔아서 명영종을 구할 돈을 마련하고, 다른 한편으로 밤낮으로 웅크리고 앉아서 울었다. 그리하여 다리 하나를 못쓰는 장애를 갖게 된다. 그리고 눈 하나도 실명한다. 나중에 명영종이 돌아오고나서도 경태제에 의하여 연금된다. 모친인 손태후와도 만나지 못한다. 이때 다시 전황후가 자주 남편을 위로하고, 여러 비를 데리고 바느질을 하고 베를 짜서 돈을 벌어서 살았다. 명영종은 전황후에게 고마워했고, 복벽한 후에 황태자의 생모인 주귀비를 황후로 앉히지 않고, 여전히 장애를 앓고 자식도 없는 전씨를 황후로 남겼다. 이는 명나라에서 태자의 생모가 아닌 첫번째 황후이다. 호선상이 아들을 낳지 못해서 황후에서 폐위된 선례가 있었기 때문에, 자식이 없는데다가 장애를 앓고 있던 전황후는 자신이 언젠가 아들이 없어서 폐위될까봐 걱정했다. 자신의 황후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전황후는 적극적으로 호선상의 복위를 추진한다. 그것은 무슨 출신문제를 발견해서가 아니라, 그저 사랑하는 처인 전씨의 황후 자리를 안정적으로 유지시켜주기 위함이다. 그래서 명영종은 그저 호선상에게 황후의 시호를 주고, 능침을 만들었지만, 부묘(합사)를 해주지는 않았다. 


청나라때 쓴 <명사>에는 이런 말이 있다: "(호)황후는 과실없이 폐위되었다. 천하가 듣고는 이를 안타까워했다. 명선종도 나중에는 후회했다. 일찌기 스스로 변명하여 말하기를: '이는 짐이 어렸을 때 한 일이다'라고 했다." 명선종이 호황후를 폐위시킨 것을 후회했고, 자신이 어릴 때 저지른 잘못된 결정이었다고 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사람을 속이는 거짓말이다. 호씨집단과 처첩정통제도를 고집하는 유학자들이 명선종을 폄훼한 것이다. 이는 청나라조정이 명나라황실을 폄훼하려는 의도와 맞아떨어져서 널리 확산된 것이다. 명선종은 손황후에 대하여 평생 애정이 깊었다. 죽을 때까지도 그녀를 보호할 방법을 강구했다. 그런데 무슨 후회를 한단 말인가.


상서로운 성기를 들어 황후에 오른 호황후는 2년간 황후로 있다가 물러났다. 나중에는 그녀의 뒤를 봐주는 장태후가 죽은 후에 우울해하면서 눈물을 흘리다가 죽는다. 명나라때의 <쌍괴세초>에는 이에 대하여 이렇게 적었다: "대관의 점이 모조리 맞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의 도는 가깝고, 하늘의 도는 멀다'" 기실 진상은 대관의 점이 맞지 않은 것이 아니라, 대관이 거짓말을 한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호선상은 구익부인의 재판이다. 상서를 날조하여 성공적으로 자리에 올랐지만, 결국은 총명한 군왕의 눈에 거짓이 들켜서 결국 쫓겨난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