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섬(殲)10B전투기(戰鬪機)
최근 들어 청왕조 및 그 문화에 관한 드라마가 이미 수도없이 많아졌다. 마치 오늘의 젊은이들은 모두 청왕조로 되돌아가서 아거(阿哥), 거거(格格)가 되어 행복하게 살고싶어하는 듯하다. 이 글은 명조와 청조중 누가 좋고 누가 나쁜지를 평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하나의 진실한 역사를 얘기하고 싶을 뿐이다. 진실한 대명왕조. 화친하지 않고, 영토를 할양하지 않으며, 천자는 국문(國門)을 지키고, 군주는 사직과 함께 죽으며, 진정으로 중화민족의 기골과 정신을 보여준 대명왕조를.
기실, 대명조의 16명의 황제중에서 가장 비난을 많이받는 황제는 바로 만력제이다. 이 황제는 친정이래 30년부상조의 신화를 창조했다. 그리하여, 후인들의 그에 대한 평가가 나온다. 바로 만력제의 혼용으로 명왕조의 멸망을 가져왔다. 혹은 명왕조 멸망의 씨를 심었다. 잠깐. 만력황제는 확실히 30년 부상조했다. 그러나 <명사.신종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비록 만력30년이후, 즉 사람의 마음 곳에서 소위 부상조의 그 기간에, 만력제는 여전히 조정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재난구제, 하도소통, 관료기율정돈, 변방정돈, 세수처리등등 해야할 일은 만력이 모두 했다. 그리고 조정업무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것은 바로 필자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이다. 부상조(不上朝)가 불리조정(不理朝廷)은 아니었다.
만력제가 이런 방법으로 조정업무를 처리한 것은 실제로 명나라 정치체제의 완비된 정도가 오늘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고, 당시의 세계 다른 나라와 비교하더라도 명나라의 정치체제가 선진적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런 정치체제는 바로 내각을 핵심으로 하는 국가행정기구가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황상은 이미 일부 권력을 내각에 위임했고, 황상 자신은 막후에서 조정을 지휘하면 되었다. 이것은 어느 정도 현대기업의 지배구조와 비슷하다. 황상은 회장이고, 내각수보가 CEO이다. 황상은 사람도 많고 말도 많은 조회는 열지 않고, 구체적인 일이 있으면, 황상은 반드시 소범위의 회의를 열거나 심지어 단독으로 대신을 만나서 논의한다. 소위 부상조는 만력이 대범위의 조회를 열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만나봐야할 대신은 만났고, 대신이 올린 주절에 대하여 만력제는 반드시 비복을 내렸다.
<백가강단>의 염숭년 선생은 만력제가 태정(怠政)했다고 말했다. 여섯 가지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불교(不郊), 불묘(不廟), 불견(不見), 부조(不朝), 불비(不批), 불강(不講). 불교, 불묘는 제사에 속한다. 만력제는 원래 다리에 문제가 있어서 거의 걷지를 못했다. 불교와 불묘는 형식주의에 소간다. 만력이 하지 않은 것도 이해가 된다. 불조와 불견은 먼저, 황제가 확실히 조조(早朝)에 참석하지 않았다. 다만 조정을 내팽개쳐둔 것은 아니었다. 다른 것은 얘기하지 않더라도 예를 들어보자. 만력삼대정(萬曆三大征). 1592년에서 1599년까지의 항일원조전쟁(抗日援朝戰爭), 표면적으로는 중국과 일본의 양군이 조선에서 전쟁을 한 것인데, 실제로는? 국가간의 전쟁은 하나의 시스템적인 프로세스이다. 전선의 정보를 취득하고, 부대의 이동과 지휘, 군수물자의 보급등등. 전투는 돈이 든다. 돈은 국고에서 나온다. 만일 만력이 대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주절을 비복하지 않았다면, 부대의 이동은 거의 불가능하다. 호부도 국고에서 돈을 내서 전선의 군대가 싸울 수 있도록 할 수가 없다. 만일 만력이 정말 염숭년 선생이 말한 것처럼 대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조정을 돌보지 않았다면, 항일원조전쟁 7년의 승리는 어디서 나왔단 말인가? 하늘에서 그냥 떨어졌단 말인가?
그래서, 항일원조전쟁의 정상적인 진행만으로도 충분히 증명된다. 만력은 국가의 최고통수권자로서 조정을 돌보지 않은게 아니라는 것을. 반대로 그는 적극적으로 조정업무를 처리했다. 단지 단독으로 대신을 만나서 일을 논하거나 주절을 비복하는 방식으로 처리했을 뿐이다.
다시 예를 들어보자. 그것은 마테오 리치라는 서양인이 중국으로 와서 전도한 것이다. 1601년, 만력제는 친히 마테오 리치를 만난다. 그리고 마테오 리치 본인이 북경에 남아서 전도하는 것을 허용한다. 마테오 리치와 당시 정부의 요인은 왕래가 밀접했다. 서광계(徐光啓), 심일관(沈一貫)등이 포함된다. 만력의 지지하에, 마테오 리치는 서양의 기독교와 자연과학을 전파하기 시작한다. 여기에는 서광계와 <기하원본> <측량법의>등 자연과학저작을 함께 번역한다. 마테오 리치는 성당내에 서방자연과학 기기와 도서를 전시하며 많은 사람들이 참관하도록 끌어들였다. 서방과학이 추동하에 만력제는 세계에 눈을 연 첫번째 사람이 된다. 1610년, 당시의 음력 11월 일식이 발생한다. 중국본토의 관리가 일식을 기록한 시간에 차이가 있어, 만력제는 명을 내려 이지조(李之藻)를 북경으로 부른다. 그리하여 역법의 수정에 참여하게 한다. 이는 만력제가 친히 주재하여 중국이 서방근대과학을 학습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마테오 리치는 근대자연과학을 전파하는 공헌을 했다. 마테오 리치가 죽은 후에 만력제는 마테오 리치를 북경성 안에 묻어 준다. 그리고 마테오 리치의 사후에 서방역법과 자연과학을 학습하기 시작한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만력제는 확실히 명나라후기 개방돤 안목을 지니 ㄴ황제이다. 이 점은 강희제와 달르다. 강희제는 그저 자기만 배웠고, 대신들에게는 자연과학을 배우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만력황제는 자연과학을 개방한다.
명왕조의 관료기풍은 지금의 서방의회같았다. 욕도 하고, 심지어 심하게 모욕하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 가정제이후 명왕조의 언관은 욕을 하는 것이 기풍이었다. 황제들도 그들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문관집단과 대항하기 위하여 만력제는 조회를 열지 않는 방법을 선택했다. 진정으로 일을 해야할 관리는 직접 글을 써서 올리면 그가 비복하여 정무를 처리했다. 이 점을 가지고 청나라에서 <명사>를 쓸 때 혼용태정했다고 적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보도록 하자. 만력제가 태정했는지 아닌지. 위에서 말한 항일원조전쟁과 마테오리치의 활동을 제외하고도 아래와 같은 일들이 있다:
1602년 이월, 만력제는 호부에서 나태한 관리 장양몽(張養蒙)등을 처벌한다.
1602년 삼월, 만력제는 명을 내려 대운하하도아문과 조운총독아문을 나누게 한다. 이는 관제개혁이다.
1603년 정월, 만력제는 명을 내려 호부와 병부에 변방군대수를 비준하고, 관리들이 공짜고 녹을 먹는 것을 제지한다. 이것은 군대를 정돈한 것이다.
1603년 사월, 호부에서는 상소를 올려 전국에 일조편법을 시행할 것을 건의하고, 만력제는 동의한다.
1604년, 만력제는 이화룡(李化龍)을 황하연안수리공사의 책임자로 임명하여 하도를 파게 한다. 다음 해에는 계속하여 황하연안에 제방을 쌓게 한다. 이렇게 하여 황하의 수환은 크게 감소한다.
1607년, 만력제는 염정(鹽政)을 정돈하는데 동의하여, 변방의 군심을 안정시키고, 국가염업수입을 보장했다.
1610년, 웅정필이 상소를 올려 변진을 설치하여 경제행적관리를 강화하도록 건의한다. 만력제는 동의하고, 비복에서 평창을 설치하는 것이 변진의 관리에 유리하다고 쓴다.
1614년에서 1615년까지, 중국화북, 강회지구에 가뭄이 발생한다. 만력제는 이 시기에 재난구제의 주절에 비복한 건이 아주 많다. 이것은 당시 중국최대의 재난구조활동이었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관원관리에서 군대정돈, 수리사업, 서방과학학습 그리고 재난구조, 경제발전까지 만력제는 해야할 일을 다 했다. 나태하지 않았다. 단지 정무처리방식이 앞에서 말한 것처럼 주절비복과 관리접견이었을 뿐이다.
당시의 대신은 만력제에게 상소를 올려, "황제가 깊은 궁궐에 20년간 머물면서, 대산을 한 명도 만나지 않고, 국가의 일을 한 건도 처리하지 않았다"라고 썼다. 이들 문관이 보기에, 항일원조, 마테오리치 접견, 재난구조, 수리사업은 모두 국가대사가 아니다. 정격안, 언관과의 말싸움이야말로 국가대사이다. 문관들이 보기에, 황제들은 아침에 반드시 대전에 나와야 하고, 삼궤구고를 받아야 하고, 그 후에 각부관리들이 일을 보고해야 한다. 심지어 일을 얘기하면서 서로 싸우고 공격해야 한다. 그리고 경연을 들어야 한다. 유학대가가 소위 치국이론을 토론하는 것을 들어야 한다. 그 후에 같이 즐겁게 밥을 먹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올린 주절은 황제가 볼 시간이 없으므로, 그냥 동의하면 된다. 황제는 이렇게 해야 소위 명군성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만력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만력제는 문관의 조회에서의 공격과 욕설에 이미 질렸다. 그러나 그는 국가대사를 처리해야 했다. 게다가 그는 다리가 불편했다. 만력제는 그래서 주절을 비복하고 대신을 접견하는 방식을 취한 것이다. 일본의 공격을 물리치고, 황하의 수리사업을 하고, 마테오 리치를 활용하여 서방자연과학을 전파했다. 말년에 이르러 만력제는 웅정필이 요동으로 가서 후금의 진격에 항거하는 것을 지지하기도 했다. 그래서, 만력제가 조회를 열지 않은 것만으로 조정을 게을리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만력제는 그저 욕설로 가득찬 주절에는 비복을 하지않았을 뿐이다. 정상적으로 국가사무를 처리하는 주절에는 그가 비복을 내렸다. 그런데, 청나라사람들이 보기에 만력제가 조회를 열지 않은 것을 태정이다.
그래서 알 수 있다. 만력제는 명나라 중후기사회대변혁기 그리고 내우외환의 연대에 다리가 아픈 고통을 참으면서 국가대사를 처리한 것이다. 그는 주원장과 주체와 같은 문치무공은 없었다. 다만 만력제는 실제행동으로 항일원조전쟁을 하여 국가의 주권과 영토를 지켜냈따. 영하소수민족반란과 운남소수민족반란도 진압한다. 이렇게 하여 다민족국가의 통일도 지켜낸다. 만력제는 수리사업을 벌아고, 염정을 정돈하였으며, 말년에는 서방자연과학을 배운다. 이렇게 세계과학기술발전의 조류에 순응하여, 생산력의 진보와 문화의 번영을 가져온다. 만력연간에, 자본주의 경제가 범차 발달하고, 백성의 생활이 부유해지며, 물가가 안정된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진상이다. 만력제는 명왕조 후기 보기 드문 영명한 군주였다. 최소한 항일원조전쟁(임진왜란, 정유재란)과 마테오리치 두 건에서는 만력제의 독특한 안목을 엿볼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청왕조 통치자들보다 훨씬 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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