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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가정제(嘉靖帝): 총명하기 그지없는 그는 왜 좋은 황제가 못되었을까?

by 중은우시 2018. 7. 30.

글: 임미호(林迷糊)


1539년, 대명 가정18년, 음력 삼월 십이일, 호북 안륙의 순덕산(純德山, 지금의 호북 종상시 송림산).

33세의 가정제는 순덕산에 걸음을 멈추고, 말없이 산아래의 그가 너무나 익숙하게 잘 알고 있고, 평생동안 살아왔던 땅을 내려다본다.

아무도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몰랐다. 안륙을 떠난 후 18년, 이는 가정제 주후총(朱厚㷓)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고향에 돌아온 것이다.

황제의 뒤에는 그의 중신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앞장선 사람은 5명이다. 개국공신 곽영(郭英)의 후손인 무정후(武定侯) 곽훈(郭勛), 영략명장 주능지(朱能之)의 후손인 성국공(成國公) 주희충(朱希忠), 예전에 친히 어린 황제를 호위하여 북경으로 갔던 경산후(京山侯) 최원(崔元), 수보대학사(首輔大學士) 하언(夏言), 그리고 예부상서(禮部尙書) 엄숭(嚴嵩).

몇년 후,  이 5명중에서 단지 2명만이 선종한다: 주희충과 최원. 그들의 공통점은 바로 시종일관 가정제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공손'했다는 것이다.


기실 엄숭도 특별히 공손했다. 다만 최종적으로 황상에게 버림받는다. 왜냐하면 어떤 도사가 미신을 믿은 황상에게 하늘이 엄숭의 존재에 대하여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같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후화(後話)이다.

나머지 두 사람중 곽훈은 감옥에 갇혀 죽는다. 하언은 더욱 참혹했다. 직접 서시에서 참형을 당한다. 명나라때 사형을 당한 관리는 무수히 많지만 수보의 지위로 공개참형을 당한 사람은 아주 적다.

곽훈은 부패하고 말을 듣지 않았다. 하언은 명성이 아주 좋았다. 사서에 그를 '능신(能臣)'이라고 적었다. 그는 단지 약간 '말을 듣지 않았다' 예를 들어, 그는 감히 황제가 그에게 내리는 '수도(修道)'의 의미를 지닌 '향엽관(香葉冠)'을 조롱하는 어투로 거절한다. 그것은 조정신하가 써야할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그 모자를 황제가 직접 만들었다는 것이다.

말을 듣지 않으면 죽는다. 설사 하언이 피살된 후 여러해 후에도 황상은 그 당시의 '모욕'을 떠올리면 이를 갈았다고 한다.

바로 이것이 가정제의 명나라군왕주에서 가장 두드러진 한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원한을 잊지 않는다. 이 특징은 문무대신들이 그를 북경에서 영접할 때 아마 아무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1521년 명나라에 말썽꾸러기황제 무종(武宗) 주후조(朱厚照)가 돌연 사망한다. 그는 후사를 남기지 못했다. 그리하여 멀리 안륙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던 주후총이 돌연 제국의 후계자에 오른 것이다. 이것은 '윤서당립(倫序當立)'이라고 할 수 있고, 또한 당시 권력을 지닌 수보(首輔) 양정화(楊廷和)가 고심해서 선택한 결과라고 할 수도 있다. 양수보는 13세의 부친이 돌아가신 후 모친의 도움하에 안륙왕부를 잘 관리해오고, 시서를 많이 읽고 박학다식한 주후총에 대하여 상당히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양수보는 어린 항제를 경성에서 맞이할 때, 미래에 대하여 무한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말썽을 부리던 무종이 마침내 죽었다. 신황제는 총명하고 단정하다. 바로 새로운 '성세'를 열 수 있는 인물이다. 아마도 바로 이런 지나친 기대 때문에, 총명한 양정화는 거의 일생에서 거의 유일한, 그러나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그리하여 명나라때의 유명한 '대예의지쟁(大禮儀之爭)'을 불러오게 된다.

이 다툼은 18년간 지속된다. 이는 양수보가 절대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간단히 말해서, 소위 대예의지쟁은 대체로 전후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1단계에서 싸운 것은 소황제가 이미 사망한 효종(孝宗)을 부친으로 인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이다. 2단계에서 다툰 것은 소황제의 이미 사망한 생부인 흥헌왕(興獻王 주우원(朱祐杬)을 태묘(太廟)에서 제사지낼 때 황제의 신분을 누릴 수 있느냐의 것이다.

1단계에서, 소황제의 편은 처음에 비록 극소수였다. 어쨌든 법리로 보나 윤리로 보나 소황제는 큰백부를 부친으로 모실 필요는 없었다. 몇년의 투쟁을 거쳐, 그는 최종적으로 1단계의 투쟁에서 승리를 거둔다. 그리고 다수 사가의 동정을 받아낸다.

후세의 많은 사람들은 양정화를 질책한다. 그는 일세의 능신인데, 어찌 이런 저급 실수를 저질렀느냐는 것이다. 어린 황제의 무리한 유구에 대하여 기나긴 조정투쟁을 시작했느냐는 것이다. 기실 양수보가 비록 총명하기 그지없지만, 그도 어쨌든 사람이다. 그는 감정적으로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효종에 대하여 감격하는 마음과 충성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가의 기준에 따르면, 효종 주우탱(朱祐樘)은 거의 완벽한 황제였다. 근면하고 궁궁진췌의 지경이었다. 그리고 사람을 대하는데 관후(寬厚)했다. 18년간 한번도 대신에게 정장(廷杖)을 가한 적이 없다. 명왕조에서 다시는 깰 수 없는 기록을 세운 것이다. 효종의 유일한 아들은 무종 주후조이다. 그러나 그는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다. 효종과 같이 좋은 황제가 '후사가 없다'는 것은 그의 옛신하들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가정제로 하여금 효종의 뒤를 잇게 하는 것은 '명군에게 후사가 있다'는 것뿐아니라, 그의 '유지'를 잇는다는 강렬한 상징적 의미가 있다. 세상의 일을 겪을 대로 겪은 노신들은 그다지 깊이 생각하지 않고 바로 양수보의 의견에 찬동한다. 그리하여 그들 사고의 '맹점'의 주요한 원인중 하나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같다.

양수보가 언제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분명히 2년이 넘지는 않았을 것이다. <명사>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2년동안, 양수보는 최소한 4번 대예의문제에 관한 어비(御批)를 돌려보낸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30여통의 상소를 쓴다. 조정내에 맹우는 물론이고 잘 아는 사람조차 하나 없이 홀로 깊은 궁궐에 앉아있는 어린 황제는 양대학사가 어비를 돌려보낼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한번 또 한번 붓을 들어 조정대신들의 천을 헤아리는 상소문을 앞두고 칠백여일동안 죽어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명사>는 양수보의 고집을 감탄하고 있지만, 그 입장에 처했던 양수보는 아마도 갈수록 소년천자의 집착에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가정2년 십이월, 양정화는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사직의 원인은 한 가지 '작은 사건'이었다. 가정제가 태감을 소주항주에 보내어 직조업무를 감독하는데, 양정화는 '교민(攪民, 백성을 교란시킨다)'을 이유로 반대한다. 황상은 자신의 태감이 절대로 백성을 교란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양정화는 분노하여 사직서를 내고, 황상은 비준한다.

사후에 보면, 태감을 보내거나 말거나 중요한 일이 아니다. 황상은 그의 말을 지켰다. 그의 태감은 성실했다. 실제로 가정제때, 태감은 기본적으로 상당히 착실했다. 그렇지 않은 태감은 황상에게 채찍을 맞아서 죽었을 것이다. 명나라때의 다른 여러 황제와 비교하면, 가정제는 태감들에게 아주 엄했다.

양정화의 분노와 실망의 착안점은 태감에 있지 않았다. 그는 상소에서 이런 말을 한다: "폐하께서 혼자 2,3명의 간사한 자들과 함께 조종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목표가 없는 그저 화가나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가 한 말은 바로 내심의 가장 큰 절망이다. 2년여의 상황은 그에게 말해준다. 황상은 비록 환관과 결맹을 맺지는 앉았지만, 절대로 그와 같은 충성심이 강한 노신들과 결맹을 맺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리하여 효종시대의 '군신공치천하(君臣共治天下)'의 광경을 재현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글을 많이 읽고, 박학다식한 소황제는 누구와도 결맹을 맺지 않고, 그야말로 외로운 늑대라는 것을.

19살에 진사가 되어 관료사회에 들어오고 근 50년간의 세월동안 겪어오면서 4명의 황제를 모신 노신 양정화는 이때 자신이 어떤 황제를 선택했는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확실히 알았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이미 되돌릴 수가 없었다.

가정7년, 대예의지쟁에서 1단계의 완승을 거둔 가정제는 조서를 내려 양정화를 엄히 질책한다. 그는 원래 참수해야하지만, 은혜를 베풀어 죽음을 면하게 해주고, 서인(庶人)으로 강등시켰다. 가정8년, 양정화가 사망한다. 그래도 적시에 물러나고, 빨리 죽는 바람에 선종을 맞이할 수 있었다. 양수보가 '능신'의 신분으로 명예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가정의 아들인 목종 융경제때이다.

여하한 일도 처음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반대하든지간에 황상이 끝까지 관철하겠다고 하면, 지지자는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다. 이것은 역사가 반복하여 증명해준 진리이다. 원인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황상이 일단 승리하면, 지지자에게 돌아오는 보답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도박을 걸어서 황제에게 거는 것은 왕왕 충분한 가치가 있다.

이번에 가장 먼저 일어나서 지지한 사람은 관료사회에서 반평생을 실의로 보낸 장총(張璁), 계악(桂萼)이다. 그들은 도박에 제대로 걸었다. 장총은 양정화의 뒤를 이어 수보가 된다. 이와 동시에 황상의 '외로운 늑대'같은 성격을 점점 대신들이 알게 된다. 그저 이해하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고, 댓가가 너무 컸을 뿐이다.

가정3년 칠월 이십일, 대예의지쟁으로 18세의 황제는 명을 내려 며칠전에 "좌순문곡간(左順門哭諫)"에 참여한 모든 220명의 반대파관리들을 처벌한다. 4품이상은 봉록을 정지시키고, 5품이사는 모조리 정장(廷杖)에 처한다. 그 결과 100여명의 관리가 정장을 맏고, 16명은 그 자리에서 혹은 중상을 입고 그 후에 사망한다.

백여명의 관리들이 바지를 내리고 정장을 맞는 일은 아마도 하루 종일 계속되었을 것이다. 이 하루동안 행형자의 고함소리와 수형자의 비명소리를 자금성안에서 분명히 다 들었을 것이다.

칠월 이십팔일, 하루종일 신하들이 지르는 비명소리가 아직 다 가시기도 전에 황제는 명을 내린다. 앞장섰던 7명의 관리에게 제2차 정장을 가한 것이다. 그중에는 양정화의 아들로 '명왕조 제일대재자(第一大才子)'로 불리던 양신(楊愼)도 포함되어 있다. 그 결과 다시 1명이 사망한다. 젊은 양신은 그래도 몸이 건강하고 밥을 잘 먹어서 어쨌든 목숨은 건져서 귀가한다. 이어서 서남의 변방으로 유배간다. 이때붜 휘황한 학술의 길이 열린다.

18세의 어린황제는 일거에 명왕조에서 한번에 정장을 받은 수와 사망자수의 두 가지 기록을 세운다. 9일동안 두번의 정장으로 억제할 수 없는 보복욕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신하들의 간담이 서늘해진다. 효종때의 '기상'을 회복하려던 꿈은 이후 신하들에게서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여기서 언급할만한 점은 장총이다. 장총은 목숨을 내걸고 황상이 대예의지쟁에서 첫번째 목표를 달성하게 해주었지만, 두번째 목표에 대하여는 마찬가지로 견지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하언이 수보의 자리를 차지하도록 기회를 넘기게 된다. 그렇기는 해도 황상은 장총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남아 있었다. 장총은 성격이 제멋대로이고, 작은 원한이라고 있으면 반드시 갚는다. 그는 일생동안 네번 올라가고, 네번 내려간다. 순식간에 바닥에 떨어지고 순식간에 꼭대기로 올라갔다. 황상은 그러나 그에게 시종 관용적이었다. 생각해보면 이는 그가 가장 외로울 때 가장 먼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준 것에 대한 보답일 것이다. 비록 장총이 황상에게 손을 내민 것에는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황제도 그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수보 하언은 장총의 이런 선례를 보고 안심해서인지는 몰라도, 점점 말을 듣지 않기 시작한다. 황상은 결국 그를 형장에 보내게 된다.

가정제때, 45년간, 황상의 관용을 받은 사람은 오직 장총 한 명뿐이다. 가정말년의 명신 서계(徐階)가 얻은 것도 '관용'이 아니었다. 노황상은 그저 귀찮아서 다시 그와 싸우지 않았을 뿐이다.

가정18년, 황상이 순덕산에 갔을 때, 기나긴 대예의지쟁이 막 끝났었다. 황상은 최후의 철저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의 심정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한편으로 얼마 전에 모친이 돌아가셨고, 그의 이번 출행은 바로 모친을 안륙으로 모셔와서 매장할 수 있을지를 알아보기 위해셔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번 출행에서 어느 한 건도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먼저 남순을 계획할 때, 군신들은 반대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거의 안배되었을 때, 구경대신들이 마치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속속 상소를 올려 중단하라고 요구한다. 황제의 자리에 이미 18년간 앉아 있던 황상은 이런 일에 익숙했다. 직접 어비(御批)를 내린다:

"...경등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왜 일찌감치 말하지 않았느냐? 이제 일이 모두 결정되고 나서 운운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중의에 혹해서 그런 것이고 실제로 그만두라고 권하는 충성이 아닐 것이다. 마땅히 잘 생각해서 쓸데없이 명성을 낚으려는 것은 하지 말라."

그는 정말 수하의 이들 대신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명성을 낚으려는게 아니라 정말 목숨을 거는 대신들이 지금은 너무 많이 죽어서 남아있지 않았다.

진정한 '충신'은 비록 조정대신은 아니지만, 그래도 남아 있었다. 단지 출현한 방식이 조금 난감했을 뿐이다. 손당(孫堂)이라는 병사가 있다.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황성으로 숨어들어와, 오문(午門) 금대에 올라가서 거기에서 하룻밤을 지낸다. 그런데도 성문을 지키는 관리 수백명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날이 밝을 때, 손당은 금대에서 크게 ㅅ리친다. 그제서야 수위병에 발견된다. 심문을 할 때 손당은 이렇게 말한다: "연도에 행궁을 짓고 있는데, 군인과 백성들의 반이 힘들어 죽을 지경이다. 그래서 내가 막으러 왔다."

손당의 충성의 댓가는 그의 목숨이었다. 교립결(絞立決)의 판결을 내린다. 황상은 그래서 기뻐할 수가 없었다.

성을 나와서 가는 길에 직예, 하남, 호광의 세 성은 재난이 심각했다. 비록 호부에서 사전에 태창을 열어 은이십만냥을 특별히 풀어서 가는 길에 양식과 풀을 준비했지만, 연도백성의 부담은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 길의 재난상황은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또 다른 남순연도에서는 '영접을 제대로 못하거나,' '알현을 하지 못하는' 관리들이 매일 생겼다. 벌을 내려도 계속되었다. 황상이 아무리 미련하더라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비록 관리들이 전전긍긍하고 있지만 전체 제국의 기기가 태만과 쇠퇴로 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황성에서 안륙까지 모두 그러했다.

그는 이에 대해 어떻게 손을 쓸 도리가 없었다.

이월 이십팔일, 황제일행이 하남 위휘에 도착한다. 깊은 방에 행궁에 큰 불이 난다. 만일 금의위지휘사 육병(陸炳)이 죽음을 무릅쓰고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마도 위휘에서 불에 타 죽었을 것이다. 이런 일은 당연히 황제의 기분을 좋지 않게 만들었다.

삼월 십구일, 하늘과 부친의 현릉에 제사를 지낸 후, 신하들의 칭송소리 속에 가정제는 안륙의 고향사람들에게 조서를 내린다: 사서는 이에 대하여 한 글자도 빠트리지 않고 기록했다. 조서는 '간절'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어느 정도 처량함이 드러난다.

"나의 부친이 이 땅을 분보앋고, 인덕을 쌓아서, 나늘 낳고, 대위를 받들 수 있었다...다만 그저 나는 덕행이 없고, 부모는 이미 돌아가시니, 나는 아주 고통스럽다. 그걸 그대들이 어찌 알겠느냐. 내가 오늘 일을 마치고 북경으로 돌아가니 그대들에게 몇 마디 말을 남기겠다. 너희들은 아들로서 효도를 다하고, 부친으로서 아들을 잘 가르쳐라. 어른은 아이를 잘 돌보고, 아이는 어른을 공경하라. 부지런히 살면서 좋은 사람이 되라. 나의 이 밀을 따르라."

황제는 익숙한 안륙의 산수를 보고, 이런 말을 할 때, 느꼈을지 모르겠다. 만일 자기가 안륙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이 모친과 그냥 친왕으로 남았더라면, 생활은 마아도 더욱 아름답지 않았을까?

<명사>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가정제는 18년에 장성태후를 장례지낸 후, 조회를 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의 고증에 따르면, 이 설은 정확하지 않다고 한다. 실제로 이후에 3년간, 가정제는 조회에 나간 적이 있다. 모두 6번이다. 더욱 심한 것은 18년 팔월, 황상은 도사 단조용(段朝用)의 말을 듣고, 태자(太子)에게 감국(監國)을 하도록 한다. 자신은 오로지 수련을 2년간 하겠다고 한다. 태복경(太僕卿) 양최(楊最)가 죽기살기로 반대하여 없던 일이 된다. 33세의 한창 나이의 황제가 조정을 얼마나 싫어했는지는 이것만 보아도 알 수가 있다.

가정18년, 전수보 양정화가 이미 죽은지 10년이 되었다. 만일 죽은 자가 만일 '구천에서 알 수 있다면' 양수보는 이때 분명히 후회막급이었을 것이다. 그가 당시에 이 15살의 아이가 가장 적당한 친왕이라고 보았는데, 친왕으로서는 뼛속까지 합격이었던 그가 황제로서는 완전히 불합격이었던 것이다.

대명왕조의 정난지역때 친왕인 숙부가 조카황제를 죽인다. 그리고 성조의 자손양대친왕도 황제와 피비린내나는 투쟁을 벌인다. '친왕'은 일찌감치 제국에서 가장 조심해서 방비해야 하는 괴물이 되어 있었다. 친왕들은 비록 편안한 생활을 지내지만, 사상과 행동은 엄격하게 통제되는 대상이었다. 오랫동안 이렇게 하다보니, 친왕의 기준이 이미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이 뿌리박힌다.

가장 합격점인 친왕은 이러해야 한다:

1. 아랫사람을 엄격하게 통제하여 화를 불러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은혜를 베푸는데 인색하여 '인심을 사려고 한다'는 혐의를 받지 않아야 한다:

2. 여하한 대신이나 무장과도 교분을 맺지 않는다. 더더구나 결맹은 맺지 않는다.

3. 자신의 향락만 돌보는 것으은 문제가 없다. "천하를 마음에 품는 것"은 절대로 안된다.

4. 국사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충성'이다. 동시에 '효도'를 반드시 강조해야 한다.

5. 가장 좋은 것은 집안에 틀어박혀 지내는 것이다. 어쨌든 너는 어디로든 갈 수가 없다.

6. 시서는 그래도 읽어야 한다.

가정제는 이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었다. 완전히 합격점을 받을 수 있고, 점수도 만점에 가깝다. 기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그는 친왕중에서 어느 정도 예외적인 인물이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가정제가 어렸을 때, 그의 부친 흥헌왕은 그와 조정신하의 능력과 충간에 대하여 토론한 적이 있다고 한다. 나중에 어린황제가 양정화에게 그래도 약간의 '인자'함을 베푼 이유는 이 어릴 때의 토론이 그에게 형성한 판단기준과 관련이 있지는 않을까?

바로 그 좋은 친왕의 행동준칙 중에 최소한 앞의 3가지는 황제를 배양하는데는 불합격이다. 황제는 어려서부터 '가국(家國)' '충간(忠奸)' 군신(君臣)' 유법(儒法)' '인애(仁愛)'류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 "현신을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하는' 류의 '위국결맹'의 거동을 배워야 한다. 최소한 표면적인 공부라도 해야 한다. 항상 멸시해서는 안된다. 더더구나 전혀 감추는 것이 없이 '간신'들에게 보복하는 것은 안된다.

이런 이치를 총명한 가정제도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다만 어떤 것은 스스로 바꾸려 한다고 바꾸어질 수가 없다. 거의 조회에 나가지 않음으로서 그들 '폐물'들을 다시 보지 않은 그 27년간, 그는 차가운 멸시의 눈빛으로, 적나라한 '순창역망(順昌逆亡)'의 정치수완으로 이 방대한 제국을 통치한 것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말해 왔다. 명나라는 가정제에게서 망한 것이라고. 일정한 의미에서 그 말은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