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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중기)

도광제(道光帝)는 왜 60이 되도록 후계자를 정하지 못했을까?

by 중은우시 2018. 9. 14.

글: 소몽(蕭夢)


도광제는 60세가 될 때까지 비밀입저(秘密立儲)를 하지 못했고, 선택을 망설였다. 그 이류를 알아보면 실로 가슴아프다.


1. 앞의 세 명의 황자가 전후로 죽었다. 도광제는 모두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황장자(皇長子) 혁위(奕緯)는 가경13년에 태어났고, 11살때 패륵(貝勒)이 된다. 이 작위는 화석친왕과 다라군왕의 바로 다음가는 것이니 3등급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한 황제로서는 낮은 것이 아니다. 하물며 이 장남은 생모의 출신이 비교적 낮고, 지위도 궁내에서 낮았으며 황제의 총애도 받지 못했었다.


처음에 도광제는 이 장남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싫어했다. 그러나 나중에 황이자(皇二子)와 황삼자(皇三子)가 태어난 후 연이어 요절하면서, 이미 50세가 된 도광제로서는 할 수 없이 장남에게로 눈길을 돌려야 했다. 그때부터 그를 중시하고 배양했다. 그러나 그는 공부를 싫어했고, 스승을 존중하지 않았다. 도광제는 화가나서 발길질을 한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이 황장자는 목숨을 잃게 된다.


가련한 도광제는 오십이 다 되어가는 나이인데도 아들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당시에 아마도 미칠 것같았을 것이고, 정신은 붕괴상태였을 것이다. 강산을 이을 후손이 없어서 그의 대에 끊어지게 된다면 아주 자책할 일인 것이다.


앞의 세 황자가 죽은 것이 그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일찌감치 후계자를 세우지 못한 원인이 된다.


2. 나중에 태어난 6명의 황제는 모두 나이가 어렸다. 도광11년, 24세의 황장자 혁위가 죽었을 때, 도광제는 이미 50이 다 된 나이였다. 슬하에 아들이 없는 상심과 처량함으로 황제는 더욱 늙어보였다. 다행히 전귀비(全貴妃) 뉴후루씨가 이 해에 도광제를 위해 황사자(皇四子)를 낳아준다. 그리고 연이어 황오자, 황육자, 황칠자, 황팔자, 황구자가 출생한다. 만년의 도광제에게는 새로운 희망과 감동이 된다.


이렇게 되자 문제가 생겼다. 몇몇 황제중 가장 나이많은 황사자도 도광제가 60세가 되었을 때 나이가 겨우 12살이었다. 나머지 황자들은 그보다 더욱 어렸다. 도광제가 후계자를 세우지 못한 이유는 아마도 황자들의 나이가 너무 어려서일 것이다.


3. 황사자와 황육자 사이에서 선택이 어려웠다. 만일 도광제가 후계자를 세우지 못한 것이 황자들의 나이가 어려서라고 말하기보다는 아마 황사자와 황육자 사이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였다고 하는 것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


황사자는 나이도 더 많고, 게다가 황후 소생이다. 그러나 황육자만큼 총명하지는 못하다. 게다가 황사자는 사냥때 다리를 다쳐서 절름발이가 되었다. 이것도 문제였다. 다만 황사자는 어질어서 인군(仁君)의 풍모를 타고 났다. 황육자는 비록 총명하지만 이 점은 황사자와 비교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도광제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누구를 선택할지 고민한 것이다.


나중에 황사자의 스승인 두수전(杜受田)이 그를 도와서 최종적으로 황사자가 후계다툼에서 이기도록 만들어 준다. 그러나 도광제는 황육자를 그대로 묻어두기는 아깝다고 여긴다. 그래서 후계자를 정하는 유조에 황육자를 공친왕(恭親王)으로 한다는 유조를 같이 남긴다.


도광제가 내린 유조는 대청황조에서 보기 드문 것이고, 결국 아들들간의 다툼을 남겼다. 황사자가 함풍제(咸豊帝)에 오른 후, 그의 재능과 능력은 뛰어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는 황제이다. 황육자가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여전히 친왕이다. 그리고 생모에게 태후의 봉호를 얻으려고 하다가 함풍제에게 밉보인다. 그리하여 결국 형제간에 불화가 생기게 된다.


강자황태후가 서거한 후, 함풍제는 즉시 공친왕의 궁내행주의 직무를 박탈한다. 그리고 그의 나머지 직무도 박탈한다. 양무를 아는 친왕이 그저 집에서 쉬고 있게 된 것이다. 이는 대청의 큰 손실이다. 또한 도광제가 남긴 보기드문 유조의 후유증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