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중기)

왕가씨(王佳氏): 청나라역사상 유일하게 3번 봉호(封號)를 바꾼 비빈

by 중은우시 2017. 12. 7.

글: 소몽(蕭夢)


대청의 후궁은 일반적으로 승급하거나 강급하더라도 봉호는 변하지 않았다. 다만 한 대청의 후궁비빈은 이 법도를 바꾸었다. 그녀는 귀인(貴人)에서 비(妃)로 3번이나 승급하였는데, 봉호도 3번이나 바뀐다. 이는 대청역사상 유일한 경우이다. 그녀는 바로 가경제(嘉慶帝)의 장비(莊妃) 왕가씨(王佳氏)이다.


장비 왕가씨는 거인(擧人) 이리포(伊里布)의 딸로 신분이 높지 않았다. 가경제가 황자일 때 그의 저택에서 그를 모시게 된다. 그저 한 명의 시첩(侍妾)이었다. 가경제가 황제에 오른 후, 그녀는 춘상재(春常在)로 승진한다. 가경3년 왕가씨는 상재에서 다시 춘귀인(春貴人)으로 승진한다. 이때는 봉호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가경6년이 되어, 왕가씨는 원래의 춘귀인에서 길빈(吉嬪)으로 승진한다. 이때 봉호는 춘(春)에서 길(吉)로 바뀐다. 가경13년, 길빈은 다시 장비로 승진한다. 봉호는 다시 바뀌어 길(吉)에서 장(莊)이 된다.


장비 왕가씨는 귀인에서 비로 연이어 3등급이 오르면서, 그녀의 봉호도 춘귀인에서 길빈으로 다시 장비로 3번이나 바뀐다. 왕가씨가 세번 승진하면서 세번 봉호를 바꾼 일은 대청후궁에서 보기 드문일이다. 아마도 유일한 사례일 것이다. 왜냐하면 청나라때, 대청제왕은 후비의 승급과 강급이 있더라도 일반적으로 원래의 봉호를 유지시켰기 때문이다. 왕가씨처럼 귀안에서 비로 3번 오르면서 봉호를 3번이나 바꾸는 일은 유일무이했다.


이치대로라면, 왕가씨처럼 출신이 빈한한 왕부의 옛 여인에 대하여 가경제가 파격적으로 3급이나 올려주고, 3번이나 봉호를 바꾸게 해주는 것은 크나큰 은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왕가씨에게 최대의 은총은 아니었다. 그녀의 최대의 은총은 그녀가 죽은 후, 가경제의 중궁황후 즉 나중에 효화예황후(孝和睿皇后)가 친히 청서릉으로 가서 장비 왕가씨의 입관식에 참석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대청유사이래 전무후무한 일이다. 어쨌든 당시의 장비 왕가씨는 그저 가경제 후궁의 4비(妃)중 하나였을 뿐이다. 즉, 가경제의 여러 후궁중 한 명이었을 뿐이다. 지위로 보나 은총으로 보나 모두 중궁황후가 친히 입관식에 참석할만한 수준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는 대청역사상 하나의 수수께끼라 할 수 있다.


생각해보라. 만일 중궁왕후라면, 즉 효화예황후가 장비 왕가씨와 개인적으로 좋은 관계였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감히 이렇게 큰 위험을 안고 자기보다 직급이 몇 단계 낮은 장비의 입관식에 참석하지 못했을 것이다. 설사 그녀가 그런 위험을 안으려 했다고 하더라도, 가경제가 윤허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를 보면, 유일하게 해석가능한 것은 효화예황후가 가경제의 지시를 받아, 황제를 대표하여 친히 장비의 입관식에 참석한 것으로 봐야 한다. 그저 이렇게 해석해야먄 말이 된다. 다만 장비는 사료를 보면 특별한 기록이 없다. 가경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한 것은 대청역사상 하나의 수수께기라고 봐야 한다.


만일 가경제가 정망 장비 왕가씨를 총애하였다면 그녀를 일개 비로 봉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훨씬 더 높은 직위를 주었을 것이다. 귀비 혹은 황귀비. 그러나 장비에게는 그러하지 않았다. 그래서 효화예황후가 친히 청서릉까지 그녀의 입관식에 참석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만일 황제의 수권이 없었다면, 황후가 사사로이 일개 비빈의 입관식에 참석했다면 그것은 대청의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다. 아마도 스스로 견디지 못했을 뿐아니라, 가경제도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간에, 효화예황후는 친히 입관식에 참석한다는 그런 법도에 어긋나는 일을 행했다. 이것은 수수께끼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