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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중기)

손씨집안: 조조집안보다 난륜인 삼국가족

by 중은우시 2015. 2. 10.

글: 복녕객(福寧客)


삼국의 조, 유, 손의 3집안에 대하여 얘기하자면, 유씨는 가장 간단하다. 그러나, 조씨, 손씨의 가정은 비교적 복잡한데, 그중에서도 손씨가정이 더욱 복잡하다. 손권(孫權)의 서부인(徐夫人)은 서진(徐眞)의 손녀인데, 서진은 손권의 고모부이다. 즉, 손권이 취한 부인은 자신의 고종조카인 것이다. 손권의 아들 손휴(孫休)의 부인은 동오의 대장 주거(朱據)와 자신의 누나인 노육공주(魯育公主) 사이에 낳은 딸이다. 배분으로 보면, 이 주부인은 손휴의 외조카딸이 된다. 손휴는 나중에 자신의 딸을 주거의 손자 주선(朱宣)에게 시집보내는데, 주선의 각도에서 보자면, 그가 취한 것은 자신의 조모(노육공주)의 조카딸이다. 즉 자신보다 1배분이 높은 고모뻘이다. 어지럽기 그지없다.


아래에서는 손권의 악취미로 인하여 동오귀족간에 혼란스러운 인척관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 장승과 제갈근은 원래 나이가 비슷한 친구사이이다. 장승의 처가 죽은 후, 손권이 나서서 중매를 선다. 제갈근의 딸을 장승에게 시집보낸 것이다. 장승은 제갈근의 딸과의 사이에 두 딸을 낳는다. 하나는 손권의 아들 손화에게 시집가고, 다른 하나는 육손의 아들 육항에게 시집간다. 그러나 육항의 외할아버지는 기실 손권의 형인 손책이다. 즉, 원래 손화는 육항의 당외숙인데, 이제 두 사람은 동서간이 된 것이다. 그리고 손화는 대장씨(大張氏)와의 사이에 낳은 딸은 육항과 소장씨(小張氏) 사이에 낳은 아들 육경에게 시집보낸다.


* 손권에게는 딸이 둘 있다. 큰 딸은 손노반이고 작은 딸은 손노육이다. 손노반은 주유의 아들 주순에게 시집가고, 주순이 병사한 후에는 전종(全琮)에게 개가한다. 전종의 당손녀인 전씨는 재색을 겸비했고, 손노반이 부추겨서, 손권은 전씨는 막내아들 손량에게 시집보내게 한다. 비록 모두 미성년이지만, 원래 손량은 전씨의 할아버지의 형수의 동생인데, 현재 두 사람은 부부가 된 것이다. 


* 손노육은 주거에게 시집가서 2남1녀를 낳는다. 손권은 다시 중매를 서서 손노육과 주거의 사이에 낳은 딸을 손권의 아들 손휴에게 시집보낸다. 즉 손휴는 주씨의 친외숙이다. 두 사람은 손권의 명으로 부부가 된다.


* 손권의 당질에 손공(孫恭)이 있다. 손노육과 주거의 한 아들인 주손(朱損)은 손공의 작은 딸과 결혼한다. 손공의 아들 손준은 그의 먼 친척고모뻘이자 동시에 그의 매부의 이모부인 손노반과 간통한다. 손공의 큰 딸은 바로 전씨의 모친이다. 즉, 손공은 원래 손노반의 먼 당형제(두 사람의 조부가 친형제임)가 된다. 손공의 세 자녀는 원래 모두 손노반을 당고모라고 불러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큰 딸은 남편을 따라 손노반을 숙모라고 부르고, 작은 딸은 남편을 따라 손노반을 이모라고 부르고, 아들은 손노반의 애인이 된다.


이것들은 본문의 중점이 아니다. 단지 손권의 악취미를 곁들이로 보여주는 것이다. 아래에 얘기하는 것이 원래 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손권에게는 모두 7명의 아들이 있었다. 장남 손등은 원래 태자이다. 그는 촌명하고 인효하여 인망이 있었다. 젊은세대의 오나라 명사인 제갈각, 장휴, 고담, 진표등이 그를 힘을 합쳐 보좌한다. 이들은 당시 사람들은 태자사우(太子四友)라고 불렀다. 그들 4명은 각각 중신 제갈근, 장소, 고옹과 이미 사망한 명장 진무의 후손이다. 이처럼 화려한 진용으로 태자를 보필하였다는 것은 손권 본인 및 조야상하에서 모두 손등을 국가의 미래 희망으로 보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쉽게도 손등은 31살때 병으로 드러누워 손권보다 먼저 죽는다.


인품으로 보면 손등은 확실히 군자였다. 그가 살아 있을 때, 동생 손화에 대하여도 아주 잘 대해주었다. 마치 형을 대하듯이 했다고 한다.(待之如兄)  심지어 여러번 태자자리를 손화에게 양보하려고 했었다. 그가 죽자 손화는 정말 태자의 자리에 오른다. 손화는 괜찮은 후계자후보였다. 도덕적으로나 능력으로나 모두 손등과 고하를 따지기 어려울 정도였다. 한때 손권의 총애를 받는다. 그가 태자로 세워진 초기에, 거의 모두 그가 몇년후에는 순조롭게 동오제국의 황위를 물려받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저주를 받은 것처럼 그의 이후 처지는 형인 손등보다 비참해진다.


손권이 손화를 태자로 세운 후, 또 다른 아들이자 손화의 동생이며 노왕에 봉해진 손패(孫覇)를 총애하기 시작한다. 그 정도는 "손화와 차이가 없었다" 이런 방식은 정상인이 보기에 불가사의했다. 그래서 나쁜 마음을 먹은 사람들은 이를 이용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조정대신들은 점점 대립되는 양파로 나뉘어지고, 서로간에 공격하기 시작한다. 나쁜 마음을 먹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노린 사람은 "전공주(全公主), 즉 전종에게 시집가 있는 손권의 맏딸 손노반이었다. 그녀는 전체 삼국역사상 가장 큰 야심과 권모술수를 지닌 여인이라고 할 수 있다. 수백년후의 태평공주도 그녀와 비교하면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이다.


사건의 발단은 손노반과 손화의 모친 왕부인이 불화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처음에 그녀는 단지 기회를 보아 왕부인을 제거하려 했을 것이다. 한번은 손권이 큰 병에 걸렸는데, 손화가 환왕묘(桓王廟, 손책의 묘)에서 그를 위해 기도했다. 손화의 비(위에서 언급한 대장씨)의 숙부인 장휴 - 위에서 언급한 '태자사우'의 한 명) - 의 집이 환왕묘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손화를 그의 집에 초대한다. 원래는 좋은 뜻으로 한 일인데, 손노반은 부친의 앞에서 이 일을 일러바친다. 태자가 장휴와 음모를 꾸몄는데, 그것은 부친이 죽은 후에 황위를 잘 승계받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의 모친 왕부인은 부친의 병이 중하다는 말을 듣자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손권은 그녀의 말을 듣고 대노하였다. 왕부인은 그 사실을 듣고는 우울하고 두려움에 쌓여 죽는다. 손화는 이때부터 점점 소원해지고, 그의 악운은 멀리서 다가오고 있었다.


배송지의 주석에서 인용한 진(晋)나라때 은기의 <통어>에는 당시 조정의 파벌이 어떻게 나뉘어져 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태자를 지지하는 일파는 육손, 제갈각, 고담, 주거, 등윤, 정밀등이고, 노왕을 지지하는 일파는 보즐. 여대, 전종, 여거, 손홍등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태자의 곁에는 옛날 손등의 곁에 있던 '태자사우'중 살아있는 3명(제갈각, 고담, 장휴. 비록 명단에서 장휴가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는 태자비의 숙부이다) 및 정직하기로 이름난 육순, 주거이다. 노왕의 당에는 대부분 간사한 소인배들이다. 그중 손홍은 음험하기로 유명한 인물이다. 전종은 비록 좋은 장수이지만, 덕행은 좋지 못했다. 노당에 들어간 것은 처인 손노반이 뒤에서 교사한 때문일 것이다. 여거는 더욱 얘기할 것도 없고, 오로지 보즐, 여대가 거기에 참여한 것이 잘 이해되지 않을 뿐이다. 


파벌투쟁의 결과는 치명적이다. 결국 손권이 친히 칼을 들어 치는데, 양파는 옥석구분(玉石俱焚)한다: 손화는 폐위되고, 육손은 화가나서 죽으며, 장휴, 주거는 피살되고, 고담은 멀리 유배가고, 노왕은 사사되며, 전종의 아들 전기(全寄)등은 주살된다.


만일 동기를 분석하자면, 입장(立長, 나이많은 아들을 세우는 것)이든 입현(立賢, 현명한 아들을 세우는 것)이건 손화는 모두 황위계승의 최선의 선택이다. 하물며 그는 이미 태자의 자리에 올랐다. 지위는 분명하고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왜 시간이 흐르면서 균열이 생기고 동요하며, 결국은 뿌리까지 흔들리게 되고, 나중에 무너지게 되었을까? 통상적인 견해로는 손권이 나이가 들면서 멍청해졌다는 것이다. 마음이 자주 바뀌고, 거동이 괴이하였고, 손노반등 요사한 자들이 중간에서 교사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표면만 본 것이고 속을 들여다 본 것은 아니다. 손노반등이 교사하였지만 이는 바로 말년의 손권이 바라던 것이어서 이용한 것이다. 그가 이렇게 여러번 불합리해 보이는 폐립의 조치를 취한 원인은 이를 통하여 자신의 심복의 우환을 제거하고자 한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눈엣가시로 여기던 인물은 바로 충성심이 강한 승상 육손이었다.


손권이 왜 육손을 제거하여야만 했을까? 이 문제는 이미 학자들이 분석한 바 있다. 여기서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육손은 강동의 명문세가이고, 인척들이 혁혁하고 수가 많다. 둘째, 여몽이 죽은 후, 육손은 무창을 계속 지켰는데, 오나라는 위로는 태자부터 아래로는 보즐, 제갈근, 번준, 주거까지 재상과 장군들이 모두 육손과 관계가 좋다. 손권의 말년에 국토강역은 대체로 확정되었는데, 손권은 공격하기에는 부족해도, 지키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육손이 없더라도 강동을 스스로 지킬 수 있게 된 것이다. 셋째, 손권은 자신의 사수를 고려했다. 후계자가 육손을 제대로 다루지 못할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욕순등이 태자 손화를 옹호하면할수록 손권은 더욱 불안해졌다. 그는 육손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을 뿐아니라, 육손의 아들 육항까지 책임추궁한다. 이는 바로 육손을 꺼려한 때문이다. 넷째, 강동의 기업은 원래 손권이 형인 손책에게서 계승한 것이다. 다만 그는 손책의 아들을 자신의 아들처럼 같이 대우해주지 않았다. 손권의 여러 아들들은 왕에 봉해졌지만, 손책의 아들들은 평생 후에 머물렀다. 이 점은 손권 본인조차도 미안해하는 일이다. 손권이 병이 들자, 부친 무열황제 손견에게 기도하지 않고, 형인 손책에게 빈 것도 바로 내심 깊은 곳에 창업한 형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에게 벌을 내릴까봐 겁낸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한 것이다. 육손은 손책의 사위이고, 손권이 그에 대하여 의심하는 것은 더욱 깊을 수밖에 없다.


강동이 처음에 발전할 때, 영웅호걸들이 많았다. 손량이 즉위하자 이미 좋은 신하들은 씨가 말랐고, 손노반은 간부 손준과 연합하여 수보 제갈각을 주살하여 권력을 좌지우지하자, 백관들은 모두 불안해 했다. 나중에 손량과 손로반은 모두 손준의 당제 손림에게 쫓겨나고, 황위를 승계한 손휴는 손림을 주살한다. 손휴는 겨우 30살까지밖에 살지 못하는데 그후에 손화의 아들 손호가 즉위한다. 사람을 수도 없이 죽이고 잔혹하기 그지없어 결국 국가가 멸망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손권이 스스로 만든 양궁지쟁(兩宮之爭)으로 인한 것이다. 죽기 얼마전 손권은 슬하를 둘러보고, 부득이 막내아들 손량을 태자로 삼았을 대 그는 약간은 후회했을까? 아니면 약간은 비애에 빠졌을까?


손권의 일생을 돌아보면, 누군가 "7푼의 공적, 3품의 과실"이라고 말했다. 이는 너무나 관용스런 평가이다. 왜냐하면, 말년의 악적은 그가 이전에 얻은 모든 좋은 명성을 갉아먹을 정도였다. 양궁지쟁은 그가 멍청해져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한 무리의 간사한 자들이 교사한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오나라 최고지도자 손권이 미리 계획하여 악의적으로 일으킨 반대파를 몰아내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대숙청이었다. 이 사건은 육체적으로 육손, 주거, 장휴, 고담, 오찬등 충성스럽고, 선량하며, 정직한 대신들을 없앴을 뿐아니라, 정신적으로 이 국토의 사람들에게서 선량한 본성을 앗아가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믿음이 사라지고, 가치관에 혼란이 왔다.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 신뢰가 없고, 서로 적의를 가지게 되었다. 이런 사람들간의 쟁투는 손권의 사후에도 계속되었다. 마치 음혼이 흩어지지 않고 이 국가를 뒤덮고 있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