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중기)

고태청(顧太淸): 청나라 최고의 여사인(女詞人)

중은우시 2018. 11. 29. 22:07

작자: 미상





유명한 여사인(女詞人)을 얘기하자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분명 이청조(李淸照)일 것이다. 그러나 청나라때, 재색을 겸비한 여자가 있었고, 이청조에 비견할 만했다. 그녀는 바로 현대문학계가 "청대제일여사인"으로 공인한 고태청이다.


청나라의 귀족 만주족들은 활쏘기와 말타기를 습속으로 했으나, 중원에 들어온지 시간이 오래되니 점점 한족의 문화에 훈도받게 된다. 청나라때 문단은 매우 번성했으나, 이름있는 만주족 문인은 몇 명 되지 않는다. 만일 시사쪽으로 한 자리를 차지한 만주족을 얘기하자면 일반적으로 "남중성용약(男中成容若), 여중태청춘(女中太淸春)"이라고 본다. 성용약은 바로 납란성덕(納蘭性德)을 말하는데, 강희제때의 대사인이다. 태청춘은 바로 본문의 주인공인 고태청이다.


고태청의 원래 성은 서림각라(西林覺羅)이며, 이름은 춘(春)이다. 자는 매선(梅仙)이고, 호는 태청(太淸)이다. 만주 상남기 사람이며, 내대신(內大臣) 악이태(鄂爾泰)이 증손녀이다. 조부인 악창(鄂昌)이 문자옥에 연루되어 자진하였기 때문에,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죄인의 후손'이었다. 고태청의 부친인 악실봉(鄂實峰)은 경성에서는 살 수가 없어, 지방을 떠돌면서 막료로 살았다. 고태청의 나중 시사로 추단해보면, 그녀는 유년시절에 북경에서 살았고, 조금 자란 후에는 다른 사람의 집에 의탁하여 살았으며, 복건, 광동, 오중, 항주까지 간다. 스스로의 말에 의하면, "반생상진고산신(半生嘗盡苦酸辛)"(반평생동안 온갖 고난과 힘든 일을 다 겪어 보았다)이다.


<정풍파(定風波). 악몽(惡夢)>


사사사량경유인(事事思量竟有因), 반생상진고신산(半生嘗盡苦酸辛).

망단안항무정처(望斷雁行無定處), 일모(日暮), 척령원상누잠건(鶺鴒原上淚霑巾)

욕사수회심이취(欲寫愁懷心已醉), 초췌(憔悴), 혼혼불사소년신(昏昏不似少年身)

악몽성래심경파(惡夢醒來心更怕), 창하(窓下), 화비엽락총경인(花飛葉落總驚人)


악이태의 손녀이자 고태청의 당고모는 건륭제의 황오자(皇五子) 영친왕(榮親王) 영기(永琪)이 처였다. 이런 친척관계로 고태청은 자주 영왕부를 드나든다. 영기의 손자인 혁회(奕繪)는 박학다식하고 다재다능했다. 특히 시사에 정통했다. 그는 고태청과 나이가 같아서 두 사람은 바로 마음이 통해 자주 함께 시를 읊고 사를 지었다. 이렇게 서로간에 애정이 싹튼다. 혁회의 가족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구전에 따르면, 고태청은 일찌기 영왕부의 거거(格格, 아가씨)들 가정교사를 지냈다고 한다. 고태청의 오대손이자 당대학자인 김계종(金啓孮)의 <고태청과 해전(海澱)>에도 이런 견해를 취한다. 혁회와 묘화부인(妙華夫人)도 일찌기 독서와 시를 가르치는데 참여했고, 인연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한 쌍이 부부로 맺어지는데에는 여러가지 장애가 있었다. 먼저, 혁회는 이미 결혼을 했다. 다행히 혁회의 처인 묘화부인은 고태청을 받아들이겠다는 태도였다. 그리고 고태청도 기꺼이 혁회의 첩이 되겠다는 의사였다. 둘째, 가장 심각한 장애인데, 고태청은 죄인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종인부(宗人府)에서부터 황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녀가 영친왕부로 시집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혁회는 고민 끝에 왕부의 호위인 고문성(顧文星)의 도움을 받아 뜻을 이룰 수 있었다.


자신이 순조롭게 영친왕부에 시집가기 위하여, 고태청은 할 수 없이 성을 고쳐서 종인부를 속인다. 고태청은 고문성의 딸인 것처럼 들어가서, 고태청이라는 이름으로 종인부에 보고하고, 결과적으로 순조롭게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도광4년(1824년), 마침내 혁회의 측푸진(側福晋, 푸진은 부인이라는 뜻임)이 된다.


고태청이 혁회에게 시집간 후, 그녀의 생활에는 중대한 전환이 일어난다. 호의호식하며 생계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리고 혁회와 어울려서 시사를 같이 짓고, 묘화부인과는 자매처럼 화목하게 지낸다. 그리하여 행복한 생활을 찬미하는 것이 이 시기 고태청 시사창작의 주선율이 된다.


<자고천(鷓鴣天). 상사동부자유풍대(上巳同夫子遊豊臺)>


남곽동유상사천(南郭同遊上巳天), 소교유수벽만환(小橋流水碧灣環), 

해당아나저홍수(海棠婀娜低紅袖), 양류경영탕녹연(楊柳輕盈蕩綠煙)

화염염(花艶艶), 류편편(柳翩翩). 단혼화류우춘잔(斷魂花柳又春殘)

석양영리쌍비접(夕陽影裏雙飛蝶), 상축동풍하채전(相逐東風下菜田)


도광10년(1830년) 칠월, 묘화부인이 병사한다. 혁회는 다시 후처를 맞이하지도 않고, 첩을 더 두지도 않는다. 곁에는 그저 고태청 한 명뿐이었다. 둘은 아침 저녁으로 함께하며 한 마음으로 서로 아꼈다.


이렇게 즐거운 세월이 9년동안 계속된다. 고태청은 심지어 세상의 근심이 무엇인지를 잊을 정도였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항상 끝이 있기 마련이다. 하늘이 시샘을 했는지 혁회는 돌염 병이 든다. 그리고 1달도 되지 않아 처자식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난다. 고태청의 이때 나이 40살이다. 그러나 고태청이 남편을 잃은 아픔에서 미처 벗어나기도 전에 침중한 타격이 연이어 다가온다.


십월이십팔일, 혁회가 죽은지 100여일이 지나서, 고태청은 시어머니, 즉 혁회의 생모인 왕가씨(王佳氏)에 의해 집에서 쫓겨난다. "시어머니의 명을 받아, 쇠(釗), 초(初) 두 아들과 숙문(叔文), 이문(以文) 두 딸을 데리고, 왕부 밖으로 이사한다. 거처할 곳이 없어서, 금봉차(金鳳钗)를 팔아서 주택을 한 마련하여" 거기에서 산다. 그러나, 혁회의 큰아들 재균(載鈞)은 묘화부인 소생인데, 횡포하고 인정이 없었다. 부친의 능원조차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 그러니 고태청이라는 서모와 고태청 소생이 자녀들은 더더욱 안중에 없었다.


이 시기의 굴욕적인 생활을 고태청은 "시를 지어 기록했다"


선인이화운간학(仙人已化雲間鶴), 화표하년일재회(華表何年一再回)

망육함원수대설(亡肉含寃誰代雪), 견몽부옥자응해(牽夢補屋自應該)

이간봉시능풍거(已看鳳翅凌風去), 잉유화광조안래(剩有花光照眼來)

올좌불감사왕사(兀坐不堪思往事), 구회장단촌심애(九回腸斷寸心哀)


'망육함원'은 <한서.괴통전>의 전고이다. 한 집에서 밤에 고기가 없어졌는데,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훔친 것이라 여겨서 화가 난 나머지 며느리를 집에서 쫓아버린다. 나중에 다행하 누군가 나서서 고기는 이웃집의 개가 물어갔다고 말해주어 며느리는 억울한 누명을 벗을 수 있었고, 집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고태청은 이것을 빗대어 자신이 시어머니에게 집에서 쫓겨난 일을 얘기한 것이다.


고아과부의 힘든 생활에 세상의 염량세태는 고태청을 깊은 고통에 빠지게 만든다. 심지어 여러번 자살하고자 생각한다. 단지 자녀들이 아직 어리고, 남편의 부탁을 저버릴 수 없어서 인욕부중하며 겨우겨우 살아남는다.


고태청이 집에서 쫓겨난 원인에 관하여 또 다른 주장도 있다. 어떤 연구자는 그 이유를 고태청과 공자진(龔自珍)의 염문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공자진의 시사에서 염문의 방증을 찾아내기까지 한다. 다만, 이런 주장은 다른 학자들의 반박을 불러온다. 순전히 날조된 스캔들이라는 것이다.


이 시기에 고태청은 여러 수의 죽은 남편을 애도하고 그리워하는 작품을 남긴다. 그 중 하나는 제목만 보더라도 <남편이 죽은 이후, 시를 쓰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겨울에 창가에서 유고를 정리하는데, 거기에 서로 화답한 시가 많아서, 마음이 아팠고, 잊을 수가 없어서 몇자를 썼다. 원망하려는 것이 아니라, 남겨진 사람의 불행을 쓰기 위함이다. 겸하여 쇠, 초 두 아들에게 보여기 위함이다> 이런 감정을 가진 여인이, 가정이 명성은 뒤로 하고 풍류문인 공자진과 염문을 뿌렸다는 것은 정말 말이 되지 않는다.


홍혼천욕설(昏昏天欲雪), 위로좌남영(圍爐坐南榮), 개권독유편(開卷讀遺編), 통극불성성(痛極不成聲)

황차애병신(況此哀病身), 누다안불명(淚多眼不明), 선인자등선(仙人自登仙), 표연귀옥경(飄然歸玉京)

유아성치완(有兒性痴頑), 유녀년상영(有女年尙嬰), 두속여척포(斗粟與尺布), 유소불능행(有所不能行)

누항수연옥(陋巷數椽屋), 하이공곡정(何異空谷情), 오오아녀제(嗚嗚兒女啼), 애애요심정(哀哀搖心旌)

기욕순천하(幾欲殉泉下), 차신불감경(此身不敢輕), 천첩기자석(賤妾豈自惜), 위군교아성(爲君敎兒成)


파란만장한 생활, 그리고 민간에서의 청빈하고 힘든 생활을 하면서, 오히려 고태청의 문학적 재능은 활발하게 꽃핀다. 그리하여 그는 시사가 모두 뛰어난 여문학가가 된다.


일번마련일중관(一番磨煉一重關)

오도무생심자한(悟到無生心自閑)

탐득진원하소론(探得眞源何所論)

번지난엽진수산(繁枝亂葉盡須刪)


점점 고태청의 마음은 청빈한 생활에서 초탈하고, 담담하게 모든 고난을 받아들이게 된다. 크게 기뻐할 것도 없고, 크게 슬퍼할 것도 없으니 그저 마음이 편안하다. 부귀와 청빈은 그다지 큰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심경은 그녀의 시에서 잘 나타난다. 한가지 언급할 것은 고태청은 말년에 "운사외사(雲槎外史)"라는 이름으로 <홍루몽영(紅樓夢影)>이라는 소설을 썼다는 것이다. 그녀의 문학적 견식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람과 물은 돌고 도는 법이다. 20년후, 혁회와 묘회부인사이의 장남인 재균이 병사하고, 후사를 두지 못한다. 그리하여 고태청의 장손이 대를 잇게 된다. 이렇게 하여 59세의 고태청과 자녀들은 패륵부로 되돌아가서, 말년을 편안하게 보내게 된다. 광서3년 고태청은 79세의 나이고 선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