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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중기)

진대사(秦大士): 청나라때 장원을 한 진회의 후손

by 중은우시 2018. 1. 11.

글: 소명진(蘇明眞)


천년이래로 진회(秦檜)의 악명은 그의 동족들로 하여금 그의 그림자 속에서 살도록 만들었다. 진회의 후손들 중에서 관직에 나간 사람은 아주 드물다. 청나라 건륭제 때에 이르러, 진대사라는 장원이 나타난다.


사료 기재에 따르면, 진대사는 자가 간천(澗泉)이고, 호는 추전노인(秋田老人)이다. 조적은 안휘 당도이며 1715년에 태어났다. 부친은 진유륜(秦有倫)이고 조부는 진응호(秦應瑚)이다. 진대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글읽기를 좋아했으면 10살에 시문을 지었다. 강남지역에서 명성을 어느 정도 날린다. 그뿐 아니라 그는 서에도 잘 해서, 소년시대에 사람들에게 글을 써줘서 집안의 생계를 도왔다.


진대사는 23살에 거인(擧人)이 되고, 38세에 북경으로 가서 회시에 참가한다. 황태후60세탄신의 만수은과(萬壽恩科)에서 그는 당당히 장원을 차지한다. 청나라에서 43번째 장원이 된 것이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여기에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당시에 진대사의 뛰어난 답안과 서예는 모든 시험관들을 탄복시킨다. 장원을 차지하는데 이제 황제의 결정이라는 마지막 한 걸음만 남았다. 건륭제는 그의 시험답안을 읽어본 후에 얻기 힘든 기재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가 진대사의 관적을 보고 거기에 그의 성까지 더하니 돌연 송나라의 간신 진회가 떠올랐다. 건륭제는 이렇게 생각한다. 만일 진대사가 바로 간신 진회의 자손이라면 그는 장원이 될 자격이 없다. 만일 장원으로 뽑는다면 내가 천하의 독서인들에게 뭐라고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건륭제는 진대사를 부른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와 진회는 무슨 관계인지를 묻는다.


이때 진대사는 내심으로 아주 망설였을 것이다. 어쨌든 이것이 그의 일생의 관료길을 결정하는 대사인 것이다. 만일 직접 간신 진회가 자신의 조상이라고 말하면, 이후 더 이상 관직에서 성공할 기회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진회의 후손이라는 것을 부인했다가, 일단 진상이 밝혀지면 이는 기군지죄가 된다. 그 본인이 죽임을 당할 뿐아니라, 가족들까지도 연루될 것이다.


진대사는 잠깐 생각하고는 7글자로 대답한다: "일조천자일조신(一朝天子一朝臣)"


이는 명나라의 탕현조(湯顯祖)가 <목단정. 노첩>에서 쓴 시로서 "만리강간만리진(萬里江山萬里塵), 일조천자일조신(一朝天子一朝臣)"이라고 쓴데서 비롯된 것으로, 천자가 바뀌면 신하도 바뀐다는 의미이다.


과연 건륭제는 그 말을 듣고 전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크게 기뻐하면서 그를 장원으로 뽑는다.


장원급제를 한 후에, 진대사는 관례에 따라 한림원에 들어간다. 수찬(修撰)이 되어 국사를 쓴다. 한림원은 비록 실권을 가진 곳은 아니지만, 나중에 관료로 성공하는데 반드시 거쳐야하는 길이다. 청말의 명신 증국번, 이홍장, 장지동 등이 모두 한림원에서 일한 경력이 있다.


알려진 바로는 나중에 건륭제가 진대사에 대하여 조사를 해보는데, 진대사가 진회의 형인 진재(秦梓)의 후손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진재는 사람됨이 정직하고, 관료로서 청렴했다. 그는 진회가 권력을 휘두를 때도 그와 같이 어울리지 않고, 율양(溧陽)으로 이사가서 은거했다.


건륭은 진대사의 재능과 기개를 높이 평가했고, 다음 해에 순천향시의 시험관으로 임명한다. 그 후에 진대사는 함안궁관학,  경산관학의 총재를 지내고, 한림원 시강학사로 황자의 글읽기를 가르쳤다.


사료기재에 따르면, 진대사가 어렸을 때 일찌기 친구들과 서호를 유람한 적이 있다. 그때 악비의 묘 앞에 이른다. 진회부부가 꿇어앉은 동상이 악비의 묘 앞에 있었다. 한 친구가 진대사를 놀렸다. 진대사는 거기에 변명하지 않고 붓을 들어 대련(對聯)을 남긴다.


인종송후무명회(人從宋後無名檜)

아도분전괴성진(我到墳前愧姓秦)


사람들은 송나라이후로 이름에 회를 쓰지 않는다.

나는 악비묘 앞에 오니 성이 진이라는게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