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토목보지변(土木堡之變)이후 주기옥(朱祁鈺)은 어떻게 황제로 추대되었는가?

중은우시 2018. 9. 11. 15:35

글: 두문자(杜文子)


정통14년 칠월, 대명의 북방 변관에서 긴급한 사태보고가 올라왔다. 오이라트가 침입했다! 명영종(明英宗) 주기진(朱祁鎭)은 왕진(王振)의 꼬드김에 넘어가 바로 친정(親征)에 나서게 된다.


명영종은 이렇게 경솔한 결정을 한 것에 대하여 참혹한 댓가를 치르게 된다. 금방 토목보의 변은 경사에 알려진다. 이에 대하여 신하들은 원망스러우면서 당황했다. 감국(監國)에 임명되었으나 이전에는 정사에 전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던 명영종의 동생 주기옥은 어쩔 줄을 모르게 된다. 이때 다행히 경성에 남아 있던 병부좌시랑(兵部左侍郞) 우겸(于謙)등이 나서서 대국을 중시하여 서유정(徐有貞)등 대신들의 남쪽으로 도망가자는 남천주장을 반박하고, 오이라트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한다. 이렇게 하여 겨우 인심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얼마후, 주기옥은 황제로 추대된다. 그라나 이때는 명영종이 아직 퇴위하지 않았다. 우겸등은 명영종이 신하로서 왜 다른 사람을 황제로 세우고자 했을까? 그리고 '불충'한 우겸은 왜 이로 인하여 역사에 악명을 남기지 않을 수 있었을까?


경사를 보위하는데, 우겸은 적극적으로 계책을 냈고, 성왕(郕王) 주기옥은 시대이 조류에 순응하여 인심을 얻었다.


오이라트가 토목보에서 명군 수십만대군을 격패시키고, 사기가 높았으며, 곧이어 명영종을 내세워 장성을 넘어 들어와 계속 남하하여 경사를 포위할 것이 명약관화했다. 그러므로, 시급한 것은 북경을 보위하는 것이다. 북경을 보위하려면 먼저 3가지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군대, 양식과 인심이다.


우겸은 성왕 주기옥에게 상소를 올려, 하남등이 도사(都司) 및 남북직예위소의 관군을 북경으로 이동시키도록 건의하고, 산동, 남직예의 비왜군(備倭軍)중 4500명의 정예병을 선발하고, 강북직예, 북직예의 36000명 양식운송관을 이동시켜 북경에서 통일적으로 훈련시키도록 한다. 주기옥은 우겸의 방안을 비준한다. 이로 인하여 원래 텅비어있던 경성의 군사방어력량은 강화되게 된다.


토목보지변은 아주 돌연한 사건이었고, 오이라트군은 남하하는 기세여서, 북경교외 통주의 수백만석 양식이 적의 손에 들어갈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리하여 누군가 이런 의견을 낸다. 사람을 보내어 통주의 양식을 불태워버려야 한다고. 우겸은 동의하지 않는다. 봉록을 선지급하는 방식으로 관리와 사병들로 하여금 스스로 통주로 가서 양식을 운송해가도록 한다. 많이 운송해가면 상까지 추가로 내렸다. 양식운동을 위하여, 심지어 백성과 죄수들까지도 동원한다. 이렇게 하여, 개인이익과 애국열정이 교묘하게 결합되어, 관군, 백성 심지어 죄수들까지도 모두 양식운반에 동원된다. 그리하여 통주양식운송문제를 해결했을 뿐아니라, 얼마후의 경사보위전에서도 버틸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다. 그리고 주기옥과 우겸등은 인심을 얻는다.


명영종이 포로로 잡히면서, 손태후는 두 살된 주견심(朱見深)을 황제로 앉히고자 했으나, 우겸등은 나이가 있는 주기옥을 황제로 세우고자 했다.


이런 상황하에서 당시의 주요지도자인 우겸은 약간 불안했다. 정통중후기부터 환관 왕진이 권력을 농단해서 전투력이 약화되고 명영종이 포로로 붙잡히고 수십만대군이 전멸하는 불행을 맞이했다. 우겸으로서는 통탄해 마지 않을 일이었다. 비록 유가충군사상의 훈도를 받은 우겸이고, 명영종이 하루빨리 기적적으로 귀국하여 복위하기를 바랐지만, 잔혹한 현실이 눈앞에 닥쳤다. 명영종에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만일 황제의 자리를 오랫동안 비워두게 되면 대명제국의 인심은 안정되지 못한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다: "하늘에 하루도 태양이 없을 수 없듯이, 나라에 하루도 군왕이 없을 수 없다." 그리하여 현재 명영종이 없는 상황하에서, 대명의 사직을 지키는 각도에서 고려하면 반드시 새로운 황제를 옹립해야 했다. 비록 이렇게 하는 것이 명영종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리고 자신의 장래에 예측불가능한 후환을 남기는 것이지만, 우겸은 이렇게 생각한다: 스스로 사심이 없이 광명정대하고, 열정을 지니고 위로는 하늘에 부끄럼이 없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기만하지 않았다. 설사 나중에 명영종이 복위하더라도 자신의 고심을 이해해 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그는 여러 신하들과 힘을 합쳐서 황태후 손씨에게 속히 신황제를 정해줄 것을 청한다. 이렇게 하여야 나라의 근본이 튼튼해지고, 인심을 안정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우겸의 상소문이 함축적이기는 하지만, 손태후는 적지 않는 자극을 받는다. 어쨌든 명영종은 자신의 친아들이다. 대신의 요청에 손태후는 일부러 모르는 척 이렇게 대답한다. 너희는 나에게 새로운 임금을 앉히자는 것이 아니냐. 관례에 따르면 신황제는 명영종 아들 즉 태자가 맡아야 한다. 그리하여 토목보의 변 이후 엿새째되는 날 손태후는 주견심을 태자로 앉힌다.


주견심이 몇 살인가? 이때 겨우 두 살이었다. 그래서 손태후의 이런 행동은 대신들의 뜻과 다른 것이다. 그래서 태감이 손태후의 의지를 전달했을 때, 조정은 의론이 분분했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는데, 겨우 두 살된 아이를 태자로 앉히다니, 그리고 황제로 앉히려 하다니, 그가 어떻게 이 위기를 지휘하여 넘길 수 있단 말인가.


기실 손태후의 생각은 아주 분명했다. 아들 주기진이 친정을 떠나기 전에 주기옥으로 하여금 경성을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주기옥이 토목보지변이후에 한 행동거지는 아주 적절했고, 인심을 얻었다. 게다가 그의 신분이 특수했다. 그가 대국을 주재하기에 가장 적절했다. 우겸등이 주청한 것은 바로 주기옥을 신황제로 앉히라는 것이다. 그러나 손태후는 그것을 원치 않았다. 원인은 아주 간단하다. 주기옥은 그의 친아들이 아니다. 일단 그가 황제에 오르면, 자기에게 그리고 명영종의 미래에 골치아픈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손태후가 2살된 손자를 태자에 앉힌 것은 황제의 자리를 주기진에게 남겨놓고 싶어서였다.


다만 대신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우겸을 대표로 하는 인물들은 주기옥을 신황제로 앉혀야 한다고 했다: "백성이 귀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며, 군왕이 가장 경하다."는 맹자의 이치를 들고 나왔다. 그러나 손태후는 이를 거부한다. 손태후도 보통 여자가 아니다. 그 이후 국사가 얼마나 긴급하든지간에 신황제를 옹립하는 일에 대하여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상황이 통제불능이 되자, 손태후는 어쩔 수 없이 대신들의 요구에 응하여 주기옥을 새로운 황제로 앉히게 된다.


그후의 한 가지 사건은 손태후의 생각을 바꾸게 만든다. 그것은 바로 좌순문(左順門)유혈사건이다. 급사중 왕굉(王竤)등 대신은 화풀이로 조정에서 왕진의 일당인 금의위지휘(錦衣衛指揮) 마순(馬順)등 3명을 때려죽인 것이다. 상황이 통제불능이 되고, 아주 혼란스러웠다.


신하들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았고, 손태후에게 연명으로 상소를 올려 신황제를 세울 것을 청한다. 그리고 백관들은 조정의 밖에서 손태후의 대답을 기다렸다. 손태후는 이런 기세를 보고 마음 속으로 더 이상 미루어도 해결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긴다. 대신들이 좌순문에서 3명이나 때려죽인 사건이 발생했는데, 자신이 허가하지 않으면 또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손태후는 대신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주청한 바에 따라, 성왕을 황제로 즉위하도록 명한다."


이렇게 하여 주기옥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경태제의 시대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