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두문자(杜文子)
주체(朱棣)의 정난지역이 성공하여 영락제에 오르자, 그의 차남 주고후(朱高煦)는 계속하여 야심을 가지고 형인 주고치(朱高熾)와 태자 자리를 다투었다. 그러다가 주체에 의하여 산동 낙안(樂安)의 번왕으로 쫓겨난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여 황위를 빼앗을 기회를 노렸다.
주고치가 죽고, 주첨기(朱瞻基)가 등극하자, 주고후는 아마도 이번에 반란을 일으키지 않으면 더 이상 기회를 없을 것이라고 여긴 듯하다. 그리하여 대명역사상 제2차 "정난지역"을 주고후가 일으킨다. 그러나 이번 숙질간의 싸움은 결과에 있어서 어가친정(御駕親征)한 주첨기가 모반한 숙부 주고후를 생포하는 것으로 끝난다.
주고후가 산동 낙안으로 가서 한왕(漢王)이 된 이후로, 그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하루종일 사람들고 모의하여, 군대를 강대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비밀리에 낙안성내에 점포를 열어 군수물자와 정부가 금지한 화기를 제조했다. 그 후에 낙안의 장정, 유민, 깡패 그리고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을 회유하여 훈련시킨다. 동시에 주고후는 암중으로 산동도지휘사 근영(靳榮)과 결탁한다. 당시 많은 관리들은 이런 상황을 보고 속속 한왕 주고후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주고후는 아주 기뻐하며 무슨 태사, 도독, 상서, 시랑등의 관직을 그들에게 허락한다. 마지막에는 황도길일을 택해 정식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계획에 따르면 먼저 산동성성인 제남을 함락시키고, 다시 북경으로 진격하여 황위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재미있는 현상이기는 한데, 주고후가 모반을 일으킨 방식은 주체와 거의 같았다. 조제(祖制)를 회복하고, 청군측(淸君側)한다는 기치를 내걸었고, 주고후는 모반전에 조카황제 주첨기와 공후대신들에게 서신을 보낸다. 서신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명인종 주고치는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저 문신만 중용하여 홍무제와 영락제가 정한 '조제'를 어겼다. 그리고 조정에 간신이 있고, 간신의 우두머리는 하원길(夏元吉)이다. 조정은 신속히 간신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만일 그러지 않으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
주첨기는 숙부 주고후에게 인내해온지 오래 되었다. 그가 보낸 서신을 보고는 생각한다. 조정에서 이번에도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그는 분명 나를 병든 고양이 정도로 여길 것이다. 다만 누구를 보내어 주고후의 반란을 진압할 것인지의 문제를 놓고 대신들간에 의견이 분분했다. 어떤 사람은 일찌기 주체를 따라 정난지역과 북정에 공을 세운 양무후(陽武侯) 설록(薛祿)을 보내어 반란을 평정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학사 양영(楊榮)이 반대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황상은 이경륭(李景隆)의 일을 보지 않으셨습니까?" 그는 설록이 제2의 이경륭이 될까봐 걱정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신들과의 여러번에 걸친 상의 끝에 주첨기는 친정하기로 결정한다. 그후 주첨기는 명을 내려 "여러 장수들에게 엄격히 각 성을 수비하도록" 한다. 그리고 평강백(平江伯) 진선(陳瑄)을 보내 회안(淮安)을 방어하게 한다. 이를 통해 주고후가 남쪽으로 도망치는 길목을 차단했다. 일련의 배치와 준비를 거친 후, 선덕원년 팔월, 주첨기는 "주고후의 죄를 천지, 종묘, 사직, 산천, 백신에게 고하고" "대영 5군의 장병을 이끌고" 북경을 출발하여 산동 낙안으로 향한다.
도중에, 주첨기는 주고후에게 투항을 권유하는 서신을 보낸다. 먼저 심리적으로 주고후를 타격하고자 한 것이다.
투항권유서신을 보낸지 얼마 후 선봉군의 사령관인 양무후 설록이 사람을 보내와서 보고한다; "조정 선봉부대가 이미 낙안성 아래에 도착했습니다. 주고후는 내일 춘전하기로 약정했습니다." 주첨기는 즉시 명령을 내려, 전군에게 행군속도를 올려 날이 밝기 전에 낙안에 도착하도록 했다.
낙안에 도착한 후, 주첨기는 여러 장숭게 명령을 내려 낙안성의 4개 성문을 열도록 했다.
이때 주고후는 심복 왕빈(王斌)등의 옹호하에 성벽에 오른다. 수하병사들에게 화포를 배치하라고 명령하여 발사할 준비를 한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조정군대의 사문신기총포(四門神機銃砲)가 성벽위를 대린다. 성벽 위에 모여 있던 주고후의 병사들은 놀라서 급히 숨고, 두려움에 떤다. 도망가고 싶어도 도망갈 수가 없었다. 주고후등이 감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성들을 다치게 하지 않기 위하여, 주첨기는 발포를 멈추라고 명한다. 그 후에 주고후는 칙유를 보낸다: 짐이 왔다. 그런데 와서 배알하지 않고, 계속하여 웅크리고 완강하게 반항하고 있다. 짐은 성의를 가지고 너를 대하겠다. 네가 싸우겠다면 싸우고, 싸우지 않겠다면 바로 짐의 군문 앞으로 와서 상황을 설명해라. 그래야 보전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성이 함락되는 날에는 모든 것이 늦었을 것이다."
조카의 칙유를 받고, 주고후는 당연히 신경쓰지 않았다. 정오가 되기를 기다려, 주첨기는 다시 주고후에게 칙유를 보낸다. 최후통첩인 셈이다. 그에게 즉시 투항할 것을 권유했다.
주첨기의 이 방식은 아주 효과를 발휘한다. 낙안성 안의 많은 사람들은 황제의 칙유를 보고, 주고후를 붙잡아 조정에 바칠 생각을 한다. 이런 상황을 보자, 이미 낭패에 빠진 주고후는 놀란 새가슴이 된다. 어떻게 해야한단 말인가? 싸울 것인가 말 것인가? 그는 초초하게 고민한다.
돌연 주고후에게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싸운다면 분명히 조정군대를 이기기 어려울 것이다. 같이 모반을 꾀했던 동료들까지 내가 지금 신경써줄 수는 없다. 사나이라면 눈앞의 손해에 연연하지 않는 법이다. 먼저 투항하고 보자. 여기까지 생각하자, 그는 바로 사람을 주첨기에게 보내어 투항할 생각이라고 알린다. 다만 하룻밤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가 처자식과 이별하고, 다음 날 아침에 가서 죄를 빌겠다는 것이다.
주첨기는 응락한다. 그리고 바로 이날 밤에, 주고후는 여러 해동안 만들었던 병기와 반란음모를 꾸몄던 서신을 모조리 소각한다. 낙안성은 불길이 치솟는다.
다음 날, 주고후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황제의 영장(營帳)으로 걸어간다. 그런데 마침 그의 충실한 심복 왕빈을 만난다. 왕빈은 이렇게 말한다: "한왕전하, 우리는 싸우다 죽을 지언정 포로가 될 수는 없습니다." 누가 알았으랴. 주고후는 얼굴이 두껍다는 것을. "나는 투항하러 갈 생각이 없다. 오늘 아침에 나와서 군대의 상황을 한번 시찰해 보려는 것이다. 곧 돌아가겠다." 마를 마치고 그는 자신의 한왕궁(漢王宮) 방향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다가 그는 과연 왕빈이 속았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서 샛길로 낙안성을 빠져 나온다. 성문을 막 나서자마자, 조정의 군대에 체포되어 주첨기의 앞으로 끌려간다.
주고후이 이번 황당한 반란은 이렇게 주첨기에 의하여 '칼에 피한방울 묻히지 않고' 해결된다.
다만 주고후는 어쨌든 주첨기이 친숙부이다. 그래서 황제는 그를 죽이지 않는다. 주고후와 그의 아들과 여자식솔들은 주첨기에 의하여 북경 서안문(西安門) 안의 한 새로 지은 집에 갇힌다. 사람들은 이곳을 "소요성(逍遙城)"이라고 불렀다. 대우는 괜찮은 편이지만, 자유는 제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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