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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남명(南明)이 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by 중은우시 2018. 7. 14.

글: 한정우기(閑情偶記)


<도화선(桃花扇)>에서 공삼임(孔尙任)은 마사영(馬士英)의 입을 빌어 아주 정확한 시세판단을 한 바 있다: "나라에 변고가 있어야, 우리같은 자들이 뜻을 얻을 수 있다." 나는 일찌기 여러 사적(史籍)을 살펴봤다. 역사에 대한 인식과 분석이 어떤 때는 희극가가 사학자보다 더욱 심도있다. 홍광조가 비바람에 흔들리다보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등장할 수 있게 된다.


사가법만이 아니고, 마사영만이 아니고, 유공소(劉孔昭)도 있다.


유공소(1604-?), 자는 복양(復暘), 유백온(劉伯溫)의 14대손으로 성의백(誠意伯) 작위를 승계했다. 숭정11년, 영남경우부제독조강겸순강방(領南京右府提督操江兼巡江防)이었다.


유공소의 졸년이 왜 ?일까? 왜냐하면 그는 인간증발했기 때문이다. 남경이 함락된 후, 그는 가족을 데리고 조상무덤으로 가서, 조상에게 절을 한 후에 행방이 묘연해진다.


생사의 길목에, 유공소는 왜 위험을 무릅쓰고 조상묘를 찾아서 절했을가? 왜냐하면 그의 조상은 보귀할 뿐아니라 보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훈신집단(勛臣集團)"에 관하여 사람들의 인상은 이미 약화되었다. 훈신은 명나라의 이성귀족(異姓貴族)을 말한다. 군공으로 공,후,백의 작위를 받은 신하와 그 작위를 승계한 후손이다. 명목상으로, 그는 명나라의 무관(武官) 특히 고위군직 후보자이다. 기실 그는 '관료자제'와 다르다. 관료자제는 신축적이다. 관료로 나가고 싶으면 관료로 나가고 다른 것을 하고 싶으면 다른 것을 한다. 그러나 훈신은 다르다. 정상적인 때라면, 이 기득이익집단은 모두 그냥 죽을 때까지 먹고 놀며 지내면 된다. 정책적인 대우가 부여되는 한. 오직 국가에 변고가 생겨야 이들이 나설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자성이 북경을 점령한 후, 남경을 "유도(留都)"로 삼는다. '전시정부'의 기본틀은 갖춰져 있었다. 이 시기의 '유도'는 남경 병부상서 사가법을 제외하고, 남경훈신집단이 조정에 이미 중요한 작용을 하게 된다. 그때 남경훈신집단중 서열이 가장 높은 살마은 서홍기(徐弘基, 서달의 후손)이고, 그 다음이 바로 유공소이다.


비록 '관14대"이지만 유공소의 성격은 '관1대"와 다를 바 없었다. 권세가 날로 커진 유공소는 이 시기에 그의 친구인 "완대성(阮大鋮)"을 추천한다.


완대성과 유공소가 가까워 진 것은 모두 술자리에서이다. 돈도 있고, 시간도 있고, 주량도 세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더하자면, 완대성을 재기용하는 문제에 있어서, 마사영이 간부정책에서 임인유친(任人唯親)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틀렸다. 마사영과 완대성의 권력이 조정을 좌지우지하게 된 것은 나중의 일이고, 억지로 마사영이 주연유(周延儒)의 정치적 당부를 이행하기 위하여 완대성을 홍광조정에 끌여들였다고 하는 것도 너무 단순하다. 왜냐하면 처음 완대성을 추천한 것은 마사영이 아니라 유공소이기 때문이다.


유공소의 추천공작은 완전히 관방특색을 나타낸다. 첫째, 인식제고, 둘째, 실제수행, 셋째, 영도강화.


표준적인 관방의 방식은 여러해동안 해보지 않으면 잘 알지 못할 것이다. 소위 '인식제고'는 무슨 일을 할 때는 목소리를 가능한 끌어올려서 압도적인 성량으로 상대방이 자신의 관점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려봐야 누가 너를 알아주겠는가? 그리고 실제수행은 그저 목소리만 높여서 말싸움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자신이 움직여서 일을 처리해야 하다. 다섯 손톱에 피를 묻히면서, 절대로 가식적으로 몇 가지 동작만 해서는 안된다. 만일 앞의 두 수단만으로도 통하지 않으면, 지도자가 나서서 '강화'시켜주어야 한다. 지도자가 나서서 한마디 해도 안된다면 그것은 어쩔 수가 없다.


숭정17년 오월 초삼일, 이때의 주유송(朱由崧)은 신분이 감국(監國)이다. 아직은 황제를 칭하지 않았다. 즉 이제 막 판을 벌였을 때이다. 새 회사를 만들면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바로 간부인사문제이다. 조정에서 감국의 관리를 논의해야 한다. 바로 이 논의때, 훈신인 성의백 유공소가 완대성을 추천한 것이다.


다만, 유공소의 추천은 바로 사가법등의 반대에 부닥친다.


사가법이 완대성의 입조를 반대한 것은 그의 개인적 은원 때문은 아니다. 흩어져 있는 자료를 종합해보면, 사가법은 동림당에 기울어 있고, 은사인 좌광두와 완대성의 갈등은 죽을 때까지 풀리지 않았다. 다만 사가법은 완대성과 무슨 일이 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 교류한 바 없다. 그가 완대성의 기용을 반대한 중요한 원인은 바로 당쟁국면을 고려해서이다. 한명을 잘못쓰면 전 판에 영향을 미친다. 정치적 리스크평가가 불가피하다. 바로 이 점때문에 주유송도 동의하여, 완대성의 입조건은 보류되게 된다.


유공소는 여기서 그만두지 않는다. 반달 후, 사가법이 남경을 떠나고, 마사영도 입각한다. 완대성의 임용문제를 해결할 조건이 비교적 성숙된 것이다. 유공소는 책임감있게 다시 완대성을 추천한다. 노구덕(盧九德)도 유공소의 영향을 받아 기회를 봐서 주유송에게 완대성이 얼마나 재능있는지를 선전한다. 주유송이 정식으로 등극하면서, 노구덕은 중도수비태감에서 사례감병필태감으로 승진하고 실력파가 된다. 완대성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친구가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 결과 황상의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나 외부의 반대 목소리는 처음보다 더욱 컸다.


완대성의 임명이 통과될 수 없었는데, 관건은 바로 장신언(張愼言)이었다.


장신언(1578-1646), 자는 금명(金銘), 호는산(藐山)이고, 산서 양성 사람이다. 홍광조때 이부상서를 지낸다. 이부상서가 한 사람의 기용을 막는 것은 전력회사사장이 전기를 끊는 것처럼 간단하다.


인사문제를 처리하는데, 장신언은 뛰어난 인물이다. 당시 유명한 이부상서 조남성(趙南星)은 바로 그가 추천한 사람이다. 장신언은 강직한 관리였고, 여러가지 피해를 많이 입었다. 풍전(馮銓)을 탄핵하는 소를 올렸다가 음해를 당하여 좌천되기도 했고, 숭정원년에 다시 기용되었다. 장신언은 명예회복되면서 나중에 남경 호부상서, 이부상서, 장우도어사사(掌右都御史事)가 된다.


북도에서 장사라면 남경이부상서는 그저 명예직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홍광조이다. 장신언의 의견은 더 이상 참고사항이 아닌 것이다.


유공소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다. 이제는 장신언을 겨냥해야 한다. 그리고 목표를 실현하려면, 반드시 업무를 새로운 단계로 발전시켜야 한다.


주유송이 칭제하기 이틀 전에, 다시 한번 중요한 업무를 공동으로 논의한다. 유공소는 화력을 증가시키기로 결정하고, 탕국조(湯國祚), 조지룡(趙之龍)등 훈신을 끌어들인다. 그리고 집단적으로 장신언을 욕한다. 장신언은 문관이므로, 욕을 하는데 장점이 있지는 않다. 그는 혼잣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청자자청(淸者自淸)....


주유송은 그래도 성격이 좋았다. 양쪽에 화해할 것을 권한다. 모두 일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문무각관은 서로 협력하여 헤쳐나가자고 한다.


유공소는 황제의 체면을 봐줄 생각이 없었다. 계속하여 자신의 강점을 드러낸다. 소매에서 칼을 끄집어 낸다. 이제 장신언이 당황한다. 대전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엄숙한 업무장소가 이렇게 엉망진찬이 되어 버린다.


말싸움과 주먹질이 같이 나오니 견딜 수가 없었다. 장신언으로서는 약세에 처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는 몸이 확실히 좋지 않았다. 그래서 병을 핑계로 사직절차에 들어간다.


고홍도(高弘圖), 강왈광(姜曰廣)과 같은 노신들도 업무난이도가 높다는 것을 알고, 장신언과 함께 집으로 돌아간다. 고홍도는 이렇게 말한다: "신이 가볍게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쓰는 문제에서, 신이 괜찮다고 하면, 훈신이 안된다고 합니다. 시비가 혼란스러우니, 신이 어찌 그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고홍도의 말에는 기실 또 다른 정보가 숨겨져 있다: 홍광조는 이미 예전같지 않다. 훈신이라는 과거에 정치에 참여하지 않던 집단이 이미 굴기하여 관료사회의 또 다른 세력을 형성했다. 간부업무는원래 직능부서가 주도해야하는 일이 아니던가.


당쟁과 당파싸움은 홍광조때 다른 황제때보다 훨씬 복잡했다.


몇번을 싸웠는데, 완대성을 재기용하는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 마사영을 볼 수밖에 없다.


숭정17년 육월, 마사영은 완대성의 입조를 추천한다. 마사영은 어쨌든 문인출신이다. 말하는 것이나 일처리하는 것이 유공소처럼 야만적이지 않다. 일이 성사안되면 바로 욕하고, 칼을 들고 하지 않는다. 하물며, '인식제고', '실제수행'의 수법을 유공소는 모두 썼다. 자신이 쓸 수 있는 것은 이제 겨우 '영도강화'의 마지막 초식만 남은 것이다.


그래서 마사영은 상소를 올린다. <모죄특거지병지신완대성공지시한소>. 마사영은 왜 겸허하게 자신이 "모죄(冒罪, 죄를 무릅쓰)"라고 했을 까? 왜냐하면 완대성은 역안(逆案)에 관련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간부'신분이 아니다. 그래서 마사영은 말투를 조심한 것이다. "전임 광록시경 완대성은 산림에 거처하면서도 군왕을 잊지 않았고, 변방에 부임하여 병법을 써보지 못하고 있다. 그가 모역사건에 연루된 것은 아직 실질적인 증거가 없다. 그의 재주는 쓸만하고, 죄는 용서할 만하다. 청컨대 관리를 보내어 조서를 작성하여, 임시직위를 부여해서, 남경으로 와서 황제를 접견하게 하시고, 방략을 물어보십시오, 만일 쓸만하면 병부우시랑을 내려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완대성을 추천한 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말나오는대로 헛소리를 지껄인 것은 아니다.

첫째, 완대성은 학습형의 간부이다. 여러해동안 공부를 해서, 이미 쓸만한 군사인재가 되었다.

둘째, 과거에 그에 대한 처리는 사실이 명확하지 않다. 역사문제에 집착해서 용서해주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

셋째, 도대체 쓸만한지 아닌지는 면접을 본 후에 결정해도 된다.


마사영은 원래 주유송이 중시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말이 이치에도 맞으니 자연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주유송은 동의했으나, 고홍도는 동의하지 않았다. 


고홍도1583-1645), 자는 연문(硏文), 또 다른 자는 자유(子猶), 호는 갱재(硜齋), 산동 교주 사람이다. 숭정16년 남경 병부시랑을 맡고 이어서 호부상서로 승진한다. 지금은 서열 3위의 5대각신 중 하나이다.


완대성이 면접시험을 준비하고 있을 때, 고홍도가 나선다: 간부의 임명은 조직절차를 어겨서는 안된다. "구경회의를 거쳐야 한다"


마사영은 똑똑한 인물이다. 고홍도의 이 수법이 아주 악독하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 간부임명을 정상적인 절차로 하려면, 내가 왜 그렇게 많은 말을 했겠는가. 절차를 우회하여 처리하려면, 긴급한 사안으로 처리하고, 특수한 사안으로 처리해야 한다. 쌍방의 말싸움은 치열했다.


고홍도는 주유송이 의사표지를 하지 않자, 더 이상 논쟁을 벌여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홍도는 전혀 물러날 의향이 없었다.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여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퇴근 한 후에 작업을 한다. 그 결과 반대의 목소리가 가득하고, 심지어 문서를 초안할 사람조차 없게 된다.


완대성이 재기용되는 건이 계속하여 저지되고, 인식이 통일되지 못하였다. 이제는 황제가 한 마디 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즉 '중지(中旨)"만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중지"라는 것은 바로 황제가 내린 칙명을 말한다. 상관부서와 정상절차를 거치지 않고, 직접 유관기구에 보내어 집행하게 하는 것이다. 중지는 역대왕조에 모두 선례가 있다. 단지 아주 드물게 사용했을 뿐이다. 황제가 사람을 쓰겠다는데,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래도 적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황제에게 대들 수 있는 사람은 더욱 드물다. 하물며 이때는 비상시기이다.


홍광조는 확실히 비상시기이다. 중지를 사용하는 것은 원래 문제가 없는 것이지만, 문제는 완대성에게 썼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불평불만이 터져나오게 된다.


마사영은 홍광제에게 중지를 쓰도록 종용한다. 그리고 이는 완대성에게 처음 쓰는 것도 아니다. 이미 선례가 있다. 바로 장유예(張有譽)에게 썼다. 


장유예는 자가 수예(誰譽)이고, 강음 사람이다. 천계2년의 진사이며, 숭정연간에 요주지부, 사천안찰사를 지냈고, 명성이 아주 높았다. 이부상서 정삼준(鄭三俊)이 천하의 청백리 5명을 열거했는데, 그중 첫째를 차지한 사람이 바로 장유예이다. 그는 남경 호부우시랑 겸 우첨도어사로 발탁된다.


장유예의 명망을 보면, 홍광조가 발탁하여 중용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숭정17년 팔월, 홍광제는 중지로 그를 호부상서에 기용한다. 


다만 이 때도 마찬가지로 조용히 넘어가지는 않았다. 중지가 내려오자 마자, 여러 신하들이 즉시 반대한다. 고홍도는 강력하게 반대한다. 이과급사중 장정신(章正宸)은 조서를 돌려보낸다. 다른 언관들도 상소를 올려 반대했다. 다만 이번에는 주유송이 자신의 의견을 견지했다.


중지로 장유예를 발탁한 후, 주유송은 이어서 중지로 완대성을 병부첨주우시랑으로 발탁한다. 숭정17년 구월 팔일, 홍광제가 직접 하달한 유지가 반포된다: "완대성을 직접 만나보았는데, 그의 말은 분명하고 시원했으며, 재주과 모략이 쓸 만했다. 짐은 여러 신하들이 올린 역안을 살펴보았는데, 완대성이 찬성하고 주도한 실질적인 증거는 없다. 시세가 어렵고 인제가 필요하다. 첨주병부우시랑으로 일하게 하니, 여러 신하들은 고집하고 교란시키지 말라." 


이것이 바로 완대성의 정식임명문건이다.


완대성이 다시 기용되었다. 그는 바로 <고충피함지유소>를 놀린다. 먼저 위충현당에 대한 정치적 태도를 밝힌다. 자신은 그들과 사실상 '빙탄불상용'의 관계였다는 것이다. 이어서, 안대성은 자신이 위대중, 좌광두와 싸운 것에 대하여 자신이 홍광제의 조모와 부친의 명성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고 변명한다. 위대중, 좌광두는 '사의(邪議)'를 제창하여 자신을 공격했다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뒤의 말은 그의 교활한 변명으로 본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다른 사람의 일을 끌어서 얘기하는 것은 모두 수단이고 목적은 아니다. 한걸음 물러나서 말하자면, 완대성이 그때 무슨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삼여씨 <남명야사>에서 말한 것과 같다. "안대성은 자주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가 군자가 되고 싶지 앟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내가 군자가 되지 못하게 막는다'"


병부시랑이 된 후에, 완대성은 직무를 시작한다. 그는 연이어 두 번의 상소를 올린다. 명칭은 <연락공액진취접응사착소> <장강양합삼요십사극소> 자신의 견식과 재능을 뽐낸다. 


사실상 완대성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일이나 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 중지로 완대성을 기용한 후, 여러 신하들이 시그러웠고, 오래가 지나도록 가라앉지 않았다. 온갖 욕이 난무했다. 정서가 가장 격렬했던 사람은 유종주(劉宗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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