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쇠솥: 명나라와 몽골이 100년전쟁을 벌인 원인

by 중은우시 2018. 11. 28.

글: 장뢰(張雷)


명나라가 건립된 후, 원나라는 쫓겨나서 몽골초원으로 돌아가서, 새롭게 소와 말을 기르며, 물과 풀을 찾아다니는 유목생활을 시작한다. 단일한 유목제 경제모델은 몽골인들로 하여금 소, 양, 말을 생산하는 외에 다른 기술은 뛰어나지 못했다. 특히 가정에 필수적인 물품을 자급자족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몽골인의 일상생활은 크게 영향을 받게 된다. 여러가지 생활용품중에서 몽골인들의 쇠솥에 대한 수요는 엄청나게 올라간다. 자신들은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변경무역이나 내지를 약탈할 때 가장 먼저 찾는 것은 바로 쇠솥이었다.


<명경세문편>의 기록에 따르면, 몽골은 변방무역이 금지된 후, "쇠솥이 부서지면 온갖 방법으로 구멍을 메워서 썼다. 부득이하게 되면, 가죽주머니에 물을 넣어 고기를 끓여서 먹었다." "매번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면 먼저 노략질을 하는데, 솥을 얻는 것을 가장 좋은 물건을 얻은 것으로 쳤다." <북적순의왕엄답신공표(北狄順義王俺答臣貢表)>의 기록에 따르면, "옷으로 입을 것이 전혀 없었다. 양탄자 가죽은 여름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조각난 옷감(段布)도 얻기 어려웠다." 이를 보면 중원을 떠나자 수공업품이 이렇게 귀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몽골 오이라트부의 태사(太師) 예센(也先)이 거병하여 명나라를 공격한 구실중 하나는 바로 명나라가 변경무역을 막아서, 몽골인들이 가장 기본적인 생활물자 특히 쇠솥도 취득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명나라가 우리에게 무역으로 주지 않으면, 우리가 가져갈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토목보의 변이 일어나기 전에 명나라 사신 양명(楊銘)은 오이라트부에 사신으로 갔는데, 예센은 친히 그에게 말한다. 그가 출병한 목적은 바로 쇠솥과 말안장, 의복모자등 기초적인 생활물자를 얻기 위함이라고. 당연히, 예센과 같은 정치인물의 경우 그가 출병한 목적은 단순히 이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명나라가 변방무역을 금지시킨 후, 몽골의 생활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명성조가 정난지역 이후 황제에 오른다. 그는 어느 정도 호시무역(互市貿易)을 개방했고, 몽골이 조공의 방식으로 한정된 장소에서 변방무역을 진행하도록 허용한다. 특히, 영락6년 감주, 양주, 난주, 영하등의 호시장소에서 쌍방은 생활용품을 교환한다. 몽골인은 말, 가죽제품을 주고, 중원의 쇠솥, 양식, 비단, 신발, 모자, 약재, 종이, 자기등 물품을 가져갔다. 그중 쇠솥의 거래량은 비중이 컸다. 명나라가 시행한 것은 조공무역이다. 그래서 매번 몽골이 와서 조종할 때, 명나라가 몽골의 각부에 주는 하사품은 아주 많았다. 이는 몽골각부로 하여금 욕심을 더욱 크게 내도록 만들어, 갈수록 큰 조공팀이 오게 된다. 규정에 따르면, 최초에 한번에 100명이 조공했는데, 명영종에 이르러서는 인원수가 최대 한번에 3천명에 이르게 된다. 중원에 들어온 후, 모든 비용은 명나라 중앙과 지방에서 부담한다. 돌아갈 때는 하사품을 배로 준다. 그러다보니 명나라는 힘들 수밖에 없었다. 불균등무역의 균형을 맞추기 위하여, 명나라조정은 여러번 몽골의 조공횟수와 인원수를 제한한다. 횟수와 인원수가 감소하면서, 교환하는 물자도 줄어들었다. 쇠솥을 예로 들자면, 명영종때 3천명의 몽골사절단은 1번에 쇠솥 6만여개를 가져간다. 인원규모가 3백명으로 제한된 후에는 가져가는 쇠솥이 훨씬 줄어든다. 특히 쇠솥은 일상소비품이어서, 몽골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이 필수품에 대한 수요는 계속 증가한다.


가정연간에, 몽골각부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소왕자, 엄답칸등의 부족은 이미 40만에 이르게 된다. 명나라의 수공업품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커진다. 이때는 변경무역이 규모를 확대하지 않았으므로 소왕자와 엄답칸등은 여러번 변방을 공격하여 변방 백성집안의 쇠솥등 생활용품을 약탈해 간다. 가정29년, 엄답칸이 병력을 이끌고 남하하여, 대동(大同)을 포위한다. 그리고 호시를 요구한다. 호시를 열어주지 않으면 매년 와서 약탈해가겠다고 한다. 가정제는 어쩔 수 없어, 통일적으로 구변을 개방하고, 대규모 호시무역을 진행한다. 그렇게 하여 엄답칸으로 하여금 말을 주고 생활 용품을 받아가게 한다. 그중 쇠솥은 가장 귀중한 것이었다. 무역을 장기간 지속시키기 위하여, 엄답칸은 불량품을 금지했고, 명나라와의 무역관계를 잘 유지하고자 한다. 그러나 호시가 열린지 1년만에, 가정제는 폐쇄시켜 버린다. 결국 쌍방은 지칠 때까지 싸우게 되고, 융경제가 신정을 시작하면서, 삼낭자(三娘子)가 몽골의 권력을 장악한다. 쌍방은 변방무역을 다시 개방한다. 명나라에서는 사상유례없이 엄답칸을 순의왕에 봉하고, 대규모 변경무역을 허가한다. 이렇게 하여 겨우 몽골인들이 그렇게도 바라던 쇠솥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후 백년간, 명나라와 몽골간에는 소규모전투가 있기는 했지만, 호시무역이 계속 유지되었고, 쌍방은 서로 없는 것을 교역을 통해 얻을 수 있었다.


명나라에서 쇠솥이 초원에 유입될 수 없도록 막은 원인은 우습기 그지없다. 몽골이 쇠솥을 녹여서 병기, 갑옷으로 만들까봐 겁을 낸 것이다. 부득이 변방무역을 열었을 때도, 품질이 열악한 솥으로 교역을 한다. 이렇게 하다보니 쇠솥의 수명이 아주 짧았고, 몽골은 단기간내에 다시 무역을 할 수밖에 없었다. 몽골의 퇴화한 수공업제작기술로는 쇠솥을 다시 녹여서 무기로 만드는 것이 거의 어려워졌다. 거꾸로 일본은 당시 동남연해에서 쇠솥을 산 다음, 녹여서 병기로 만들었고, 일본 전국시기의 전쟁때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