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벽제관(碧蹄館)전투: 한중일이 모두 다르게 설명하는....

중은우시 2018. 8. 2. 12:36

글: 예비역공군상위(豫備役空軍上尉)


동아시아역사상 가장 크게 논쟁이 되고 있는 전투를 따지자면 만력시대에 조선에서 벌어진 벽제관전투일 것이다.

1593년, 정월 이십칠일 이 규모가 크지 않았던 전투는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싸우고 반목하는 이슈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 전투의 결과에 대하여, 중국, 일본, 한국의 삼자가 모두 다르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후세에 이들 사료에 대한 논쟁은 계속된다. <일본외전사>등 일본사료에서는 벽제관전투를 대첩(大捷)으로 기록한다. 과정은 기본적으로 이러하다. 일본의 저명한 지장(智將)인 코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과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정밀하게 기획한 명군에 대한 포위섬멸전이라는 것이다. 명군이 평양전투에서의 승리후 경적심리로 함부로 진격하던 것을 이용하여 일거에 수만명군을 섬멸하고, 이여송등은 겨우 목숨만 구한 전투라는 것이다.

<조선정벌기> <조선군기> <일한고적>등 일본역사편저자들은 더욱 이를 상세히 기록하여, 일본군이 추격하는 도중에 명군이 물에 빠져죽고, 칼에 맞아 죽은 사람이 다시 만여명이라고 적었다.


조선의 기록은 비교적 재미있다. 윤근수(尹根壽)등 군대를 따랐던 대신들은 모두 기록하고 있다. 천병(명군)이 삼백이 죽고, 왜구(일군)도 삼백이 죽었다는 것이다. 쌍방이 비슷했다고 적었다. 이것은 표준적인 사대주의이다. 그러나 조선의 보편적인 견해는 명군이 이 전투에서 소수로 다수를 상대하다가 결국 패전했다는 것이다.


서방의 기록은 일본에 편향되어 있다. 이약슬(李約瑟)의 <중국인사관>등 저작에서도 비록 쌍방의 사상자 상황을 명확히 적지는 않았지만, 한 마디를 남겼다. 명군의 단도, 장모로는 일본군의 화창과 무사도를 당해내지 못했다.


기실 이 전투의 승부를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전쟁후의 태세를 보면 안다. 이어송은 마치 더 이상 대거 남하하지 않고, 더 이상 일본군을 먹잇거리로 생각하지 않은 것같은 자태를 보인다. 그러나 일본군은 기본적으로 다시 평양을 되찾겠다는 계획이나 고함을 외치지 않는다. 오히려 왕경을 수비하는 것을 주요임무로 삼았다.


이여송이 이번에 조선에 데려온 명군은 겨우 4만여명이다. 일본에서 과장하는 것처럼 벽제관전투에서 1만이상의 명군을 참수했다면, 일본군이 승기를 잡아 추격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여송이 벽제관전투에 데려간 부대는 3천 내지 4천에 불과했다. 후기에 양원(楊元)이 데려온 수천의 명군이 증원된다. 다 합쳐봐야 1만이 되지 않는다.


당연히 이여송이 벽제관전투에서 전승을 거두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객관적이지 않다. 그는 적군에 의해 깊은 곳까지 유인되었고, 매복에 당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반박할 수 없다. 단지 이여송의 가병과 요동철기는 확실히 대단했다. 수만의 일본군이 포위공격하는데도, 완전히 섬멸하지 못했으니까.


벽제관전투는 쌍방이 진정으로 상대방의 실력을 인식하게 된 조우전이다. 이여송은 자신이 데려온 3,4만으로 10여만의 일본군을 완전히 궤멸시키려면 강대강으로 부딛쳐서는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양초를 불태우는 등 지취(智取)의 방법을 쓰게 되는 것이다.


일본군장수들도 인식했다. 일본전국시대의 소위 백전노장의 군대도 명군을 만나서는 적수가 되지 못했다는 것을. 정면으로 대결해서는 흉다길소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본역사가들이 벽제관전투에서 수만의 명군을 죽였다고 허풍을 떠는 것은 아마도 명나라의 허황된 언관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뒤에서 매일 이여송을 탄핵했고, 안으로는 백만의 돈을 들이면서 사병의 사상자가 십여만이라는 헛소리를 지껄였던 것이다. 이들이 탄핵하는 글은 <명사>를 편찬하는 청나라의 후안무치한 문인들에게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이렇게 하여 내수가 수출로 전환된 것이다. 명군의 명예를 가장 심하게 훼손했던 것은 다름아닌 스스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