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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중국역사상 가장 기이했던 과거시험

by 중은우시 2018. 11. 29.

글: 임염춘추(林炎春秋)


과거시험은 중국봉건왕조에서 문무관리를 선발하는 제도이고, 수당부터 청나라때까지 1300년간 존속했다.

수나라이전에 채용한 제도는 "구품중정제"이다. 이는 일반백성들에게 아주 불공평하다. '구품중정제'이 창립초기 기준은 세 가지이다: 가문, 도덕, 재능. 위진시기에 중정이 되는 것은 일반적으로 이품이고, 이품은 중정추천권을 가지기 때문에 이품을 얻은 자는 거이 전부 '문벌귀족'이었다. 즉 관료사대부로 구성된 정치집단이 완전히 관료선발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연히, 인재의 도덕과 능력을 점점 경시되고, 가문이 갈수록 중요하게 된다. 심지어 유일한 기준이 되어 버린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다보니, '공의 집안에 공이 나오고, 경의 집안에 경이 나온다' '상품(上品)에 한문(寒門)이 없고, 하품(下品)에 세족(勢族)이 없다." "세주(世胄)가 고위직에 앉고, 영걸(英傑)이 하위직에 앉는다."는 국면이 나타난다. 평민백성은 아예 관료가 될 수 없고, 중하급관료집안은 그저 하급관리만 할 수 있었다.


수문제가 즉위한 후, '구품중정제'를 폐지하고, 과거제를 시행한다. '자유롭게 신청하고, 통일적으로 시험을 보아, 평등하게 경쟁하며, 우수한 자를 선발하고, 공개적으로 방을 내건다'는 원칙에 따라 평민백성들에게도 공평하게 경쟁할 기회를 주었다. 동동한 조건 하에서 문벌을 따지지 않았으니 사람들은 모두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조위전사랑(朝爲田舍郞), 모등천자당(暮登天子堂)'(아침까지는 농사짓는 사내였으나, 저녁에는 천자의 조당에 올라가는 관리로 된다), '십년한창무인문(十年寒窓無人問), 일거성명천하지(一擧成名天下知)"(십년동안 쓸쓸하게 지내며 아무도 찾는 이가 없었다가, 어느날 갑자기 일거에 이름을 떨치고 천하인들이 모두 알게 된다). 그리하여 공부를 잘하면 관리로 나선다, 능력이 있는 자가 정치무대에 나서고 통치계급의 동량지재가 되게 된다.


대명왕조가 건립된 후, 과거제는 전성기를 맞이한다. 명나라 통치자들은 과거를 아주 중시했다. 과거의 방법이 이전의 왕조보다 훨씬 엄밀해진다. 그 동안 한번의 중대한 사건이 벌어져서 조야를 뒤흔들게 된다. 여러 관리들이 연루되고, 후세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홍무30년 이월, 명왕조는 삼년에 한번씩 치르는 과거 회시(會試)를 맞이했다. 주원장은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78세의 고령인 한림학사 유삼오(劉三吾)를 주고관(主考官)으로 임명한다. 유삼오는 한림세가 출신으로, 원나라에서도 신하를 지냈는데, 원나라말기에 광서제학(교육청장)을 지냈다. 명왕조의 과거제도조례도 그가 만들었고, 명나라초기 형법인 <대고(大誥)>의 서문도 그가 썼다. 그는 또한 <환우통지>등의 편찬을 주재하기도 했다. 그는 인품과 학문이 모두 뛰어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평상시에 주원장은 항상 그에게 치국안민의 도리와 현명하고 능력있는 신하를 채용하는 방법을 묻곤 했다. 이를 보면 주원장은 유삼오를 아주 높이 평가하고 신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거결과가 나오고, 방이 공고된다. 이를 춘방(春榜)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합격하여 방에 이름을 올린 51명이 모조리 남방(南方)의 성에서 온 사람들이고, 북방의 성에서 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것은 역대왕조에서 일어난 적이 없는 상황이다. 이런 기괴한 국면에 대하여, 백성들도 의문을 품었고, 낙방생들은 더더욱 불만이 컸다. 그들은 연합하여 예부(禮部)에 고발장을 내고, 항의방문을 한다. 남경성은 졸지에 소란스러워진다. 골목과 길거리에는 온갖 소문이 나돌았다. 어떤 사람은 주고관이 뇌물을 받고 부정행위를 저질렀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주고관이 남방사람이어서 '지방주의', '지방차별'을 했다고 하였다. 이런 소식이 전해지자, 명왕조의 상하는 모두 놀라고, 각급관리들도 속속 상소를 올린다. 황제에게 이 일을 철저히 조사하여 공정하게 처리해달라는 것이다.


주원장은 대노하여, 조서를 내려 12명의 중앙관리로 조사반을 꾸민다. 시독 장신(張信), 시강 대이(戴彛), 우찬선 왕준화(王俊華), 사직랑 장겸(張謙), 사경국교서 엄숙재(嚴叔載), 정자 동관(董貫), 왕부장사 황장(黃章), 기선 주형(周衡(과 소읍(蕭揖)등이 구성원이다. 이번 조사반의 구성은 아주 공정하고 공평했다. 조사반은 시험답안지를 다시 읽어보고 신중하게 점검한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는 "유삼오등 시험관이 시험채첨을 하는데 과실이 없고, 사실대로 했다. 합격한 51명은 확실히 재능과 학문이 뛰어나서 합격한 것이다. 부정행위현상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결론이 나오자, 더욱 큰 파란이 일어난다. 낙방한 북방의 응시생들만이 아니라, 조정의 북방출신 관리들까지 나선 것이다. 즉시 항의를 제기하고 엄중하게 관련관리들을 조사해달라고 요청한다.


이번에 주원장은 더욱 불같이 화를 낸다. 조서를 내려, 장신과 백신도(白信蹈)등 20여명을 능지처참하고, 유삼오를 변방으로 유배보낸다. 유악(劉諤), 송종(宋琮)등도 유배를 간다. 겨우 대이, 윤창륭(尹昌隆)등만이 죄를 면했을 뿐이다. 그후 명태조 주원장은 친히 전시를 주재하여 새로 임백안(任伯安)등 61명을 합격시킨다. 이를 하방(夏榜)이라 한다. 기괴한 일은 이번에 합격한 61명은 모조리 북방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북방(北榜)이라고도 부른다. 후인들은 이 일을 가리켜, "남북방(南北榜)" 혹은 "춘하방(春夏榜)"이라고 부른다.


과거사건의 배후에 있는 수수께끼는 확실히 의문이 든다. 중앙정부 조사반이 새로 심사를 했지만, 합격자는 여전히 모두 남방사람이었다. 부정행위가 있었는지 아니면 그냥 우연인지. 아마도 정말 우연한 '저확율의 사건'일 수도 있다. 자고이래로, 과거시험은 개인의 운명을 뒤바꾼다. 더구나 강산사직과도 관련이 있다. 천하를 가슴에 품은 심모원려의 정치가라면, 통치를 안정시키고, 민심을 다독여야만 한다. 그것이 주원장의 선택이었다. 남북방이 나온 것은 가장 좋은 절충방법이었을 것이다. 표면적으로보면 멍청하게 처리한 것같지만, 실제로는 제왕의 총명함과 지혜가 담긴 의사결정이다. 유삼오, 장신등이 만일 정치의 도리를 알았더라면 절대로 무고한 희생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사건은 대명왕조의 과거제도를 다시 한번 바꾸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이후, 명나라의 과거시험은 더 이상 전국통일시험이 아니게 된다. '남북방'으로 나누어 본다. 즉 남방과 북방의 응시생들은 자신이 사는 곳에서 시험을 치르고 등수를 매긴다. 각각 공생으로 합격한 후 다시 통일적으로 전시에 참가한다. 이 제도는 명,청 양왕조에 지속되고,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그 여파가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