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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당고조의 총비(寵妃) 우문소의(宇文昭儀)는 현무문사변에 어떤 입장이었을까?

by 중은우시 2018. 8. 9.

글: 상륭십팔장(祥隆十八章)


당고조 이연의 열한번째 아들인 이원가(李元嘉)는 유명한 현왕(賢王)이고, 이당종실 내에서 명성이 널리 퍼졌다. 곽왕(霍王) 이원궤(李元軌)보다 대단했다. 그리고 그가 어렸을 때, 생모인 우문소의때문에 그는 당고조 이연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


언뜻 보면, 이원가의 일생은 말년에 월왕(越王) 이정(李貞)을 부추겨서 거병하게 한 것을 제외하면 아주 빛나는 일생이었던 것같은데, 실제도 그러했을까? 여기에서는 <구당서.한왕 이한가열전>으로 간단히 이원가의 당태종시기의 대우에 대하여 알아보고, 그의 생모인 우문소의가 무덕연간 현무문사변때의 입장문제를 검토해보기로 한다.


이원가는 어려서부터 열심히 공부해서 읽은 책이 만권이 넘었다. 품성이 고결하고, 동생 이영기(李靈夔)와도 우애가 좋았다. 이렇게 출중한 덕행은 이당종실에서 그 누구도 따라올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현명하기로 이름을 떨친 곽왕 이원궤도 전혀 따라올 수가 없었다. 다만 재미있는 것은, 비록 이원가가 이렇게 현명하고 능력있었지만, 이세민은 곽왕 이원궤를 훨씬 더 많이 그리고 더 높게 칭찬했다는 것이다. 분명히 이원궤는 이원가보다 못한데, 이원궤는 당태종은 물론 위징등으로부터도 칭찬을 받는다.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더욱 재미있는 닐은 우문태비(宇文太妃)가 장안에서 병이 위독한데도, 멀리 노주(潞州)에 있던 이원가는 이세민의 허락을 받지 못해 장안으로 와서 병중의 모친을 뵐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상심한 나머지 밥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우문태비가 병사한 후, 이원가는 비통해 마지 않는다. 이세민은 그 얘기를 듣고는 감동하여 몇번 동생을 위로한다. 이 장면은 어찌보면 너무 늦게 알았다는 듯한 느낌이다. 생각해보라. 이세민은 일찌기 어떤 아들을 번왕의 봉지로 보낼 때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얘기했다. 네가 번왕이 봉지로 가는 것은 국가제도이다. 그리고 공무처리식으로 이 아들에게 가야할 곳으로 가게 했다. 그러나, 뒤돌아서자마자 국가제도는 아예 입에 꺼내지도 않고, 대신들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계속하여 관례를 위반해가며 다른 두 아들은 자신의 곁에 남겨두고 죽어라 번왕의 봉지로 보내지 않았다.


그래서 만일 이세민이 진심으로 이원가를 생각했다면, 그리고 정말 그의 효심에 감동했다면, 왜 우문태비의 병이 위중할 때, 이원가로 하여금 장안으로 와서 모친을 뵙게 해주지 않았을까? 굳이 우문태비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상심해 마지 않는 이원가를 위로했을까?


그렇다면 이원가가 왜 이런 대우를 받았을가? 기실 이것은 그의 생모인 우문소의의 평생사적과 연결시켜야 개략적인 연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문소의는 수양제를 살해한 주범인 우문화급(宇文化及)의 친여동생이다. 또한 당고조 이연이 말년에 총애한 후비이다. 한왕 이원가, 노왕 이영기 두 황자를 낳았다. 이연이 등극한 후, 그녀를 황후로 앉히려 했으나, 우문씨가 극력 사양한다. 이런 거동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문소의도 상당히 총명한 여자라는 것을. 어쨌던 당시 이미 장성한 세 명의 황자 이건성, 이세민, 이원길간에 황위계승자리를 놓고 암중으로 싸움이 있었다. 만일 그녀가 황후에 오른다면, 그녀의 두 아들도 자이모귀(子以母貴)로 적자가 된다. 그러나 자신의 두 아들은 아직 나이가 너무 어려서 황위다툼의 충격을 견뎌낼 수 없고, 어른이 된 후에 풍파를 피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우문소의 본인은 안목이 있다. 문제거리를 회피하기 위하여 황후자리도 사양한다. 그러나 황위계승다툼이 갈수록 치열해지면서, 비빈들도 거기에 연루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사서기록에 따르면, 당시 이연의 후궁들 중에서 만귀비(萬貴妃)를 위시한 4비(妃)와 장첩여(張婕妤)등 총비들은 태자 이건성의 편이었다. 그렇다면 우문소의는 어떤 입장이었을까? 그녀는 명철보신을 선택하여 중립을 유지했을까? 아니면 암중으로 이건성 혹은 이세민의 어느 한쪽을 지지했을까?


이에 대하여 사서에는 아무런 명확한 기록이 없다. 우문소의가 이번 투쟁에서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그러나, 이원가가 정관연간에 당태종에게 받은 대우라든지, 이원가의 명성이 크게 떨치고 있음에도 이원가가 이세민과 대신들에게 더욱 중시를 받은 것이라든지, 우문태비의 병이 위독할 때도 이원가는 장안으로 와서 모친의 병문안을 하도록 허락하지 않은 것이라든지를 보면, 우문씨가 무덕연간에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만일 우문소의가 이세민을 도왔더라면, 이세민의 은원이 분명한 성격으로 볼 때, 이원가의 대우가 이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좋게 보면 우문소의는 중립을 지켰을 것이고, 나쁘게 보면, 우문소의는 암중으로 이건성을 도왔을 것이다. 어쨌든 이건성은 어찌되었건 명정언순(名正言順)의 황태자였다. 우문소의가 뜨거운 감사인 황후 자리를 사양하였다는 것을 보면 그녀는 확실히 총명한 여자이다. 그렇게 총애를 받고, 항상 이연의 곁에 머물렀으므로, 그녀는 나이많은 황제가 젊은 아들이 공고개주(功高蓋主)할까봐 우려하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리고 황태자를 바꾸려는 생각은 없었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단지 우문소의는 비록 총애를 받았지만, 윤덕비(尹德妃), 장첩여등과 같이 나대지는 않았다. 그후 이원가의 대우가 비록 이원궤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윤덕비의 아들 이원형(李元亨)보다 훨씬 나았던 것을 보면, 우문소의의 총명함은 설사 이건성에게 치우쳤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태도를 명확히 드러내지는 않았던 것같다.


심지어 이 일을 가지고 이연이 퇴위한 후의 실제 지위 혹은 영향력이 어떠했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정관5년, 이세민은 윤덕비의 유일한 아들이자 나이 12살의 풍왕(酆王) 이원형을 번왕의 봉지로 보낸다. 이연은 윤덕비를 총애하여, 직접 그녀의 앞에서 이세민을 혼낸 적이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린아들이 멀리 지방으로 떠나는데 이연은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일찌기 총애하던 우문소의가 장안에서 병이 들어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도, 멀리 봉지에 있는 이원가가 생모를 그리워하는데도 이세민의 허락을 받지 못해 장안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면서도, 이연은 역시 한 마디도 내뱉지 않는다. 도대체 이연이 철저히 우문소의와 윤덕비와의 정의를 단절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이연이 아예 목소리를 낼 수가 없는 상황이었을까?


비록 이런 식으로 보면 너무 잔혹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인지상정이다. 어쨌든 이세민은 아들로서 효도를 다한다는 차원에서, 부친 이연에 대하여 여러가지 불만이 있지만 그래도 순종하는 면이 있다. 그래서 태상황을 위하여 행궁도 지어주고 친히 사냥한 동물을 태상황에게 보내기도 했다. 이것들은 당태종의 부친에 대한 효심을 보여준다. 그러나 부친의 이들 소첩에 대하여는 이세민이 전혀 효성을 하지 않았다. 당초 무뎍연간에도 그는 부친의 이들 소첩들에게 잘보이려고 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연의 앞에서 윤덕비 등을 싫어하는 감정을 전혀 감추려 하지 않았다. 등극한 후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현명하기로 이름을 떨쳤으나 생모의 임종도 하지 못한 이원가는 이에 대하여 앙심을 품지 않고 마음을 풀었을까? 답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수공년, 이미 황태후의 자리에 오른 무후(武后)가 임조칭제하자, 이원가는 그 기회를 틈타 이정 부자에게 거병하도록 부추긴다. 그리고 자신은 병력을 이끌고 가만히 있으면서 어부지리를 노린다.


역사는 놀랄 정도로 유사하다. 이원가의 호소에 호응하여 거병한 월왕 이정의 경우에도, 묘하게 그의 생모인 연태비(燕太妃)는 당고종 부부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두 눈이 실명되고 몸이 좋지 않으면서도 무후의 모친인 영국부인의 장례에 참석하겠다고 길을 나선다. 그 결과 도중에 쓰러진다. 그후 1년동안 연태비는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은 아니지만, 병이 호전되었을 때도 겨우 역참에 나가서 기다리고 따로 움직이지는 못할 정도였다. 정주에서 동도 낙양까지는 270리 거리밖에 되지 않는데. 당고종과 무후는 연태비로 하여금 아들의 봉지로 가서 요양하도록 해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연태비는 타향에서 객사한다.


사람도 죽었고, 무후는 위로같은 것도 해주지 않는다. 이정에게 있어서는 모친의 목숨을 다시 살려낼 수도 없고, 더더구나 가슴 속의 한은 풀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원가 부자의 서신을 받자마자 이정은 즉시 아들과 거병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실패했고, 이정부자는 무후에게 효수된다. 이원가 부자도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단지 이원가에게 행운인 점은 앞장섰던 이정의 후손들은 이당황실의 냉대를 받고 철저히 친왕의 작위를 잃었을 뿐아니라, 운좋게 살아남은 후손도 영남으로 귀양가서 의탁할 고없이 살면서 백여년동안 장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러나, 암중으로 이정을 부추겼던 이원가 부자는 한왕의 작위를 대대손손 이어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