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천지사화(天地史話)
무측천은 당나라때 권력을 장악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말년에 손자 이융기(李隆基)의 정변으로 하야하게 된다.
당중종이 죽은 후, 이융기는 정변을 기획하여 위황후(韋皇后)를 주살한다. 역사에서 "당륭정변(唐隆政變)"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그리고 그는 등극하여 당현종이 된다. 왕씨(王氏)는 담략이 뛰어나서, 이융기를 도와 계책을 세운다. 나중에 이융기가 태평공주(太平公主)를 제거하는 "선천정변(先天政變)"때 왕씨는 친히 기획에 참여하고, 자신의 쌍동이오빠인 왕수일(王守一)로 하여금 직접 가담하게 한다.
당현종은 정변에 성공한 후, 왕씨를 황후로 올린다. 그런데 나중에 왕황후는 총애를 잃게 되는데, 그 원인은 다음의 몇 가지이다:
첫째, 왕황후는 문화수준이 비교적 낮았다. 당현종은 웅재대략에 풍류를 아는 황제였다. 왕씨는 후궁을 제대로 관리할 능력이 없었다.
둘째, 왕황후는 가족배경이 비교적 약했다.
셋째, 가장 치명적인 것은 왕황후가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것이다.
무혜비는 항안왕(恒安王) 무유지(武攸之)의 딸이고, 어려서 부친이 병사하자, 궁안에 거두어서 자란다. 당현종이 즉위할 때, 무혜비는 이미 예쁜 소녀로 자라 있었다. 그리하여 당현종의 관심을 끈다. 무혜비는 천성이 영리하고, 당현종에 잘 맞춰주었다. 그리하여 금방 당현종의 환심을 산다. 무혜비는 처음에 첩여(婕妤)로 봉해졌고, 당현종과의 사이에 4남3녀를 낳는다. 그녀가 낳은 자식들은 모친이 총애를 받는 바람에 당현종의 사랑도 많이 받는다. 아들과 딸은 다음과 같다:
하도왕(夏悼王) 이일(李一)
회애왕(懷哀王) 이민(李敏)
수왕(壽王) 이모(李瑁)
성왕(盛王) 이기(李琦)
상선공주(上仙公主)
함의공주(咸宜公主)
태화공주(太華公主)
당현종이 무혜비를 총애하게 되면서. 왕황후는 총애를 잃는다. 왕황후는 자주 당현종의 면전에서 무혜비에 대하여 나쁜 말을 한다. 그렇게 되니 당현종은 점점 왕황후를 싫어하고 멀리하게 된다.
한번은 당현종이 왕황후에게 갔는데, 왕황후가 눈물을 흘리면서 당현종에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어찌 아충(阿忠)이 자반비(紫半臂)를 벗어서 면 한 되로 바꿔서 생일 탕병(湯餠)을 해드린 긋을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원래 당현종이 임치왕(臨淄王)으로 있을 때, 아충(왕황후의 부친 왕인교)의 집에 가서 식사를 한 적이 많았다. 한번은 이융기가 생일날 왕인교(王仁皎)의 집에 갔는데, 집안에는 밀가루조차 없었다. 왕인교는 바로 자신이 입고 있던 자반비를 벗어서 전당포에 맡기고 그 돈으로 면을 한되 사와서 이융기에게 국수를 해서 먹인 적이 있다. 당현종은 왕황후로부터 그 말을 듣고 한동안 황후를 폐위할 생각을 접는다.
그러나 왕황후가 아들을 낳기 위하여, 오빠인 왕수일로 하여금 명오(明悟)라는 스님을 찾아와서 무술(巫術)을 행하게 한다. 명오는 그녀에게 벼락맞는 나무를 구해 오라고 하고, 그 위에 천지(天地) 두 글자와 당현종으 이름을 써서 몸에 지니고 다니며 경을 암송하게 시킨다.
이 일은 금방 들통난다. 무술은 고대에 중죄이다. 당현종이 대노하여, 왕황후를 냉궁에 넣는다. 이때부터 더 이상 왕황후를 찾지 않는다. 그리고 2년도 지나지 않아 왕황후는 우울하게 죽는다.
2년후인 개원14년, 당현종은 대신들에게 말을 꺼낸다. 무혜비가 온량공검(溫良恭儉)하여 모든 미덕을 갖추었으니, 그녀를 황후로 올리고 싶다고. 그러자 어사 반호례(潘好禮)가 바로 상소를 올려서 말한다: "무씨(武氏)는 불구대천의 원수입니다. 어찌 국모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대신들이 줄기차게 반대했는데, 내놓은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당고종은 바로 왕황후를 폐위시키고, 무측천을 황후로 세워서 나중에 무측천이 칭제하기에 이르렀고 하마터면 이당강산이 망할 뻔했는데, 70년후에 다시 무씨를 황후로 앉히면 역사가 재연되는 것이 아니냐.
둘째, 당현종은 당시에 이미 태자를 세웠는데, 무씨가 황후에 오르게 되면, 다시 태자를 바꾸려 하지 않겠는가.
대신들의 반대에 당현종은 망설인가. 무혜비는 무측천의 질손녀이다. 당초 이융기는 두 번의 정변에 참가하면서, 강산을 무씨로부터 빼앗아 왔다. 그리고 현재도 조정에서 무씨는 아주 큰 세력이다. 무씨가 이씨에게서 황제의 자리를 빼앗는 역사가 재연되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해서, 당현종은 결국 무씨를 황후에 앉히려는 생각을 접는다.
무혜비는 계속 총애를 받았고, 궁안의 예절, 대우는 모두 황후와 같았다. 죽은 후에, 당현종은 그녀에게 황후의 자리를 추증해준다.
무혜비의 사후, 이융기는 자신의 아들 이모의 왕비를 좋아하게 된다. 이모는 무혜비의 아들이다. 당현종은 며느리를 빼앗아 왔고, 그녀가 바로 양귀비이다. 양귀비는 당현종보다 많이 어리다. 나중에 총애가 천하를 뒤덮는다. 다만 당현종은 더 이상 황후를 세우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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