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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안록산(安祿山)은 어떻게 장안을 점령하였을까?

by 중은우시 2018. 7. 19.

글: 정호청천(鼎湖聽泉)


천보15년(756년) 육월, 동관(潼關)이 함락된 그 날, 가서한(哥舒翰)의 부하는 화급히 상황을 조정에 보고하여 모두 준비를 하도록 한다. 그런데 당시에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당현종 이융기는 사자(使者)를 접견하지 않고, 단지 이복덕(李福德)등에게 부대를 이끌고 동관으로 증원가게 하였다. 아마도 아직도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저녁이 되어, 기대하는대로 평안하다는 봉화가 올라오지 않았다. 아마도 가서한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 것이다. 이융기는 머리가 어지러워졌고, 점점 겁이 나기 시작한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기본적으로 아이큐가 제로가 아닌 한 동관에 일이 생기면 장안이 위험하다는 것은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만일 동관을 지켜내지 못하면, 장안은 아예 지켜낼 수가 없는 것이다. 유일한 출로는 도망치는 것이다. 역시 노련한 가서한의 권고를 들었어야 했다.


초십일, 상황이 위급하다고 느낀 이융기는 즉시 재상들을 모아서 시국대책회의를 연다. 그때 양국충(楊國忠)은 자신이 검남절도사(劍南節度使)를 겸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록산이 반란의 기치를 들자마자, 교토삼굴(狡兎三窟)의 그는 즉시 절도부사 최원(崔圓)에게 암중으로 각종 중요물자를 준비해서 위급할 때 검남으로 보내서 사용하도록 지시한다. 그래서 이때 그는 즉시 황제에게 촉으로 피난가는 것이 장안에서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낫다고 권한다. 아무런 방법이 없던 이융기는 부득이 그의 의견이 찬동한다. 일단 피난가는 것에 찬동했으니 미친 듯이 도망쳐야 한다


십일일, 양국충은 다시 당황하면서도 모양을 갖추기 위하여 백관을 조당에 모아서 상의한다. 일찌감치 이전처럼 보무당당한 모습은 없었다.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린다는 식으로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 백관들에게 무슨 좋은 계책이 없겠는지 묻는다. 백관들은 일찌감치 놀라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고, 그럴 듯한 계책은 하나도 내놓지 못한다. 그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을 뿐이다.


방법이 없다. 양국충은 그저 책임을 떠넘기는 식으로 말한다: "많은 사람들은 모두 안록산이라는 이 나쁜 놈이 반란을 일으키려는 마음을 가진 것이 이미 십년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만 황상은 계속 믿지 않았다. 계속 안록산을 보호해주었다. 현재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도저히 방법이 없다. 하늘은 비를 내리려 하고, 딸은 시집가려고 한다. 이제 하늘의 뜻에 따르는 수밖에 없다. 이것은 우리 재상들의 잘못이 아니다. 각자 도망쳐서 목숨을 구하라."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은 모두 마음 속이 처량해 졌다.


조회가 끝난 후, 위병이 물러난다. 모두 앞다투어 집으로 돌아간다. 이때 경성의 백성들은 일찌감치 놀라서 도망치고 있었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할지를 몰라서, 파리마냥 이리저리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소위 나라가 없어졌는데 집이 찌 남아 있겠느냐는 격이다.


당시는 아직 반군이 도착하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점포는 이미 문을 닫아 걸었고, 이전에 만국의 수도 장안의 화려했던 생활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시장과 길거리는 썰렁했고, 마치 죽은 도시 같았다. 양국충은 이때 그저 도망칠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매 한국부인(韓國夫人)과 괵국부인(虢國夫人)을 궁으로 들여보내, 계속 이융기로 하여금 장안을 버리고 촉중으로 피난가도록 동원했다. 그때는 도망가는게 주류였다.


육월 십이일, 백관들 중에서 조회에 나온 사람은 열에 한,둘도 되지 않았다. 아마도 모두 이미 패물을 챙겨서 피난을 떠났을 것이다. 당시 아무런 주견도 없는 이융기는 신경질적으로 근정루(勤政樓)에 오른다. 그리고 친히 전투에 나서겠다는 말을 내뱉는다. 아마도 이 말을 듣고는 전국의 백성들이 모두 웃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는 황제 이융기는 놀라서 정신을 못차리고 있을 때였고, 그저 말로만 한번 큰소리치는데 불과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연극을 좀더 그럴 듯하게 하기 위하여, 이융기는 경조윤(京兆尹) 위방진(魏方進)을 어사대부(御史大夫) 겸 치돈사(置頓使)로 임명하고, 경조소윤(京兆小尹) 최광원(崔光遠)을 경조윤으로 전격 발탁하여 서경유수(西京留守)를 겸하게 한다.환관장군인 변령성(邊令誠)으로 하여금 궁전의 열쇠를 관장하도록 했다.겉으로는 당당하게 전시 인사이동임명을 마친 후, 이융기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던 것은 도망후의 물자보급이었다. 당시 이융기는 검남절도대사 영왕(潁王) 이장(李將)을 현지로 부임하게 하고, 나아가 명정언순하게 검남도에서 사용할 물자를 준비하도록 명한다. 기실 이는 그저 황제가 쓸 물자를 준비해 놓으라는 것이다.


그날, 이융기는 대명궁(大明宮)으로 옮긴다. 날이 어두워진 후에 즉시 도망계획을 실시한다. 이융기는 용무대장군(龍武大將軍) 진현례(陳玄禮)로 하여금 금군을 집합시키게 한다. 황실피난시의 특별호위부대로 삼기 위해서이다. 먼저 그들에게 금은보화를 상으로 내리고, 다시 마굿간에서 좋은 말 900여필을 고른다. 이런 작업은 모두 고도의 기밀리에 차근차근 진행되어 외부인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 


육월 십삼일, 위대한 도망의 시각이 마침내 다가왔다. 그때, 하늘이 막 밝아지고 있었다. 약간은 실망하고 약간은 미련을 가진 이융기는 양귀비 자매, 황자,황비, 공주, 황손 및 양국충, 위견소(韋見素), 위방진등 심복, 환관, 궁녀와 함께 연추문(延秋門)을 출발하여 서촉(西蜀)으로 향한다. 한걸음 내딛고 세번 뒤돌아본다. 혹시 후회하는 것일까. 아마도 데리고 가는 사람이 너무 많으면 돌보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해서인지, 궁밖의 황비, 공주 및 황손은 모두 헌신짝처럼 내버려진다. 마치 자신의 가족, 친척이 아닌 것처럼. 그저 자신만 도망쳤다. 확실히 체면이 서는 일은 아니다. 대난을 맞이하여, 각자 살 길을 찾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성으로는 뭐라고 할 수가 없는 일이다.


황제일행이 좌장고(左藏庫)를 지날 때, 간사하고 교활한 양국충은 모든 금은재보를 불태워버릴 것을 청한다. 그의 이유는 내가 못쓰는 것을 반란군이 쓰도록 남겨둘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건 너무 멍청한 일이라는 것이다. 어찌 이런 걸 남이 쓰도록 남겨둘 수 있단 말인가. 그냥 듣기에 이는 아주 이치에 맞는 듯하다. 이런 걸 옥석구분(玉石俱焚)이라고 한다. 외나무다리를 건너고 나면 다리를 걷어버리는 것이 양국충의 특기이다. 그는 다른 사람의 사활은 신경쓰지도 않는다.


이융기는 비록 정치적으로 멍청하지만, 돈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정확한 판단을 했다. 그는 약간은 처량하게 말한다: "적군이 와서 돈이 없으면, 분명히 심하게 백성들에게서 긁어낼 것이다. 그러면 백성들만 더 힘들어지지 않겠는가. 됐다. 그들에게 남겨두어라.어쨌든 우리가 못쓰는 것을 백성들이 조금이라도 덜 힘들게 하면 되지 않겠느냐." 도망치는 혼군의 마음 속에 백성이 들어 있었다는 것이 놀랍다. 일찌감치 그렇게 하면 얼마나 좋았을까.


"사림이 죽을 때가 되면 바른 말을 한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관을 보고 눈물을 흘릴 때가 되면, 기본적으로 사상정치교육이 필요없이 많은 살마들은 이치를 깨닫는다. 철저히 대오각성하는 것이다. 비록 조금 늦었지만.


이 날, 백관들은 뭐가 뭔지도 모르고 조회에 나갔었다. 그것이 최후의 조회일 줄은 몰랐다. 궁문 앞에 이르렀을 때, 물시계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맑은 소리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분명히 들렸다. 궁정의장대의 위사들도 여전히 위무당당하게 거기에 서 있었다. 마치 바뀐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그러나, 생각지도 못ㅅ했던 일이 일어난다. 궁문이 열린 후, 상황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많은 궁녀들이 벌떼처럼 몰려서 도망치고 있었고, 궁안이건 궁밖이건 질서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혼란상태였다. 사람들은 황제인 이융기가 아주 신비스럽게 '실종'되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아무도 황제가 어디로 갔는지 몰랐다. 군룡무수(群龍無首)의 결과는 당연히 천하대란이다.


황제가 인간증발했고, 전방에서는 동관이 무너졌다는 소리가 들려온다. 반군이 곧 경성을 함락시킬 것이라고 한다. 약간만 머리가 있는 사람이면 모두 좋지 않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왕공귀족, 평민백성도 즉시 사방으로 도망친다. 혼란이 극치였다.


가장 탄식할 일은 일부 담이 큰 촌부야로(村夫野老), 시정무뢰배는 혼란을 틈타 황궁과 왕공귀족의 집으로 쳐들어가서 미친 듯이 금은보화를 훔쳐갔는데 상당한 수확이 있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나귀를 타고 대전으로 가서 좌장대영고를 불태운다. 그저폭동이고 방화약탈로 원한을 발설하는 것이다.


막 경조윤 겸 서경유수로 발탁된 최광원은 환관 변영성과 상황이 좋지 않다고 보고 급히 사람들을 데리고 불을 끄러 온다. 그리고 용사람을 모아서 앞장선 10여명을 죽여버린다. 그리고 나서 비로소 국면이 안정된다. 장안을 방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고 최광원은 아들은 안록산에게 보낸다. 그리고 변령성은 궁전 각문의 열쇠를 안록산에게 바친다. 이는 경성을 그냥 받들어 바치는 것과 같다.


이제, 우리는 반군이 장안을 공격하려 점령한 상황을 얘기해보기로 하자.


솔직히 말해서 반란군의 우두머리 안록산은 혼군 이융기가 이렇게 빨리 장안을 빠져나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토끼보다도 빨리 도망쳐 버린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안전을 고려하여, 일처리가 조심스러운 안록산은 먼저 최건우(崔乾祐)로 하여금 동관에 병력을 이끌고 남아 있도록 한다. 뒤에서 호응하라는 것이다. 그 후에 인내심을 가지고 10일을 기다린다. 혹시라도 관군이 매복하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확실해 졌을 때, 부장 손효철(孫孝哲)로 하여금 병력을 이끌고 장안으로 진군하도록 명한다. 그리고 장통유(張通儒)를 서경유수로 삼고, 최광원을 경조윤으로 삼는다. 그리고 안수지(安守志)로 하여금 병력을 이끌고 원내(苑內)에 주둔하며 관중의 여러 장수들을 감시하게 한다. 모든 것을 처리완료한 후에 비로소 미친 듯한 파티를 벌인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반군은 장안을 점령한 후, 천하를 이미 평정했다고 여겼다. 혁명이 성공한 것이다. 그래서, "밤낮으로 술을 마시켜, 음악과 여인 그리고 재물을 모으는 일만 했다." 먹고 마시고 여색에 빠지면서 한바탕 즐긴 것이다. 당나라조정의 잔여세력을 철저히 소멸시키고, 서쪽으로 도망친 이융기를 적시에 추격하여 붙잡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마땅히 승기를 잡아 계속 추격하여 철저히 혁명을 완수해야 했다. 그래서 이융기 일행은 안전하게 서촉에 들어갈 수 있었고, 태자 일행은 북으로 가는데 역시 추격의 위험은 없었다. 태자 이형은 숨을 쉴 시간을 벌고 천천히 세력을 키워서 항전의 새로운 중심이 된다. 그리하여 세력이 너무 커져서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른다. 이것은 안록산의 근시안적 안목을 보여준다. 그는 큰 일을 감당할 지도자는 못되었던 것이다. 기것해야 "점산위왕(占山爲王)"식의 정치인물일 뿐이다. 이는 안록산의 뒤이어지는 인생비극을 예고하는 셈이다.


광란의 파티이후, 보복적인 대도살이 벌어진다. 그의 인간성이 말살되고,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을 정도였다. 안록산은 원한이 있으면 반드시 갚는 인물이다. 반란을 일으키면서 그의 친척 부하들은 모두 이융기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에는 이. 사람을 죽일 이유는 충분하다. 원한을 하나하나 갚아나간다.


그래서 그는 먼저 숭인방(崇仁坊)으로 가서 곽국장공주와 왕비, 부마를 죽이고 배를 가른다. 심장을 꺼내 이융기가 죽인 큰아들 안경종(安慶宗)을 위해 제사지낸다. 손효철은 또한 아직 장안을 벗어나지 못한 황실 구성원, 백관의 가족들에게 피비린내나는 대도살을 벌인다. 피빚은 피로 갚는다. 


어쨌든 안록산의 정적 양국충, 고력사의 일당, 그리고 안록산이 평소에 아주 미워하고 마음에 안들어하던 사람은 모조리 죽여버린다. 모두 83명을 죽였다. 역사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혹은 쇠몽둥이러 머리를 내려쳐 피가 온거리에 흘렀다." 안록산은 새로운 형벌을 고안해 냈다. 사람의 천령개를 내래쳐서 깨버리는 식으로 참혹하게 죽인 것이다.


또 전해지는 바로는, 안록산은 특별히 황친국척을 미워했다. 이들은 평소에 항제를 믿고 위세를 부렸다. 이제는 빚을 갚아야 하는 때이다. 그래서 황손 및 군주, 현주를 죽인다. 20여명에 이른다. 사람을 많이 죽여서 손이 마비될 정도이다. 혁명은 원래 살인게임이다. 더 할 말이 없다.


사람을 죽여서 화를 푼 후에, 당연히 천하의 금은보화를 긁어모아야 한다. 이것은 당연히 혁명의 중요한 내용중 하나이다.


안록산은 장안의 일부 촌부야로가 혼란을 틈타 방화약탈을 하면서 창고의 재물을 대거 훔쳐가서 거의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다. 이들 강도는 너무 대담하다. 감히 나의 혁명승리의 과실을 훔쳐가다니. 그래서 이에는 이로. 장안에서 삼일간 융단포격식으로 수색한다. 관청의 재물이건, 개인재산이건 모조리 거두어 간다. 비적이나 다를 바가 없다. 이와 동시에 부,현에 명하여 '장물'을 몰수하도록 한다. 


그외에 일부 사료기록에 따르면, 이때 지득의만(志得意滿)의 안록산은 당현종이 즐기던 것을 그대로 즐기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이융기의 가무, 잡기, 무마, 서우등을 모조리 끌어모으고, 약탈해 온 궁녀, 악공, 기사 및 전문적인 호위군을 자신의 도성인 낙양으로 보낸다. 수백명의 이원(梨園) 제자는 동도(東都) 금원(禁苑) 응벽궁(凝碧宮)에서 연주하도록 한다. 노래와 춤으로 자신의 부하들을 연회에 초대한다. 가무승평(歌舞昇平)의 분위기를 연출하고자 한 것이다. 아마도 시불(詩佛) 왕유(王維)도 이런 분위기 하에서 '반시(反詩)'를 써서 자신의 목숨을 구했을 것이다. 어떤 대역무도한 것은 어떻게 순수하게 포장하든지간에 결국은 와해되기 마련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록산의 용상이 아직 따뜻해 지기도 전에, 친아들에 의하여 피살된다. 인생은 죽람타수일장공(竹籃打水一場空)이다. 민간이 속담에도 이런 말이 있다: 운명에 때가 있으면 언젠가 이루어지고, 운명에 때가 없으면 억지로 추구하낟고 되는 것이 아니다. 억지로 머리를 드러낸 결과는 결국 폭망이다. 양국충과 마찬가지로 안록산과 같은 간웅도 편안히 죽지는 못했고,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그 후, 안록산은 천하통일을 위하여, 일찌기 그의 부장 고숭(高嵩)에게 서신과 비단을 가지고 하서, 농우의 여러 장수들에게 투항을 권유하러 간 적이 있다. 그런데, 대진관사(大震關使) 곽영예(郭英乂)에게 붙잡힌다. 닭을 훔치려다 실패하고 쌀만 썩힌 꼴이 되었과 아주 낭패해졌다. 곽자의(郭子儀), 이광필(李光弼)은 동관이 함락되고, 황제가 도망쳤다는 것을 알고난 후에 할 수 없이 군대를 되돌려서 정형(井陘)을 지킨다. 그리하여, 하북의 대부분 군현도 반군의 수중에 들어간다.


다시 그 다음에, 안록산은 다시 대군을 보내어 영천(潁川)을 공격한다. 태수(太守) 설원(薛願), 장사(長史) 방견(龐堅)은 중순(張巡)같은 총의맹장이었다. 비록 적군과 아군의 수량차이가 엄청나지만, 그들은 반군의 미친 듯한 공격을 한번 또 한번 막아냈다. 그리고 1년이나 성공적으로 지켜내면서 반군의 수차례에 걸친 포위공격을 막아낸다. 역사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지덕원년(756년) 정월부터 십일월까지, 적(안록산군)은 주야로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성에서 백리 떨어진 곳까지 집과 분묘, 나무는 모조리 베어지고 사라진다. 외부에서의 지원도 없었다. 십이월, 안록산은 아사나승경(阿史那承慶)에게 무슨 댓가를 치르더라고 성을 함락시키라고 명한다. 아사나승경은 정예군을 모조리 동원하여 강공하니, 북소리가 하늘을 울렸고, 화살과 돌이 비오듯이 내렸으며, 죽이라는 소리가 우뢰와 같았다. 설원등은 십여일간 피를 뒤집어 쓰며 분준했지만, 성안에 오랫동안 갇혀 있다보니, 성안에 더 이상 남은 것이 없었다. 결국 반군이 한밤중에 운제를 타고 성을 넘어 들어오고, 설원, 방견은 모두 붙잡혀서 동도 낙양으로 보내어지고, 사지를 잘라서 죽이고자 한다. 그런데 누군가 안록산에게 말하기를 '설원, 방견은 의로운 인물이다. 사람은 각각 자기가 모시는 주인이 있고, 그들을 죽이는 것을 상서롭지 못하다'라고 하여, 두 사람을 낙수의 얼음 위에 묶어 두었는데, 그때는 엄동설한이어서 추위로 얼어죽게 했다고 한다." 


악독한 안록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