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효풍모우(曉風暮雨)
수나라 대업13년(617), 와강군(瓦崗軍)에서 수양제를 토벌하자는 격문을 세상에 내놓는다. 거기에는 수양제의 시부찬위(弑父纂位), 황음난륜(荒淫亂倫), 황폐정사(荒廢政事), 영건궁전(營建宮殿), 가연잡세(苛捐雜稅), 순행무도(巡幸無度), 궁병독무(窮兵黩武), 거간육충(拒諫戮忠), 매관죽작(賣官鬻爵), 배신기의(背信棄義)등 십대죄상을 열거했고, 동시에 와강군의 위세를 선양하고 수나라장병의 투항을 부추겼다. 이 격문은 천고에 전해지는 명문이고, 수양제에게 씻지 못할 악명을 선사한다. 그리하여 수양제는 망국군주의 전형으로 역사에 기록된다.
이런 기세방박(氣勢磅礴)하고, 기탄산하(氣呑山河)할 격문은 수나라의 대재자(大才子) 조군언의 손에서 나왔다. 이처럼 만복경륜(滿腹經綸), 재고팔두(才高八斗)의 유아(儒雅)한 문사가 왜 초망호걸(草莽豪傑)의 집단인 와강군에 들어가게 되었을까?
모든 것은 조군언의 부친에게서 시작된다. 바로 그가 북제(北齊)의 명장 곡률광(斛律光)을 죽음으로 몰아넣어, 북제의 멸망을 가속시키고, 동시에 조군언으로 하여금 수나라에서 관료로 성장하는데 큰 장애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조군언은 범양 적도(지금의 하북성 용성) 사람이고, 관료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바로 북제의 "맹인(盲人)"재상 조정(祖挺)이다.
조정은 역사상 드물게 보는 다재다능한 인재이다. "신정기경(神情機警), 사조주일(詞藻遒逸)"했고, "여러 기예를 다 잘했다. 문장을 제외하고, 음률에 능하고 오랑캐들의 말을 알아듣고, 음양과 점술에 능했으며, 의약에는 특히 뛰어났다."
아쉽게도, 이런 거세무쌍(擧世無雙)의 대재자가 인품은 아주 비열했다. 탐욕이 많아 부패를 저질렀고, 윗사람에 아부하고 아랫사람을 못살게 굴었으며, 결당영사(結黨營私)하고, 매관매직했으며, 충신과 양신들을 모함했다. 게다가 그는 양상군자로 남의 물건을 잘 훔쳤다.
당시, 북방에는 북주(北周)와 북제의 두 정권이 있어서 서로 공격을 계속했는데, 북제에는 곡률광이라는 명장이 있어서, 전공이 혁혁했으며 매번 북주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는 북제강산을 보위하는 대들보였다.
곡률광은 조정의 사람됨을 멸시했고, 멀리서 그를 볼 때마다 몰래 욕을 했다: "쓸데없는 일만 벌이는 거지같은 소인배가 또 무슨 계략을 꾸미는가?" 조정은 그것을 알고 마음 속에 원한을 품는다. 언젠가 복수하기로 마음먹는다.
북주는 곡률광을 꺼려서 반간계를 쓰기로 한다. 사람을 북주의 도성으로 보내어 참어(讖語)를 퍼트린다: "백승비상천(百升飛上天), 명월조장안(明月照長安)" 백승(백 되)는 1곡이고, 명월은 곡률광의 자이다. 그러므로 곡률광이 하늘로 오르고 장안을 비춘다는 것이니 황위에 오른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고산불추자붕(高山不推自崩) 곡수불부자수(槲樹不扶自竪)" 북주의 황제는 고(高)씨였는데, 고씨가 무너지고 떡갈나무 곡(槲)은 곡률광의 곡(斛)과 발음이 같으므로 스스로 황제에 오른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조정은 이 참어를 듣고 크게 기뻐하며, 사람을 보내어 이 참어를 황제인 북제의 후주(後主) 고위(高緯)에게 고한다.
고위는 조정에게 물어본다. 그러자, 조정은 뒤의 참언 뒤에 한 마디를 덧붙인다. "고산붕(高山崩), 곡수거(槲樹擧) 맹노공배상하대부(盲老公背上下大斧), 요설노모부득어(饒舌老母不得語)" 즉, 고씨가 무너지고, 떡갈나무가 서는데, 맹인노인, 즉 자신이 도끼를 들고 떡갈나무를 내려치고, 말많은 노모(여기서는 황제 고위의 유모이자 조정과 함께 조정의 권력을 잡고 있던 목제파(穆提婆)의 모친인 육영훤(陸令萱)을 가리킴다)도 아무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곡률광에게 황위를 찬탈할 마음이 있다고 모함한 것이다. 이때 참군 봉사양(封士讓)이 마침 조정등의 지시를 받아 곡률광이 모반한다고 무고한다. 그리하여 곡률광은 억울한 죽임을 당하고, 멸족된다.
북주의 무제는 곡률광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조서를 내려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려 경축한다. 몇년 후, 북주는 죽제를 멸망시키고 북방을 통일한다. 주무제는 곡률광을 상주국(上柱國), 숭국공(崇國公)으로 추증한다. 그리고 주무제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이 사람이 살아있었더라면 어찌 짐이 업(鄴)에 올 수 있었겠는가?"
얼마후, 주무제가 병사하고, 아들 주선제(周宣帝)가 즉위한다. 주선제도 1년후에 병사하고, 나이 어린 주정제(周靜帝)가 즉위한 후, 외척 양견(楊堅)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북주를 대체하여 수왕조를 건립한다.
조군언은 수나라의 명장 설도형(薛道衡)과 사이가 좋았다. 설도형은 수문제 양견을 비교적 일찍부터 따라다녔고, 신임을 깊게 받아 내사시랑(內史侍郞), 가개부의동삼사(加開府儀同三司)의 직을 맡고 있었다.
설도형은 조군언의 재능을 잘 알고 있어서, 황제에게 추천한다. 그러나 수문제 양견은 조군언이 조정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자, 바로 싫어하는 태도를 드러낸다: "바로 곡률광 명월을 죽인 자가 아닌가? 짐은 쓰지 않겠다!" 황제가 싫어하니, 조군언은 수문제 시기에 시종 관직과 인연이 없었다. 조정이 곡률광을 모함한 죄과를 수나라때 아들이 먹게 된 것이다.
인수4년(604), 수문제는 '이상하게' 사망하고, 양광(楊廣)이 즉위하니 바로 수양제이다.
수양재는 재능이 넘쳤고, 웅재대략으로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는 자기보다 잘난 사람을 용납하지 못했다. 설도형의 대표작으로 <석석염(昔昔鹽)>이 있는데, 거기에 이런 문구가 있다:
암유현주망(暗牖懸蛛網)
공량낙연니(空梁落燕泥)
수양제는 이 문구를 아주 좋아했다. 그러나 그는 더 좋은 싯구를 지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질투심이 폭발하여, 핑계를 찾아 설도형을 죽여버린다.
수양제는 같은 이유로 천하에 재주가 가장 뛰어나다는 조군언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수문제처럼 버려두고 쓰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에게 아주 작은 관직을 하나 내리긴 한다: "동평서좌(東平書佐), 검교숙성령(檢校宿城令)"
조군언은 스스로 경천위지의 재주를 지녔다고 자부하는데, 영웅이 제대로 쓰이질 못하고 있다고 여겨서 항상 우울해 했다.
금방 전기가 도래한다. 이밀(李密)이 와강군에 가입한 후, 와강군이 급속히 발전하며 사방으로 세력을 키워나간다. 전후로 흥락(興洛), 회락(回洛), 여양(黎陽)의 3대양창(糧倉)을 점령한다. 산동, 하북 일대의 반수의군(反隋義軍)이 속속 가입한다. 와강군은 병력이 수십만에 이른다. 그리하여 모든 반수의군 중에서 가장 큰 세력이 된다. 이밀은 위왕(魏王)으로 추대되고, 수나라 수도 대흥성(大興城)을 점령한 이연(李淵)까지도 그에게 서신을 보내어 '형(兄)'이라 칭한다.
조군언은 수나라에서 뜻을 얻지 못하자, 와강군에 가입한다. 이밀은 조군언의 명성을 일찌감치 듣고 있어서, 즉시 그에게 기실(記室)의 직위를 내린다. 기실은 품급이 높지는 않지만, 아주 중요했다. 와강군의 문서, 격문, 작전계획등을 초안하는 업무를 수행한다. 접촉하는 것은 모두 와강군의 핵심기밀사항들이다. 이밀의 심복만이 맡을 수 있다. 조군언은 마침내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무대를 찾은 것이다.
대업13년, 이밀의 지시하에, 조군언은 그 유명한 토수격문(討隋檄文)을 쓴다. <위이밀격낙주문(爲李密檄洛州文)>. 이 격문은 경전을 인용하여 거대한 기세로 수양제의 각종 죄악을 낱낱이 드러내고, 특히 "경남산지죽(罄南山之竹), 서죄무궁(書罪無窮); 결동해지파(决東海之波), 유악난진(流惡難盡)" (남산의 그 많은 대나무를 다 가져다가 죄상을 적어도 다 적지 못하며, 동해의 물로 그 죄를 씻어도 다 씻지 못할 정도이다). 이 문구는 특히 인구에 회자되었다. 여기에서 "경죽난서(罄竹難書)"라는 성어가 나오게 된다.
격문이 내걸린 후, 반수의군의 투지는 고무되고, 동시에 수군의 전투의지는 와해시킨다. 그리하여 수왕조의 멸망을 가속화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은 <위이밀격낙주문>의 일부 내용은 진실성이 심히 의심된다는 것이다.
수양제는 비록 망국의 폭군이기는 하지만, 그는 격문에서 말한 것처럼 그렇게 모두 잘못한 것이 아니다. 수양제는 수왕조에 대하여건 아니면 전체 중국역사에 있어서건 모두 어느 정도 공헌이 있다. 역사인물을 평가함에는 반드시 객관적이고, 이성적이어야 한다. 그 나쁜 점도 드러내야 하지만 그 잘한 점도 밝혀주어야 한다.
조군언은 나중에 이밀을 위하여 <위이밀여원자간서(爲李密與袁子干書)>, <위이밀여이연서(爲李密與李淵書)>등을 쓴다. 그러나 좋은 시절이 오래 가지는 못했다. 대업14년, 북으로 돌아온 우문화급(宇文化及)을 격패시킨 후, 와강군은 원기를 크게 상한다. 이밀은 부하들이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낙양을 본거지로 둔 왕세충(王世充)과 전투를 시작한다.
이밀은 연전연패하고, 와강군의 많은 장수들은 왕세충에게 포로로 잡힌다. 이밀은 서쪽으로 장안에 들어가 이연에게 투항한다. 얼마 후 핑계를 찾아 떠나는데, 결국 당군에 의해 웅이산(熊耳山)에서 피살된다.
조군언은 포로로 잡힌 후, 왕세충에 맞서다가 한바탕 두들겨 맞는다. 그리고는 나무 아래에 버려져 죽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다.
다만, 이때의 왕세충은 이미 소황제 양동(楊桐, 수양제의 손자. 낙양에서 황제로 옹립되었으며 연호는 황태(皇泰)였다)을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조군언을 이용할 가치가 잇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허혜조(許惠照)라는 의사를 보내어 구해주게 한다. 왕발주(王拔柱)라는 낭장이 이렇게 말한다: "이 놈처럼 붓자루나 놀리는 자는 죽어도 싸다!" 말을 마치고, 그는 발로 조군언의 가슴을 밟아 죽인다.
조군언이 죽은 후, 왕세충은 육시시중(戮屍示衆)한다. 일대재자가 마지막에 이런 비참한 지경에 처한다. 정말 탄성이 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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