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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민족

해족(奚族): 그들은 누구인가?

by 중은우시 2018. 8. 4.

글: 왕덕항(王德恒)


"구백해영(九百奚營)"은 요성종(遼聖宗)시기(983-1030)에 처음 설\되었다. 금(金)이 요(遼)를 대체한 이후에도 계속 존재한다. 금의 해릉왕(海陵王) 천덕(天德)2년(1150년)에 구백해영의 서쪽에 한주성(韓州城)을 건립한다. 구백해영의 명칭은 점점 사라진다. 다만 사서에서는 계속하여 나타난다. 이 명칭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중국에서 현재 유일하게 '해족' 색채를 지닌 지명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상 요(遼)로 통칭되는 왕조를 그들 자신은 시종 "대거란국(大契丹國)"이라고 불렀다. 비록 요태종이 남하하여 변량을 점령한 후, 민족색채를 약화시키기 위하여 요수(遼水)의 이름을 따서 "대요(大遼)"라고 고치기는 했지만, 거란국호를 취소한 것은 아니었다. 내부에서는 여전히 '거란'이라고 불렀다. 혹은 "요"와 "거란" 두 개의 국호를 나란히 썼다.


1. 해인(奚人)의 분포


수당교체기에 해인은 동몽골과 동북을 나와서 지금의 산서, 하북북부지구로 확산된다. 630년 해족은 당왕조에 귀부한다. 당나라는 해족지구에 5개의 주를 설치한다. 그리고 그 위에 요락도독부(饒樂都督府)를 두어 관리한다. 도독은 해족 대추장이 맡았고, 당황제는 이(李)씨성을 하사한다. "고북구(古北口) 바깥의 승덕부 본경, 난평현, 풍녕현, 적봉현, 평천주의 4경, 당나라때, 단주, 게주 평주의 3주의 장성바깥은 땅이 모조리 햬에 들어갔다."


해의 군사력은 거란과 비슷했다. 어떤 때는 거란보다 약간 강했다. 그리서 당나라때는 "양번(兩藩)"으로 불린다. 당나라중엽이후 거란이 날로 강해지면서, 점차 해족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당나라말기, 일부 해족은 추장 거제(去諸)이 인솔하에 거란을 배반하고 서쪽으로 규주(嬀州, 지금의 하북성 회래현) 북산으로 이동하여 당나라에 내부(內附)한다. 역사에서는 서해(西奚)로 불린다. 이리하여 해는 동해(친거란), 서해(친당)로 나뉜다. 


거란이 건국한 후, 해족에 대하여 한족 및 기타 민족보다 높은 특수한 대우를 해준다. 거란정권의 구조에서 가장 큰 특색은 "일국양제"이다. 남원(南院)과 북원(北院)으로 나누며, 남원은 한인의 사무를 관리하고, 북원은 거란의 사무와 군사를 관리했다. 의심의 여지없이 주요 권리는 북원에 있다. 북원에는 4대부를 설치하는데, 그중에는 거란3부가 있다: 오원부(五院部), 육원부(六院部), 을실부(乙室部); 해인 1부, 해왕부(奚王府)가 있다. 이 4대부는 요나라의 주요 구성이고, 군사력은 주로 이 4부에서 나온다. 그리고 해의 다섯 왕족(요리(瑤里), 백덕(伯德), 오리(奧里), 극지(極只), 초리(楚里))은 "대대로 요인(遼人)과 통혼했다, 그래서 술률씨(述律氏)의 성에 붙는다." 즉, 해인은 후족(后族)과 평등했다. 나중에 모든 후족에게는 사성을 내려 "소(蕭)" 성을 갖게 된다. 더욱 분명하게 말하자면, 거란통치자는 해족을 황제족에 바로 다음가는 황후족에 상당하는 것으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해의 5왕족 외에 "육부해(六部奚)"가 있다. 이에 대한 견해는 서로 다르다. 일설에 따르면 야율아보기가 해를 토벌할 때, 분산되고 남은 해인들을 가지고 '타괴부(墮瑰部)'를 설치했다고 한다. 이것은 확실히 범위가 너무 좁다. 또 다른 일설에 따르면, 위의 해왕족 5부 이외의 6개 부라고 말한다. 즉, 해왕족 이외의 해족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길림성 이수현(梨樹縣)의 "구백해영"에 있던 해인은 주로 이 6개부에서 왔다고 한다. 당나라때 해족수량에 대한 기록은 장수(帳數)를 단위로 했는데,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장수'로 하던 것을 '영수(營數)'를 단위로 하게 된다. 최초에 <요사>에 기재된 해족은 "삼영(三營)"이다. "해는 삼영이 있는데, 철리갈(撤里葛), 절조(竊爪), 누완조(耨碗爪)이다. 태조가 해를 토벌하니, 투항해서 저장자제(著帳子弟)가 되기를 원했다. 궁분(宮分)에 적을 두고, 모두 이리근(夷離堇)을 설치한다. 성종은 각각 부를 설치하고, 고쳐서 절도사를 설치한다. 모두 남부(南府)에 예속되어, 농사와 사냥일을 했다. 택주(澤州) 동쪽에 거주한다."


요태조는 항복을 받아낸 후 해인의 거주지에 따라 어떤 경우는 '영'이라 칭하지도 않고, '장'이라 칭하지도 않고, '암(巖)'이라 칭하기도 한다. 완안창(完顔昌)은 해인과의 전투중 가장 격렬했던 것이 바로 "십삼암(十三巖)"을 탈취할 때라고 했다. 그래서 구백해영은 구백여호가 아니다. 구백여영(營)이다. 그저 우리는 아직가지 1개의 영이 몇 개의 장을 포함하는지는 찾지 못했다. 영의 위는 부(部)이다. 요사를 살펴보면, '해왕부'의 활동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해인의 '부'활동은 기재가 있다. 이것도 증명한다. 거란은 해족상층을 완전히 정복했다는 것을. 다만 또한 해인이 독립적임을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후세에 말하는 '동화'는 나타나지 않는다. 요나라말기의 해왕부는 해왕이 소하말(蕭霞末)이다. 그는 도종(道宗) 황제의 황후 소탄사(蕭坦思)의 오빠이다. 그의 부인은 위국공주(魏國公主) 야율살갈지(耶律撒葛只)인데, 야율살갈지는 요도종 야율홍기(耶律洪基)이 둘째딸이다. 모친은 선의황후 소관음(蕭觀音)이다. 여진이 거병할 때 소하말은 중경(中京)에 있었다. 소간(蕭干)이 해왕이라고 하는 것은 오해이다. 소간은 당시 요나라의 지북원추밀사, 겸제군도통으로 지위는 비록 소하말보다 높지 않아도, 권한은 소하말보다 컸다.


2. 해인의 저항


요천경4년(1114년), 여진인이 반란을 일으킨다. 강녕주전투, 출하점전투에서 요군에는 모두 해인이 있었다. "구월 이십삼일, 발해는 여진군을 만나서, 대패한다. 영강주를 함락시키고 해, 거란 갑마 3천을 획득한다. 천조제는 소봉선이 동생인 전전도점검 소사선으로 하여금 해, 거란금군 오천여명을 지휘하도록 한다. 십월 출하점에 주둔하고, 백강을 임하고 녕강주의 여진과 대치했다."


수국원년(1115년) 칠월, 독립한 해군(奚軍)이 출현하기 시작한다. 금태조는 온적한적고질(溫迪罕迪姑迭)을 보내어 "해영(奚營)을 함락시키고 한주로 되돌아왔다. 적 2천명을 만나서 공격하여 좇아냈다." 이 전투이후, "구백해영이 와서 항복한다" 다만, 이 기재는 확실히 엄밀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구백해영이 이번이 모조리 투항한 것이 아니다. 3년후 천보2년(1118년) 윤구월, 여전히 구백해영의 해인 소보(蕭寶), 을신(乙辛)등이 무리를 이끌고 와서 투항한다(<금사.태조기권2>, 해왕 소하말을 핵심으로 하는 해군(奚軍)은 계속하여 금왕조에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천보5년(1121년) 정월, 금태조는 조서를 내려 요의 중경(中京)을 공격하도록 명령한다. "만일 중경을 함락시키면, 획득한 예약의장도서문적은 먼저 조정으로 운송하라" 다음해(1122) 정월 전쟁이 개시된다. 당시 거란인은 중경을 버리고 도망칠 준비를 했다. 그러나 해왕 소하말은 응전을 준비한다. 물론 도망칠 예비방안도 마련한다.


금군은 먼저 고주, 은주, 회흘의 3성을 함락시킨다. 중경의 요군은 과연 싸우지도 않고 도망쳤다. 금군은 대량의 전리품을 획득한다. 여기에는 1200필의 말, 500두의 소, 170두의 낙타, 4700마리 양, 350량의 수레가 포함된다. 이 350량의 수레는 확실히 당시에 천하에 이름을 떨치던 "해거(奚車)"이다. 거란군이 도망가면서, 소하말에게는 큰 곤란을 남긴다. 강하게 응전하는 것으로는 금군을 이길 수 없을 것같았다. 그래서 그는 계책을 쓴다. "완안환도의 유병(遊兵)이 중경을 나가서 남쪽으로 가다가 기병 삽십여기를 만났는데, 이들이 속여서 말하기를, '내일 아침에 이곳에서 항복하겠다' 완안고는 이를 믿었고, 온적흔아리출, 납합둔은, 포찰파라외, 제갑발척린으로 하여금 가서 맞이하도록 했다." 실제로 이것은 소하말이 지시힌 거짓투항이었다. 여진군이 항복을 받으러 왔을 때, 해왕 소하말의 복병이 돌연 나타나서, 아리출등을 포위한다. 이때 납합둔은을 우두머리로 하는 금군은 지형이 말을 타고 싸우기에 불리하다고 보고 말을 버리고 유리한 지형을 차지한다. 거기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고, 지원군이 속속 도착하면서 결국 소하말의 군대를 이길 수 있었다. 소하말이 도주하자, 여진군은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추격하고는 회군했다. 이 전투에서 납합둔은의 공이 가장 컸다. 


소하말의 이번 매복전은 잘 설계한 것이다. 단지 여진군의 전투력이 너무 강해서 해군을 패배한다.  중경의 서부에서, 완안은술가(完顔銀術可)도 해군과 격전을 벌인다. 중경에서 서쪽으로 칠십리 되는 곳에서 소하말은 완안고(금태조의 친동생)이 이끄는 금군의 주력과 전투를 벌인다. 여기서 대패하고 소하말은 도망친다.


용맹하고 모략도 있는 완안희윤(完顔希尹)도 전선에서 실력자인 해인의 항복을 받아낸다. "해인 낙호(落虎)가 투항한다. 완안희윤은 낙호로 하여금 그의 부친인 서절도사 와리랄(訛里剌)을 설득하게 하고, 와리랄은 본부를 이끌고 투항한다." 와리랄은 해적의 서부절도사이다. 그의 지위는 소하말의 바로 다음갔다. 이 일이 조정에 보고된 후, 금태조는 특별히 조서를 하달하여, 그를 포함한 6명의 요나라신하 및 그 부하의 죄행을 사면하고 관대하게 처리한다. 금나라 제일대장 완안종한(完顔宗翰)은 계속 소하말을 추격한다. 완안누실, 도단작리와 병력을 합하여 북안주(지금의 하북성 융화현 북토성자)에서 해군을 대파한다. 그리하여 소하말로 하여금 이월 기해일에 투항하게 한다.


소하말이 금에 투항하기를 전후하여, 또 다른 중요한 해인인 소익(蕭翊)이 금에 투항한다. 소익은 전임 해왕 내열(乃烈)이 후예이다. 그가 금에 투항한 후, 금군을 따라 흥중부(興中府, 지금의 요녕성 조양시)를 함락시키고, 흥중부윤(興中府尹)에 임명된다. 비록 해왕 소하말이 금에 투항하였지만, 아직도 상당한 해인은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금나라장수 고표(高彪)는 무안주(내몽골 오한기 동쪽)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해인은 험준한 지형을 근거로  완강하게 저항했다. 고표는 여러번 싸워서 공을 세웠다." 당시 중경 지역의 해인이 가장 규모있게 저항했다. 다른 지역에도 해인이 완강하게 금군에 저항한다. 요동반도 남부에서 거란인, 해인은 항복했다가 다시 반란을 일으켜 10만명을 모은다. 금나라장수 사묘아리(斜卯阿里)는 포위된 여진인을 구하러 간다. "그 무리를 벽리밀한수에서 격파하고, 거의 모두 죽인다. 그리하여 물이 흐르지 않을 정도였다." "거란, 해인은 배 천척을 모아서, 바다로 들어가고자 했다. 아리는 이십칠 척으로 맞이한다. 그러다가 화살을 맞아서 배 안에 누워 있는다. 한밤중에야 깨어났다. 적선은 이미 왕가도로 들어갔다. 그날 밤에 해로로 추격하였다. 적은 험준한 지형으로 막았고, 아리는 기병으로 공격한다. 그러다가 다시 화사을 맞았는데, 힘껏 싸우며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격파하고, 그 배를 모조리 빼앗는다. 그리하여, 소주, 복주, 파속로는 모두 평정된다." 이후 해인은 더 이상 대규모로 조직하여 저항하지 못한다.


3. 완안창(完顔昌)의 등장


천보6년(1122년) 금왕조는 전문적으로 해족을 위한 해로도통사(奚路都統司)를 설치한다. "나중에 육부로도통사(六部路都統司)로 개명한다." 해로도통사의 초대도통은 완안혼졸(完顔渾黜)이다. 그가 부임하자, 무슨 이유에서인지 중경지구에 이미 투항했던 해족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팔월 신축일, 중경은 완안혼졸이 거란, 해, 한 육만을 고주에서 격패시키고, 패근마길(孛堇麻吉)이 죽는다. 반란을 평정하기는 했지만, 패근마길이 희생된다. 마길은 바로 완안은술가의 동생이고, 금태조의 족제(族弟)이다. 그는 일찌기, "요인으로 중경의 산골짜기에 모여 있는 자를 토벌하고 3천여명의 항복을 받아냈다"


구월, 금태조는 이리저리 고민하다가 중경에서 반란을 일으킨 해족에 대하여 조서를 하달한다: "너희들은 이미 투항했다가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사람들을 선동하고 유인하였으니 그 죄를 사면할 수 없다. 그러나 아직 귀순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감싸안는 것이 제대로 되지 못한 점을 고려하여, 다시 조서를 내린다. 빨리 투항하면, 죄를 사면하고 관직을 원래대로 돌려주겠다." 그리고 해족에 대해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완안혼졸을 파면하고, 완안창(여진이름은 完顔撻懶)을 해육부로도통으로 임명한다.


완안창은 금목종(영가)의 아들이다. 모친은 정혜황후 오고륜씨이다. 그는 금태조 완안아골타의 숙백형제이다. 1074년에 태어났고, 1139년에 죽는다. 완안창은 금강종의 딸과 결혼했다. 금강종의 이름은 오아속(烏雅束)인데, 금태조의 친형이다. 또한 금태조의 전임 여진부족장이다. 그가 죽은 후 금태조 완안아골타가 비로소 즉위했다. 즉, 완안창의 부인은 금태조의 친조카이다. 아들 아리(당괄덕온), 알대와 오달보를 낳고, 딸 갈라신을 낳는다.


그리고 한 가지 주목할 것은 금태종 완안오걸매가 3살가량일 때, 완안창의 집에서 기른다. 두 아이는 서로 잘 지냈다. 완안창이 16세에 완안아골타의 곁으로 가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지혜가 뛰어났다. 요군과의 흑룡강 조원 출하점전투에서 아골타가 말을 타고 친히 출정하려 한다. 완안창은 고삐를 잡고 제지하며 말했다: "주군은 왜 적을 경시합니까. 신이 나가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창을 들고 돌진하여 연이어 7명을 죽이고, 9명을 말에서 떨어뜨린다. 창도 부러졌다. 아골타가 흥분하여 말했다: "이런 친구 수십명이 있으면 만명이더라도 당해낼 수 없겠구나."  그리고 달로고성(지금의 길림 도아하변)전투에서 요병 1천이 병영의 바깥에 진열을 갖추고 있었다. 아골타는 완안창을 보내어 공격하게 한다. 그는 적진을 뚫고 들어가서 그들을 대파한다. 임황부(지금의 요녕성 파림좌기 동쪽 진남파라성), 춘수, 태주, 중경, 서경을 공격할 때 모두 공로가 있었다. 어떤 사람은 이 완안달나는 나중의 완안창이 아니라고 본다. 또 다른 사람이라고 본다. 그저 일찍 죽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이 완안창에게 돌아갔다고 한다. 다만 확실한 증거가 있기 전에는 잠시 이 것들을 모두 완안창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그래야 금태조의 완안창에 대한 큰 신뢰를 설명할 수 있다.


1122년(천보6년)때, 완안창의 신분은 그저 모극(謀克, 삼백호를 관할함)이었다. 바로 그 해에, 그는 완안종한의 명을 받아 요군을 추격한다. 그리고 요국의 추밀사 소득리저(蕭得里底)와 그 아들 마가(磨哥), 나야(那野)를 포로로 잡는다. 그래서 완안창이 해육로군도통이 된 것은 파격적인 발탁이다. 그는 해육로도통을 맡은 후, 사람들의 예상을 벗어나게, 먼저 해습(奚霫, 지금의 하북, 요녕 경계지역)의 땅을 다스리고 경영하는데 열중한다. <구당서.북적.습>이 기록에 따르면, 습(霫)은 '흉노의 별종'이다. 황수(潢水, 지금의 시라무룬강) 북선비의 옛땅에 거주한다. 그 나라는 경사에서 동북 오천리이고, 동으로 말갈을 접하고, 서로는 돌궐에 이르며, 남으로 거란에 이르고, 북으로 오라혼에 접근한다. 점유면적은 주변약 2천리이고, 사면에 산이 있어 그 지역을 둘러싸고 있다. 사람들은 사냥을 잘 하고, 붉은가죽으로 옷을 만들어입기를 좋아하며, 부인은 동천(銅釧, 구리팔찌)를 귀하게 여긴다. 옷의 아래 위에는 작은 구리방울을 단다. 풍속은 개략 거란과 같다. 도륜흘청부에 4만호, 병사 만여명이 있다. 정관3년때, 군장은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어 방물을 조공으로 바쳤다.


정관 중기에 다시 조공을 왔다. 나중에 당나라조정은 그 땅을 치안주(寘顔州)로 하고, 별부를 거연주(居延州)로 했다. 수령 사근(俟斤)을 자사(刺史)로 임명한다. 그리고 이(李)씨성을 하사한다. 현경5년, 추장 이함주(李含珠)에게 거연도독에 임명한다. 이함주가 죽고나서, 동생 궐도(厥都)가 승계한다. 나중에 더 이상 내왕이 없었다. 어떤 사람은 이 민족이 해족에 병합되었다고 본다. 다만, 요나라말기까지, 이 명칭은 계속하여 등장한다. 그리고 해와 동시에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것을 보면 독립성이 있었던 것같다. 완안창은 먼저 해습지지를 경영했는데 아마도 거기에 불안정요소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지리위치가 중요했다. 그래서 먼저 잘 안착시키는 것이 필요했다. 해습지지를 안착시킨 후, 천보7년(1123) 오월, 완안달나는 가까이 있는 해인 속고부(速古部)를 초무(招撫)한다. 그러나 속고부는 응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저명한 십삼암전투가 벌어진다. "먼저 속고부 해인은 핵산(劾山)을 근거지로 했다. 해로도통 완안달나가 초무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가서 토벌한다. 철니부(鐵泥部)의 무리들은 험준한 곳을 지키며 저항한다. 그리하여 모조리 죽였다. 그리하여 속고, 철리(啜里), 철니의 3부가 점거하고 있던 십삼암은 모두 평정된다." 이 전투에서 완안창은 험준한 지형을 근거로 버티는 철니부를 공격한다. 아마도 전투중 손실이 너무 커서인지, 완안창은 철니부를 모조리 죽여버린다. 속고부와 철리부는 할 수없이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요사.영위지>에 따르면, 요나라때 해족 백덕부에는 육석렬(六石烈)이 있었다: 철륵석열, 속고석열, 전니석렬, 질리석렬, 욱특석열, 열리석열, 맹광요 선생은 "백덕부의 속고석열이 바로 속고부의 전신이다. 철륵석열이 바로 철리부의 전신이다. 전니석열이 철니부의 전신이다." 이 삼부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전투력도 아주 강하다. 그러나 결국 완안창에게 거두어진다.


금태조는 완안창의 전과에 대하여 조서를 내려 표창한다: 금태조의 완안창에 대한 평가는 아주 높고, 그에게 해족을 처리할 수 있는 전권을 부여한다.


4. 완안창의 해인 안치


금나라는 거병초기, 요나라의 동경지구를 탈취한 후, 이미 해인을 맹안모극으로 편입하여 관할했다. 예를 들어 수국2년(1116년) 발해인 대고(大皐)가 동경해민모극(東京奚民謀克)에 임명된다. 다만, 이때는 아직 해인이 맹안모극을 담당하는 것은 나타나지 않는다. 완안창이 해습을 안치시키고, 해인십삼암을 평정한 후, 안정과 융합을 위하여, 상소를 올려 해족지구에 관원을 두어 관리할 것을 요청한다. 금태조는 아주 명확하게 답변한다: "동경발해의 사례에 다라 천호, 모극을 설치하라." 그리하여그 후에 투항한 해인에 대하여 맹안모극으로 편제한다. <금사.해왕회리보전>에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에 이르러 회리보가 죽고, 해인은 차례로 부속하니 역시 맹안모극을 설치하여 이끌었다." 금태종 천회2년(1124년) 윤삼월, "사야(斜也)가  요련소고아(瑤輦昭古牙)를 습격하여, 쫓아냈다. 그의 처 노군총 및 호족을 획득했다. 패근혼철등이 해칠암(奚七巖)을 격파하고 그 백성을 위무했다." 어떤 사람은 '요련소고아'가 바로 거란의 '요련소고칸(瑤輦昭古可汗)의 후예로 구성된 부족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인구구성으로 보면, 분명 해족 요리부(遙里部)이 성문이 많고, 거란성분은 적다. <요사>에서는 해족 요리부를 "담주, 이주의 사이에 있다"고 했다. 확실히 해족이 위주라고 기록한 것이다. 사야(즉, 완안고)가 금군장수 사묘아리와 산도로를 지휘하여 고주에 주둔하게 할 때, 고고아는 주동적으로 부대를 이끌고 출격하여 금군을 공격한다. "거란의 소고아, 구근은 흥중병 수만으로 호리특의 영채를 공격한다. 아리는 여덟 모극으로 구해준다. 호리특이 먼저 갔는데, 성아래에서 패한다. 아리는 적진의 앞에 비의(緋衣, 붉은 옷)를 입은 자 이십여명을 가리키며, '이들이 분명 적의 우두머리이다'라고 하며, 병사를 몰아서 공격하여 모조리 죽인다. 나머지 무리는 궤멸된다." 이 전투에 분명 완안창이 참가했다. 왜냐하면 소고아병이 완안고(완안사야)(에게 격패한 후에 완안창이 마지막 전투를 지휘하고 추격하였기 때문이다. 팔월, "육부도통 달나는 소고야를 추격하여 쫓았고, 그의 대장 갈로조, 백살갈등을 죽였다. 그리고 낙타산, 금원, 흥중의 여러 군대를 격파하여 항복을 받아낸다. 그리하여 조서를 내려 은패 10개를 내린다."


은패(銀牌)에 관하여 얘기해야겠다. 완안창의 부친 영가가 정권을 잡고 있을 때, 여진의 각 부락은 모두 스스로 은패 혹은 동패를 만들었다. 주로 역참에 썼다. 그리고 각부족의 수령은 모두 발급할 권한이 있었다. 그리하여 혼란이 생긴다. 이때 완안아골타는 숙부 영가에게 건의한다. 각부에서 함부로 은패를 만드는 것을 허용하지 말고, 총부락장이 통일적으로 만들어 통일적으로 발급하자고. 만일 영을 어기면 범법으로 취급하자고. 이때부터 호령이 하나가 되고, 백성들이 들어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신패는 비교적 적은 일이지만, 이 일은 완안가족이 여진여러 부락에서 권력이 강화된 것을 의미한다. 여러 부락의 권한은 약화된다. 노예주귀족집권국가의 건립에 기반을 세운 것이다.


금이 건국된 후, "수국2년 구월, 금패를 만들기 시작한다. 나중에 다시 은패, 목패를 만든다. 금패는 만호를 수여하고, 은패는 맹안을 목패는 모극이다. 이를 보면 금태조는 실제로 완안창에게 10개 해인맹안을 조직할 권리를 부여한 것이다. 이는 완안창에게 3만여호를 추가해준 것이다. 즉 완안창의 권리가 갈수록 커졌고, 해족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절대적인 발언권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유리한 형세하에 이어서 완안창은 요련2부의 항복을 받아내고, 흥중부 해군을 격패시킨다. 그리고 건주의 관리에게서 항복을 받아낸다. 모두 합쳐서 산채 20개, 촌보 580개를 점령한다. 완안창의 이런 압박하에, 할 수 없이 십월, 소고아는 무리를 이끌고 투항한다. 관외의 가장 중요한 흥중부가 투항한 것이다. 금태종은 조서를 내려 공이 있는 장병에게 상을 내린다. 그리고 투항한 군민을 위무한다. 완안창은 이런 상황하에서, 요련구영을 구맹안으로 편제할 것을 건의한다. 금태종은 이에 동의할 뿐아니라, 4개의 맹안을 직접 통솔하고, 나머지도 그가 사람을 적당히 뽑아서 맡기라고 한다. 이제, 원래의 300모극 외에, 완안창은 다시 4개 맹안의 해군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가 이후 성공하는 기본역량이 된다. 그는 산동을 점령한 것은 주로 이들에 의존한 것이다. 금태종 시기에, 누가 지휘하느냐에 따라 거의 개인의 군사역량이 된다. 금태종은 군사상으로 권한이 없었다. 그래서 왕왕 각 장수의 의견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금태종은 황제의 지위에 있지만, 그저 두손모으고 가만히 있을뿐이다." 그가 의외로 완안창에게 친히 4맹안을 이끌게 한 것은 그들간에 일찌기 친밀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군사방면의 세력과 발언권을 확대하기 위함이다. 금태종이 붕어한 후, 완안창과 금태종의 아들 완안종경도 관계가 밀접했는데, 바로 이런 역사적 연원이 있다.


완안창이 구백해영의 해군을 다른 곳으로 데려갔느냐에 관하여, <완안창전>에서는 비록 명확히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기타의 기전에서는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분명한 단서가 있다. 대정21년(1181) 금세종이 대신들에게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여진맹안모극호가 농사를 짓지 않고 놀고 있는 상황을 언급한 후에 이렇게 말한다: '해인 육맹안은 이미 함평, 임황, 태주, 기타 비옥한 곳으로 이주하여, 농사에 전념아고 잘 살고 있다. 여진인으로 해인의 땅으로 이주한 사람은 곡식을 잘 수확하고 있는가?" 좌승 수도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듣기로 모두 스스로 경작하며, 해마다 충분하다고 합니다." 황상이 말하기를 "그 땅은 비옥하여 다른 곳과 다르다. 오로지 수해를 입은 자는 구휼해주라." 여기서 설명해야할 것은 1238년, 금왕조의 모든 중앙정부 기구는 함주에서 회녕부로 옮겨간다. 함주에 로(路)를 설치하니, 당금왕조 19개 성급 건제중 하나이다. 로윤(路尹)은 정이품이고 명실상부한 성회(省會)이다. 아래에 함평부, 동안군을 설치하고, 그중 구백해영은 함평부가 관할한다. 교통의 편리를 위하여, 해릉왕 천덕2년(1150) 옛 구백해영의 기초 위에 한주부(韓州府)가 설치된다. 함평부는 구백해영을 포함한다. 한주부가 설립되어도, 함평부는 여전히 존재했고, 한주는 부 아래의 주(州)였다.


금태종때, 해군을 구백해영(함평)에서 이주시킬 수 있는 사람은 완안창 뿐이다. 나중에 천하가 안정되고, 완안창은 피살된다. 그가 데리고 나가서 각지에 안치시킨 해인은 금나라정권에 의하여 속속 되돌아온다. 해릉왕과 금세종도 모두 이 방면의 조치를 한다. 만일 구백해영이 이주해 나가지 않았다면, 어찌 금세종의 입에서 "이미 함평으로 이주해서 거주한다"는 해인이 있겠는가. 이를 보면, 구백해영의 해군은 대요,대송 전쟁시기에 데리고 갔다. 그리고 오로지 완안창이 데리고 갔을 것이다. 아마도 회하작전의 완안창부대도 해군이 위주일 것이다. 완안창은 이때 노왕(魯王)에 봉해졌다. 산동에 주둔하는 군대는 대부분 해군이다. 스스로 이끄는 해인 4맹안 외에 완안창은 심시도세하여 위망있는 해인 소공익(蕭公翊)을 흥중윤(興中尹)으로 추천한다. 소공익은 전대 해왕의 아들이다. 명성이 아주 좋았고, 해인에 대한 영향력이 컸다. 그후 흥중부 일대는 많이 안정된다. 그외에 그는 다시 나머지 관리 전부를 현지에서 덕망이 높은 거란인, 한인으로 임명하여 군,부,주,현을 다스리게 할 것을 건의한다. 이에 대하여 금태조는 모두 비준한다. 그리고 새로 건립한 국가에서 추진한다. 통계에 따르면, 금나라정권의 관리중에서, 한족이 6700여명, 여진족이 4,700여명이다. 이것은 완안창이 시작한 한인을 대거 기용하는 정책과 관련이 있다. 도한 여진의 한족정치와 문화에 대한 인정을 의미한다. 맹안으로 편제된 해족은 예전이 부를 떠난다. 금태종 천회2년(1124년) 팔월 정사일, 철리개부 맹안 추사(雛思)는 뇌물로 파면되고, 해금가노가 대신 맡는다. 철리개부는 요나라때 택주(지금의 하북성 평천현)에 거주했다. 이를 보면 철리개부 전체부는 금나라때 맹안으로 편제되고, 두령은 먼저 추사이다가 해금가노로 바뀐다. 추사는 아마도 여진인일 것이다. 뇌물로 파면된다. 그리고 이 부의 해인을 다독이기 위하여, 금나라는 해인인 해금가노를 맹안으로 임명한다. 비록 이 기록은 금나라조정에서 나섰지만, 구체적인 업무처리는 분명 완안창일 것이다. 완안창이 해인을 주재하는 이 시기에, 우연히 굶주리는 해인이 있으면 금나라정부는 구휼해주었다. 천회3년(1125), 병자일 해, 거란에서 새로 귀부한 백성을 구휼했다.


완안창의 안배하에, 서경로의 운내주(지금의 내몽고 토묵특기 서북)에도 해족이 이주해왔다. "천회7년(1129년) 해 제1부, 제3부가 이곳으로 와서 변방을 지켰다." 이 해제1부, 제3부가 구체적으로 어느 부인지는 아직 확인하기 어렵다. 중도로의 보주(지금의 하북성 보정시)에도 해인이 분포한다. 탁주 방산에까지 이어진다. 이들은 청렴하고 깨끗하며 관후하기로 이름있다. 요나라때 진사출신의 범승길은 해을왕때 순천군절도사가 되는데 "해졸(奚卒)이 경내에 흩어져 살고 있는데, 수천명을 이끌고 도적질을 했다. 승길이 법으로 엄히 처벌하니, 두려워서 감히 법을 어기지 못했다." 이런 상황은 금나라초기에 오랫동안 지속된다. 나중에 완안량의 개혁으로 다시 연경으로 천도하고, 대방산으로 황제릉을 옮긴다. 금왕조의 정치중심은 철저히 옮겨간다. 엄청난 변화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역사단계에 해인에 대한 기록은 비교적 적다. 다만, 완안창이 이주안치시킨 맹안을 보면, 그들은 새왕조에서 전심전력을 다해서 일했다. 여진의 군공귀족과는 분명히 달랐다. 반세기후의 대정18년(1178년) "사월, 태주관할의 여러 맹안, 서북로초토사관할의 해족맹안에게 함평부 경운현, 무송하등이 풍년을 만나서 곡식을 많이 사들이도록 했다."


이상지구는 서북로초토사관할의 해족맹안외에, 위에서 금세종이 언급한 해족맹안도 있다. '양식구매'의 목적은 재난으로 인한 해족의 반란을 막기 위함이다. 거란인 이랄와알(移剌窩斡)의 반란이 일어난지 10여년후인 대정18년(1178), 해족맹안을 임명할 때, 여전히 해인이 와알반란에 참여했다는 무고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 어사대부를 맡고 있던 오고륜원충은 이렇게 해명해서 말해준다: "해인 독산은 같은 족인 발리사가 맹안의 직에 오르게 되자, 독산은 발리사가 거란인 와알의 반란에 참가했다고 고발했다. 상서성은 조사를 거쳐, 와알의 반란이 일어날 때 발리사는 9살이다. 어찌 가담할 수 있겠는가. 독산이 무고한 것이다." 독산과 발리사가 소재한 해인맹안은 아마도 완안창 시기에 안치시킨 '해인6맹안'중 하나일 것이다. 서북로초토사의 관할하에 해족맹안이 있을 뿐아니라, 그 장관인 서북로초토사도 해인이 맡았다. 소회충이 해릉왕때 서북로초토사를 맡았고, 백덕매화상은 금장종때 서북로초토부사가 된다. 서남로토초사에도 해인이 있다. 백덕유가는 서남로초토사 관할의 해인이다. 요리아호와 요리아아는 모두 해족 요리부 사람일 것이다. 이때, 서남로초토사중 최소한 해족의 2개부가 있다. 매지부와 요리부.


즉, 비록 반세기의 분산과 안치, 동화가 있었지만, 여전히 많은 해족특색의 인물제도가 존재했다. 그이후 해족의 정보는 찾기 어려워진다. 해족으로 이루어진 단위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해인이 제작한 수레, 마구, 해거, 해금등은 단절되지 않았다. 김올술이 사용한 철부도, 괴자마도 아마 구백해영이 제작한 것일 것이다. 비록 출토문물로 확인되지는 않지만, 구백해영 일애에서 생산되었을 가능성은 상당히 크다. 다른 해족 집단거주지는 이렇게 큰 곳이 없다. 그리고 기록도 없다. 나중에 해족의 기록은 갈수록 적어진다. 구맥해영이라는 명확한 해족집단거주지의 지명은 ㅅ서에서 대대로 보존되어 왔다. 이 때 해족은 분명히 한족과 여진족에 동화되었다. 점점 종적이 소실된다.


1981년 필자가 금황릉촌을 일제조사할 때, 일찌기 이씨성의 노인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이 성은, 당왕이 사성으로 내린 것이다." 나는 마음이 움직였다. 설마 그가 당나라때 해족의 후손이란 말인가? 그러나 오랫동안 얘기를 나눠봤지만, 그는 그저 조상으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그 말만 기억하고 있었고, 다른 것은 몰랐다. 아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