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사회/중국의 민족

객가(客家)과 중원(中原)의 연원

중은우시 2013. 9. 14. 01:07

글: 왕립군(王立群) 

 

중국고대사 특히 중국이민자를 잘 알지 못하는 현대인에 있어서, 객가와 중원간에 어떤 연결이 있는지를 잘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개봉(開封)"과 "봉개(封開)"라는 두 지리명칭을 대하면, 마음 속으로 의혹이 생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두 개의 지명은 서로 뒤집어놓았는데, 그저 우연일까? 아니면 그들간에 무슨 연결이 있는 것일까?

 

사실상, 이런 의문이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개봉과 봉개, 비록 천리나 떨어져 있지만, 정신문화는 일맥상통한다; 개봉에서 봉개까지, 그것은 바로 객가의 이주사이다.

 

"객가는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면? 객가는 황하의 가에서 왔다고 할 것이다. 객가는 어디에 거주하느냐고 물으면, 봉산유객객주산(逢山有客客住山). 남자는 집을 나서 천하를 돌아가니고, 여자는 집을 지키며 농사를 짓는다. 산속과 산밖은 한 마음이고, 다 함게 아름다운 새 집을 만든다" 이 인구에 회자되고 오래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노래는 객가인의 시사(詩史)이다. 객가인과 중원의 깊은 역사적 연원을 말해준다. 이런 역사연원은 역사문헌의 자료로 증빙될 뿐아니라, 현대유전학의 유전자분석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객가인의 이주에 관하여, 역대학자들은 이미 상당히 분명하게 정리해놓았다. 객가인은 진(晋)왕조이래 최소한 5번의 대규모 이주를 거쳤다. 제1차 이주는 서진의 '팔왕지란'과 '오호지란'때이다. 제2차 이주는 당나라의 '안사의 난'과 당말 농민의 난 때이다. 제3차는 금나라가 북송을 멸하고, 송고종이 남으로 내려오고, 원나라사람들이 중원을 차지했을 때이다. 제4차는 만주족이 산해관을 들어오면서 나타난 이민활동이다. 제5차는 태평천국시기이 '토객계투(土客械鬪)'이다. 이 다섯 번의 대규모 이민중 '정강지란'후의 이주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이번 이주는 '객가인'이라는 칭호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1127년, 북송이 도성 개봉이 금나라군대에 함락된다. 송나라황실은 남으로 내려가서 임안에 남송왕조를 건립한다. 중원의 백만에 이르는 무리들이 송고종을 따라 남으로 내려간다. 원나라사람들이 중원을 차지한 후, 황하유역의 한인은 전란을 피하여, 다시 한번 남으로 이주한다. 원나라군대가 남으로 침입해 들어오면서, 강서, 복건, 광동이 만나는 지역이 송,원 쌍방의 전쟁터로 바뀐다. 초기에 이 곳에 들어왔던 객가인들은 안전한 환경을 찾아서, 다시 남으로 이주한다. 광동 동부의 매주(梅州), 혜주(惠州) 일대로 들어간다. 이때의 호적은 "주(主)", "객(客)"의 구분이 있었으므로, 이민와서 입적하면 모조리 "객적(客籍)"에 편입된다. "객적인"은 스스로 "객가인"이라 칭한다. 이렇게 하여 객가라는 호칭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봉개는 남으로 이주한 객가인들의 거주지중 하나이다. 개봉은 객가인들과 연원이 가장 깊은 지방중 하나이다. 객가인이 이주할 때의 주요 출발지였다. 국내외의 객가인들의 중요한 조근지(祖根地)이다. 그래서, 황하의 가에 위치한 고고 개봉과 천리 먼 곳의 광동서부의 변방에 있는 봉개는 일종의 '우물물은 강물을 범하지 않느다'는 것처럼 밀접하고 불가분의 무형의 연결이 있다. 이런 인연으로 인하여, 개봉은 '전세계화인이 가장 그리워하는 10대 근친문화성지"일 뿐아니라, 2012년 11월 만장일치로 2014년 세계객속제27기 간친대회의 주최권을 얻어냈다.

 

27기 세계객속간친대회(世界客屬懇親大會)의 초기 준비활동중 하나로서, <변량만보>는 "천만리 나는 너를 찾아간다. 개봉에서 봉개까지"활동을 발기하여, 하남, 안휘, 강소, 강서, 복건, 광동등 6개성 30여개시현, 만리에 걸친 노정의 객가부리찾기 대형시리즈행사를 벌인다.

 

변량만보 특별보도조는 개봉에서 출발하여, 객가선주민들의 이주노선을 쫓아, 회양, 부양, 남경, 양주, 남창, 감주, 용남, 정남, 석성, 영화, 삼명, 영안, 연성, 장정, 상항, 용암, 영정, 장주, 용해, 남정, 장포, 조주, 매주, 매현, 소관, 심천, 개평, 조경, 그리고 봉개까지. 근 2개월의 시간을 들여서 만리 객가의 이주로를 추적했다. 특별보도조는 강서, 호남, 복건의 객가집단거주지로 들어가서, 그 곳을 직접 체험하고 길거리를 걸어보며, 객가 선주민이 이주한 족적을 찾아다녔다. 이렇게 객가의 진실한 생활을 기록으로 남겼다. 객가가 고수하는 전통과 정신을 마음깊이 느꼈다. 100편의 문화적인 품격과 학술적인 가치가 있는 시리즈보도를 한 것이다. 세밀하고 진실되게 객가인의 만리이주의 심령사를 보여준다.

 

전체 보도를 자세히 살펴보니 몇 가지 느끼는 바가 있었다.

 

첫째, 객가인들은 "역사기억"을 보유하고 있었다.

 

역사상 객가 선인들은 어쩔 수 없이 남으로 이주해야 했다. 전란의 고통을 깊이 겪었다. 그러므로, 객가인은 고향의 안정, 국가의 강성, 민족의 굴기에 대한 강렬한 갈망이 있다. 그들은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고, 진하다. 그래서 객가인은 어느 곳으로 이주하던지간에 모두 '조종의 밭은 팔지언정, 조종의 말은 팔지 않는다'는 조훈을 지킨다. 돈종목족(敦宗睦族), 경독전가(耕讀傳家), 신종추원(愼終追遠). 바로 객가인의 이같은 고수로 객가문화는 고인의 소리를 보존했고, 전통을 보존하고 문화를 이어갔다. 이것은 객가인의 역사기억이다. 고대문명의 활화석이다. 전체 화하족군의 집단적 '역사기억'이다.

 

둘째, 문화는 교류와 충돌을 통하여 생명력을 발휘한다.

 

역사상의 중원문화는 유가위주의 문화이다. 박대정심하지만 상대적으로 보수적이다. 객가인들은 이주를 통하여, 중원문화를 전파한다. 이를 통하여 중원문화는 개방적인 체계를 갖춘다. 각지로 이주한 객가인은 고향을 떠남으로서 고향의 문화를 포기하지 않고, 계쏙하여 자신의 문화를 지켜나간다. 다만 이런 고수는 폐쇄적인 것이 아니었다. 각지문화와 교류하고 충돌하면서 계속 생명력을 발휘해나간다. "예실구제야(禮失求諸野)". 객가문화는 거꾸로 중원문화에 영향을 주고, 새로운 충돌을 일으킨다. 이렇게 하여 중원문화의 내재적인 장력과 혁신능력을 북돋운다. 이런 층면에서 말하자면, 개봉시가 2014년 세계객속제27기간친대회를 개최하는 것은 의미가 상당히 크다. 개봉의 국제문화관광도시로서의 영향과 지위를 끌어올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중원문화에 대한 심층적인 충돌로 인하여 나타난 무형적인 형향은 더욱 심원할 것이다.

 

셋째, 신문보도는 발로 뛰어서 쓴 것이다.

 

신문보도는 발로 뒤어서 쓴 것이다. 말은 거칠지만 도리는 거칠지 않다. 가보지 못하고 제대로 찾아가지 않으면 제대로 말할 수 없다. 변량만보가 강대한 진용의 보도조를 보내어 만리를 달리게 하며, 하층을 찾아가고, 강서, 광동, 복건의 객가거주지를 깊이있게 들어가서 행진식으로 보도하고, 이동식으로 원고를 보냈다. 이런 것은 칭찬받을 만하다. 그래서 필자는 이 대형문화행사의 기획에 찬탄할 뿐아니라, 이들 산넘고 물건너 다닌 보도조의 구성원들에게도 경의를 표한다.

 

이번 대형활동보고를 전부 읽어봄으로써, 객가인의 견지에 대하여, 중원문화에 대한 혁신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과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