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사회/중국의 민족

흉노의 후예들은 어디로 갔는가?

by 중은우시 2013. 4. 15.

글: 문재봉(文裁縫)

 

흉노는 기원전3세기경 중국북방에서 흥기한 고대민족이고, 하투(河套)지대(지금의 내몽고,산서일대)에서 번성했고, 대막남북에서 유복생활을 했다. 흉노의 수령은 선우(單于)라고 하는데, 중원의 국왕에 해당한다. 선우의 아래에는 좌현왕, 우현왕이 있고, 각각 대부락을 이끈다. 흉노족은 일찌기 기원전 7,8세기에 이미 중국북방의 넓은 지역에서 생활하고 번식하면서 씨족과 부락연맹을 건립했다. 기원전3세기때, 흉노는 철기시대로 접어든다. 군사력도 그에 상응하여 강해졌다. 그래서 진, 조, 연등 국가의 변경을 교란시키기 시작한다. 기원전265년, 흉노의 철기는 조나라장수 이목(李牧)에 패배한다. 그러나 얼마후 다시 권토중래한다. 기원전215년, 진시황 영정이 몽염을 파견하여 흉노를 공격할 때까지 그러했다. 흉노는 패배한 후 "감히 남하하여 말을 방목하지 못하고, 병사들을 감히 활을 들고 원한을 복수하려 하지 못했다." 그러나 진왕조 말기에 이르러, 흉노는 다시 기회를 잡아 남으로 발전한다. 점차 진나라의 변경에 가까워진다. 한무제때, 한왕조는 적극적으로 흉노를 공격하기 시작하고, 군사천재 위청과 곽거병의 지속된 타격으로 흉노는 원기를 크게 상한다. 그리고 점차 쇠약해진다. 마지막에는 남, 북흉노로 분열된다.

 

북흉노는 서한군대의 지속적인 압력하에, 사상유례없는 민족대이동을 하게 된다. 북흉노의 이주는 몇 세기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 과정은 이미 고증하기 어려울 정도이고, 사료의 기록도 아주 모호하다. 대체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렇다. 북흉노의 서천도중 강거(康居), 대완, 선선등 서역제국을 지난다. 4세기중엽, 북흉노는 강대한 돌궐국 알란국(阿蘭國)을 멸망시킨다. 서방은 이때문에 깜짝 놀란다.당시 북흉노인의 서쪽에는 두 노르만부락연맹이 있었다. 하나는 드네프르강 서쪽에서 드네스테르강의 동쪽에 있는 동고트인연맹이며, 또 하나는 드네스테르강 서쪽에서 카르파티아산맥 사이에 있는 서고트인연맹이다. 서고트인연맹의 서남쪽은 바로 유럽대부분을 통치하는 로마제국의 영토이다.

 

알란국이 흉노에 멸망된지 얼마 후, 고트인들이 아직 흉노에 대한 거대한 공황에 빠져 있을 때, 흉노철기는 바로 성아래까지 밀려온다. 그리고 신속하게 동고트를 급습하여, 동고트군대는 흉노에 전멸한다. 국왕은 자살하고, 무리는 사방으로 흩어진다. 서고트인은 동고트가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드네스테르강에 부대를 포진한다. 흉노인이 강을 넘는 것을 막겠다는 의도이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흉노이는 멀리 상류를 돌아서 적의 진영을 야습한다. 그리하여 서고트군이 큰 피해를 입는다. 고트인을 격파한 후, 남러시아초원을 점거한 후, 흉노인은 정비를 한다. 인구는 급격히 증가한다. 동시에 일부 흉노기병은 여전히 이웃 나라를 교란했다. 한무리의 흉노기병은 다뉴브강을 건너, 고트인과 함께 로마제국을 교란하고, 또 다른 흉노인은 384년 메소포타미아로 진공하여, 애덕사성(愛德沙城)을 점령한다. 그리고 또 한무리의 흉노인은 396년 사산조 페르시아제국에 침입한다. 영토를 계속 늘이면서, 헝가리평원을 통치중심으로 하는 흉노제국이 다시 흥성하기 시작한다.

 

흉노제국의 전성기는 대선우 아틸라의 통치하일 때이다. 그는 434년 아틸라와 브래다는 공동으로 왕위를 계승한다. 445년, 브레다선우는 신비롭게 암살당해 죽고, 아틸라가 혼자서 대권을 장악한다. 그는 북유럽과 동유럽에 대한 대규모 전쟁을 일으킨다. 앵글로색슨족은 영국아일랜드섬으로 도망가고, 많은 노르만과 슬라브인들의 부족도 전쟁에서 패한다 속속 흉노에 투항한다. 그는 동로마제국으로 대거 침입하여, 동로마제국에서 6000파운드의 황금을 배상금ㅇ로 받아니고, 연공(年貢) 2100파운드황금을 받기로 한다. 이제 흉노제국의 강역은 동으로 카스피해에서 북으로 북해, 서로는 라인강, 남으로 알프스산에 이른다. 아킬라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서로마에 대한 전쟁을 일으킨다. 이탈리아북부는 폐허로 변하고, 서로마제국황제는 공황에  빠지고 어쩔 수 없이 평화협상을 한다.

 

453년, 아틸라는 노르만족 신부 일디코를 맞아들인다. 결혼식에서 그는 대취한다. 다음 날, 사람들이 신방에 들어섰을 때, 아틸라는 혈관이 터져서, 핏물속에 쓰러져 사망해 있었다. 그의 신부는 침상의 귀퉁이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당시에 어떤 사람은 아틸라가 순환계통의 질병으로 죽었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은 일디코가 아틸라를 모살했다고 생각했다. 아틸라의 장례식에서 흉노인들은 머리카락을 자르고, 얼굴을 망가뜨려, 선혈로 그들의 국왕을 애도한다. 아틸라의 관은 3층으로 되어 있었다. 가장 바깥은 철이고, 두번째는 은이고 가장 안쪽은 금이다. 이렇게 그의 불후의 공적을 상징했다. 흉노인들은 강물의 물을 막아서, 아틸라의 유체를 마른 강바닥에 묻는다. 그후에 다시 둑을 터트려 물을 흐르게 한다. 시공에 참여한 노예는 모조리 죽인다. 그리하여 후세의 도굴자들이 찾을 수 없게 한다. 그의 묘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다.

 

아틸라의 사후, 그의 아들들은 대선우의 자리를 놓고 다툰다. 내전이 발어져서, 흉노제국은 순식간에 와해된다. 동고트, 게피다이족이 연합하여 반항하자, 흉노인은 454년 남러시아초원으로 쫓겨간다. 461년, 아틸라의 아들은 흉노제국을 재건하고자 한다. 그는 다뉴브강유역의 동고트인과 전쟁을 벌이나 실패한다. 468년, 그는 다시 동로마제국에 대한 전쟁을 일으킨다. 결과 자신이 전쟁터에서 전사한다. 이때부터 흉노인은 점차 조용해진다. 그리고 역사에서 철저히 잊혀지게 된다.

 

북흉노가 유럽으로 이주할 때, 남흉노의 거주지는 남쪽으로 이전한다. 그들은 계속하여 하투일대에서 거주했고, 삼국시대 조조는 흉노를 5개부로 나눈다. 3세기, 흉노족의 5부대도독 유연(劉淵)이 성도왕 영의 수하에서 장군으로 있었다. 당시 서진은 팔왕의 난을 겪고 있었다. 유연은 흉노족의 대선우가 되고, 북중국의 대부분지역을 점령하고 스스로 한왕(漢王)이라 칭한다. 역사에서 그 왕조를 한조(漢趙)라 부른다.

 

흉노의 한갈래무리들은 갈인(羯人)이라 부른다. 한조의 대장인 갈인 석륵은 한의 황제위를 찬탈하고 조(趙)를 세운다. 역사에서는 석조(石趙) 혹은 후조(後趙)라 부른다. 나중에 저(氐)족인 부씨의 전진에 멸망당한다.

 

흉노인에 섞여 있던 월지인은 흉노별부 노수호(盧水胡)라고 불리웠다. 그중 저거(沮渠)가족은 후량의 한족관리 단업(段業)을 주공으로 모신다. 현재의 감숙지역에 북량(北凉)을 건립한다. 나중에 저거몽손이 단업을 죽이고, 스스로 북량왕이 된다. 나중에 선비족 탁발선비의 북위에 멸망당한다.

 

흉노와 선비의 혼혈후대는 철불인이라고 부른다. 출불인 유발발은 선비 탁발씨에게 패배한 후 강(羌)족의 후진(後秦)에 투항한다. 나중에 스스로 마지막 흉노왕이 된다. 그리고 성을 혁련(赫連)으로 바꾼다. 하투지구(현재의 영하)에 하(夏)국을 건립하는데, 역사에서 호하(胡夏)라 부른다. 나중에 북위에 멸망한다.

 

흉노는 가까운 고구려의 선비인 우문씨부락에도 섞여들어간다. 그리고 한반도로 들어간다. 나중에 우문씨가 서위에서 건립한 북주정권은 한족외척인 양견에 찬탈당한다. 양견은 남정북정후, 수왕조를 개창하고, 다시 한번 중원지구를 통일한다.

 

이상은 16국 및 위진남북조시대, 흉노가 중국역사무대에서 진행한 마지막 연출이었다. 그후 흉노는 독립한 민족으로 중국의 역사에서 점차 소실된다. 흉노의 후예는 한족에 섞여들어온 후, 한족성인 유(劉), 하(賀), 총(叢), 호연(呼延), 만후(萬侯)등으로 바꾼다. 대부분은 지금의 섬서, 산서, 산동등지에서 생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