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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민족

유연(柔然): 흉노이후 유럽으로 침입한 유목민족 아바르(Avar)인

by 중은우시 2013. 8. 5.

작자: 미상

 

아틸라의 흉노제국이 와해된 후, 흑해 북안에 잔류해있던 일부 흉노인부락은 2개 부분으로 나뉜다: 쿠트리게르흉노인은 아조프해(Sea of Azov)의 서북쪽에서 유목생활을 했고, 우트게르 흉노인은 논강 하구에서 방목을 하고 있었다. 개략 545년, 비잔틴의 유스티니아누스황제의 선동하에, 우터게르인의 수량인 상디크는 쿠트리게르인을 공격하고, 10명중 1명을 뽑아서 도살한다(548년). 쿠트리게르인은 수량인 자보칸의 통솔하에 그들의적인 비잔틴에 대하여 보복을 감행한다. 자보칸은 558년-559년 겨울에 부락을 이끌고 얼음이 얼어있던 다뉴브강을 넘어 돌은 콘스탄티노플의 성아래까지 진격한다. 다만 명장 벨리사리우스에 패배당하여 돈강 초원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그는 상디크에 대한 적대행동을 계속하게 된다.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버마제비가 매미를 잡으려 하면, 참새가 뒤에서 노린다." 두 부락간에 너죽고 나살기식의 전쟁이 벌어지려고 할 때, 또 다른 용감한 유목민족 아바르인이 동방에서 일어난다.

 

1. 초조(初潮)

 

아바르인은 중국남북조시기에 북방초원에 있던 유연이다. <위서>, <북사>에서는 "연연(蠕蠕)"이라고 불렀다. <위서>의 기록에 따르면, "유연"은 그들이 스스로 붙인 이름이고, "연연"은 위세조 태무제가 그들이 무지하고 벌레와 비슷하다고 하여 호칭을 고쳐서 부른 것이라고 한다. 유연은 동호(東胡)에서 나왔다. <위서>에 따르면, "연연은 동호의 묘예(苗裔)이다. 성은 욱구려씨(郁久閭씨)이다." 유연이 수령인 아나괴(阿那瑰)가 위황제에게 만남을 청할 때, "신선세원유(臣先世源由), 출어대위(出於大魏)"라고 한 바 있다. 이를 보면 유연은 선비(鮮卑)와 기원이 같고, 모두 동호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유연의 시조는 이름이 목골여(木骨閭)라고 하는데(3세기후반), 선비 탁발부의 노예였다고 한다. 자손은 시조의 이름과 비슷한 욱구려를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목골려의 아들인 차록회(車鹿會)부터 무리를 갖기 시작한다. 4세기중엽부터 스스로 유연이라 칭하며, 5세기초부터 칸(可汗)으로 칭하기 시작한다. 전성기때에 지배하던 지역은 "서로는 언기(焉耆)의 북쪽, 동으로는 조선 옛땅의 서쪽, 북으로는 사막을 넘고, 한해(翰海)에 이르렀으며, 남으로는 대적(大磧)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북위와 교전을 벌였으나, 나중에는 화해한다. 6세기중엽 원래 유연에 예속되어 있던 돌궐이 흥기하여, 552년 유연을 격패시킨다. 칸인 아나환(阿那環)은 자살한다. 555년, 유연칸 암라진(庵羅辰)은 무리 천가를 이끌고 서위(西魏)로 간다. 서위는 돌궐의 압력에 뭇이겨 암라진 및 무리 3천여명을 모조리 돌권사자에게 넘긴다. 그리하여 모조리 장안 청문밖에서 참형을 당한다. 유연은 동방에서 멸족이 된 것이다.

 

유연칸국이 멸망하기를 전후하여, 일부 무리는 서쪽으로 이전하여 서방에서 말하는 아바르인이 된다. 그 핵심구성은 유연칸국의 권리핵심의 상층부 일부였는지, 아니면 유연에 예속되어 있던 어떤 부락인지는 아직 확실한 증거가 없다. 다만, <초원제국>에서는 비잔틴의 역사학자 시모카타의 구분법을 인용하여, 유연인을 진(眞) 아바르인으로 부르고 소수를 점했으며, 바르부족과 쿤니부족을 가(假) 아바르인이라고 불렀다. 이를 가지고 분석해보면, 아바르인은 소수의 '정종' 유연인과 서방의 몇몇 예속한 부락의 혼합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돌궐의 압박에 공동으로 서쪽으로 이주한 것이다. 아바르인의 습속은 유연인과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샤먼을 신앙하고, 두 줄로 머리카락을 땋았으며, 장막에서 생활하고, 물과 풀을 따라 목축을 했다. 전체 부락의 움직임에는 대량의 봉차(篷車, 북위때 유여은 이미 적지 않은 차량을 사용했다)로 옮겼다.

 

동방이 유연이 멸족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서쪽으로 이주한 유연인인 아바르인이 유럽에 침입한다. 비잔틴의 유스티니아누스황제는 다시 한번 그의 '이이제이' 수법을 활용한다. 사신을 발렌타인으로 보내어 그들의 칸과 다른 부락 즉 쿤누게르와 샤비르인을 싸우게 만든다. 아바르인은 비잔틴제국의 맹방으로, 이들 부락을 격패시키고 병합한다. 아바르인은 그리고 전술한 쿠터리게르와 우터케르 흉노인도 격패시킨다. 그리고 이 두 갈래의 흉노인들도 자신의 부락에 편입시킨다. 그외에 아란인(이전에 아란인은 흉노에 복속한 바 있다. 동방에서 온 강대한 유목민족에 복속하는데 익숙해진 것같다)도 아바르인에 대하여 우호적인 태도를 취한다. 결국에는 비잔틴제국의 북방에 더욱 강대한 적수가 나타난 것이다.

 

560년을 전후하여, 아바르인의 판도는 이미 볼가강에서 다뉴브강입구까지 확장된다. 아바르칸은 그의 봉차를 다뉴브강 북안에 주둔시킨다. 그는 북으로 슬라브각부족(안터인, 슬로베니아인 및 원더인)을 공격하고, 서쪽으로는 노르만지구에 진입한다. 마지막에는 퇴링겐의 대전에서 클로비스의 손자이자 프랑그왕인 시거버트에게 패배당한다(562년). 아바르인은 다시 흑해로 철수한다.

 

2. 광조(狂潮)

 

퇴링겐전투이후, 아바르인이 직면한 형세는 이러했다:

 

서방: 아주 강한 프랑크왕국. 퇴링겐전투이후 다시 서쪽으로 확장하는 것은 확실히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남방: 전성기의 비잔틴제국. 새로 동고트, 반달 두 나라를 소멸시켰다. 그리고 이탈리아와 아프리카를 얻었다. 제국의 북부는 일련의 천연장벽이 엄호하고 있었다. 코카서스산맥, 흑해, 다뉴브강등. 다뉴브강변경에는 막강한 병력을 배치하여 지키게 했다. 게피다이인, 롬바르드인이 그 사이에 있었다. 그리고 최소한 표면적으로 비잔틴과 아바르인은 동맹관계를 유지했다. 비록 아주 불안정하기는 했지만.

북방: 흩어져 살고 있는 슬라브인들이 있었는데, 별로 얻을 게 없었다.

서남: 다뉴브강중하류. 두 개의 이웃한 노르만족이 있었다: 롬바르드인은 서쪽의 판노니아에 거주하고 있고, 게피다이인은 동쪽의 고다시아지구에 거주했다. 이전에 게피다이인은 일찌기 흉노에 귀순했다 나중에 반기를 들어 흉노제국을 무너뜨렸다; 롬바르드인은 비잔틴이 동고트와 전쟁할 때 도와주어서, 유스티니아누스대제의 묵인하에 다뉴브강이남지구로 들어가 거주했다. 이 두 민족의 실력은 강하다고 할 수는 없었고, 서로 적대시 했다. 그래서 좋은 돌파구가 될 수 있었다.

 

[아바르인은 재능이 풍부한 새로운 칸 바얀(Bajan, 약565년 즉위)은 이런 형세를 감안하여, 롬바르드인과 결맹하여 게피다이인을 공격하는 전략을 취한다. 567년, 아바르-롬바르드연합군은 게피다이를 침입하고, 완전히 평정해버린다. 그리고 그왕 쿠니무드를 살해한다. 게피다이가 망하고 롬바르드왕 알보인(Alboin)은 아바르인의 위세에 눌려서, 다음 해 거주하던 판노니아등의 땅을 아바르인에게 넘겨준다. 그리고 무리를 이끌고 남하하여, 방어를 하지 않고 비어있던 이탈리아로 진입한다. 비잔틴군대는 대부분 지구에서 쫓겨난다. 이렇게 롬바르드왕국을 건립하고, 수도를 파비아로 정한다. 아바르인은 두 부족의 옛거주지로 들어가 점령한다. 그리고 영장을 판노니아강 유역부근의 헝가리초원에 설치한다. 그곳은 위대한 아킬라의 옛 도읍 소재지이다.

 

게피다이, 롬바르드인은 하나는 망하고 하나는 떠났다. 이제 아바르인의 앞에는 비잔틴제국의 다뉴브방어선이 나타난다. 바로 이 때, 비잔틴인은 동쪽으로 페르시아인과 전투를 벌이기 시작한다. 많은 군인들이 동쪽 전선으로 이동한다. 다뉴브강의 방어는 아주 약화된다. 비잔틴은 속금을 올려주는 방식으로 야만인들을 달래서 더 이상 욕심을 내지 않게 하려고 기도한다(금액은 매년 7만솔리디이다). 예전이 맹우와 전쟁을 개시하기 전에, 바얀은 570년을 전후하여 먼저 옛날에 그들을 이긴 바 있는 프랑크인을 정벌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시그보트를 격패한다. 이렇게 하여 미래 비잔틴과의 전쟁시 뒤에서 프랑크인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만들었다. 그후, 바얀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비잔틴에 대한 침입을 시작한다. 유목민족의 기병은 계속 다뉴브강을 건너, 동로마제국의 중심지로 쳐들어간다. 연이어 미시아, 트라키야, 펠로폰네소스등의 지역을 휩쓸었고, 한 때 수도 콘스탄티노플까지 위협했다.

 

6세기말, 아바르인의 세력범위는 남으로 아드리아해에서 북으로 보스니아에 이르고, 동으로 카르파티아, 서로는 알프스에 미친다. 그리고 원래 이곳에 거주하던 많은 슬라브부족을 정복한다. 전성기에도 아바르군대의 규모는 겨우 5만명가량이었다. 그중에는 투항해온 흉노인과 발칸인도 포함되어 있다. 작전때, 항상 피정복민족으로 구성된 보병(주로 슬라브인)을 앞에 내세우고, 아바르기병은 결정적인 타격역량으로서 중간에 둔다. 그들이 가져온 군사혁신은 금방 채용되고, 비잔틴중기병의 장비에도 체현된다. 아바르인의 공헌은 나무틀에 가죽을 덮은 안장과 등자이다. 그리고 여러 겹의 앏은 구리조각을 뚫어서 만든 호후(護喉)도 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말등자는 아바르인이 유럽으로 가져온 가장 중요한 혁신이다. 이는 기병의 마상격투능력을 크게 강화시키고, 더욱 효과적으로 말을 통제할 수 있게 되어, 말에서 설 수도 있게 된다; 그리고 두 손이 해방되어, 이전처럼 말고삐를 꽉 붙잡고 있을 필요가 없어져서, 더욱 무겁고 큰 방패를 장착할 수 있게 된다.

 

바얀칸은 전쟁말기에, 진정으로 좌절을 맛본다. 6세기의 마지막 몇년동안 비잔틴의 마우리키우스황제와 그의 장군 프리스커스는 흑해와 티아이스강(즉, 티자강)의 사이에서 아바르인과 일련의 전투를 벌이고 최종 승리를 거둔다. 601년, 프리스커스는 다뉴브강을 건너기까지 하고, 헝가리초원까지 추격하여, 다시 한번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다. 칸의 4명의 아들을 죽여버린다. 다음 해, 바얀칸이 죽었고, 전투는 잠시 일단락된다.

 

후임 마바르칸은 당시 롬바르드인의 세력하에 있던 이탈리아를 공격한다. 610년, 칸은 프리아울을 점령하고 약탈한다. 619년, 그는 트리키야의 헤라클레판디아(에레일리)와 비잔틴황제가 회담할 때를 틈타 배신을 하고 비잔틴황제 헤라클리우스 1세를 습격하고, 바로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한다. 습격과 진격은 모두 성공하지 못한다. ㄱ러나, 페르시아왕 코스로에스 2세가 비잔틴을 적대시하는 바람에 아바르인은 다시 생각지도 못했던 좋은 기회를 얻게 된다. 페르시아와 아바르인이 연합하여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한다. 전자는 소아시아에서, 후자는 트리키야에서 출병한다. 626년 6월-7월, 페르시아장군 샤흐바라츠가 소아시아의 한쪽 끝에서 다른쪽 끝까지 횡단한다. 보스포러스 입구의 칼케돈에 병력을 주둔시킬 때, 아바르칸이 콘스탄티노플 성벽아래에 도착한다. 당시 헤라클리우스 1세황제는 코카서스전선에 있었다. 그가 없을 때, 콘스탄티노플은 그의 행정관 보누스가 지켰다. 626년 7,8월이 교체되는 시기에, 아바르인은 콘스탄티노플성에 대하여 계속 맹공을 취한다. 이런 국면은 콘스탄티노플이 이전에 만난 적이 없는 것이다. 다만 최후에, 비잔틴함대가 적시에 도착하고, 페르시아인과 아바르인이 연합행동을 버지한다. 비잔틴은 놀라운 댓가를 치르며 아바르인의 공격을 계속 막아낸다. 아바르칸은 포위를 풀고 헝가리로 돌아간다. 이번의 모든 것을 다 건 전투가 실패한 후, 아바르인의 위신은 중대한 타격을 입는다. 630년 칸이 사망한 후, 아바드인은 쇠퇴기로 접어든다. 한때 그의 휘하에 복속했던 여러 민족이 속속 벗어나고, 칸국은 사면팔방에서의 압력에 시달린다.

 

3. 퇴조(退潮)

 

아바르인은 확장능력을 모두 소진한 후, 직면한 것은 원래의 적인 비잔틴인과 프랑크인이 아니라, 원래 복속해 있던 부락이 자신의 지배를 벗어난 후 여러개의 새로운 정권을 세운다. 그중 가장 주요한 것은 남쪽의 불가리아와 서,북쪽의 사모(Samo)였다.

 

발칸반도의 원주민은 키르키야인이다. 5세기에서 6세기까지 대량이 슬라브인이 북에서 들어온다. 그리하여 발칸은 금방 슬라브화된다. 북쪽의 아바르인과 남쪽의 비잔틴인인을 두고, 7세기전반기에 전 미시아행성(지금의 불가리아북부, 다뉴브강 이남)지역에 7개의 슬라브부락으로 구성된 연맹이 건립된다. 6세기중엽, 원시불가리아인 - 볼가인이 이 지역에 나타난다.

 

볼가인은 돌궐인종에 속한다. 2세기에 중앙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온다. 카스피해와 흑새의 사이에 정착한다. 코트라지, 사라고리, 오노구언서리등 부락으로 나뉘며, 통칭하여 '볼가인'이라고 부른다. 4세기후반기, 볼가인은 흉노에 정복되어 그 휘하로 들어간다. 아틸라의 사후에 다시 독립한다. 7세기 전반기, 쿠푸라트칸의 통솔하에, 볼가인은 코카서스서북, 쿠반하곡과 아조프해의 사이에 있는 땅에 강대한 왕국을 건설한다. 즉 비잔틴편년사학가들이 말하는 "대불가리아"이다. 쿠푸라트가 죽은 후 "대불가리아"는 카자르인의 칩입으로 와해되어 3부로 나뉜다: 일부분은 쿠푸라트의 아들 바얀이 통솔하여, 나중에 그곳에 불가국을 건설한다. 1236년겨울 바투의 몽골서정때 정복당한다; 또 다른 일부분 볼가인은 쿠푸라트의 또 다른 아들 이스패리크가 통솔하여 서쪽으로 이동한다. 670년대에 다뉴브강을 건너 미시아로 들어간다. 현지의 슬라브 7부락연맹은 토지와 대량인구를 보유하고 있다. 볼가인은 용맹하고 전투를 잘 했다. 양자는 바로 마음이 맞아 신속히 연합한다. 680년경, 이스패리크가 비잔틴황제 콘스탄틴 4세의 친정을 격파하고, (제1) 불가리아왕국을 건립한다. 비잔틴인은 이에 대하여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그저 매년 공납을 주면서 평화를 유지했다(필자는 십여년전에 불가리아영화를 하나 보았는데, "칸의 영예"라는 것이다. 불가리아의 개국역사를 그린 것인데, 카자르인이 침입하여 국가가 셋으로 나뉘고 비잔틴을 격패시키고 건국할 때까지의 이야기인데, 아주 괜찮았다). 불가리아건국후, 아바르인에 대한 영향이 아주 컸다. 슬라브인의 분리독립으로 원래 수가 많지 않았던 아바르인은 더욱 열세에 처한다. 이때부터 아바르인은 다뉴브이북으로 물러나서 스스로를 지킨다. 이 지역의 패주 지위는 불가리아인에게 넘겨준다.

 

사모공국은 창건자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약623년, 사모공작(슬라브출신, 일설에는 프랑크인이라고 한다)이 슬라브인을 통솔하여 아바르인을 격패시키고, '대공'이라고 부르고, 건국한다. 631년 다시 서쪽으로 프랑크인을 이기고 한 지방에 웅거한다. 강역은 모라비아와 니트라를 중심으로, 체코, 슬로바키아, 루르츠등지를 포함한다. 658년에 사모가 죽은 후 와해된다.

 

아바르인은 이상의 여러 국가의 압박하에, 생존공간이 갈수록 줄어들었고, 헝가리초원일대에 국한된다. 비록 658년 사모공국이 와해되어씨만, 그때 아바르인은 이미 더욱 쇠약해져 있었다. 그곳의 옛것을 모두 되찾을 힘이 없었다.

 

아바르인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한 것은 프랑크에서 온 샤를마뉴대제이다. 791년 8월 , 그는 아바르인의 3년전의 침입에 반격하기 위하여, 친히 아바르칸국으로 진공한다. 다뉴브와 라브강의 합류처까지 쳐들어간다. 그러나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한다. 아바르인은 그가 거주하는 숙영지의 바끝에 나무로 만든 목책을 만든다. 그리고 로마인의 담장으로 친 땅의 개념을 본받아, "새보권(塞堡圈)"을 형성한다. 그 바깥은 일정한 너비가 있는 성벽과 타(垛)로 구성되어 있다. 담장의 아래에는 일정한 깊이와 너비의 도랑을 파놓는다. 도랑에는 뾰족한 목장등 적의 신속한 공격을 막을 설비를 설치한다. 이런 설비는 상대적으로 말하면 그다지 방어력이 좋지 못하다. 다만 암흑시대에 전술능력이 엉성했던 유럽에 있어서, 함락하기 힘든 장애였다. 프랑크인에게 큰 골치거리가 되었다. 관련 사서에서는 자주 과장되게 묘사하고 있다.

 

795년, 샤를마뉴대제의 아들 피핀은 푸리아울 변방의 에릭후작의 도움을 받아, 아바르인의 '새보권'을 공격한다. 그리하여 아바르인의 일부 재물을 탈취한다. 아바르인이 비잔틴세계에 대한 2세기에 걸친 공격에서 얻은 전리품이었다. 에릭은 아바르인의 재물을 찾아서 15대의 마차에 가득 실어 샤를마뉴에게 바친다. 불행하게도 후작 자신은 매복에 당하여 사망한다. 796년, 피핀은 세번째 전투에서 아바르인의 '새보권'을 무너뜨리고, 나머지 모든 재물을 탈취한다. 아바르인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정화는 거의 모두 잃게 된다. 나머지 역량은 티자르강이동으로 몰아낸다. 그 수령은 샤를마뉴대제에 항복한다. 799년, 그는 프랑크인통치에 반항하는 의거를 일으킨다. 그러나 금방 실패한다. 이후 소당이라는 아바르의 새로운 수령이 803년부터 장기간 프랑크인의 통치에 굴복한다. 805년, 교명이 테오도르인 칸이 샤를마뉴의 속신으로서 아바르인을 통치한다.

 

재난을 가득 겪은 후, 아바르인은 이미 슬라브인과 불가리아인으로부터의 이중압력을 버틸 수 없게 된다. 샤를마뉴대제의 통치기간에 그의 허가하에, 아바르인은 칸 테오도르가 다뉴브강 북안을 포기한다. 카넌툼과 샤바리아의 사이에 있는 판노니아서부로 이주한다. 다뉴브강 동쪽은 불가리아의 수중에 떨어진다. 그곳은 헝가리남부, 왈라치아와 발칸산이북의 불가리아를 포함한다. 서부지구는 먼저 슬라즈인과 바바리아의 식민지를 건립한다. 9세기후기 이곳에서 슬라브인이 건립한 대모라비아국이 흥기한다. 그것은 보헤미아에서 판노니아의 사이에 있는 지역이다. 9세기말 마자르인이 동방에서 아바르인의 옛땅으로 들어온다. 다시 새로운 '아바르인'이 된다. 다만 예전에 한때 강성했던 아바르인은 이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그저 역사상 나타난 적이 있는 명사로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