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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정여창(丁汝昌): 민족영웅인가?

by 중은우시 2018. 7. 10.

글: 청림지청(靑林知靑)


등세창(鄧世昌)과 좌보귀(左寶貴)는 "갑오쌍충(甲午雙忠)"으로 불린다. 그외에 "갑오삼영(甲午三英)"이라는 말도 있는데, 여기에는 북양해군제독 정여창이 추가된다.


정여창은 '삼영'중에서 가장 심각하게 오명을 뒤집어쓴 경우라 할 것이다. 평가는 거의 정반대로 나뉜다. "반대파"는 육군출신의 정여창은 해군을 아예 몰랐고, 군대를 잘 다루지 못하여, 지휘에 실패했고, 인품에도 문제가 있었다는 등이다. 그는 북양수군을 수장시킨 책임자라고 본다. "지지파"는 정여창을 민족영웅, 애국장수로 본다. 특히 일본측 장수들조차도 정여창의 자살을 '무사도정신'에 부합한다고 보니, '진정한 군인'이라는 것이다.


비록 그는 일본과의 전투과정에서 죽었지만, 공식적으로 그가 민족영웅인지에 대하여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최소한 애매한 상태이다. 그는 역사에 많은 논쟁거리를 만들어 놓았고, 지금까지도 정확한 입장이 나오기 힘들다. 아마도 결론을 미루는 수밖에 없겠다. 이홍장과 마찬가지로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결론은 내리기 힘들 것같다.


정여창은 안휘  합비 사람이다. 원적은 무위현(無爲縣)이고, 호는 차장(次章)이다. 청나라말기의 저명한 장군이고, 관직은 북양해군제독에 이른다. 갑오년 위해위(威海衛)의 전투에서 북양함대를 지휘하여 일본군에 대항하지만, 결국 항구내에서 총탄이 떨어졌고, 일본군의 투항권유를 거절하고, 아편을 먹고 자결한다.


그는 어려서 집안이 가난했고, 일찌기 사숙(私塾)에서 몇년간 글을 읽었으나, 10살때부터 공부를 그만둔다. 그리고 방공(幇工)으로 있다가 나중에 두부점(豆腐店)의 학도가 된다. 태평군이 여강을 점령했을 때 그는 태평군에 참가한다. 나중에 부대를 따라 상군(湘軍)에 귀순한다. 이어서 회군(淮軍)에 예속된다 전공으로 청나라조정에 의하여 기명제독(記名提督)이 된다. 나중에 이홍장이 북양수군으로 차출해서 쓴다. 그는 양무운동의 대표적 인물중 하나이다.


1888년, 북양해군이 정식으로 설립될 때, 그는 북양해군제독이 된다. 재직기간동안 북양수군과 북양해상방어의 건설에 힘을 쏟는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엄격했다. 다만, 육군출신의 장군으로서 그에게는 해군을 지휘하는게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평소에 온화하게 부대를 다스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군기를 잡는데 엄격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내부의 부패가 심각했고, 전체 북양해군의 자질도 상당히 저하된다.


그는 비록 글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해야한다는 문인의 신조는 지켰다. 그의 부하중에서 등세창(鄧世昌), 유보섬(劉步蟾), 임태증(林泰曾)같은 학식이 높은 인물들은 그를 무시했다. 그래서 그의 군대내에서의 명망은 그다지 높지 못했다. 그저 윗사람의 명령을 아랫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관리자 수준이었다. 그는 이홍장에게 깊이 의존했고, 이홍장의 말은 모두 따랐다. 그는 은사 이홍장이 배양해준 은혜에 부끄럽지 않게 하려고 노렸했고, 아래로는 그가 잘 알지도 못하는 해군의 군무를 지휘하였고, 자부심높고 교만한 부하들을 지휘해야 했다. 그로서는 확실히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갑오해전의 전패의 책임을 모조리 정여창에게 돌리는 것은 확실히 불공평하다.다시 말해서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부상으로 그는 지휘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후에 항구내에서 그는 이홍장의 명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항구를 나서서 적과 싸울 수가 없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갑오해전의 패전에 그가 책임은 있다. 그러나 그 개인의 행위가 어떠했든지간에 결과는 바꿀 수가 없었을 것이다.


당시 죽음으로 절개를 지키는 것이 필연적이다. 해군에는 해군의 법도가 있다. 선장은 배와 함께 생사를 같이 한다. 하물며 이 방대한 함대임에야. 설사 그가 자결하지 않았더라도, 조정이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황해해전 당시 중국과 일본에서 참전한 해군군함은 각각 12척이다. 비록 중국이 해전에서 패배했지만, 일본해군도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다만 다행히 한 척도 잃지 않았다. 북양함대는 5척의 전함을 잃는다. 북양함대가 황해해전에서 중대하게 패배한 결과에 정여창은 일정한 책임이 있다.


비록 해전에서 패전했지만, 주력은 남아 있었고, 북양해군은 여전히 강대한 역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만일 나중에 바다로 나아가서 일본과 결사의 전투를 벌였다면, 승패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그는 오로지 이홍장의 명을 따랐고, 바다로 나가서 적과 마주치지 않았으며 섬에 웅크리고 있었다. 결국 일본군이 육상에서 포위공격을 해오자 전멸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정여창이 바다로 나가지 않았을 때의 나쁜 결과를 몰랐을 리 없다. 그는 이홍장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렇게 썼다: "창(정여창 본인)이 평범한 재능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아 해군제독이 되었습니다. 해군을 통솔한 이래 힘을 다하여 왜구와 황해에서 전투를 벌였습니다. 되돌아보건데, 첫번째 전투에서 비록 내가 아끼는 장수 등공 세창, 임공 영승을 잃었지만, 주력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여전히 왜구와 자웅을 겨룰 수 있었습니다. 총사령관 이대인이 어떤 뜻에서인지는 몰라도 우리들에게 모조리 위해위 항구로 들어가고, 출전하지 말라고 명하였습니다. 귀퉁이에 웅크리고 있으면서 왜구가 육,해에서 협공하는 것을 앉아서 기다리는 건 실로 병가의 큰 금기입니다. 저는 여러번 북경으로 들어가 출전하기를 청했으나 허가하지 않으시고 엄명을 내렸습니다: 만일 명을 어기고 출전하면 비록 이기더라도 죄를 묻겠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전멸을 당하고 맙니다.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필자의 생각으로 먼저 이중당(이홍장)이 주요책임을 부담해야 한다. 가령 정여창에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만 주었더라도 아마 전쟁의 결과가 이렇게 형편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이홍장은 어쨌든 멀리 조정에 있는 고위관리이다. 청나라정부는 그가 난국을 수습해주기를 기대했다. 그렇다면 이 정여창은 나라를 망쳤다는 오명을 혼자서 뒤집어 쓴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문제가 나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유공도를 포위한 것은 십일,반달이 아니다. 그렇다면 원군은 어디에 있었는가? 조정에서는 관여하지 않았단 말인가. 정부에서 구해주지 않았단 말인가?


최근 위해의 민간사학연구자 유화봉(劉華峰)의 글을 잃고서야 깨달았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당시 산동순무 이병형(李秉衡)이 간접적으로 정여창을 죽인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병형은 이홍장, 정여창과 정치적 입장이 달랐다. 그래서 자주 정여창을 공격했다. 위해위전투의 중요한 순간에, 그는 아무런 전투력도 없는 하방군(河防軍)을 보내어 정여창을 구원했다. 하방군은 바로 강둑을 방어하는 민부(民夫)이다. 손에는 대도(大刀), 장모(長矛)를 들고 있을 뿐이다. 결국 일본군에게 형편없이 깨졌다. 이것은 바로 청류오국(淸流誤國)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병형은 증원온 부대를 산동경내에서 막고 유공도로 가지 못하게 했다는 말도 있다. 이에 대하여는 고증을 하지 못하여 함부로 말할 수는 없다. 이치대로라며 이병형도 충용지사이고, 나중에 그의 최후도 존경할 만하다. 그러나 왜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고 하여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설마 그는 결과의 심각성을 몰랐단 말인가.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 외국종군기자인 커닝햄은 유공도의 패전원인을 얘기할 때 이렇게 말한다: "본성의 순무(이병형)이 병력을 보내주지 않았다." "약속한대로 병력을 지원해주지 않은 것"이 중요원인이다. 이 말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수군이 전멸하자, 조정은 진노한다. 형부는 명을 내려 그의 관에 구리줄로 묶는다. 그리고 관과 구리줄을 모두 검은색으로 칠하여 죄인임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의 원적지 마을 입구에 두고 매장하지 못하게 했다. 정여창의 영구는 그의 아들인 정대희(丁代禧)가 원적지로 호송한다. 부인은 슬픔을 참지 못하고 남편을 따라 죽는다.


1895년 미국의 <뉴욕타임즈>는 이 해군장군을 칭찬한다: 그는 전쟁에서 그의 동포들에 비하여 더욱 굳건한 애국정신과 더욱 고상한 민족기개를 보여 주어 중국인들이 자랑으로 삼을 만하다. 그는 비극적인 방식으로 자살함으로써 이런 고귀한 품성을 보여주었다.


정여창이라는 갑오년의 비극적 인물의 후사도 여전히 평범하지는 않았다. 1959년 겨울, 정여창의 안장지의 사람들은 호미를 들고 땅을 파서, 검은색의 목관을 땅속에서 발굴해낸다. 사람들이 관을 열었을 때, 그의 곁에는 먼지만 있었고, 아무 것도 없었다. 묘를 파낸 사람들은 화가나서 소리친다: "이 늙은이는 아무 것도 없군!" 이들은 시신을 끌어내어, 불태워버린다. 잘라낸 관목은 금방 인민공사 식당의 의자로 된다.  나머지 돈나가는 물건들 두 부인의 부장품은 인민공사에서 자전거 1대와 맞바꾼다.


정여창의 죽음은 갑오년 청일전쟁에서 비극적인 일막이다. 어떤 사람은 정여창이 책임질 것이 두려워 자살했으니, 나약한 것이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그의 자살은 전체 유공도 군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것이니 의로운 것이라고 한다. 정여창에 대한 평가는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모두 각자의 논리를 내놓고 있고,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간에, 그는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국가를 위하여 생사를 넘나들었다. 그리고 충성스럽고 용맹스러운 사람이다. 외래의 침략에 자신의 최대한 노력을 바친 사람이다. 그가 생전에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질렀든간에 그는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했다. 혹은 죽음으로 죄를 갚았다. 그런데 죽은 후에 시신조차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이런 노인에게 우리는 조금은 관용을 베풀어도 되지 않을까?


그를 어떻게 대하든지 간에, 그는 내가 보기에 민족영웅이 분명하다. 그는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다. 그는 후손들의 존경을 받을만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