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육기(陸棄), 손옥량(孫玉良)
역사상 이런 인물이 있다. 일생동안 '죄악이 많았고', 그는 '반도'였으며, 원래의 전우를 죽이는데 전혀 봐주는 법이 없었다; 그가 태평천국을 진압하면서 얼마나 많은 의군형제들이 그의 화살아래 죽어갔는지 모른다; 그는 한때 의화단을 진압하는데 앞장서겠다고 나서기도 했지만, 역사는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었다. 그는 상패장군(常敗將軍)으로 얼마나 많은 전투에서 패배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청나라의 봉강대리(封疆大吏)가 된다. 만일 이렇게 그냥 죽었더라면 그의 이름은 그렇게 묻혔을 것이다. 그러나 마침 영국프랑스연합군이 중국을 침략했고, 그는 고희(70)가 넘은 나이에 여전히 전선에 나가서, 74명의 프랑스인을 죽인다. 바로 중국에서 유명한 진남관대첩(鎭南關大捷)이다.
그는 바로 풍자재이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받은 인상은 풍자재가 '민족영웅'이라는 것이다. 원인은 바로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진남관대첩을 거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또 다른 일면이 있다.
풍자재는 일찌기 천지회(天地會)와 태평군(太平軍)의 반도(叛徒)이다. 풍자재는 비천한 출신으로 4살때 모친이 죽고, 10살때 부친이 죽는다. 그 후에는 할머니, 형과 같이 살며 외롭게 자란다. 학교는 겨우 2달 정도 다니다가 그만둔다. 그의 외삼촌인 여씨(黎氏)는 이 아이를 양자로 삼고 시어 한다. 그러나 조건을 달았는데 성을 여씨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다. 풍자재는 단칼에 거절한다. 이것을 보면 그는 성격이 강인한 것이 분명하다. 그는 혼자서 살면서 소금을 팔고, 목공일을 하고, 물고기와 새우를 잡고 무슨 일이든 다 하며 먹고산다. 청나라말기에는 계급간 갈등이 첨예했고, 곳곳에서 반청의거가 일어난다. '천지회'는 바로 반청복명을 목표로 하는 민간의 비밀결사조직중 하나이다. 풍자재는 천지회에 가입하여 천지회이 소두목중 하나가 된다. 나중에 짧지만 태평천국에도 가담한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천지회와 태평군을 배신하고, 청나라조정에 투항하여 천지회를 진압하는데 나선다.
풍자재가 배반한데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하나는 그가 예전에 친구와 외지로 나가서 장사를 한 적이 있는데, 영산현 경내에서 천지회의 유팔(劉八)무리에게 납치당한 적이 있다. 이리하여 반청조직과는 원한이 있었다. 그가 천지회와 태평군에 가입한 것은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는 사회와 부패한 청나라정부에 원한을 품어서가 아니라 그냥 먹고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누구든 그에게 먹을 것을 주고 그에게 앞날을 열어주기만 한다면 그는 바로 그에 의탁하는 것이다. 이것은 풍자재의 본성일 뿐아니라, 대다수 중국인의 본성이기도 하다. 그가 참가한 태평군의 부ㅐ는 청나라군대의 향영(向榮) 부대에 격패당한다. 그 후에 그는 인생최대의 '귀인'을 만난다. 그는 바로 그의 인생에서 희망이 없을 때 만난 '백락'이다. 이름은 바로 장국량(張國梁)이다. 일명 장가상(張嘉祥)이라고 하는데, 원래는 천지회 이의당(怡義堂)의 당주였는데, 나중에 천지회의 '반도'가 된다. 청나라조정에서 의군을 진압하는 선봉이 된다. 풍자재가 막다른 골목에 몰렸을 때, '반도' 장국량은 그에게 길을 열어준다. 그리하여 풍자재는 인생에서 가장 중대한 선택을 한다. 장국량을 따라 의군을 진압하기로 한 것이다.
풍자재는 청나라군대의 진영에서 물만난 고기와 같이 잘나갔다. 그는 태평군을 진압하는 용장으로 일찌기 군대를 이끌고 하루만에 태평군의 영루 칠십여개를 무너뜨린 전적을 가지고 있다. 장국량은 강남대영 총사령관인 향영의 부수(副手)였고, 그가 주로 의지하는 장수는 바로 풍자재였다. 풍자재는 처음에 장국량을 따라 향영의 휘하에 들어간다. 장국량이 죽은 후에는 그의 병마를 이끌고 증국번(曾國藩)의 휘하로 들어간다. 진강을 지킬 때, 연속하여 태평군의 백번이 넘는 공세를 막아낸다. 이러한 전공으로 풍자재는 계속 승진하여, 소두목, 총병에서 광서, 귀주제독이 된다. 이십여년의 제독생애에서 풍자재의 주요업무는 청나라조정을 위하여 사방을 평정하는 것이다. 천지회, 태평군, 염군의 의거를 진압했다. 풍자재는 타고난 장수재목은 아니다. 병법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전투에서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했다. 심지어 태평군에게 거의 전멸당한 적도 있따. 그러나 그가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라면, 실패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청나라조정에서 중용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때문일까? 풍자재는 병사를 다루는데 나름대로 특색이 있었다. 첫째, 전투에 용맹했다. 친히 선봉에 서서 적진을 돌파한다. 장국량은 그의 등을 쓰다듬으면서, "용맹하기로는 내가 너를 따라갈 수가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둘째, 관병이 평등했다. 풍자재는 장수이지만 베옷에 짚신을 신고 병사들과 함께 훈련했다. 먹고 마시는 것도 모두 병졸들과 같았다. 병사가 아프면 친히 돌봤고, 병사들에게 급여를 줄 때도 직접 나눠주었다. 나중에 원세개가 소참에서 병사를 훈련시킬 때, 친히 급여를 주는 것은 바로 풍자재에게 배운 것이다. 셋째, 의군을 진압할 때, 초무(招撫)를 위주로 하고, 함부로 죽이거나, 마구잡이로 죽이거나, 약탈하지 않았고, 기율이 엄격했다. 넷째, 사람됨이 돈후하고 착실했다. 너무 착실해서 동료들의 비웃음을 받을 정도였다. 황제와 태후가 그를 의심하지는 않고 안심하고 쓸 정도였다. 다섯째, 지방에 부임하면 열심히 다스리고 백성을 사랑했다. 그래서 '청천'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여섯째, 서예와 시를 좋아했다. 비록 거칠기는 했지만, 이를 빌어 그가 '재능없음'을 알릴 수 있었다. 재능이 없으면 아무도 경쟁상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반란을 일으킬 위험도 없다. 이것이 바로 그로 하여금 관료사회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게 만들었던 이유이다. 이 여섯가지는 풍자재가 의군을 진압한 인물이지만, 역사상 그다지 큰 악명을 남기지 않을 수 있었던 원인이다.
만일 진남관전투가 없었더라면, 풍자재는 역사에서 그저 평범한 관료였을 것이다. 영국프랑스연합군 및 이후의 팔국연합군은 원래 청나라조정의 눈에 오랑캐부락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싸워보고나자 그들의 선박이 단단하고 대포는 날카로워 청나라조정이 겁을 먹게 된다. 그리하여 청나라조정은 전투에서 한번이라도 승리하겠다는 생각마저 버리게 만들었다. 풍자재가 전선에 보내어질 때, 이미 고희에 가까운 은퇴하여 집에서 쉬고 있던 늙은이였다. 그리고 그는 그저 전선의 부사령관으로 임명받았다. 총사령관은 광서순무 겸 관외군무독판 반정신(潘鼎新)이었다. 이홍장은 원래 풍자재에 대하여 그다지 큰 희망을 걸지 않았다. 그에 대한 평가는 "사불능전(四不能戰)"장군이라는 것이다: "나이가 들고 몸이 쇠약하여 힘이 마음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래서 싸울 수 없다. 이것이 첫째이다; 배에 먹이 없고(배운 것이 없고), 가슴에 도략이 없다. 그래서 싸울 수 없다. 이것이 두번째이다. 병기가 누추하여 살상력이 약하다. 그래서 싸울 수 없다. 이것이 세번째이다. 췌군낭병(萃軍狼兵), 전법이 옛날식이다. 그래서 싸울 수 없다. 이것이 네번째이다." 그러나 풍자재는 이홍장이 그에게 준 결론을 뒤집어 버린다. '사불능전'을 '사능전'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풍자재는 어떻게 싸웠는가? 첫째, 군기를 엄격히 했다. 그는 '사참령(四斬令)'을 내린다. 길을 막고 악탈하면 참한다, 부녀를 강간하면 참한다. 소나 돼지를 훔치는 자는 참한다. 사람을 유괴해서 파는 자는 참한다. 한번은 그의 부하중 한 사병이 밥을 먹고 돈을 내지 않았다고 고발당했다. 그 사병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배를 갈라서 자살한다. 그의 뱃속에는 쌀한톨이 나오지 않았다. 이 사건은 풍자재 군대의 명성을 크게 떨치게 만들었다. 둘째, 전투에 임하면서 유언을 남긴다. 일단 광서를 지키지 못하면 일족을 강남으로 이주하라고 한 것이다. 죽어도 망국노는 되지 않겠다는 것이다. 전투전에 두 아들을 곁에 데려와서 언제든지 자신의 시신을 거둘 준비를 하도록 시킨다. 이렇게 하여 사기를 북돋운다. 셋째, 전술적으로 친히 지형을 관찰한 다음 적을 유인하는 계책을 쓴다. 넷째, 자신의 단점을 피하고 자신의 장점을 활용한다. 프랑스군과는 대포의 위력에서 차이가 나지만, 큰칼을 쓰는 것은 더 잘할 수 있었다. 기회를 잡아서 프랑스군과 육박전을 벌인다. 그 결과 진남관대첩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기실 진남관대첩이라고는 하지만, 겨우 적 74명을 죽인 전투이다. 74명을 죽이고서 대첩이라고 이름붙이는 것은 당시 외국군대와의 실력차이가 그만큼 컸다는 것을 보여준다. 칠십사명이라는 수량이 많지는 않지만, 프랑스군에게 이길 수 없다는 신화를 깬 것에 의미가 있다. 항일전쟁때 평형관대첩과 마찬가지이다. 실제로는 천명가량의 일본군을 죽인 것이고, 팔로군의 손실도 그만큼 되지만, 이것만으로도 대승리인 것이다. 풍자재는 이 전투로 명성을 떨친다. 프랑스군 74구의 시신으로 인하여 농민군을 진압했던 도살자에서 민족영웅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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