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무훈(武訓): 거지 신분으로 정사와 교과서에 이름이 오른 인물

중은우시 2018. 1. 6. 12:24

글: 단승택(段承澤)


민국시대에 어느 중학교에서 이런 시험을 보면서, 역사시험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네가 가장 숭배하는 역사인물은 누구인가? 이때 거의 모든 학생들은 무훈이라고 썼다고 한다.


지금은 아마도 그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역사상 확실히 그런 사람이 있었고, 중국의 평민교육에 심혈을 쏟았던 인물이다.


청나라말기, 산동성 당읍현 서북향 유림진 무가장에는 무숭우(武崇禹)라는 빈농이 있었다. 집안에 식구는 많고, 땅은 적어서, 생홣이 가난했다. 1939년 12월 5일 그는 다시 자식을 하나 더 낳는다. 이 아이는 집안에서 항열이 7번째여서 "무칠(武七)"이라고 불리웠다.


무칠이 어릴 때 매번 지주와 부농집의 아이들이 학교로 공부하러 가는 것을 볼 때면 부러워했다. 그들을 따라 학교 문앞까지 가서는 무한한 동경을 품고 학교를 바라보곤 했다. 부자집 아이들은 그의 의복이 남루한 것을 보고 그를 무시했고, 심지어 아무런 이유없이 그를 때리거나 욕하기도 했다.


무칠은 자주 울면서 집으로 돌아와서 모친에게 물었다: "엄마, 나는 왜 공부하러 갈 수 없어요?" 그의 모친은 눈물을 흘리면서 대답했다: "우리 집은 가는해서 먹을 것도 없는데, 학교갈 돈이 어디 있겠느냐. 책은 가난한 사람이 읽을 것이 아니다. 가난한 집안의 아이는 그저 농사일을 하고 노동일을 해서 번 돈으로 먹고 살아야 한다."


7살때, 산동 각지에는 재난이 크게 발생한다. 설상가상으로 부친도 사망한다. 곤궁한 집안은 대들보를 잃었고, 그는 할 수 없이 모친과 함께 유리걸식하며 살아가야 했다.


무칠은 나이가 어렸지만, 모친에 효도를 다했다. 매번 비교적 깨끗하고 맛있는 양식을 구하면 반드시 모친에게 가져가서 드시게 했다.


13살때, 무칠은 형을 따라 농사일을 시작한다. 농촌에서 가난한 집 아이들이 하는 농사기술을 익힌다. 땔감을 구하거나, 풀을 베거나, 곡식을 거두거나, 면화를 따거나, 소에게 물을 먹이거나, 수레를 끄는 등. 그가 일생동안 할 일이 결정된 것이다.


15살이 되던 해, 무칠은 이모부집으로 가서 일을 한다. 그는 아직 미성년인 아이였지만, 처세는 아주 충성스럽고 돈후했다. 집안의 사람들은 그가 '바보'라고 여긴다. 그래서 그를 웃음거리로 삼곤 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무시하거나 놀리는 것에 전혀 신경쓰지 않고 매일 시간에 맞추어 일을 하고 시간에 맞추어 쉬면서 자신을 단련했다.


이모부인 장씨는 그가 친척이라고 하여 잘 대해주지도 않았다. 반대로 그는 무칠은 성년일꾼처럼 부렸다. 어떤 험한 일이든 모두 그를 찾아서 하도록 시킨다. 그리도 급여는 주지 않았다.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만도 큰 은혜를 베푸는 것인 것처럼. 무칠은 매일 힘들게 일했고, 소나 말처럼 생활했다.


17살 되던 해, 고향사람의 소개로 무칠은 대지주 이씨의 집으로 가서 일을 한다. 이씨는 돈을 많이 번 소송꾼(訟棍)이고 아주 각박한 인간이었다. 무칠이 그의 집에서 일할 때 자주 학대를 받는다.


한번은 섣달 그믐날, 주인이 그에게 춘련(春聯)을 붙이도록 시킨다. 그는 글자를 모르기 때문에, 춘련을 거꾸로 붙였다. 이씨는 그것을 발견한 후 크게 불길한 일이라고 여겨서 그를 주먹과 발로 때리고 욕하며 먹을 것도 주지 않았고, 하룻밤동안 잠도 자지 않고 눈바람이 몰아치는 한겨울에 마당에서 밤새도록 서 있게 만든다.


무칠은 이씨집에서 3년간 일을 하는데 매년의 급여는 십육조(十六吊)였는데, 3년동안 급여를 주지도 않았고, 계산도 해주지 않았다. 한번은 모친이 병들어 돈을 빌려 집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이씨는 그가 우매하여 속이기 쉽다고 생각해서 가짜장부를 만들어, 무칠에게 이미 급여를 다 지급했다고 우긴다. 그리고 가노를 불러서 그를 때려서 머리에 피가 흐른다.


동네사람들은 무칠이 억울하다는 것을 잘 알고는 있었지만 이씨의 세력을 무서워하여 아무도 나서서 말을 하지 못했다.


무칠은 이렇게 당한 후 소묘(小廟)에서 삼일을 꼼짝못하고 누워있었다. 그는 이런 생각을 한다. 이 세상의 얼마나 많은 가난한 집안 아이들이 공부를 하지 못하고 글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무시와 착취를 당하는지.


3일후, 그는 일어났다. 그리고 결심을 하고 일을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피땀으로 번 돈을 모아서 의학(義學)을 세워 가난한 아이들이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결심한다.


그 후에 그는 구걸생활을 시작한다. 무칠은 이씨집을 떠난 후 집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고정된 직업을 가지지도 않고, 이곳 저곳으로 유랑하면서 기회가 되면 짧은 기간동안 일을 해주곤 했다.


아침 일찍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서, 무칠은 남의 집을 청소한다. 어떤 때는 돼지우리를 청소하고, 돼지똥을 공터에서 말린 후 다시 모아서 밭에 뿌린다. 풀을 깍는 것도 원래 위험한 일이고, 조금만 잘못하면 손가락을 베일 수 있다. 무칠은 풀을 깎으면서도 세심하게 일하고 서두르거나 당황하지 않고 태연자약해서 한번도 상처를 입은 적이 없다.


땅을 가는 일은 아주 힘든 일이고, 원래는 가축이 써서 끈다. 무칠은 이런 일도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일했다: "돈만 주면, 땅알 갈아주겠다. 학교만 세울 수 있다면 힘들 것도 없다. 나귀가 되고 소가 되더라도 학교만 세울 수 있다면 걱정할 것이 없다."


매번 일이 없을 때면 무칠은 구걸을 했다. 언제든 입으로는 뭐라고 중얼거리는데, 노래같기도 하고 아닌 것같기도 했다. 항상 학교를 세우는 것에서 벗어나질 않았다.


무칠은 구걸해서 받아온 음식을 먹지 않고, 풀뿌리를 캐서 먹었다. 누군가 그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하느냐고. 그랬더니 무칠은 이렇게 답한다: "풀뿌리를 먹는 것은 내가 배부르면 다른 사람에게 구걸하지 않을 것이다. 음식을 남겨서 학교를 만드는데 쓸 것이다."


무칠이 구걸할 때, 어떤 사람은 그에게 물을 준다. 그 뜻은 그에게 마시라는 것이다. 그는 먼저 물로 얼굴을 씻은 후에 다시 마셨다. 그러면 그 사람이 묻는다: "더러워진 물을 왜 마시는가?"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더러운 물을 마시는게 더러운게 아니다. 학교를 만들지 못하는게 더러운 일이다."


23살이 되던 해, 무칠은 머리의 변발을 잘라버리고, 머리를 체두사부에게 판다. 머리깍은 돈을 제하고 경전 1조를 벌었다. 이것은 그가 학교를 만드는 첫번째 기금이 된다. 누군가 물었다: "왜 이렇게 머리를 이상하게 했는가?" 그는 말한다: "이쪽은 깍고 저쪽은 남겨두더라도 학교를 세울 수 있다면 걱정이 없다."


무칠은 물을 길어다 주기도 했다. 매번 길어다주면 2제전(制錢)을 벌었다. 한번은 물을 길어서 정원에 뿌리는데 하루종일 일을 해서 이백문제전을 번다. 무칠은 스스로 생각한다: "1전만 더 번다면 학교를 만드는 걸 하루 당길 수 있을텐데..."


무칠은 호의로 그에게 베풍어주는 사람을 만나면 이렇게 노래하며 칭송했다: "나는 구걸하고, 당신은 선을 행한다. 학교를 만들테니 꼭 보십시오."


31살때, 그의 모친이 사망한다. 그는 두 형과 분가하며 3무(畝)의 땅을 받는다. 이것을 팔아서 120조전을 받는다. 여기에 여러해동안 구걸해서 모은 90조전을 합쳐서 모두 210조전이 된다. 그는 믿을 만한사람에게 맡겨서 이자를 불리려 한다. 그렇게 해서 학교를 만드는데 더 많은 자금을 모으려 한 것이다.


무칠은 오래 전부터 유림진의 진사 양수방을 존경했다. 그는 공정하고 의로운 신사였고, 남을 도와주기 좋아했다. 그는 특별히 양씨집으로 가서 하루밤낮을 꿇어 앉아 부탁드렸고, 양진사도 감동한다. 돈이 이자를 만들게 되니 학교를 세우는데 한걸음 더 다가간 것이다. 이 일은 무칠로 하여금 돈을 더 모아야겠다는 열정을 부추겼다.


이어서, 그는 다시 각지를 다니며 구걸하고, 돈을 버는 방법도 더욱 많이 찾아낸다. 그는 길거리를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이 더욱 많아지고, 어떤 때는 중매를 서주고 혼사가 이루어지면 약간의 희전(喜錢)도 받았다. 그는 여자들의 바느질도 했다. 버려진 베나 옷감을 가지고 밧줄을 마들거나, 실로 만들어 팔곤 했다.


무칠이 50세 되던 해, 양수방과 당읍 유림진이 숭현의숙(崇賢義塾)을 설립한다. 20세때 구걸을 시작하여 50세가 될 때까지 꼬박 30년을 들여서 첫번째 의학을 설립한 것이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힘든 일을 겪었는지는 그 자신만 알 것이다.


의학에 교사(校舍)는 충분했지만, 그는 방한칸도 점용하지 않았고, 평소에는 그냥 복도에서 잤다.


하루는 오전에 학생들이 모두 모였는데, 선생이 수업하러 나오지 않은 것을 본다. 그는 조용히 선생의 침실로 들어가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침대 앞에 꿇어앉아 눈물을 흘린다. 스승은 깨어난 후에 너무나 부끄러워했고, 그 이후로 다시는 수업에 태만하지 않았다.


만일 어떤 학생이 수업에 빠지면, 그가 그 학생의 앞에 꿇어 앉아 눈물을 흘리면서 권한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집에 돌아가서 부형을 만날 면목이 없지 않겠는가. 공부에 마음을 두지 않으면 집에 돌아가서 모친을 뵐 면목이 없지 않겠는가."


1890년에는 그가 두번재 의학을 연다. 이 해에는 그가 이미 53세였다. 어떤 사람은 그에게 처도 들이고 아들도 낳고 말년을 편안하게 지내라고 권한다. 그리고 불효에 세 가지가 있지만 후손을 두지 않는 것이 가장 크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구걸할 때 이렇게 노래한다: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 오십삼세불취처(五十三歲不娶妻), 친척붕우단개정(親戚朋友斷個淨), 임사낙거의학증(臨死落個義學症)"


서서히 그의 명성은 퍼져갔고,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그를 무선인(武善人)이라고 불렀다.


그의 선행은 산동순무의 주목을 받는다. 산동순무는 그의 의복이 남루하기 그지없는 것과 솔직하고 순박한 태도를 보고 크게 감동받는다. 그는 무칠이 학교를 세운 일을 써서 광서제에게 보고한다. 이때부터 그이 사적은 산동성 전체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청나라정부는 그에게 "낙선호시(樂善好施)" 패방(牌坊)을 세우도록 하고 이름을 "훈(訓)"으로 내린다. 이때부터 그는 이름을 가지게 된다. 무훈.


그는 거지의 신분으로 중국정사에 기록된 유일한 인물이 된다.


1896년 4월, 그는 병으로 쓰러진다. 조용히 어사항의숙의 처마 밑에서 밥도 먹지 않고, 약도 먹지 않고, 매일 맑은 물만 몇 모금 마신다. 그러나 그는 학생들이 책읽는 소리를 들으면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청사고>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무훈)이 병으로 누워있으면서, 학생들이 글읽는 소리가 들리면, 그래도 눈을 떠서 웃었다."


1866년 4월 23일, 무훈은 눈을 감는다. 그의 나이 58세때였다.


장례식 당일에 당읍, 관도, 임청 3개현의 관리신사들이 모두 참가하고, 각현의 주민들도 자발적으로 참가하여 만명이상이 모여 인산인해를 이룬다.


선생과 학생들의 통곡소리가 하늘을 울리고, 주민들의 눈물이 비오듯 흘렀다.


무훈이 구걸을 통해 학교를 세운 일은 1911년 신해혁명후 국민학교 교과서에 기록된다.


강소성 남통현의 사범학교는 민국초기에 무훈의 동상을 공자의 동상과 나란히 에당에 무시고, 봄 가을로 제사지냈다.


많은 근대의 명인들도 그를 위하여 글을 남긴다.



채원배


우우임


이종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