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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만청삼대협(晩淸三大俠): 곽원갑, 두심오, 여자검

by 중은우시 2017. 10. 25.

글: 문사원지(文史園地)


중국인은 역사상 대체로 모두 "협객" 감정이 있다. 무엇이 협객인가? 아마도 천명이 있으면 천명 모두 협객을 서로 다르게 정의할 것이다. 태사공 사마천이 협객을 별도의 전으로 넣은 때로부터 시작한다. <사기.자객열전>에는 형가, 전제가 비로 협간의담의 대표자이다. 근대중국에서 특히 청말민초의 시대에 협객들은 일찌기 난세의 역사에 깊은 인상을 낰긴다.


진문대협(津門大俠) 곽원갑(霍元甲)


1869년 1월 19일 곽원갑이 "노동향(老東鄕)" 하북 정해현 소남하촌(지금의 천진시 서청구 정무진)의 "권법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친지 7대에 이르는" 곽가에서 태어난다. 그의 부친은 곽은제(霍恩第)로 미종권(迷踪拳)의 제6대전인이다. 그 난세에, 곽은제는 항상 동북을 출입하는 객상의 표사(鏢師)를 맡아서 명망이 아주 높았다.


곽은제는 10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곽원갑은 넷째였다. 여기서 언급할 것은 곽원갑이 이 10명의 형제 중에서 체질이 가장 약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술을 익힐 재질이 아니라고 보았다. 곽은제는 곽은갑이 곽가무술세가의 명성에 누가 될까 두려워, 그가 무술을 배우지 못하게 한다. 다만 곽원갑은 그에도 불구하고, 무학을 너무 좋아해서 몰래 배운다. 자기 집안의 무술인 미종권을 몰래 숨어서 배운 것이다. 나중에 곽원갑은 천진의 무술계에서 이름을 날리고 "진문무협"이 된다. 이는 하나의 꿈과 희망을 주는 이야기이다.


나중에 곽원갑은 상해로 사서, 중화무술에 도전한 영국 대력사와 공개대결을 펼쳐서 상해탄에 명성을 날리기도 한다. 그후에 중국인의 체력을 강건하게 하기 위하여 곽원갑은 상해에 정무체조학교를 창건한다. 이때부터 곽가의 미종권은 사회에 대규모로 전파되기 시작한다. 모조리 사회에 공개해버린 것이다. 1910년 9월 14일 곽원갑은 각혈병이 발작하여 상해에서 병사한다.


관동대협(關東大俠) 두심오(杜心五)


1869년 두심오는 호남 서부의 자리현(慈利縣)에서 태어난다. 이때의 상서(호남서부)는 비적이 출몰하여 약탈을 일삼았다. 산간주민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검술과 권술을 익힌다. 그러므로, 무술을 익히는 기풍이 성행했다. 두심오는 더더욱 이런 무술을 익히는 환경 속에서 성장한다. 그리고 명성을 사방에 떨치는 대무술가가 된다.


두심오는 출도한 후 사천과 운남, 그리고 광동, 광서를 다니는 표국의 표사로 일한다. 그는 강호를 다니면서 여러 명사들과 표객을 만난다. 그러나 모두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나중에 두심오는 표국업을 북방까지 확장한다. 그리고 북방의 대협 대도왕오(大刀王五)를 알게 된다. 무술정변후, 왕오가 피살되고, 두심오는 친구를 위해 복수하기 위하여 두번 이화원으로 잠입하여 서태후를 암살하려 한다. 하마터면 서태후의 목숨이 위험할 뻔했다.


나중에 두심오는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의 스모 최고수를 이겨 한때 일본에서 명성을 떨친다. 당시 손중산은 두심오의 무예를 아껴, 두 사람은 생사지교가 된다. 두심오는 나중에 동맹회에 가입하여 손중산과 송교인의 보디가드를 맡는다. 1913년 송교인이 암살되자, 두심오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강호에 은거한다. 그리고 청방, 홍방 양방의 "쌍용두(雙龍頭)"가 된다. 1953년 7월 8일, 84세의 두심오는 타좌하면서 편안하게 세상을 떠난다.


장강대협(長江大俠) 여자검(呂紫劍)


여자검은 1893년 음력 십월 십오일 호북 의창의 명성이 자자한 무술세가에서 태어난다. 나중에 강영(江英)을 스승으로 모신다. 나이가 조금 들어서는 호북국의학당에서 공부한다. 여자검은 무학과 의학을 모두 잘했다. 무예도 고강하고 의술에도 정통했다. 그래서 아주 오래 산다. 2009년 세계최고령자가 된다.2012년 10월 21일 여자검 선생이 사망하니 향년 119세이다.


여자검의 인생경력은 비교적 풍부하다. 항전시기, 그는 일찌기 남경대학살을 목격하고, 마지막에 의원으로 변장하여 위기를 넘긴다. 그후에 절대 일본인은 제자로 받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그외에 여자검은 일본무사와의 비무때 친히 3명의 일본무사를 죽인 적이 있다. 여러번 일본세력에 항거하고, 나중에 여자검은 여러번 일본인의 암살시도를 당한다. 그의 처도 일본인의 손에 죽는다.


건국후, 여자검은 전후로 <중국무술내가권법>, <팔괘양생법>등 저작을 내놓는다. 동시에 그는 "팔괘혼원양생공"을 창안한다. 그는 중국무술의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