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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청말삼도(淸末三屠): 관도(官屠), 민도(民屠), 전도(錢屠)

by 중은우시 2018. 7. 13.

글: 역사상적나점사아(歷史上的那點事兒)


청나라말기에 3명의 권세가 컸던 봉강대리(封疆大吏, 지방장관)가 있는데, "청말삼도"라 불리웠다. 그들은 각각 양광총독(兩廣總督) 잠춘훤(岑春煊), 산동순무(山東巡撫) 원세개(袁世凱), 호광총독(湖廣總督) 장지동(張之洞)이다.


관도 잠춘훤


잠춘훤의 성공은 팔국연합군의 중국침략부터 시작한다.


그해에 팔국연합군이 북경으로 쳐들어왔고, 서태후와 광서제는 황급히 북경을 도망쳐 나갔다. 당시 감숙포정사(甘肅布政司)로 있던 잠춘훤은 그 소식을 듣고 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밤을 새워 황제와 태후를 보호하기 위하여 달려간다. 그리고 서태후와 광서제의 서도로(西逃路)의 전로양대독판(前路糧臺督辦)을 맡는다. 이로부터 잠춘훤은 서태후의 신임을 받고 섬서순무와 산서순무로 발탁된다.


<신축조약>의 체결로 팔국연합군의 중국침략건은 점점 평정된다. 잠춘훤은 광동순무로 간다. 잠춘훤은 원래 북경으로 가서 서태후를 배알한 후, 남하하여 부임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때 사천에서 가로회(哥老會) 폭동이 일어난다. 청나라조정은 즉시 삼춘훤을 서리(署理) 사천총독으로 임명하여, 급히 사천 성도로 가서 폭동을 진압하도록 명한다. 잠춘훤은 부임한 후, 현지의 탐관오리들이 가로회의 폭동을 일으킨 주요 원인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과감하게 탐관오리를 처리하여 폭동을 평정한다.


잠춘훤의 능력은 청나라조정에서 확실히 인정했다. 이어서, 잠춘훤은 다시 명을 받아 서리양광총독이 된다. 양광총독으로 있으면서, 잠춘훤은 다시 탐관오리들을 치죄하는데 그 수량이 100여명에 이르렀다. 한때 국경을 넘어 마카오에까지 쫓아가서 체포한다. '관도'라는 별명을 어느새 얻게 되었다.


기실, 잠춘훤은 수하의 불법관리를 과감하게 치죄했을 뿐아니라, 심지어 여러번 직급이 높은 관리들도 탄핵한다. 일찌기 1898년, 잠춘훤이 광동포정사를 맡고 있을 때, 계속하여 상사이자 양광총독인 담종린(譚鍾麟)을 탄핵한다. 나중에 감숙포정사로 가 있을 때에도 탄핵을 멈추지 않았다. 담종린이 양광총독의 지위에서 면직될 때까지 계속했다. 이를 잠춘훤은 <낙재만필>에서 자랑스럽게 썼다. "이 사건은 번사(藩司)가 독신(督臣)을 탄핵하여 파면시킨 것으로 청나라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경우이다."


1907년, 잠춘훤은 우전부상서로 임명된다. 그때 다시 당시의 실권자인 원세개에게 칼을 들이민다. 원세개의 두 심복을 탄핵해서 직위에서 쫓아낸 것이다: 우전부시랑 주보규(朱寶奎)와 천진북단순경총판 단지귀(段芝貴)


민도 원세개


1900년을 전후하여, "부청멸양(扶淸滅洋)"의 기치를 내건 의화단운동이 산동에서 폭발한다. 그후 직예지구까지 석권한다. 결국은 청나라조정과 서방열강을 불안에 떨게 만든 사건이 된다.


1899년, 원세개는 명을 받아 서리산동순무가 된다. 이는 원세개가 처음 맡은 봉강대리였다. 이전에 산동순무 육현(毓賢)은 의화단에 대하여 초무(剿撫, 토벌과 회유)를 겸시(兼施)하고, 그중 무(撫, 회유)를 위주로 해서 비교적 의화단에 친화적이었다. 서방열강의 항의하에, 청나라조정은 육현의 직위를 면직하고, 원세개로 대체한 것이다.


원세개는 산동에 부임한 후, 의화단에 대하여 강경한 태도를 보인다. 1900년 5월부터 원세개는 의화단에 도륙의 칼을 들이민다. 바로 원세개의 살륙하에, 의화단은 산동에서 발디딜 곳이 없게 되고, 어쩔 수 없이 하북, 천진, 북경등지로 도망친다. 원세개는 이로 인하여, '민도'라는 별명을 얻는다.


결국, 원세개는 겨우 반년의 시간을 들여, 산동을 혼란에 몰아넣은 의화단의 난을 평정한다. 1901년 11월, 이홍장이 병사한 후, 원세개는 서리직예총독 겸 북양대신이 된다. 이리하여 청말 정계의 새로운 스타로 떠오른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원세개의 홍정자(紅頂子, 관모에 붙이는 것으로 관직의 상징)에는 의화단의 선혈이 가득 묻어 있다.


전도 장지동


1889년, 장지동은 서리호광총독이 된다.


"사십을 불혹이라 하고, 오십을 지천명이라 한다" 이때의 장지동은 이미 52세였고, 노령의 단계에 들어섰다. 다만 그는 호광총독의 자리에서 편안하게 노년을 보낼 수는 없었다. 그는 큰 일을 하나 벌인다: 양무운동을 주재한다.


그는 학교를 설립하는데, 자강학당(오늘의 무한대학의 전신), 광무학당, 무비학당, 농무학당(오늘의 화중농업대학의 전신), 공예학당(무한과기대학의 전신), 사범학당, 양호총사범학당, 여자사범학당등의 신식학교를 설립한다.


그는 기업을 설립하는데, 당시 아시아에서 규모가 가장 컸던 한양철창을 만들고, 호북직포국, 호북창포창, 대야철광, 한양철창기기창, 강궤창, 호북직포국, 제사국, 방사국, 제마국, 제혁창등 근대공업기업을 설립하여, 내륙 무한을 당시 중국최대의 중공업기지로 만들었다.


그는 교통을 건설하여, 오랫동안 끌어왔던 노한철로(盧漢鐵路, 나중에 경한철로(京漢鐵路)로 이름이 바뀜)의 건설에 착공하여, 호북이 수로와 역도에만 의지하여 교통망이 이루어졌던 국면을 타파한다. 구성통구(九省通衢)의 무한은 이때부터 철도시대로 들어간다.


그는 우수한 학생들을 일본에 유학보내고, 그들을 잘 보살핀다. 그때는 아직 외국유학에 대하여 그다지 높게 보지 않을 때였다. 장지동은 스스로 모범을 보여 자신의 몇 아들을 모조리 일본에 유학보낸다.


양무운동을 하는 것은 돈이 많이 드는 일이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장지동이 매일 하는 것은 돈쓰는 일이다. 돈을 물쓰듯이 써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전도"라는 별명을 얻는다.


"전도"에 대하여는 또 다른 의견도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장지동, 원세개등은 1905년 청나라조정에 과거제를 폐지하고, 학당을 널리 추진하자자고 주청올리는데, 이것을 청나라조정에서 받아들인다. 이는 과거시험을 통하여 권력과 부를 얻고자 했던 많은 응시생들의 길을 막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전도'라고 불리웠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