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언비(燕飛)
최근 몇년동안 극단적인 민족주의가 갈수록 범람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곽숭도의 비극을 알아보는 것은 아주 필요할 것이다.
곽숭도는 중국 최초의 "주외대사(駐外大使)"이다. 그는 아주 특수한 상황하에서 이 직무를 맡았다.
동치13년(1874년) 6월, 영국은 조사단을 조직하여, 버마를 거쳐 육로로 운남에 들어가서 통상을 위한 준비작업을 하고자 했다. 조사단의 언어교류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영국주중대사 토마스 프란시스 웨이드(Wade, 威妥瑪)는 청나라 총리아문의 허가를 받아, 번역관 마가리(A. R. Margary, 馬嘉理)를 중국-버마 경계선으로 보내어 맞이하게 한다.
그런데 마가리가 운남 등월(騰越)에서 피살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것이 중국근대사상 유명한 "마가리사건"인데, 일명 "운남사건" 혹은 "전안(滇전案)"이라 불린다.
마가리사건은 의문투성이이다. 지금까지도 수수께끼이다. 어떤 사람은 등월의 지방관이 애국심에 침략에 항거하고자 마가리를 때려죽였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운남 소수민족의 지방무장세력이 때려죽였다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산 속의 야인이 때려 죽였다고 말한다.
어쨌든, 영국 외교관이 원인도 모르게 중국운남 경내에서 피살되었다. 영국정부로서는 청나라정부에 해명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청나라정부는 일시에 어쩔 줄을 모르고 당황한다. 그 와중에 <연대(煙臺)조약>을 체결하여 의창, 무호, 온주, 북해의 4곳을 통상항구로 추가로 개방하고, 영국의 "무휼(撫恤)", "배상", "징흉(懲凶)"의 요구를 받아들인다. 심지어 부득이 '천조의 위엄'을 내려놓고, 영국의 요구에 따라, 흠차대신(欽差大臣)을 영국에 보내어 '사죄'하고, 주영공사(駐英公使)를 맡기로 약속하낟.
즉, 중국 최초의 주외국대사는 국가를 대표하여 영국에 사죄하러 가는 것이다. 이는 확실히 좋지 않은 업무이다. 아무도 이 대사 직을 맡으려 하지 않았다. 관리들은 서로 미룼다.
청나라조정은 고르고 고르다가 결국 마지막에 곽숭도로 결정한다.
곽숭도로 결정된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그는 순수한 유학자이다. 곽숭도는 유학세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유가경전을 읽었고, 나중에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관료의 길로 들어선다. 그는 일생동안 유가이념을 신봉했고, 관료로서 청렴했으며 스스로에게 엄격했다. 그리고 저술도 아주 많았다. 전통적인 평가기준으로 보자면, 곽숭도는 도덕이나 문장에서 모두 모범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둘째, 곽숭도는 양무파(洋務派)의 중요구성원이다. 그저 성현의 서적만 읽은 유생과는 달리, 그는 전혀 보수적이지 않았다. 그는 양무에 정통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일찌기 1856년 봄에 그는 증국번을 수행하여 군무를 도울 때 상해로 간 적이 있다. 서방의 기물과 제도를 약간 알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서학에 마음이 기운다. 점점 국가사무 특히 '양무'와 관련하여 탁월한 견해를 갖게 되고, 양무파의 중요 일원이 된다.
도덕이 고상하고, 양무에 정통한 사람을 영국에 사신으로 보내면 청나라정부로서는 비교적 안심된다. 이런 면에서 곽숭도는 둘도 없는 적절한 후보자이다.
다만 중국에서 곽숭도를 영국에 사신으로 파견한다는 소식이 나가자, 즉시 큰 파란을 불러온다. 천백년이래로 중국이는 화이지변(華夷之辨)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화하민족은 가장 선진적이고 가장 우수한 민족이다. 다른 민족은 모두 오랑캐이다. 중국과 평등하게 마주할 자격이 없다. 역대이래로 이런 외국에서는 '사신'을 중국에 파견하여 조공을 바치는 일은 있어도, 중국이 자존심을 굽히고 외국에 사신을 보내어 주재하게 하는 일은 없었다.
곽숭도가 영국에 사신으로 나간다는 소식이 들리자, 청나라의 백성들은 가슴을 치며 통탄했다. 이는 국가체면을 상하게 하는 일이며 엄청난 치욕이라고 여긴 것이다. 곽숭도는 분명히 위기의 순간에 명을 받아 나선 것인데, 사람들은 그를 매국노라 욕한다. 보통백성도 그러했고, 사회엘리트들도 그러했다. 왕개운(王闓運)은 당시의 명사인데, 심지어 곽숭도에 대하여 이렇게 질책한다: "미능사인(未能事人) 언능사귀(焉能事鬼), 하필거부모지방(何必去父母之邦)"(사람도 제대로 모시지 못하면서 어찌 귀신을 모실 수 있겠는가. 하필 고향을 떠나 외국으로 가려 하는가?")
곽숭도의 고향인 호남의 반응은 더욱 격렬했다. 곽씨의 이번 일은 호남인의 체면을 땅바닥에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리하여 그의 성적(省籍)을 박탈하도록 요구한다. 향시에 참가한 선비들은 집회를 벌여 소란을 피우며 여러번 곽숭도의 고향집을 쳐들어갔다. 곽숭도의 집을 부숴버리겠다고 소리치면서, 곽숭도의 일가족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여론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곽숭도는 당시 나이 이미 58세였다. 밖에서는 영국인들이 위협하고, 안에서는 중국인들이 욕을 한다. 이런 거대한 압력하에, 곽숭도는 몸과 마음이 지쳐서 병석에 눕는다. 그는 원래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자 했으나, 결국 명을 받들어 노구를 이끌고 칠만리를 가기로 결정한다. 사죄의 여로를 나선 것이다.
원인은 당시 조정이 특별히 곽숭도에게 명을 내려서 그가 연도(沿途)고 들은 것을 기록하여 총서(總署)에 제출하도록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무릇 교섭에 관련되거나 각국의 풍토인정에 관련된 것은 당해 사신이 모두 상세히 기록하여, 보고하라. 몸과 마음을 다하여 국가에 유익하게 하라."
곽숭도는 이에 적극 찬동했다. 그가 일찌기 증국번을 따라서 양무를 배운 이래로, 서방의 선진과 문명, 중국의 우매와 낙후에 대하여 그는 크게 자극을 받는다. 그는 일찌감치 서방의 부강지도를 중국인에게 소개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동포들이 하루빨리 '천조상국'의 꿈에서 깨어나기를 바랐다.
그래서, 곽숭도는 영국에 사신으로 가는 일에 열정을 불사른다. 그는 청나라정부의 규정에 따라, 출국시부터 매일 일기를 쓴다.
런던에 도착한 후, 곽숭도는 일기를 정리하고 윤색하여 <사서기정(使西紀程)>이라고 명명한다. 한부를 베껴서 총리아문으로 보낸다. 나중에 그는 다시 <파리런던일기>를 쓴다.
곽숭도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진다. 그의 일기가 나중에 큰 화를 불러온 것이다.
그럼 한번 살펴보자. 그는 일기 속에서 도대체 뭐라고 적었을까?
그는 보고 들은 것을 기술했을 뿐아니라, 이들 견문에 대한 자신의 평가도 언급했다. 일기에서 그는 핵심관점을 하나 제기한다. 바로 이 핵심관점이 골치거리를 불러온 것이다.
곽숭도는 서방이 진정으로 유가의 "추행인정(推行仁政), 천하위공(天下爲公)"의 이상을 실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서방을 인의지방(仁義之邦)이라고 보았다. 소위 인의지방은 국가의 내정은 인정이고, 국가가 백성들에게 잘 대해주는 것이다. 서방이 이런 이상을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은 헌정민주제도에 의존해서이고, 이것이 바로 서방이 강대해진 근본 원인이라고 보았다.
곽숭도의 이런 결론은 절대로 아무렇게나 말한 것이 아니라, 그가 런던과 파리에서 서방사회를 현지고찰한 후, 진지하게 내린 결론이다. 예를 들어 그는 일찌기 영국의 의회를 참관한다. 그는 영국의 의원들이 중국의 유가에서 말하는 군자와 같다고 여긴다. 그들은 의회에서 국가대사를 논의하는데 모두 '공심(公心)을 가지고 일했고, 백성을 위했다.
곽숭도는 영국법원에서 사건을 심리하는 것을 방청하기도 했다. 일반백성도 정부관리를 고발할 수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백성이 이겼다. 이는 곽숭도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그리고 느낀 바가 많았다. 중국에서라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기때문이다.
이런 여러가지를 곽숭도는 분석한 후, 서방이야말로 진정 추행인정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서방이 강대해진 진정한 원인을 일기에 기록했다:
"서양은 입국(立國)에 본말(本末)이 있다. 본(本)은 조정의 정치교육이고, 말(末)은 상업이다. 배를 만들고 기계를 만드는 것이 서로 보완하여 날로 강해지는데 이는 말 중이 한 부분에 불과하다."
간단히 말해서, 곽숭도는 우량한 정치제도가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것이야말로 근본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견해를 붓으로 써서 <조진해방사의(條陳海防事宜)>를 조정에 올린다. 여기에서 서방의 강성을 단순히 강한 배와 날카로운 대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중국이 만일 단순히 서방의 병학의 '말기(末技)'만 배우고, '이렇게 하여 스스로 강해지고자 한다면 아마도 스스로를 가리는 것일 뿐이다" 오로지 서방의 헌정민주를 배우는 것이 기본이라고 하였다.
동시에 그는 문명의 측면에서 분석한다. 세계각국의 진화정도를 3단계로 나누었다: 문명, 반문명 그리고 야만. 서방은 이미 문명사회에 들어섰다. 그러나 중국은 현제 반문명의 제2단계에 머물러 있다. 이미 세계에서 뒤쳐졌다. 중국이 맹목적으로 대제국이라고 다른 나라를 무시할 수는 없게 되었다.
이것은 정말 날카로운 통찰력이다.
당시의 중국은 보수파이건 양무파이건 예를 들어 장지동 같은 사람도 기껏해야 "중체서용(中體西用)"을 주장했다. 서방의 기술만 배우면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서방은 기실 아주 야만적이고, 중국은 단지 배의 강함이나 대포의 날카로움에서 그들에 못미칠 뿐이라는 것이다. 도덕이나 문명은 서방보다 훨씬 낫다고 본 것이다.
이와 비교하면 곽숭도의 인식은 이미 동시대인들을 훨씬 넘어섰다.
그래서 곽숭도는 자신의 <사서기정>이 국내 총서에서 간행된 후, 마치 수류탄을 썩은 연못에 터트린 것처럼, 즉시 경사의 사대부들 사이에 큰 파란을 일으킨다. 어떤 사람을 그가 외국을 미화하고, "용이변하(用夷變夏)"하려 한다고 욕한다. 그리고 곽숭도는 이미 약이 없다고 하기도 하고, 서양의 독에 중독되어 구해줄 수가 없는 자라고도 했다.
더더욱 일부 사람들은 곽숭도가 '두 마음으로 영국을 섬기고, 중국이 영국의 신하국이 되게 하려 한다"고 공격한다. 그러면서 삭탈관직하고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심을 교란시켜 그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다고 하였다.
청나라정부는 한편으로 <사서기정>의 전파를 금지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곽숭도에게 귀국하도록 하여, 조사한 후 처벌하려 한다. 나중에, 이홍장, 증기택(曾紀澤)등의 반대로 유야무야되었다.
이로 인하여 곽숭도는 철저히 실망한다. 그는 이미 세계를 향했는데, 그의 국가는 방황하며 나아가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마음은 있으나 힘이 없음을 한탄한다.
더더욱 그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은 그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장사, 선화의 두 현은 '윤선은 성하(省河, 상강)에 가기 부적절하다'는 이유를 들어 육로로 가도록 한다. 고향 장사에 도착했을 때, 그를 기다린 것은 온 성을 뒤덮은 대자보였다. 그가 '양인과 결탁했다'고 욕하는 내용이다. 그가 매국노라는 것이다. 관리이건 보통선비이건 모두 그를 멀리했다.
곽숭도는 세태의 염량을 모두 맛보았다. 일찌기 시에서 이렇게 탄식한 바 있다.
인생도시가련충(人生都是可憐蟲)
고파차타소내공(苦把蹉跎笑乃公)
분주봉영개유술(奔走逢迎皆有術)
대도여초지수풍(大都如草只隨風)
이렇게 욕을 얻어먹으면서 곽숭도는 정치무대를 떠난다.
1891년 7월 18일, 곽숭도는 고독 속에서 병사한다.
곽숭도가 영국,프랑스 두 나라에서 공무를 처리한 짧은 2년간, 그는 천페이지가 넘는 <런던과파리일기>를 썼다. 필자는 이 일기를 읽을 때, 글자와 행간에서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정통유학교육을 받고 가국(家國)정회를 지닌 사대부는 민주, 자유, 번영의 서방세계를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복잡했는지.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선진유가는 위대하고 아름다운 사회이상을 수립했다. 그것은 바로 추행인정, 천하위공이다. 다만 유가 자신도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이천년이래, 이 이상은 중국에서 실현되지 못했다고. 현실은 사람을 절망에 이르게 하는 암흑이라고.
마침내 곽숭도같은 유학자가 중국을 나선 후에 비로소 놀라워하며 발견한다. 유가의 이 위대한 이상이 서방은 민주헌정이라는 제도로 이미 실현하고 있다는 것을.
이것은 정말 많이 탄식하게 만드는 일이다.
더욱 탄식한 것은, 곽숭도에 관한 자료를 읽다가 아주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곽숭도가 파면된 것은 그가 세상을 놀라게 한 사상 이외에, 또 한 가지 중요한 원인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의 부사(副使)로부터의 공격이다. 곽숭도가 영국에 공사로 갈 때 부사는 유석홍(劉錫鴻)이다. 이 사람은 기실 청나라조정이 대신을 통제할 목적으로 곽숭도를 감시하라고 붙인 인물이다. 전제의 권력구조에서 이것은 자주 볼 수 있는 법가의 권모술수이다.
부사로서, 유석홍은 계속하여 청나라정부에 곽숭도에 대한 '보고'를 했다. 예를 들어, 한번은 포대를 참관하는 중에, 날씨가 급변해서 돌연 비가 왔는데, 곁에 있던 한 영국인이 자신의 겉옷을 곽숭도에게 덮어주었다는 것이다. 유석동은 "설사 얼어죽더라도 입어서는 안되었다"고 적었다.
브라질 국왕이 영국을 방문했을 때, 곽숭도는 초청을 받아 브라질 대사관에서 거행된 티파티에 참석한다. 브라질 국왕이 입장할 때, 곽숭도는 사람들을 따라 같이 서 있었다. 이것은 원래 최소한의 예절이다. 그러나 유석홍은 이것이 대국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당당한 천조에서 어찌 소국의 군주에게 경의를 표한단 말인가."
중국공사관의 인원이 영국여왕이 버킹검궁에서 거행한 음악회에 참석했을 때, 곽숭도는 음악프로그램을 뒤적여 보았다. 유석홍은 이를 서양인을 흉내내는 행위로 해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유석공은 공공연히 공사관에서 말했다. "경사에서 모두 매국노라고 지목하는 사람을 나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비밀리에 곽숭도의 죄 10개항목을 밀고한다. 모함에 능한 재능을 마음껏 발휘한다.
내가 가장 탄식한 것은 이것이 아니다. 유석홍은 한편으로 곽숭도를 공개적으로 질책하지만, 사저그로는 그도 서방사회에 대한 견해가 곽숭도와 완전히 같았다는 것이다. 어떤 때는 곽숭도보다 훨씬 '반동'적이었다. 더더욱 '매국노'스러웠다.
예를 들어, 유석홍은 일찌기 국내에서 사이가 가까운 친구에게 보낸 서신에서 서방사회는 '인의의 극단이다"라고 말한다. 우리 중국인들이 잘 모르고 있지만, 서방인들은 실로 인의도덕을 중시한다고 말한 것이다.
한번은, 일본공사가 찾아왔다. 식사할 때 곽숭도, 유석홍과 얘기를 나누는데, 우리 두 나라는 돈이 없고, 국가에서 세금을 거두는데 백성들이 반감이 크다. 납부하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영국이라는 나라는 백성들이 세금을 잘 낸다. 이건 무엇때문인가?
당시 유석홍이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제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영국인들은 세금을 거두는데, 그것은 백성들이 선출한 의회에서 결정한다. 모두 이 공공서비스를 필요로 하므로, 자원해서 내는 것이다. 우리가 세금을 징수하는 것은 어디에 쓰는지 아무도 모른다. 당연히 아무도 내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기실 '대표가 없으면 세금도 없다'는 뜻이다.
곽숭도는 듣고나서 아주 신기해 한다. 그는 나중에 일기에 적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유석홍이 이런 식견을 갖고 있었다고.
유석홍이라는 사람은 기실 전형적으로 잘 알면서 모른 척하는 자이다.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하여, 곽숭도를 공격한다. 그리고 양심에도 없는 말을 한다. 겉으로 다르고 속으로 다르다.
그런데, 양심에 따라 사실을 말한 곽숭도는 중국인들에게 매국노로 몰린다.
백여년이래, 유사한 비극이 계속 나타나고 있다. 진정으로 국가를 위하여 고민하는 사람, 국가에 일편단심으로 충성하는 사람ㅇ,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오히려 매국노로 몰린다.
역사를 강의하는 원등비(袁騰飛)는 그저 어느 역사의 진상을 얘기했다고 하여 사람들이 그의 직장을 찾아가 소란을 피웠다. 경제학자 모우식(茅于軾)은 장사에서 학술강연을 진행하려 했는데, 사람들이 매국노라고 욕하는 바람에 부득이 강연을 취소해야만 했다. 어느 고등학교 선생님은 진실을 얘기했다가, 극단분자가 학교를 찾아가 제명을 요구하고, 학생은 그를 고발하기까지 했다.
인터넷에서 서방문명에 동의하는 사람이나 전통문화에 대하여 반성해야한다고 하는 사람이나 현실에 약간만 서로 다른 의견을 갖고 있는 사람은 고발되거나 조상까지 들춰지게 된다. 어떤 경우는 심지어 인터넷에서 명수배당한다. 그리고 극단분자는 육체까지 소멸시키지 못해서 이를 간다.
이건 도대체 뭐하는 짓인가.
등소평 선생이 말한 바 있다. 중국은 우(右)를 경계해야 한다고. 다만 주로는 좌(左)를 방비해야 한다고. 나는 여기에서 위인의 말을 빌려 한 마디 하겠다: 중국에 만일 문제가 생긴다면, 십중팔구는 극단민족주의와 국수주의때문일 것이다.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 > 역사인물 (청 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완안입동기(完顔立童記): 청나라말기 가장 아름다운 거거(格格) (0) | 2018.08.28 |
---|---|
장덕성(張德成): 한 의화단 두목의 죽음 (0) | 2018.07.28 |
청말삼도(淸末三屠): 관도(官屠), 민도(民屠), 전도(錢屠) (0) | 2018.07.13 |
정여창(丁汝昌): 민족영웅인가? (0) | 2018.07.10 |
풍자재(馮子材): 74명의 프랑스인을 죽인 진남관대첩의 민족영웅 (0) | 2018.06.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