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효교(李曉巧)
명나라때 환관을 황제가 중시한 것은 명나라초기에 만든 국가통치구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환관세력이 문관집단과 서로 견제하게 하기 위하여, 명나라때 환관들은 정치, 군사상 중요한 임무를 맡았을 뿐아니라, 점점 국가의 경제명맥도 장악하게 된다.
전해지는 바로는 명나라의 개국황제 주원장은 환관의 사용에 대하여 국책성의 규정을 둔다. <명사>에 이런 기록이 있다. 명태조는 환관이 "4품을 넘어설 수 없다"고 규정했다. 동시에 "내신(환관)은 정사에 관여할 수 없다. 간여하는 자는 참한다." 실제로 그의 아들 주체는 영락제가 된 후, 그의 '가규국법(家規國法)'을 모두 지키지 않는다.
모두 알고 있다시피, 명나라초기 정화하서양(鄭和下西洋)의 지휘관인 정화는 바로 영락제가 아주 신뢰하고 능력이 출중한 환관이다. 정화가 이끄는 거대한 선단은 정치사신단이면서 또한 군사집단이기도 하다. 이와 동시에 국제해외무역에 종사하는 상단이기도 하다. 이렇게 중요한 임무를 정화에게 맡겼다. 기술적으로 보자면 그의 능력요소가 있겠지만, 정화의 신분 즉 환관이라는 것을 황제는 더욱 중시했을 것이다. 명사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모두 알고 있다. 외정(外廷)의 문관집단과 비교하여, 오랫동안 대내에 머무는 황제가 더더욱 황실의 '가노(家奴)'라고 여기는 환관을 '더욱 믿을 만한 나의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두뇌도 있고, 권모술수를 알고, 글을 읽을 줄 아는 환관은 더더욱 그 시대의 능력자가 된다. 정화도 시세가 만든 영웅이다. 이렇게 볼 수 있다. 명나라초기의 일곱번의 하서양은 정화가 조직해서 시행하지 않더라도, 다른 환관이 이끌 수가 있었다.
"이들 원정은 모두 외교활동과 황제를 위하여 보물을 구하는 환관이 조직했다"(<캠브리지 중국명대사>). 정치요소는 중요하다. 그러나 정화선단이 지닌 경제적 작용도 무시할 수가 없다. 방대한 선단이 매번 바다로 나갈 때마다 가지고 갔던 거액의 재물과 모든 비용은 국가에서 부담했다. 제국이 100% 투자자이다. 이를 보면 황실이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음을 알 수 있다. 정화선단이 가져온 것은 각양각색의 외국제품, 진귀한 보물뿐아니라, 황실귀족계급이 필요로 하는 각종 사치소비품도 있다. 이들 '외래품'은 명제국의 국내시장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온다. 상업의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정화선단은 바다를 따라 거의 지구 절반을 다닌다. 동남아국가에서 인도양, 페르시아만연안까지 가고 아프리카 동부해안국가와도 통상의 대문을 열게 된다. 중국역사상 '해상비단길'의 장엄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화선단의 항해는 당시의 경제무역에 영향을 주었을 뿐아니라, 명나라의 이후 경제무역구조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정화의 환관신분때문에 그의 역사상 명성은 전혀 퇴색되지 않는다.
사료를 보면, 명성조 영락제가 즉위한 이후의 240여년동안 대명제국의 모든 황제는 환관중의 우두머리인 태감에게 아주 큰 정치, 군사, 경제권한을 부여한다. 이 글에서는 단지 명나라 태감들이 대명제국의 경제에 미친 작용과 영향을 알아보자.
통치상의 고려에서, 명나라 건국초기에는 민생을 보살폈다. 그리고 당시 주로 세금을 부담하던 농민의 제한적인 납세부담능력으로 설계에서 조정이 정한 세율이 비교적 낮았다. 명나라때의 국가세금수입은 400년전의 송나라의 국가세수보다 훨씬 낮았다. 그러나 ,대명제국 황실의 소비는 송나라황실보다 적지 않았다. 그리고 정부의 운영비용, 국방지출도 감소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정상적으로 규정한 세금외에 실제로 각급관청은 서로 다른 정도에서 추가적인 세금을 거두게 된다. 이것은 '공개적 비밀'이다. 지방에서부터 중앙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러했다.
명나라 중후기에 이르러, 황궁의 소비와 사치는 통치자의 민간에 대한 수탈을 더욱 가중시킨다. 명나라황제는 신변의 환관을 보내어 각지에서 재물을 거두게 한다. 그리하여 환관세력이 제국의 경제분야에 대거 개입하게 된다.
확실히, 명나라때의 환관집단중에는 능력이 비교적 뛰어나고, 인품이 비교적 훌륭한 좋은 환관도 있다. 이는 <명사>에도 기록이 있다. 예를 들어 위에서 언급한 정화 등이다. 다만 오랫동안 황궁 대내에 있으면서 제국의 최고권력과 아주 가깝고, 생리심리상 변태적인 특수한 집단으로서 환관은 명나라역사상 국가경제에 대한 폐해가 이익보다 컸다.
명나라황실의 '경제대변인'으로서 환관들은 제국의 어떤 경제영역에 개입했을까? 명나라황제는 국가재정의 법정기구를 우회하여, 직접 많은 태감을 전국각지에 보내어 재물을 긁어모았다. 연해와 내지의 관세, 임산품의 징용, 염세, 광세, 직조등등이다. 모두 환관이 통제하는 영역이다. 명나라황궁내의 환관기구에는 "십이감(十二監), 사사(四司), 팔국(八局), 소위 이십사아문이 있었다." 각 '감'을 책임지는 환관을 '태감'이라고 불렀다. 권위와 권세가 아주 컸다. 오랜 시간이 흐르다보니 '태감'은 환관에 대한 존칭이 되어 버린다. 대명제국의 각지에는 많은 '경제태감'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북경 부근의 임산품세수는 명목상 공부(工部)에서 거둔다. 그러나 실제로는 환관이 장악하고, 그들은 목판(木板)과 원목(圓木)을 거두어 황실에 보냈다. 권력이 아주 컸다. 아무도 그들을 건드리지 못한다.
위충현(魏忠賢)은 어려서 집안이 가난했고, 길거리를 유랑한다. 글도 몰랐다. 그러나 활쏘기와 말타기를 배운다. 그리고 도박을 좋아했다. 그는 이진충(李進忠)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지만 나중에 원래의 성(姓)으로 돌아가고, 황제가 이름을 내려주어 '위충현'이 된다. 그는 만력연간에 입궁하여 태감 손지(孫遲)의 밑에서 일한다. 위충현의 일당이 동림당과 대항하면서 사람들은 위충현의 일당을 사당(邪黨)으로 본다. 나중에 위충현의 권력이 하늘을 가릴 정도가 되자, 그는 "구천구백세(九千九百歲)"로 불린다.
15세기 후반기, 명나라환관세력은 거의 군대의 모든 군수품의 생산과 조달을 장악한다. 납공제도하의 대부분 대외무역도 장악한다. 그리고 황실을 대리하여 황실의 비단, 도자기공장을 관리한다. 조정을 위하여 국내의 제품을 구매 운송하고, 제국의 대공사를 거의 책임진다. 예를 들어, 황궁, 황릉과 사묘의 건설등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 시기에 환관들은 국가의 특수한 형태의 관료집단이 된다. 그들의 촉각은 제국의 모든 중요한 경제의 구석구석까지 미쳤다. <명사>권304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큰 도시에는 모두 세감(稅監)이 있고, 양회에는 염감(鹽監)이 있고, 광동에는 주감(珠監)이 있다. 혹은 파견하고 혹은 겸직시킨다.."
황제가 "욕심없는" 십복인 환관들로 하여금 제국의 경제무역에 간여하게 한 원래의도는 그들로 하여금 황실을 위하여 재산을 경영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재물에 대한 욕망이 아주 강했다.
각지에 파견된 '경제태감'의 절대다수는 탐욕스롭고 교활한 자들이다. 그들은 긁어모은 거액이 재물을 황실에 바치고, 상급의 환관에게 뇌물로 제공하는 외애 대부분은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하나하나 큰 돈을 모은다. 모두 '경제태감'은 돈버는 자리라는 것을 안다. 환관을 뽑아서 각지로 보내어 세리를 맡고 감독하게 할 때 환관집단내부에는 일찌감치 가격을 매겨서 그 자리를 팔았다. 그래서, 그들은 일단 부임하기만 하면 수탈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정사에 명나라태감이 재물을 수탈하거나 지방을 교란시킨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이광은 효종때의 태감이다. 경기내의 민전을 마음대로 빼앗고, 소금으로 거만의 이익을 얻는다." "곡대용이라는 자는 유근이 사례감을 장악했을 때 서창제독이었다. 응방초장을 안주에 만들어, 민전을 무수히 빼앗았다." 경제태감들은 하고싶은대로 했다. 심지어 조정대신도 눈아래 두지 않았다. 융경제때 태감 등상은 황제의 신임을 받아, 교만하고 발호했다. "기물을 구매하고 사묘를 수리할 때 마음대로 추가로 징수했고, 공장에 남은 큰 나무도 마음대로 썼다." 국유자산을 그가 하고싶은대로 한 것이다.
경제태감들이 사회재물을 수탈하는 것은 거의 미친 듯한 수준에 이른다. <명사>에는 거둔 돈의 10%만 국고로 들어가고 90%는 환관의 주머니로 들어간다고 적었다. 당연히 탐욕스러운 태감들의 최후는 대부분 좋지 않았다.
유근(劉瑾)은 원래 성이 담(談)이다. 그는 유씨성의 환관에 빌붙어 입궁했기 때문에 성을 유로 고친다. 그는 '팔호(八虎)'의 으뜸이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입황제(立皇帝)"라고 불렀다. 무종은 "좌황제(坐皇帝)"라고 불렀다. 유근이 체포된 후, 그의 집안에서 몰수한 금은이 수백만냥에 이른다. 그리고 위새(僞璽), 옥대(玉帶)같은 금지품목도 있었다. 그는 당시 세계최고부자로 불린다.
16세기초, 명나라의 정덕연간의 대태감 유근은 '전자교황(專恣驕橫)"했고, 권력이 천하를 뒤흔들었다. 유근이 모반죄로 가산몰수당할 때 집안에서 금 1205만 7800냥, 은 2만5958만3800냥을 찾아냈다고 한다. 기타 진귀한 물품도 무수히 많았다. 만일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이 금액은 부정부패사상 유례가 없는 경우이다. 또 다른 각도에서는 당시의 환관세력이 대명제국의 부를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유근의 거액재산은 상당부분 각지의 경제태감들이 바친 것이기 때문이다.
명나라말기, 환관세력의 경제수탈은 더 이상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른다. 만력26년(1598년) 환관 양영(楊榮)이 운남으로 가서 광사(鑛使)가 된다. 양태감은 명목상으로 황제를 위하여 광산을 운영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보석을 수탈하여 주변의 이민족들을 교란시켜, 이민족의 우두머리들이 속속 반란을 일으켰다" 그의 탐욕으로 변방이 불안정해진 것이다. 그와 같이 탐욕스러운 경제태감들이 당시에는 아주 일반적이었다. 문인 심덕부(沈德符)는 나쁜 태감을 주루룩 언급한 바 있는데, 그들은 "천진의 마당, 복건의 고채, 요동의 고회, 서주의 진증, 호광의 진봉, 광동의 이봉, 이경, 통만의 장엽, 호구의 이도....거의 천하에 모두 널려 있다. 이들이 뿌린 독은 모두 양영과 백중지세이다."
결론적으로, 명나라환관이 경제를 장악한 것은 우선 황실의 필요때문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운용하는 '경제태감'들은 골수를 빨아먹으면서 그 안에서 이익을 얻고, 지방을 교란시키고, 천하를 어지럽힌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바로 최하층의 권세가 없는 일반 백성들이다. 환관이 국가경제를 통제한 것은 국가에도 백성에게도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았다. 명나라경제에 어두운 낙인을 남기게 되고, 명나라 사회와 경제는 안정되지 못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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