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만군(程萬軍)
1620년 9월 26일, 태창제(泰昌帝) 주상락(朱常洛)이 돌연 사망한다. 대명의 후임황제문제는 다시 문제가 된다.
이때의 대명왕조에는 황태자(皇太子)가 없었고, 황태손(皇太孫)이 있었다. 그는 바로 주상락의 장남인 주유교(朱由校)이다. 그는 할아버지 만력제(萬歷帝)가 임종하기 전에 태자의 장남으로서, 황태손이 된다. 그러나 만력제가 죽은지 1달이 되자마자 부친도 죽어서, 그의 황태손은 아직 황태자로 바구어 봉해지지도 못했다. 그래서 황위를 계승하려면 절차를 한 단계 더 거쳐야 하게 되었다. 즉, 반드시 두 가지 의식을 행해야 한다. 진태자(晋太子)와 등극(登基). 그래야 명분이 바른 황제가 될 수 있다.
문제의 관건은 이것이 아니다. 절차문제는 예의지국인 중국에서는 처리하는데 어렵지 않다. 어려운 것은 황권의 걸림돌이었다. 바로 잠재적인 황권의 위협이자 수렴청정을 꿈꾸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주유교의 양모인 이선시(李選侍)이다.
태창제 주상락은 죽기 직전에 한 가지 과감한 일을 처리한다. 바로 정귀비를 황태후로 봉한다는 성지를 거둔 것이다. 이 정귀비는 양궁안과 관계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 일은 비교적 잘 처리했다. 다만 동시에 이 단명황제는 또 다른 문제거리를 남긴다. 바로 자기가 가장 총애하던 비빈이자 장남 주유교의 양모인 이선시를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명나라 역사드라마를 본 사람이라면, 이선시가 사람이름인줄 알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선시는 이름이 아니라 비빈의 봉호이다. 비빈중 등급이 비교적 낮다. 재인(才人)을 포함한 모든 비들보다 낮다. 지위는 숙녀(淑女)보다 높을 뿐이다. 숙녀의 아래는 궁녀이다. 다만, 이 직급이 낮은 이선시는 주상락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주상락이 황제가 된 후 그녀를 비로 앉히려 했다. 바로 강비(康妃). 그러나, 이선시가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황후에 봉해지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밀고 당기다가 결국 정식 조서도 받지 못하고 돌연 죽어버린다. 그래서 이선시는 여전히 이선시였고, 비에도 오르지 못한다. 이 태창제 주상락이 가장 총애한 여인은 총애만 받았지, 명분은 아주 낮았다.
태창제의 장남 주유교의 생모는 왕재인이다. 왕재인은 일찍 죽었고, 주상락은 주유교를 이선시에게 주어서 기르게 한다. 그래서 이선시는 주유교의 양모가 된다. 이 양모는 주유교에게 아주 엄했다. 전해지는 바로는 주유교가 이선시를 무척 무서워했다고 한다.
이어서 일어나는 일도 이를 증명해준다. 이선시는 확실히 양모라를 지위를 이용하여, 양자의 즉위문제에 끼어들어 일을 만든다. 주유교는 만력제가 죽기 전에 황태손에 봉해졌다. 그렇다면 이제 부친인 태창제가 죽었는데, 그의 이 황태손은 마땅히 황태자로 올려야 했고, 대통을 계승해야 했다. 다만, 이선시는 주유교를 자기의 곁에 붙잡아 두고 싶었다. 그를 전전(前殿)으로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지가가 황제의 침궁인 건청궁(乾淸宮)으로 옮겨와서 머물면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건 아주 부적합한 행동이다.
황제가 죽고, 명분도 없는 이선시가 황장자를 끼고, 황제의 침궁을 점거하고 있다. 그리하여 동림대신들의 분노를 불러온다. 그들은 죽어라 황실의 정통을 보위하겠다고 결심한다. 그리하여 명말삼대의안의 마지막 사건인 '이궁안'이 바로 이런 불가피한 상황하에서 발생하게 된다.
이번에, 동림의 선봉장 양련(楊漣)은 다시 한번 투쟁의 최전선에 나선다.
이번 전투는 주로 두 단계로 나뉘어진다. 제1단계는 "태자뺏어오기"였다.
앙련과 동림당은 어떻게 태자를 빼앗아 왔는가?
태창제가 붕어하자, 동림당인은 "나라에 하루도 군주가 없을 수 없다.(國不可一日無主)"의 도리를 잘 알았다. 그리하여 그날로 양련은 신하들을 모아서 후궁으로 쳐들어가 소주(少主)를 맞이하여 대통을 계승하겠다고 요구한다.
처음에 신하들은 후궁으로 들어가자는 건의에 약간 망설였다. 어쨌든 교지가 없는 상황하에서 대신이 후궁을 쳐들어가는 것은 죽을 위험을 무릅써야하기 때문이다. 모두 망설이고 있을 대 두 명의 조정 중신이 입을 열어 양련을 지지한다.
그들은 각각 예부상서겸 동각대학사 유일경(劉一燝)과 이부상서 주가모(周嘉謨)이다.
이런 원로대신마저 지지해주자 양련의 언행은 더욱 거침이 없어진다. 다든 몇십명의 신하들도 감염되어 그를 따라 같이 후궁으로 들어간다.
양련이 신하들을 이끌고, 황문에 도착하자, 태감들이 막는다.
양련은 이들 태감에게 소리친다: 노재, 황제가 우리들을 불렀고, 오늘 이미 돌아가셨다. 만일 너희가 듣지 않겠다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
양련등이 이들 태감을 밀어내고, 한꺼번에 들어가서 황실영당으로 간다. 그러나, 이 영당에는 영구와 영위만 있고, 주유교가 지키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추궁한다: 소주는 어디에 계신가?
태감둘은 서로 얼굴만 바라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때, 한 동림당의 '내응(內應)"이 나타난다. 그는 바로 동림당의 이번 조당전투를 승리로 이끈 관건인물이다. 대태감 왕안(王安). 왕안은 동림당과의 관계가 아주 좋았다. 당년 장거정과 풍보의 묵계와 비슷했다. 이는 동림당이 전기에 잘나갔던 중요한 원인이다. 내정에서 그들에 호응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양련등이 후궁으로 쳐들어간 것은 소주를 만나기 위한 것인데, 태감들이 협조해주지 않았다. 이때 왕안이 적절하게 나타난 것이다. 그는 양련에게 이렇게 말한다. 소주 주유교는 이선시가 데리고 있다. 서난각(西暖閣)에 숨어 있다. 양련은 그 말을 듣자 분노를 금치 못한다. 신하들을 이끌고 서난각으로 간다. 그리고는 꿇어 앉아 소주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이선시는 이런 진세에 깜짝 놀란다. 이 여인은 아마도 이런 대단한 광경을 본 적이 없었던 것같다. 이선시가 망설이고 있는 그 순간, 대태감 왕안이 어지러운 틈을 타서 주유교를 병풍 뒤에서 데리고 나온다. 신하들은 진룡천자를 보자, 즉시 무릎을 꿇고 대례를 올린다. 이 장면에 주유교도 깜짝 놀라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
이어서, 태자를 빼악기 위한 격렬한 대항전이 벌어진다.
동림대신들은 가마를 하나 가지고 와서, 주유교를 태우고 전전으로 가서 의식을 거행하고자 한다. 그러나, 가마는 가져왔지만, 가마꾼은 구하질 못했다. 이들 동림대신들은 대부분이 문관이어서 가마를 들 줄 몰랐다. 아무리 급해도 할 수가 없었다. 이때 소주는 이미 그들의 손에 들어왔다. 만일 더 기다렸다가는 무슨 변고가 생길지 모를 일이었다. 이때 동림의 선봉 양련이 다시 한번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 양련은 그 자리에서 결단을 내려 주유교를 가마에 넣어서 앉히고, 그와 몇몇 대신이 직접 가마꾼이 되어 가마를 들고 뛰었다. 신하들도 따라서 뛰었다. 주유교를 태운 가마는 직접 전전으로 달려간다.
이때의 이선시는 마치 꿈에서 막 깬 것같았다. 수하 태감을 불러서 빨리 쫓아가서 소주를 빼앗아오라고 지시한다. 태감들은 금방 이들 대신들을 따라잡는다. 그리고 가마를 붙잡고 못가게 막는다. 이들 태감들은 이렇게 소리친다: "너희는 소주를 데리고 어디를 가느냐. 소주는 나이가 어려서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을 겁낸다."
양련이 크게 소리친다: "전하는 여러 신하의 주인이다. 사해구주가 모두 신하이다. 누구를 겁낸단 말이냐." 이들 태감은 동림당인들이 갈수록 많아지는 것을 보고는 할 수 없이 철수한다.
이렇게 하여 양련등은 주유교를 전전 문화각까지 모셔온다. 그리고 즉시 "정동궁(正東宮)"의 의식을 진행한다. 주유교는 이렇게 하여 황태손에서 황태자로 승격한다. 이제 정식 후계자 자리를 확정한 것이다. 날짜를 정해 다시 황위등극대전을 거행하면 된다.
비록 주유교가 명실상부한 황제후계자가 되었지만, 주유교가 정식으로 황위에 등극하게 하려면, 한 가지 관문이 더 남았다. 무슨 관문인가? 그것은 바로 이선시라는 이 걸림돌을 제거하는 것이다. 태자를 빼앗아 온 후에 동림당인들은 이궁의 두번째 단계를 시작한다. 구리(驅李). 즉 이선시몰아내기.
이번 전투를 얘기하ㅣ 전에, 우리는 먼저 한 가지 수수께끼부터 풀도록 하자: 왜 이선시가 반드시 건천궁에서 나가야 하는가?
왜냐하면 무슨 명분으로 어느 곳에서 거처하느냐는 것은 동림당인들이 보기에 대시대비(大是大非)의 문제이다. 고대의 '삼궁'제도는 봉건왕조의 기본강상법도이다. 이 건청궁은 황제의 침궁이다. 만일 황제가 부르지 않으면 누구도 이 곳에서 오래 머물 수 없다. 그렇다면 이선시는 생전에 총애를 받았으므로, 황제가 살아있을 때는 그녀가 이곳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말이 된다. 다만 황제가 죽었고, 황태자가 즉위하는데, 황태자의 생모도 아니고, 황태자의 적모도 아니고, 이곳에 오래 머무는 것은 심각하게 부적절하다. 이는 강상법도를 파괴하는 짓이다. 그래서 명분과 강상을 중시하는 동림당인들이 보기에, 명분이 바르지 못한 이선시는 반드시 내보내야 했다.
등급에 따라서 어떤 표준의 집에 거처하는지가 결정되던 시대이다. 대명황궁은 등급이 삼엄하다. 오고 싶다고 오고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이선시는 비록 명분에 맞지 않지만, 이미 쌀이 익어 밥이 되었으니 갈 생각이 없었다. 사정이 긴급해졌다. 태자는 곧 등극해야 하는게 만일 그 전에 이선시를 내보내지 않아서,양자가 즉위하고, 양모가 수렴청정이라도 하게 되면 동림대신들에 있어서는 국면을 통제권을 철저히 잃어버리게 된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때 동림당의 또 다른 선봉인물이 용감하게 들고 일어난다. 그는 공성함락의 첨병역할을 확실히 수행한다. 그가 누구인가 바로 대명자자한 좌광두(左光斗)이다.
그는 양련의 바로 다음가는 "동림육군자"의 두번째 인물이다. 사람들은 양련과 함께, "양좌"라고 불렀다.
사람들간에 의론이 분분했다. 어떻게 이선시를 몰아낼 것인가. 이때 그는 대담하게 주유교에게 상소를 올려서 바로 이선시를 향해 공격의 화살을 펴붓는다.
좌광두는 이렇게 말한다: "선시는 적모도 아니고, 생모도 아니다. 그런데도 정국에 거처하고 있고, 전하는 자경궁에 거처하고 있다. 그래서 연회도 못열고 대례도 행하지 못한다. 명분이 거꾸로 되었으니 신은 정말 혼란스럽다. 전하의 춘추가 이미 열여섯이다. 일찌감치 끊어버리지 않으면 길러주었다는 명분을 내세워 독재를 행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무측천의 화가 오늘 다시 재현되는 것이다."
좌광두는 이선시가 옮겨가지 않는 것을 정치적인 고도로 끌어올린다.
동링당인들이 강경하자 이선시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주유교는 그래도 믿는 바가 있었다. 원래 그는 이선시라는 양모를 무서워하고 미워했다. 양련, 좌광두등이 확실히 그를 위하여 생각해주고, 대신들이 뒤를 받쳐주자, 주유교는 이때야말로 무서운 양모에게서 벗어날 기회라고 여긴다. 그래서 주유교는 즉위하기 하루전날 영을 내린다. 이선시에게 건청궁에서 나가라고 한 것이다.
황제후계자가 입을 열게 되니, 이선시로서도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풀이 죽어서 건청궁을 떠난다. 동림당인들의 '구리'는 성공한 것이다. 이궁안은 동림당인의 전승으로 끝난다. 동림당의 후기지수 양련, 좌광두는 이 사건으로 인하여 일거에 이름을 떨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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