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명영종 사후 양궁존호지쟁(兩宮尊號之爭)

중은우시 2018. 6. 8. 23:42

글: 사우춘(史遇春)


천순8년 정월 십칠일(1464년 2월 23일) 명영종(明英宗) 주기진(朱祁鎭)이 붕어하니 향년 38세이다. 이월 을미(이월 십이일)(1464년 3월 19일), 묘호를 영종이라 하고 유릉(裕陵)에 매장한다.


정월 이십삼일(2월 29일), 즉 명영종이 사망한지 일칠(一七, 혹은 頭七, 즉 사망한지 칠일째 되는 날), 조정에서는 양궁에 존호를 올리는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다.


여기서 양궁이라 함은 두 사람을 말한다.


하나는 명영종의 본처이고 명영종이 일생동안 사랑했지만, 자식은 낳지 못한 전씨(錢氏)이다.


전황후는 해주 사람으로 도지휘첨사(후에 안창백에 봉해짐) 전귀(錢貴)의 딸이다. 명영종 정통7년(1442년) 황후가 된다; 정통14년(1449년) 토목보(하북성 장가구시 회래현 경내의 한 성보)의 변에서, 명영종은 오이라트에 포로로 잡힌다. 명영종을 맞이해 오기 위하여, 전황후는 자신이 가진 궁중의 모든 재산을 판다. 그리고 매일 울음으로 보내며 명영종의 안전을 기도한다. 피곤하면 그 자리에서 누워자다가 한쪽 다리를 못쓰게 된다. 하루종일 울다보니 눈 하나도 멀게 된다. 명헌종(明憲宗) 주견심(朱見深) 성화4년(1468년) 육월 이십육일 병사하고, 구월 사일 유릉에 합장된다.


다른 하나는 명영종의 귀비이자 명헌종의 생모인 주씨(周氏)이다. 그녀는 숭간왕 주견택(朱見澤), 중경공주(重慶公主)도 낳았다.


주씨(1430-1504)는 창평 사람으로, 부친 주능(周能)은 나중에 영국공으로 추증된다; 동생 주태(周泰)는 나중에 경운후가 되고, 주욱(周彧)은 장녕백이 된다. 그녀는 나중에 여러번 예법과 명영종의 유언을 어기면서 전황후의 적후(嫡后) 자리를 차지하고자 했다.


명영종이 붕어한 후, 전황후는 자식이 없었다. 비록 그녀는 모의천하의 육궁의 우두머리였지만, 현재는 신황제가 즉위한 후에 그녀는 힘을 잃는다. 후궁과 관료사회의 약삭빠른 자들은 이미 마음이 움직였고, 잔머리를 굴렸다. 권력교체기에 남을 짓밟고 자신이 한단계 더 올라가려 했다. 낙정하석하여 사지로 몰아넣음으로써 새 주인이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게 하고자 했다.


양궁에게 존호를 올리는 의안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환관 하시(夏時)는 아부해서 잘보이고자 하는 마음에 먼저 말을 꺼낸다.

"전황후는 병을 많이 앓으므로, 황제의 생모만 태후로 삼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내각수보(內閣首輔, 재상에 해당함) 이현(李賢)이 말한다:

"오늘은 양궁의 존호를 결정하는 것이다. 마땅히 선황의 유명에 따라야 한다. 경태(景泰) 연간의 사정은 취해서는 안된다!"


소위 경태연간의 사정이라는 것은 명대종(明代宗) 주기옥(朱祁鈺)이 등극한 후, 선제(명선종 주첨기)의 후비에게 존호를 올렸던 사례를 가리킨다. <명사>권일십일.본기제십일 <경태본기>를 보면 알 수 있다.


명영종 정통14년(1449년) 명내종이 즉위한다, 그 후에,

"십이월 경술, 황태후(명선종의 손황후)를 상성황태후(上聖皇太后)로 하다"

"계축 모 현비(賢妃)(명선종의 오현비)를 황태후로 하다"


탈문지변으로 명영종이 다시 황제위를 차지한다. 명대종은 연금된지 1개월후에 병사하니 나이 겨우 30살이었다.

이들 동부이모 형제들간의 권력쟁탈전에서 명영종이 최후의 승리자였다.

승리자는 발언권을 갖는다. 그래서, 명영종의 여러 신하들은 명대종의 예를 따라서는 안된다고 한 것이다.


내각수보 이현이 경태의 옛 사례는 따라서 안된다고 말한 후, 같은 내각대신인 팽시(彭時)가 이어서 말한다;

"이각로의 말씀이 지극히 옳습니다. 만일 조정이 천하인들이 마음 속으로 따르게 하려면, 강상을 바르게 하고 윤리를 밝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선황의 전황후가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을 이유로 하여 그녀에게 존호를 올리지 않는다면, 이런 방법은 존호를 올리는 본질과 의의를 잃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한다면, 윤리에 어긋나게 되니 인심을 잃게 될 것이며, 폐하의 성덕에 누가 될 것입니다."


환관 하시는 내각대신들의 의견이 강경한 것을 보자, 더 이상 자기의 의견을 견지하기 어렵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잘보이는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았다. 즉시 말을 바꾸어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면, 바로 결론을 내릴 수는 없겠습니다. 제가 내전에 들어가 폐하와 후궁에게 물어보고 오겠습니다!"


내전에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아 하시가 나왔다. 인수궁(명영종의 귀비이자, 신황제 명헌종의 생모는 인수궁에 거주하고 있었다)의 의지(懿旨)를 받아왔다는 것이다.

"아들이 황제가 되었는데, 모친은 당연히 태후가 되어야 한다. 아들도 없는데 어떻게 태후라고 칭할 수 있단 말인가.  선덕(宣德) 중의 사례에 따르는 것이 좋겠다."

이 말은 확실히 너무 기고만장하고,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말이다. 확실히 소인이 득세한 후의 말투이다.

아들이 황제가 되면 모친은 당연히 태후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아들이 없이도 태후가 된 것은 이전에 사례가 없지 않다.


인수궁이 말한 선덕중의 사례라 함은 <명사>권일백일십삼. 열전제일 <후비.선종효공황후손씨전>을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귀비였던 손씨와 황후 호씨는 마찬가지로 모두 아들을 낳지 못했다.

손씨는 계책을 써서, 몰래 궁인이 낳은 아들(즉, 나중의 명영종)을 자신의 아들로 삼는다. 그래서 아들이 있어서, 손씨는 명선종의 은총을 많이 받았던 것이다.

이때, 명선종의 황후 호씨가 글을 올려, 자신에게는 아들이 없으니, 황후의 칭호를 없애고, 일찌감치 대명왕조의 국본(즉, 황태자)을 정해달라고 청한다.

선덕3년(1428년) 삼월, 호황후는 폐위되고, 귀비 손씨가 황후로 책봉된다.


이 일을 가지고 이번 존호의 선례로 삼으라고 한 것은 억지스럽다.

수보 이현은 하시가 전해온 의지를 들은 후에 얼굴색이 변한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전에 논의한 전황후에게 존호를 올리는 일은 아마도 이루어지기 힘들 것같았다.

그래서, 수보 ㅇ현은 내각대신 팽시를 보고 말한다:

"의지가 내려왔으니, 당신이 쓰시오!"

팽시는 즉시 붓을 잡지 않고, 계속 말한다:

"오늘의 일은 선덕연간의 일과 같지 않습니다. 호황후는 일찌기 글을 올려 자리를 양보했고, 다른 궁전으로 물러나 있었습니다. 정식으로 황후의 신분을 잃은 것입니다. 그러했기 때문에 정통초기에 호황후에게 존호를 올리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일은 선황의 전황후의 명분이 계속 남아 있습니다. 어찌 그녀에게 존호를 올리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환관 하시는 내각대신 팽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즉시 이어서 말한다:

"그렇다면, 선황의 전황후에게 존호를 사양하는 글을 올리도록 하시지요."

환관 우옥(牛玉)도 말을 받아서 말했다:

"하시의 말이 맞습니다. 하시의 말에 따라 처리하시지요."


팽시는 계속하여 말한다:

"정통,천순초기에는 모두 황제의 생모에게 존호를 올려야 하기 때문에 선황의 황후에게 사양하는 글을 올리도록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누가 감히 그런 조서를 쓸 수가 있겠습니까. 선황의 황후에게 존호를 올리지 말자고. 신하로서 만일 아부하기 위하여 그것을 따른다면, 만고의 죄인이 될 것입니다."


그날 같이 이 일을 논의하던 조정신하들은 황제 생모의 의지가 내려온 것을 보고는 이 일을 바꿀 수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모두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하시는 사람들이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자 화를 내며 말한다:

"여러분들은 모두 마음 속에 편향(선황의 전황후)이 있고 모두 두 마음을 품고 있다. 만일 추궁하게 되면 곤란해질 것이다."


내각대신 팽시는 그 말을 듣고,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모으며 말한다:

"태조, 태종(나중에 성조로 고침)의 신령이 있는데 누가 감히 두 마음을 품겠습니까. 전홯후마마는 후사도 없으니 그녀를 위하여 존호를 다툰다고 하여, 신하들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제가 말을 차마 끝까지 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황상의 성덕을 보존하기 위한 것입니다. 다른 생각은 없습니다. 만일 큰 효도의 마음을 가진다면, 양궁은 마땅히 같이 존호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적절한 방식이 될 것입니다!"


팽시가 양궁에게 모두 존호를 올려야한다고 말하자, 그 자리에 있던 대신들이 모두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게 아주 좋겠습니다"

이때, 하시의 노한 얼굴색도 바뀌고, 살짝 좋아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그래서, 하시가 다시 내전으로 들어가 황제에게 묻는다.


한참이 지난 후 하시는 궁안에서 나왔고, 이렇게 말한다:

"황상께서 재삼 권해서, 인수궁에서도 양궁에 함께 존호를 올리는데 동의하였습니다!"


내각대신 팽시가 붓을 들어 조서를 초안할 준비를 했다. 붓을 움직이기 전에 그는 다시 말한다:

"반드시 상성의 관례에 따라, 존호에 2글자를 추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게 되면, 모두 태후라고 부르게 되니,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환관 하시는 즉시 내각대신 팽시에게 묻는다:

"같이 존호를 올리는데, 어찌 구분해야 한단 말입니까?"

내각대신 팽시가 대답하려 말한다:

"두 글자를 더하는 것은 부르기 좋게 하기 위함입니다. 존비나 서로 다른 문제는 없습니다."

여러 신하들도 모두 말한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리하여, 모두의 논의를 거쳐 전황후에게는 자의황태후(慈懿皇太后), 주귀비에게는 황태후로 칭하기로 한다.


이날, 양궁 존호결정에 참여했던 대신들은 황상과 후궁의 뜻에 어긋날까 겁을 내고 자선의 앞날에 불리한 일이 있을가 겁냈다. 그래서 모두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킨 것이다. 단지 내각수보 이현이 말을 했고, 내각대신 팽시가 나중에 극력 발언했다.

마지막에 원만하게 해결된 것은 주로 황상이 마찬가지의 효로 양궁을 대했고, 완곡하게 인수궁을 설득한 것도 있다. 그녀로 하여금 체면도 지키고 대국을 고려하게 한 것이다. 황제의 인효함은 이것만으로도 알 수가 있다.


며칠이 지난 후, 환간 담길(覃吉)이 내각을 찾아와서 이렇게 말한다:

"두분이 모친에게 같이 존호를 올리는 것이 황상의 본심입니다. 다만, 친생모친의 뜻이 있어 어떤 일은 황상이 실로 말하기 어려웠습니다. 예의를 모르는 사람은 이때 그저 아부하려고 하였는데, 만일 이현, 팽시 두 선생이 이치를 가지고 따져주지 않았더라면, 대사를 그르칠 뻔 했습니다. 대신이 된 사람으로서, 마땅히 이현, 팽시 두 선생과 같이 해야 할 것입니다. 중요한 순간에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사람은 조정의 녹봉을 그냥 축내는 것 외에 또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당시 내각에서 회의에 참석했지만 발언하지않았던 사람들은 환관 담길의 말을 듣고 얼굴에 모두 부끄러운 빛을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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