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악비)

송고종(宋高宗)과 악비(岳飛): 송나라 두 효자의 엇갈린 운명

중은우시 2018. 6. 27. 11:41

글: 천지사화(天地史話)


송나라(960-1279)는 300여년간 존속했다. 국내의 과학기술문화가 번성했지만, 대외적으로 강적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북방에는 요, 금, 몽골과 같은 강력한 적수들이 존재했고, 겉으로 보기에 약소해 보이는 서하(西夏)도 서역으로 이르는 길을 막고 있었다.


백년의 번영끝이 후기에 송휘종은 당현종, 건륭제와 같은 향락황제가 되고, 국내의 농민반란이 계속되며, 대외적으로 금과 연합하여 요를 멸망시키나, 최종적으로 정강지치(靖康之恥)를 겪으며 북송은 멸망한다.


1127년, 송휘종의 아들 조구(趙構, 1107-1187)는 남경응천부(지금의 하남성 상구)에서 즉위한다. 남송의 건립초기, 금나라병사들이 침입하여, 송고종은 응천부에서 양주(揚州)로 도망친다, 진강(鎭江)에서 장강을 건너 항주(杭州)에 도착한다. 1129년 9월,금나라군대가 장강을 넘어 남침한다. 송고종은 먼저 월주(越州, 지금의 절강성 소흥)로 도망쳤다가, 다시 명주(明州, 지금의 절강성 영파)로 도망친다. 명주에서 다시 정해(定海, 지금의 절강성 주산)으로 도망쳐 바다 위를 떠돌다가, 온주(溫州)로 간다. 금나라군대의 공격을 날카로웠고, 연도의 송나라군대는 '항복하는 장수들이 털처럼 많고, 투항하는 병사들은 썰물같았다."


국가가 위난의 지경에 처했을 때, 항금장수들이 나타난다. 그 중에 농민자제로 19세에 군대에 들어가 요나라를 정벌하는 결사대의 대장을 맡은 인물이 있다. 그는 두번이나 금나라군대를 개봉에 가둬놓고 포위공격한다. 북송의 멸망과정에서 성장한 장수인 악비(113-1142)이다.


악비의 모친 요씨(姚氏)는 고대 4대현모 중 하나이다. 민간의 전설에 따르면, 악비는 원수 종택(宗澤)을 따라 금나라에 항거한다. 종택의 병이 깊어지자, 인신(印信)을 악비에게 건네서 대신 관리하게 하고는 피를 토하고 죽는다. 두충(杜充)이 원수직을 이어받은 후, 금나라에 더 이상 항거하지 않고 투항하려 하자, 악비는 우울해져서 집으로 돌아가 모친을 만난다. 악비의 모친은 그에게 군영으로 돌아가서 적과 싸우라고 재촉하며, 악비의 등에 '진충보국(盡忠報國)'의 네 글자를 새겨서 영원히 나라에 보답하려는 뜻을 지니라고 한다.


요부인은 시골출신으로 글을 많이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주관이 뚜렷하고 사람됨이 강직했으며 생각이 트인 모친이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악비를 엄격하게 키눈다. 아들을 여러 고난도 견디게 키웠을 뿐아니라, 강직하고 아부하지 않는 사나이로 키웠다. 1136년 봄, 악비의 모친은 악주(鄂州)에서 병사한다. 악비는 모친을 구강현 주령산 동쪽끝에 묻는다. 후인들이 수리하고 묘비를 세워서, "송악충무왕모요태부인지묘(宋岳忠武王母姚太夫人之墓)"라고 쓴다. 묘의 앞에는 진회부부가 무릎꿇은 석용(石俑)을 세운다.


송효종의 모친 위씨(韋氏, 1080-1159)는 원래 정황후(鄭皇后)의 궁중에서 일하는 보통궁녀였다. 우연한 기회에 송휘종과 잠자리를 한다. 송휘종은 황후만 5명이고, 봉호를 받은 비빈과 여관만 143명에 이르며 봉호를 받지 않은 궁녀는 504명에 이른다. 1107년 위씨는 아홉째아들인 조구를 낳는다. 20년만에 비로소 완용(婉容)으로 승격된다. 1126년, 금나라병사들이 처음 남하했을 때, 강왕 조구는 자원하여 금나라군영에 인질로 잡혀간다. 송휘종은 그때 위완용을 용덕궁현비(龍德宮賢妃)에 봉한다.


1126년 정강지난때 금나라에서는 휘종,흠종 두 황제와 육궁의 후궁비빈, 황족을 모조리 북방으로 압송한다. "붙잡혀간 사람들은 매일 눈물로 지낸다. 오랑캐의 우두머리들은 모두 부녀자들을 끼고 술과 고기를 먹으며, 음악을 듣고, 희락무극(喜樂無極)했다." 건염2년(1128년), 팔월에 상경(지금의 내몽고 파림좌기)에 도착한다. 위현비 이하 300여명은 완의원(浣衣院) 즉 관기원(官妓院)에 들어간다.


조구가 남경에서 황제로 등극한 후, 위현비에 대한 대우는 나아진다. 오국성(五國城, 지금의 흑룡강 의란현)으로 보내어 송휘종과 함께 가둔다. 송고종 조구가 즉위한 후 위현비는 선화황후(宣和皇后)로 모셔진다. 1135년 사월, 송휘종은 오국성에서 병사한다.


남송의 건국초기, 악비(岳飛), 한세충(韓世忠), 유광세(劉光世), 장준(張俊), 유기(劉錡), 오개(吳玠)등이 이미 강대한 군사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강한 악가군은 남송연간에 전무후무한 만기마군(萬騎馬軍)을 성립하여, 금나라 여진의 정예기병과 맞싸웠다.


1140년, 금나라의 주전파 완안종필(完顔宗弼, 金兀術)은 군대를 이끌고 남침한다. 먼저 유기가 이끄는 '팔자군(八字軍)'에 패배하고, 다시 개봉의 서남에 있는 언성(郾城)과 영창(潁昌)에서 두번 악가군에 패배한다. 단지 회서(淮西) 박주(亳州), 숙주(宿州)일대에서 송군중 가장 약한 장준의 군대에 승리를 거두었을 뿐이다. 이에 금나라는 더 이상 군사적인 우세를 보일 수 없어 남송과 화의를 할 생각을 한다.


1141년 이월, 금희종(金熙宗)은 남송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하여, 죽은 송휘종은 천수군왕(天水郡王)에 봉하고, 송흠종을 천수군공(天水郡公)에 봉한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원래 송휘종은 2품 혼덕공(昏德公)이었는데 1품인 왕으로 추봉한 것이고, 송흠종은 원래 3품인 중혼후(重昏侯)였는데, 이제는 2품으로 올라간 것이다. 둘째는 원래 봉호에 있던 모욕하는 뜻을 담은 글자를 빼버린 것이다. 셋째는 조(趙)씨가 원래 천수의 망족이라는데서 존중을 표시했다.


도망황제로 불리던 조구는 집권한 초기 몇년동안은 계속 도망다니며 보냈다. 그는 금나라에 대해 두려움이 있었다. 송나라의 군사력은 전체적으로 금나라보다 약했다. 설사 개봉낙양을 수복한다고 하더라도, 직도황룡부(直道黃龍府)하여 철저히 금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은 비현실적이었다. 보병은 평야에서 싸울 때 기병에 비해 열세이다. 북송이 초기에 연운십육주를 수복하는데 실패했는데, 하물며 흑룡강성까지 빼앗아 올 수는 없는 일이다. 다른 한편으로, 남송은 매년 전쟁을 벙리다보니 군비지출이 많았고, 농민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국내가 불안정하니 더 이상 전쟁을 지탱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송휘종, 송흠종 두 황제를 모셔오는 것은 송고종의 황위에 영향을 준다. 마지막으로 조구의 생모인 위현비가 금나라에 있어서, 그는 화의를 통해 모셔오고 싶었다.


금나라와 송나라의 생각은 이렇게 일치했다.


1141년초, 남송조정은 악비, 한세충, 유기, 양기중(楊沂中)등 대장의 병권을 해제시킨다.

1141년 십일월, 송나라와 금나라는 <소흥화의(紹興和議)>의 서면합의에 이른다.

1141년 십이월, 제석날 밤에(1142년 1월 27일), 남송조정은 악비를 죽인다.

1142년 삼월, 송나라와 금나라의 <소흥화의>가 발효한다.

1142년 오월 초하루, 송고종의 생모인 위현비가 송휘종의 관과 함께 남송으로 돌아온다.


<소흥화의>에 따르면, 양국은 회수-대산관(大散關)을 국경으로 한다. 송나라는 이전에 악비가 수복했던 당주, 등주 및 상주, 진주의 반이상을 양보하고, 매년 금나라에 은25만냥, 견25만필을 진공한다.


자신의 모친을 모셔오기 위해, 조구는 모친의 명을 받들어 일심으로 금나라에 항거하던 악비를 죽인다. 남송의 위태후는 1159년에 사망하니, 향년 80세이다. 전설에 따르면 90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악비의 모친이 악비의 등에 글을 새긴 것은 아름다운 전설이다. 위태후가 90세까지 살았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전설이다. 1126년 정강지치 이후에 포로로 잡힌 북송의 비빈들은 금나라에서 완의원(관기원)으로 보내어진다. 1128년 조구가 황제에 오른 후, 위씨는 오국성의 송휘종에게 보내어지고 같이 갇힌다. 위씨가 완의원에 있던 기간은 아마도 1-2년일 것이다. 그러나 송나라황제에 있어서, 생모의 이런 경력은 오점일 수밖에 없다.


위씨는 1080년에 태어났고, 1126년에는 이미 46세였다. 여기사 다시 10살을 올린 것은 마치 금나라에서 모욕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일 것이다.


조구는 35년간 황제로 있었고, 다시 25년간 태상황으로 있었다. 81살까지 산다. 역사상 보기 드문 장수황제이다. 악비는 1142년초에 죽으니 나이 겨우 40살이었다. 송나라의 두 효자는 최후가 이렇게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