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악비)

여사면(呂思勉)의 "폄악숭진(貶岳崇秦, 악비를 내리고 진회를 올림)" 풍파시말

중은우시 2018. 8. 4. 17:50

글: 곽금창(郭金昌)


지금 만일 중학교 교과서에 악비와 진회를 이렇게 묘사하면 어떤 논쟁이 벌어질 것인가?


"악비는 그저 언성(郾城)에서 한번 승전했을 뿐, 언성 이외의 전적은 모두 불명확하다. 가장 웃기는 것은 완안종피(完顔宗弼)이 도강할 때, 악비는 시종 강소에 숨어 있었다. 송고종이 금나라군대에 쫓기는 것을 보면서도."

"진회가 반드시 돌아왔다. 그것은 바로 그가 애국했다는 것이다. 그는 시종 화의를 주장했다. 이것은 그가 식견이 있고, 책임지는 자세로 일했다는 것이다. 달나(撻懶)라는 사람을 알아보고 수단을 써서 상대했으니, 이는 그의 안목이 뛰어나다는 것이고, 한세충,악비의 병권을 회수한 것은 그의 수단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후세의 사람들은 그를 침뱉고 욕하는데, 중국의 학술계는 정말 탄식이 절로 나온다."


1923년, 상무인서관은 정말 이런 중학교 역사교과서를 발간했었다. 책의 이름은 <백화본국사(白話本國史)>이다. 작자는 저명한 역사가 여사면이다. 앞의 두 줄 악비와 진회에 관한 묘사는 바로 이 책에 나오는 글이다.


여사면은 책에서 악비와 진회의 문제에 대하여 5가지 결론을 내렸다:


첫째, 군사실력이 금나라를 상대할 수 없었다. 대장 악비, 한세충등의 부대가 모두 도적과 규합하여, "훈련도 받지 않고, 기율도 없어서, 전혀 믿를만하지 못했다" 도적을 평정하는 것은 가능해도, 금나라군대를 만나면 패하지 않으면 도망쳤다. 우연히 작은 승리를 거두더라도 대국을 좌우할 수는 없었다.


둘째, 대장들은 군구내의 재정대권과 인사대권을 농단하고, 중앙을 허수아비로 만든 군벌이다. 금송이 교전하면, 중앙은 그저 대장들의 할거를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금송이 화의한다면, 중앙은 반드시 병권을 회수하고자 할 것이다.


셋째, 각종 사료를 대조분석해보면, 악비의 전공은 오랫동안 과장되었다. 가장 유명한 '언성대첩'도 심각하게 과장되었다.


넷째, 진회는 금나라의 간첩이 아니다. 의화를 주장한다고 매국노는 아니다. "의화는 당시로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의화를 주재한 진회는 이로 인하여 악명을 얻었고, 정말 억울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다섯째, 악비가 피살되고, 다른 대장의 병권이 중앙에 회수된 후, "송나라는 겨우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었다."


여사면이 이 책은 중학 역사교과서로 출판되었고, 당시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 책에서 악비와 진회에 관한 묘사는 논쟁을 가장 많이 불러 일으켰다.


1931년 "9.18사변"이 발발한 후, 여론은 여사면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가 악비를 폄하하고, 진회가 억울하다고 하는 것은 대일평화회담을 주장하는 "민족패류"를 위해 변명해주는 것이다. 비판의 목소리가 비등한 이후, 상무인서관은 비지니스적인 측면을 고려하여 여사면에게 내용 일부를 수정삭제해줄 것을 요청한다. 1933년 수정본이 나온다.


1935년 이 책은 마침내 큰 사건을 불러온다. 3월 5일, 남경시장 석영(石瑛)은 훈령을 내린다: 악비는 충신이고 진회는 간신이다. 이는 천주의 정해진 결론이다(千秋定論).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 책은 악비를 폄훼하고, 진회를 받들었으니 나쁜 속셈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남경에서 판매를 엄금하고, 학생들이 읽는 것을 엄금한다. 이 훈령에 남경 <조보(朝報)>는 불만을 갖는다. 글을 실어서 여사면이 억울하다고 쓴다. <조보>의 경쟁상대방인 <구국일보(救國日報)>의 총편집인 공덕백(龔德柏)은 비지니스기회라고 생각하고, 가장 큰 활자로 자신의 신문에서 여사면이 매국노라고 욕한다. 그리고 <조보>가 매국노를 옹호하는 말을 한다고 공격한다. 전체 3월에 두 신문은 매일 서로 욕하고 싸웠다. 이 일은 일거에 전국의 핫이슈로 된다. 민간의 여론도 비등했다.


4월, 국민당이 개입하여, 여사면은 어쩔 수 없이 훈령에 따라 책을 일부 수정삭제한다. 공덕백은 민의가 끓어오르며 그의 말을 지지하는 단맛을 보고, 이 사건을 계속 키운다. 5월, 소장 하나가 여사면과 상무인서관을 보내어지고 법정이 열린다. 그들이 "외환죄(外患罪)"를 저질렀다고 기소한 것이다. 악비를 폄하하는 것은 국민의 항일의지를 약화시키는 것이고, 일본침략자에게 아부하는 것이며, 진회가 억울하다고 하는 것은 '주화파' 매국노를 위한 변명이라는 것이다.


여론이 비등했지만, 법원이 판결은 예상외로 냉정했다. 법원은 이렇게 판결한다: 여사면이 이 책은 동북함락이전에 쓰여졌다. 침략자에게 아부하고 매국노를 옹호할려고 할 수가 없다. 단지 "개인이 역사를 연구한 평론과 견해"이니 범죄가 되지 않는다.


기실, 악비가 군벌이냐 아니냐, 진회가 억울하냐 아니냐는 이번 충돌의 표면이다. 총둘의 실질은 역사교과서의 기술이다. 도대체 무엇을 제1원칙으로 해야 하느냐이다. 당국은 애국주의를 전파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보았고; 여사면은 '진리추구'를 우선으로 보았다. 그는 심지어 공개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학생들의 애국정신을 자극하는 것"과 "역사의 진상을 얘기하는 것"이 충돌한다면, 나는 후자를 분명히 선택할 거이라고.


1935년, 여사면은 최종적으로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마음에는 없지만 자신의 저작을 수정한다. 기시 당시의 학술계에서는 악비와 진회에 관하여, 여사면의 의견과 비슷한 사람이 아주 많았다. 예를 들어, 청화대학 역사학과 교수이자 송사전문가인 장음린(張蔭麟)은 "악비에 대한 평가가 높지 않았고, 여사면의 <백화본국사>에서 악비가 '군벌'이라는 견해에 동의한다." 시험문제로 "악비를 논하라"는 것을 내서 학생들이 서로 다른 사료를 참고하여 악비에 대하여 평가하도록 이끌었다. 1925년, 호적(胡適)도 <현대평론>에 글을 공개적으로 실어서 악비등 대장이 일방에 할거하면서 조정이 공급을 할 수 없게 되자, 지방재원을 차지하는 등 상황을 분석했다. 그리고 "송고종과 진회가 화의를 주장한 것은 확실히 부득이한 고충이 있었다...진회는 큰 공을 세우고도 세상사람들에게 지금까지 욕을 먹고 있다. 정말 억울하다." 단지, 여사면은 유일하게 교과서에 자신의 '진리추구'로 얻은 결론에 따라 진회가 억울하다고 말한 학자였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은 1923년 출판된 베스트셀러교과서가 팔린지 12년이 지나서야 전국적인 사건으로 비화한다. "분노한 민의"가 이렇게 늦게 일어나다니, 그것은 아마도 서로 다른 역사시기에, 당국과 "민의"가 필요로 하는 "악비"가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1900-1910년, 여론계에는 "민족주의가 중국을 구한다"는 것이 유행했다. 그래서 매체는 극력 악비의 '민족영웅'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1920년을 전후하여, 민중은 군벌할거의 고통을 겪었고, 여사면은 악비의 '군벌' 이미지를 드러낸다. 그리고 마침 '민의'가 필요로 하는 것과 맞아떨어졌다.


1931년후, 일본의 침략이 가속화되면서, 악비의 '대외항거' 이미지가 되살아난다. 장개석은 여러번 당내에서 악비의 '정충보국' 정신을 배울 것을 제창했다. 설악(薛岳)같은 항일장군은 심지어 희극무대에서 스스로 악비로 분장하기도 했다. 1949년이후 대만에서 악비는 "강산을 돌려달라(還我河山)"의 역사 표찰이 된다. 그래서 장기간 장개석 부자의 존경을 받는다. 대륙에서는 계급적 입장에서 농민의거를 진압한 것으로 인하여 '민족영웅'의 광환은 제거된다. 그래서 1952년, '삼반운동'때 여사면은 '사상개조보고'에서 여전히 자신이 당시 악비를 폄훼하고 진회를 숭상한 것을 변호할 수 있었다.


1957년, 여사면이 사망한다. 10년후 악비묘는 파괴된다.